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그리스도의교회 초기 인물 자료 - 토론가로써(As Debater) 캠벨 5

好學 2011. 7. 16. 17:16

 

토론가로써(As Debater)

 

알렉산더 캠벨의 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몇 차례에 걸친 그의 토론들 즉 그가 탁월하게 능력을 발휘했던 공개적인 발표형태에 대한 검토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토론은 개척지대(frontier)에서 인기가 있었다. 토론이 어느 정도 지적인 자극과 재미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캠벨은 토론이 자신의 견해를 알리고 개혁을 도모하는 이상적인 매체임을 알았다.

그의 첫 토론은 1820년 6월에 있었다. 토론의 대상자는 오하이오주 마운트 프레전트(Mt. Pleasant)에 거주하는 탈퇴파 장로교(Seceder Presbyterian) 목사, 존 워커(John Walker)였다. 침례의 문제가 그 날의 쟁점이었다. 이 날의 토론내용이 책으로 출판되었는데, 제목은 {인위적 전통임이 입증된 유아 약식세례: 기독교 침례에 관한 토론내용이 되다}<Infant Sprinkling Proved to Be A Human Tradition: Being The Substance of A Debate on Christian Baptism
(Steubenville, Ohio: printed by James Wilson, 1820)>이었다.

캠벨의 두 번째 토론의 대상자는 "보통" 장로교인 윌리암 L. 맥칼라(William L. Maccalla/1788-1859)였다. 그들은 1823년 10월에 켄터키주 메이스빌(Maysville)에서 가까운 워싱턴에서 토론을 갖기로 결정하였다. 토론의 결과는 1824년 책으로 출판되었고, 제목은 {침례에 관한 토론}<
A Debate on Christian Baptism(Buffalo, Va., Campbell and Sala)>이었다. 이 책은 널리 배포되었다.

세 번째 토론의 대상자는 스코틀랜드 뉴 래나르크(New Lanark)와 미국 인디아나주 뉴 하모니(New Harmony)의 유명한 19세기 사회개혁가 로버트 오웬(Robert Owen/1771-1858)이었다. 토론은 1829년 4월에 신시내티(Cincinnati)에서 열렸고, 동년 베다니(Bethany)에서 알렉산더 캠벨에 의해 {기독교 증거들에 관한 토론}(A Debate on the Evidences of Christianity)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토론에서의 이슈는 철저하게 세속적인 오웬의 "사회 체제"(Social System)에 관한 것이었다. 캠벨은 이 토론을 기독교 신앙에 관한 전통적인 이해를 변호할 기회로 삼았다.

1930년대까지 오하이오 밸리(Ohio Valley)에 산재한 개신교 교인들은 천주교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것에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었다. 천주교인들의 증가는 부분적으로 많은 이주자들 때문이었다. 캠벨의 네 번째 토론의 대상자는 신시내티 로마 카톨릭 주교인 존 B. 퍼셀(John B. Purcell/1800-1883)이었다. 토론은 1837년에 있었다. 캠벨은 카톨릭주의에 대항해서 개신교의 유산을 확고하게 방어하였다. 토론의 내용은 신시내티의 J. A. 제임스 앤 주식회사(J. A. James and Company)에 의해서 {천주교에 관한 토론}(
A Debate on The Roman Religion)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토론의 대상자는 켄터키주 파리스(Paris) 지방의 장로교 목사 나단 L. 라이스(Nathan L. Rice/1807-1877)였고, 토론내용은 침례의 끝없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토론은 1843년 11월 켄터키주 렉싱톤(Lexington)에서 개최되었다. 헨리 클레이(Henry Clay)가 의장을 맡아 토론을 이끌어 갔다. 토마스 카터(Thomas Carter)가 1844년 피츠버그(Pittsburgh)에서 양자의 주장을 모두 실어 {기독교 침례의 행위, 대상, 목적과 관리자에 관한 . . . 토론}(A Debate . . . on The Action, Subject, Design and Administrator of Christian Baptism
)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침수와 약식에 관한 문제로 장로교인들과 벌린 토론들은 단순히 시대적인 특징으로 보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그 토론들은 더 이상 지속적인 중요성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오웬과 벌린 토론에서 캠벨의 기독교변호와 퍼셀 주교와 벌린 토론에서 개신교 입장변호는 개척지대에서 알렉산더 캠벨을 개신교의 위대한 챔피언으로 위치를 굳혔다. 이들 토론들로 인해서 캠벨은 유명세를 탔고, 그의 명성은 가까운 추종자들을 훨씬 뛰어넘는 전국적인 것이었으며, 그의 이름은 일상적으로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 되었다. 교회연합의 목표를 좀더 진행시켜 가는 한편, 이 토론들은 신약성경의 실천에로 교회들이 환원할 것을 부르짖었던 캠벨의 입장을 널리 유포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