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그리스도의교회 초기 인물 자료 - 교회 개혁가로써(As Church Reformer) 3

好學 2011. 7. 1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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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개혁가로써(As Church Reformer)

 

"개혁가들"-그들은 곧 이렇게 불리어졌다.-이 침수세례를 채택하자 그들과 다른 교회들 사이에 장애물이 생겼다. 그들과 이웃하고 있는 신앙인들의 대부분은 장로교인들이었다. 특히 목사들은 유아세례와 교권에 대한 도전을 받자 바짝 긴장하였다.

1812-13년 겨울 내내 브러시 런 교회(Brush Run Church)는 정규적으로 집회를 가졌다. 침수세례의 채택으로 인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침례교회들과 더 친근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모농가헬라(Monongahela) 강과 앨리게이니(Allegheny)의 산기슭에 다수의 침례교회들이 있었다. 그들은 1776년 친교를 목적으로 레드스톤 침례교 협의회(Redstone Baptist Association)를 만들었다. 1812년 당시 협의회에 소속된 교회가 33개, 목회자가 20명, 그리고 교인이 1300명이었다.

그 지방 이곳 저곳을 방문하기도 하고 설교하면서 토마스와 알렉산더 캠벨은 곧바로 여러 침례교회들과 알고 지내게 되었다. 오래지 않아 침례교회의 친구들이 그들에게 레드스톤 협의회에 가입할 것을 계속해서 권하였다. 캠벨 부자는 망설였다. 협의회가 필라델피아 침례교 협의회가 사용하는 칼뱅주의 신앙고백서(장로교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비슷함)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치명적인 결점은 신앙고백서가 친교의 시금석으로 사용된다는 점이었다. 신앙고백서를 받아드리지 아니하면 교인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침례교인들이 신약성경 기독교로 환원하려하는 그들의 계획에 전적으로 찬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동시에 캠벨 부자는 기존의 교단에 소속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걱정스런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1815년 9월에 레드스톤 침례교 협의회의 가입권유를 받아드렸다. 그러나 그들은 가입권유를 받아드리기 전에 성경말씀에서 배운 것만을 가르치고 설교하겠다는 그들의 목적을 명시한 진술서를 마련하였다.

1816년 8월에 열린 협의회의 모임이 베다니(Bethany)에서 멀지 아니한 크로스 개울(Cross Creek)에서 열렸다. 알렉산더 캠벨은 그 모임에서 설교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아마도 침례교 목회자들이 알렉산더에 관해서 좀더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알렉산더는 로마서 8장 3절을 근거로 제목을 "율법에 관한 설교"로 정하였고, 그 설교에서 구약과 신약의 다른 점들을 강조하였다. 당시 레드스톤 침례교 목회자들은 신구약 구별 없이 모든 말씀을 다 수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캠벨 부자가 침례교 협의회에 가입한 해에 그들의 가입을 막는 반대자들이 몇 있었는데, 율법에 관한 알렉산더의 설교가 있고 난 후부터는 적개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이후 15년 동안 알렉산더 캠벨과 그의 아버지는 침례교회와의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긴장만 쌓여갔다. 처음부터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완전히 침례교단에 합류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그들이 갖고 있었던 특별한 선교에 대한 감각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 기간동안에 캠벨 부자와 그들을 따르는 제자들은 "개혁가들"이었을 뿐 아니라, "침례교회를 개혁하는 자들"이었으며, 나중에는 "제자"(Disciples)파로 떨어져 나왔다.

알렉산더는 전에도 펜실베니아주, 오하이오주, 버지니아주, 켄터키주에 산재한 많은 침례교 협의회들에서 설교를 하였고, 그 때마다 개혁을 촉구하였으나 개혁은 고사하고 거의 언제나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이들 협의회들 가운데 상당수가 알렉산더의 견해를 단죄하였고, 그 결과 침례교인들과 제자들 사이에 분열만 커져갔다. 1830년대 초까지 침례교인들은 알렉산더 캠벨에게 철저하게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환멸은 두 가지로 작용하였다. 분열의 과정에서 침례교회는 수 천명의 교인들과 더불어 많은 교회들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