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쟝 칼뱅(Jean Calvin)

好學 2010. 12. 19. 17:28

 

쟝 칼뱅(Jean Calvin, 1509-1564)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신학자. 칼빈

 


서론


기독교의 아름다운 빛 속에서 온전하고 경건하게 빛나고 있는 한 인물을 이 책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의 생애가 남겨 놓은 역사의 흔적을 이 책을 통해서 볼 수가 있었다. 지금까지 칼빈하면 기독교 강요가 전부였었다. 그 역사적 상황을 알지 못하였기에 16세기의 세계를 비춘 진리의 등대였고, 오늘날까지 개혁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책에 담겨진 칼빈의 피와 땀과 눈물을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에 대해서 막연하게 알고만 있었던 나로서는 이 책을 통해서 그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다. 긴박하게 돌아갔던 그때 당시의 역사속에서 그가 걸어가야 했던 가시밭 길을 이 책을 통해서 함께 걸으며 하나님의 섭리 앞에 머리숙여 기도할 수 있었다.

제1장 칼빈의 소년기와 청년기, 제2장 법률 문학 그리고 복음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의 노용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제라르(Gerard)이었는데 그는 노용시의 유력인사로서 교회에서 오랫동안 서기와 회계의 직분을 맡아 봉사했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판단력이 예리하고 지혜가 특출하여서 그 지방의 귀족들 및 교직자들과 교분이 있었으며 신임도 받는 편이었다. 하지만 칼빈의 출생을 보게되면 그의 말처럼 보통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에 불과하다는 말이 틀림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쟌느르프랑끄이었고 그의 아버지와는 비교되는 경건과 조용함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모르긴 해도 칼빈의 경건은 그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바가 클 것이다. 하지만 칼빈은 어머니를 일찍 여윈후, 아버지의 집을 떠나 귀족의 집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그의 교육은 까페뜨 대학의 부속학교에 다님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학문에 대한 뛰어난 능력과 천부적 소질을 보여 주었다. 그는 12살때에 제신느의 성직록을 받을 때가 되어 삭발을 하였다. 몽모르 집안의 아들들과 교제하면서 상류사회의 생활 관습을 익히고 교육의 폭을 넓히게 되었다. 대학 교육을 받는데 필요한 라틴어를 익히기 위해, 몽모르 집안의 소년들과 함께 파리로 떠나게 된다. 이것이 그의 가장 초기의 교육배경이다. 이후 그의 교육적인 배경은 크게 파리에서의 인문주의적 학예과정(Studia Humantatis)과 오를레앙 및 부르쥬 등에서의 법학 과정의 두시기로 나누어 진다.
파리에서 칼빈은 꼴레쥬 드 라 마르슈(College de la Marche)에서 위명한 라틴어 교사인 마투렝 꼬르디에(Mathurin Cordier)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다. 그의 밑에서 라틴어를 배운지 1년이 채 안 되어서 칼빈은 몽떼규(College de Montaigu) 대학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인문과정을 공부하게 된다. 그는 라틴어를 공부했으며, 헬라어에 대한 읽기 및 활용을 학습했다. 세네카의 관용론 주해를 보면, 그가 고대 문헌들과 역사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과 언어에 대한 정확한 구사력을 가지게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파리에서의 생활이 갑자기 오를레앙으로 옮겨지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신학자로 만드는 것에서 전환,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노용의 삐에르 로베르, 파리의 니콜라 꼽(Nicolas Cop), 그리고 그에게 헬라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멜히오르 볼마르(Melchior Wolmar)와의 교제를 가지게 된다. 1529년 칼빈은 몇몇 친구들과 함께 부르줴(Bourges) 대학으로 옮겨 공부를 하였고, 1530년에 학업을 마치고 법학 석사 학위를 획득하기 위해 오를레앙으로 돌아왔다. 마침내 1531년에 그는 모든 공부를 끝내고 면허증을 취득하였다.
1529년이나 1530년 초 무렵 칼빈은 회심을 경험했다. 그의 회심에 대해서는 단지 그의 1557년 『시편주석의 서문』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섭리의 은밀한 간섭에 따라 마침내 나의 진로를 바꾸어 놓으셨다. 제일 처음에 일어난 일은 그분께서 갑작스런 회심을 통하여 당시만 해도 지나치게 완고하였던 내 마음을 유순하게 길들이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교황 제도의 미신에 너무나 깊숙히 빠져 있어서 아무것도 그 깊은 진창에서 나를 끌어 올릴 수 없었기 대문이다." 그러나 그의 표현대로 "참된 경건을 한 번 맛본 것일 뿐"인 이 사건이 그로 하여금 법학에서 신학으로 관심을 돌리게 했다.
1531년 5월 26일 그의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잠시 노용으로 돌아갔던 칼빈은 다시 오를레앙으로 갔다가 파리로 가서 그곳에서 그의 첫 저서인 『세네카의 관용론의 주해』를 쓰게된다. 이러한 활동은 전도 유망한 한 젊은 인문주의자의 통상적인 학문 활동이었다. 이 책은 그에게 명성을 안겨주지는 못했지만, 그의 새로운 신앙과 우연한 연관관계는 맺어 주었다. 이 책에서 칼빈이 종교 개혁 정신을 암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세네카의 관용론 주해』에서 그는 에라스무스(Erasmus)와 부데(Guillaume Bude)를 모델로하는 완숙한 인문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증거는 개종전만이 아니라 개종이후로 인정되는 1533년 니콜라 콥의 연설문의 서문에 더욱 두드러진다. 이 서문에는 루터의 인용만이 아니라 에라스무스의 인용 또한 같은 비중으로 다루고 있다. 그 결과 1534년 5월에 그는 노용을 방문해서 성직자로서의 그의 직업을 종결하는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게 되는데, 제신느의 목사직을 사임함과 동시에 뽕 레베끄의 성직록도 사양함으로 결정적으로 로마 카톨릭에 등을 돌리게 된다.
1534년 10월 중순에 플래카드 사건이 일어남으로, "루터파"를 잡아들이라는 칙령이 반포됨으로, 칼빈과 두 띠예는 바젤로 도망하여, 1535년 1월에 그곳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왈도파 그리스도인을 위한 성경을 새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이보다 중요한 일은 칼빈이 자신의 저서를 탈고하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이 저서가 바로 출판업자 발타사스 라시우스와 토마스 플라터에 의하여 1536년 3월에 출판되었고, 원고는 헌정일인 1535년 8월 23일 이전에 완성되었을 그의 불후의 저서 『기독교 강요(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초판』이다.

