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데이비드 리빙스턴 [Livingstone, David, 1813~1873.4] 2

好學 2011. 7. 30. 22:32

 

데이비드 리빙스턴 [Livingstone, David, 1813~1873.4] 2

 

 

★ 최초의 아프리카 대륙 횡단 - 데이비드 리빙스턴

 

 

최초의 아프리카 대륙 횡단 - 데이비드 리빙스턴   
   
    어느 미전도 종족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과정을 보면,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World Christians)의 기도, 물질 그리고 영광스러운 선교사의 삶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이 있으려면, 그 민족에 대한 정보가 필수적이었다. 리빙스턴이 위대한 선교사로 우리에게 알려지는 것은, 바로 이 정보를 제공하는 개척 선교사였다는 것이다. 그가 제공한 정보에 반응한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면서, 아프리카 선교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리빙스턴은 1852년 3월 39세 때 케이프타운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영국으로 떠나보내야만 했다. 아프리카를 횡단하며 탐험하는 것은 생명을 걸고 하는 일인데, 이 일을 가족과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횡단 탐험은 수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선교의 발판을 놓는 일이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는 아픔을 감수할 수 있었다.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 들어 온 처음 11년 동안은 두각을 나타낼 수 없었다. 리빙스턴은 개종자를 내지도 못했고, 선교기지를 세우거나 교회를 세우는 일에서도 아무런 업적이 없었다. 다만 그는 가족과 환경에 속박되어, 좌절당한 탐험가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는 탐험을 구속할 만한 조건이 없었다. 아프리카 내륙이 그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초로 아프리카 대륙 횡단

  가족들을 케이프타운에서 전송한 후, 그는 북쪽으로 돌아가 쿠루만에서 머문 다음, 그에게 우호적인 마콜롤로 부족(Makololos)에게 가서 탐험에 동행할 일꾼들을 뽑았다. 그들은 아프리카 중앙에서 탐험을 시작하여 잠베지(Zambezi) 강을 따라 북서쪽으로 향해 루안다(Luanda) 해안에 이르렀다.

  적대적인 부족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었고, 치명적인 아프리카의 열병이 언제 덮쳐올지 모르는 위험한 여행이었으나, 리빙스턴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첫 번째 임무는 탐험이었지만, 복음 전파에 대한 사명을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는 성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과 '매직 렌턴'(Magic Lantern), 환등기를 이용해 미래의 선교사들을 위해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6개월간의 지겨운 여행을 마치고 루안다(Luanda) 서부 해안에 무사히 도착함으로써, 리빙스턴과 그의 동행들은 역사적인 대탐험을 성취했다.

 

  루안다 해안에서 리빙스턴의 탐험대를 만난 어떤 선장은 그를 영국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제의를 했지만, 리빙스턴은 동행했던 마콜롤로 부족들을 그들의 고향까지 무사히 도로 데려다 주기 위해, 잠베지 강을 따라 동부해안으로 가기로 했다.

  그들은 또 다시, 수많은 적대부족과 질병과 싸우면서 횡단했다. 갈 때는 6개월 걸렸던 그 길을, 12개월이 걸려서야 처음 출발했던 린얀티(Lynyanti)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동쪽으로 다시 탐험을 계속했다. 이 탐험 때 발견한 거대한 폭포를, 당시 여왕의 이름을 따라 빅토리아(Victoria) 폭포라고 이름 붙였다.  


 

                                     국가적 영웅이 된 리빙스턴

  아프리카에 온 지 15년이 지나 1856년 12월 영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국가적 영웅 대접을 받았다. 겨우 3일 동안만 가족과 함께 지낸 후, 그는 런던으로 가서 국가적으로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근 1년 동안, 그를 열렬히 따르는 군중들을 위한 강연을 다녔다.

  그리고 영국에 있는 동안에 그의 첫 번째 저서인 『선교여행과 남아프리카 탐험』(Missioan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이라는 책을 썼으며, 새로운 선교회의 설립을 준비하였다. 그때야 말로 그의 전성기였다.

 

  그는 1858년 45세 때 아프리카로 돌아가기 전에 런던 선교회에서 탈퇴해, 보다 많은 재정과 장비를 후원하겠다는 정부의 위임을 받아들였다.

 

                            

 

                                            그의 마지막 탐험과 죽음

  1865년 52세 때 리빙스턴은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나일 강의 근원을 밝혀내기 위해 세 번째이자 마지막 탐험을 시작했다. 단 한명의 유럽인도 동행하지 않았는데, 리빙스턴은 그 후 7년 동안 유럽인을 구경할 수 없었다. 그의 육체는 영양부족과 열병, 빈혈 등으로 쇠약해졌으며, 때때로 아랍인과 노예 무역상들이 그의 탐험 장비를 훔쳐갔다. 그렇다고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나일 강의 근원은 찾아내지 못했지만, 다른 여러 가지 중대한 사실들을 발견했으며, 자신과 주위 환경에 대한 평온함을 회복했다. 아프리카 사람들도 수염이 무성하고 이빨이 다 빠진 이 여윈 노인에게 친밀감을 느끼며, 그가 들려주는 구세주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1873년 5월 1일 그와 함께 일했던 아프리카 사람이, 그가 침대 옆에서 기도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숨져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이 노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시체와 개인적인 서류들을, 그가 이전에 소속한 선교회가 있는 해안까지 옮겨다 주는 것으로 그들의 존경심을 표현했다.

  리빙스턴의 사랑을 받았던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의 심장을 꺼내 무푼두 나무 밑에다 묻고, 시체는 아프리카의 뜨거운 햇볕 아래 말려 미라로 만들어, 2,400 Km가 넘는 해안까지 운반해주었던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의 장례식

 

 

   영국에서 리빙스턴의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영국 각처에서 많은 고관대작들과 저명인사들이 참석하였다. 그 날은 아버지가 어떻게 생긴 줄도 모르는 그의 자식들이, 마지막 작별을 고한 슬픔의 날이었다.

 

                                                                   

                                                                     

                                                                         로버트 모펫

 

 

  누구보다도 리빙스턴의 사망 3년전에 아프리카에서 은퇴한, 아프리카 개척 선교사 로버트 모펫의 슬픔이 가장 컸다. 그는 천천히 통로로 걸어서, 사위의 관 앞에 서서 과거를 회상했다. 수십 년 전 바로 이 도시에서, 그는 “선교사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수많은 종족이 살고 있는 마을”의 비전을 리빙스턴에게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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