제2장 신학자 칼빈


기독교 강요는 칼빈의 전체적인 신학 접근 방법을 요약해주는 주목할만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거룩한 교리의 총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의 두 부분으로 거의 전부가 나뉘어져 있다." 기독교 강요는 추상적인 진리를 모아 놓은 교과서가 아니라, 한 인간이 그 위에 자신의 삶의 행위를 세울 수 있는 그리고 생사의 문제가 걸리더라도 자신을 전적으로 맡길 수 있는 "경건", 즉 마음과 심장으로 믿을 수 있는 신앙에 대한 가르침이 담긴 책이다. 칼빈은 이 책을 기초적인 저서로 만들 의도를 갖고 있었다. "내가 마음에 품고 있었던 의도는 종교에 관심이 있는 자들이면 누구나 이에 의해 참된 경건을 습득할 수 있도록 약간의 기본 원리를 제시하려는 것이 전부였을 것입니다. 나는 내 동족 프랑스인들을 위해 특별히 이 과업을 떠맡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배고파하고 목말라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으나 오직 소수의 사람만이 그것도 그리스도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음을 저 스스로 눈여겨 보았기 때문입니다. 본서 자체를 읽을 때 그 가르침의 단순하고 기초적인 형태를 보고 누구나 이것이 나의 목적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의 이 말은 오늘날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어떠한 자세가 필요한지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 강요의 형태는 요리 문답의 구조를 그대로 받아 들여서 그리스도의 삶의 세 가지 기본 권위인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을 주해해서 믿음의 기초 도리를 가르치던 옛날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여기에 처음 세 장, 즉 율법에 관하여; 믿음에 관하여; 기도에 관하여가 덧붙여졌고, 4장인 성례에 관하여는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방도(수단)에 대하여 깨닫게 하고, 5가지의 성례를 상대화하거나 거부하는 내용을 담은 5장과 6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 교회정치, 시민 정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결국 1536년에 우리가 지금 "칼빈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렇게 첫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제3장 제네바에서의 시련


1536년 4월 그는 두 띠예 대동하고 페라라의 르네 법정을 방문하기 위해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6월에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그의 형제 앙트완느와 이복 여동생 마리를 안전한 스트라스부르크로 보내었다. 프랑스와 스트라스부르크 간의 군사 충돌로 인해 그들은 남쪽에서 스트라스부르크 시로 들어가기 위하여 크게 우회하여야만 했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유가 존 칼빈이 제네바의 여인숙에 머물게 된 동기였다. 이곳에서 칼빈은 파렐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제네바 시에서 봉사하게 된다. 당시 제네바는 파렐의 생명을 건 활동으로 1536년 5월 25일 시민 총회는 "복음에 따라 살기로" 투표를 했고, 이로 인해 제네바는 헌법상으로 복음주의적 도시가 되었다. 이로부터 3개월 후에 칼빈이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칼빈은 이곳에서 손수 교회 정치 원리를 가지고 제네바 시에 실현시켜 보려고 애쓴 인물이었다. 새로운 교회와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비록 복음주의적 신앙이 설교되기 시작했지만 아직 많은 로마 카톨릭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목사들은 신앙을 고백하지 못해도 출교시킬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결국 참된 신교 신앙 고백과 새 교회 건설을 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를 시민 하나 하나에게 결단케 하여 거부하면 제네바 시에서 추방하고 시인하는 자만으로 제네바 시를 구성하자는 신앙고백을 제정했다. 그러나 시민들 중에는 이것을 방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로 인해 많은 반대와 저항에 부딪히게 되었고 시민 자치회의 결의에 의해 급진적 개혁이 좌절되게 되었다. 결국 의회의 가결에 의해 칼빈과 파렐은 제네바 시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다. 그 때가 1538년, 제네바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 만 2년이 채 못되는 때였다.

제4장 스트라스부르그의 프랑스인 목사


18개월의 제네바목회에서 칼빈은 매일매일 긴장과 보람의 연속이었다. 제네바를 떠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이르렀다. 스트라스부르그는 일찍부터 종교개혁을 옹호한다고 선언했으면서도 다양한 복음주의 견해와 로마 카톨릭에 대해서도 상당한 관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로인해 프랑스의 박해받는 자들의 주요 도피처 가운데의 한 도시였다. 이곳은 주로 루터파 사람들이 개혁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부처가 유력한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었다. 칼빈은 친구 부처의 초청으로 프랑스인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그는 그 곳에서 연구와 저술활동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1539년에는 기독교강요 개정판을 내고 로마서 주석도 내었다. 또 1540년 8월 미망인 이델레트 드 뷔르를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된다.

제5장 제네바 교회의 개혁


한편 칼빈을 추방한 제네바 시는 거의 무정부상태로 돌아갔으며 날로 부패하고 신교는 구교의 세력에 다시금 힘을 잃을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칼빈의 초청을 다시금 요구하게 되었다. 결국 시의회는 1540년 9월 21일 칼빈을 재 초청하기로 결의하여 초청한다. 이에 대해 처음에는 칼빈이 선뜻 응하지 않았으나 파렐의 간곡한 권유 때문에 1541년 9월 13일 화요일에 제네바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 칼빈의 제2차 제네바목회가 시작된 것이다. 1541년 9월 13일, 3년 전에는 그를 거부했던 이 제네바시가 그가 돌아오던 날에는 기마대까지 출동해서 그를 맞이하였다. 칼빈은 돌아옴과 동시에 예배모범을 기초하고 교회법 제정 위원회를 만들어 11월 20일 초안이 의회에 제출되어 교회에 관한 칙령이 법으로 통과되었다. 이 칙령은 목회적 기능의 견지에서 작성되었다. 질서 정연한 교회는 목사,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의 4가지 직분의 감독을 받으며 교회의 임무는 복음을 전파하고 성례를 집행하며 성도들에게 믿음을 가르치고, 순종하도록 훈련시키며, 고통당하는 자를 보살피는 것이라 하였다. 교회예배의 실제적인 세부 지침도 결정되어 예배하는 교회로 자리잡아 가도록 하였다. 세 가지 주안점이 있었는데 첫째, 예배는 회중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드려져야 하며, 둘째, "보이는 말씀"인 성례는 설명이 있어야 하며, 셋째, 회중들의 찬송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설교자였다. 그에게 있어서 설교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과 신자의 순종의 삶이었다. 칼빈은 성경 본문에 놀라울 정도로 복종하였다. 그는 성경 구절을 읽고 본문과는 전혀 별개의 것을 이야기하는 현대의 설교 경향이 범하고 있는 성경을 경멸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 항상 성경 각 본문이 자신의 메시지를 말하도록 하였다.
"만일 내가 겸손히 책이라도 한 번 들여다 보지 않고 경솔하게 아 좋아, 내가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할 말을 내게 주실꺼야라고 말하면서 마땅히 선포해야 하는 것을 읽거나 생각해 보는 수고도 하지 않고, 성경을 회중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덕을 세울 수 있는지를 신중히 고려해 보지 않고 강단에 나왔다면 나는 매우 교만하고 건방진 녀석일 것입니다."

제6장 도전 받는 경건한 사회


제네바에서 칼빈은 그의 사역에 대한 적의에 찬 장기간의 반대에 직면하였다. 반대파중의 일부는 칼빈을 하나님 말씀의 사역자, 복음의 해석자로서의 권위를 의심하고 그를 향해 공격했다. 즉 칼빈이 주장한 예정설에 대해 그것은 하나님을 인간 죄의 책임자로 삼는 것이며 이것은 성경에 대해 배치되고 전통적 해석에 반하는 것이라고 한 비난이 있었던 것이다. 1545년인가 1546년인가에 암암리에 전개되던 반대가 파당으로 결집되기에 이르렀고 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은 방종파였다. 이들은 부나 지위에 관계없이 일관적으로 집행되는 권징의 굴레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또한 교회 질서에 관한 제네바의 법을 바꾸려고 시도했다. 방종파는 문제를 일으키고, 목사들을 모욕하고 치리 법원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이런 저런 방법으로 반대를 계속했다. 1553년 소의회를 장악하게 되면서부터 방종파는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방종파의 계속되는 박해는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7월 24일 월요일에 칼빈은 그가 기진맥진했음을 실토하고 사임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반대 기간 가운데 그의 아내가 1549년 3월 말에 세상을 떠났으며, 아내 이델레뜨가 남기고 간 아들 앙뜨완느 칼빈의 아내의 간통과 의붓딸 쥬디트의 간통으로 인하여 칼빈은 큰 고통과 타격을 입게 된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칼빈은 1540년 로마서 주석이후 1546년 고린도전서 주석을 시작으로 4년만에 전 바울서신 주석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1556년에 전신약 성경 주석의 완성판이 스테파누스에 의해 출판되었다.

제7장 패배에서 안정으로


칼빈과 방종파 사이의 투쟁의 전 국면이 바뀔 정도의 크기와 함축성을 지닌 대 사건이 일어난 것은 제네바에서 칼빈의 권위가 맨 밑바닥을 돌고 있을 때, 사실상 그가 패배한 것이나 진배가 없는 바로 이 때 1553년 8월 13일 일요일에, 법을 피해 다니는 도망자 한 사람인 미카엘 세르베투스라는 사람이 제네바에 오면서 역사의 흐름이 바뀌게 되었다. 세르베투스는 20세에 삼위일체의 잘못에 대하여라는 책을 출판하여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또 기독교의 회복이라는 책을 통해 노골적으로 기독교강요를 비판했다. 그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면서 방종파는 그를 이용하여 칼빈을 궁지로 몰려는 데 이용하려 했으나 11월에 들어서면서 실패하고 만다. 결국 칼빈은 신앙의 수호자로, 기독교의 전사로 인정받게 된다. 세르베투스는 의회의 다수가결과 타지방교회들의 사형안 지지로 화형을 받게 되었다. 1555년 1월 24일에 1541년의 교회협정이 60인 의회와 200인 의회에서 비준됨으로써 방종파의 반대는 불법적이라는 선언이 내려졌다. 그리고 2월의 선거로 인해 다년간 세력을 잡고 있었던 뻬렝의 추종자들이 뒤로 물러나 앉게 되었고 4명의 행정관이 모두 칼빈의 지지자가 죄었다. 나아가 소의회와 60인 의회와 200인 의회에서 방종파는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비로서 칼빈의 교회 정치에 대항하는 조직화되고 장기적인 반대는 이제 끝이 난 것이다.
세르베투스의 화형으로 인해 칼빈은 심적인 고통이 컸지만 이로 인해 개혁에 대한 그의 투지는 더욱 강렬해졌다. 이후 그는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더욱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되는데, 이 여세를 몰아 칼빈은 교육기관을 세웠다. 이는 후배양성을 통해 개혁이 다음세대에도 변함없이 지속되게 하자는 데에 있었다. 칼빈은 대학을 건립하고 그의 동지 베자를 학장으로 취임케 했다. 1559년 6월 5일에 성 삐에르 교회에서 성대한 개교식이 열렸다. 이 대학출신은 5년간에 약 300명이나 되어 유럽각지에서 종교개혁운동을 펼쳐 나갔는데 그 중에는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종교지도자 낙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칼빈은 계속해서 주석을 썼으며 1559년 8월 16일에는 2절 크기의 호화판으로 인쇄를 끝마친 기독교 강요의 최종판을 완성하였다. 이 기독교 강요는 작은 예배당으로 시작해서 대성당으로 끝을 맺은 것이다.

제8장 교회들에 대한 염려


서방 교회는 로마 카톨릭과 복음주의 교회의 대립대는 두 집단으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벼랑에서 떨어져 부서진 큰 바위처럼 복음주의 교회는 하나가 아니라 크게 성공회, 루터파, 개혁파의 셋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로 인한 대립이 칼빈에게는 염려가 되었고, 조화된 교리 안에 복음주의 교회가 통일될 날을 원했다. 그러나 칼빈의 말대로 16세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갈기 갈기 찢고 피를 흘리게" 내버려 두고 말았다.
1550년 경이 되자 제네바는 전에 쮜리히가 차지했던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복음주의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칼빈은 유럽 대륙의 비루터파 복음주의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서신이 각 나라에서 왔고 이에 대해 칼빈은 자신이 손수 편지를 쓰지 않으면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할까봐 1550년대까지 친히 답장을 하였다. 1577년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른 이후 40년간 영국에서의 칼빈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수많은 저작들에 의한 영향력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에 대한 관심 역시 지속되었다. 1550년대 말에는 프랑스에 50개나 되는 조직 교회가 있었으며, 1555년과 1562년 사이에 100명 이상의 목사들이 프랑스에 파송되었다. 그러나 1559년에 복음주의 교회 내에서는 불길한 변화가 일어나 칼빈은 염려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은 박해만 받아오던 교회가 무장 항거, 심지어는 무장 폭동까지 생각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다. "복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난동과 소란을 일으키게 만들었다는 비난을 듣느니 보다는 차라리 우리 모두가 파멸되는 편이 좋을 것이오." 그러나 프랑스에 종교 전쟁이 불붙게 되었고 1563년 4월에 앙브와즈의 화약으로 전쟁이 종식되어 칼빈은 그의 조국 프랑스에서 내란이 일어난 것을 보게 되었다.

제9장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는 내게 유익이라


1558-59년에 사이열로 고생하던 칼빈은 잠시 회복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그의 폐병이 악화되었다. 칼빈은 그가 비참한 지경에까지 놓인 1564년 2월까지는 계속 자기 업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가 죽기 전 파렐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형이 나보다 오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 같소. 부디 우리의 우정을 기억해주길 바라오.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에 유익하였고 그 열매가 하늘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소. 나는 형이 나 때문에 지치는 것을 원하지 않소. 나는 매우 힘들게 숨을 쉬고 있고 매 순간이 나의 마지막 호흡인 양 생각하고 있소.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또 죽으니 그것으로 족하오. 그리스도는 그를 따르는 모든 자에게 살아서나 죽어서나 유익인 것이요."
5월 27일자 의회 서기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오늘 저녁 8시 책임감이 강한 칼빈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감각과 정신이 온전한 채로 하나님께 갔다." 칼빈은 그가 원한대로 묘비 없이 공동묘지에 5월 28일 주일에 장례되었다.

결론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탁월한 목사이며 교사였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며, 그 말씀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하는 일에 자신을 바쳤다. 그의 헌신은 그의 설교, 강연, 그의 주석과 논문들, 그리고 위대한 역작인 『기독교 강요』에 나타나있다. 이 책은 칼빈의 전 생애를 밀도있게 다루고 있다. 청년 칼빈의 학창 시절에 대하여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칼빈의 회심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나아가 그의 전 생애를 추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제네바 시를 경건한 사회로 개혁하고자 했던 칼빈의 열정을 이 책은 담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각종 주석과 편지, 그리고 기독교 강요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담고 있어 칼빈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고 있다. 칼빈의 출생, 성장, 시련, 목회, 죽음에 관하여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어 그의 신앙과 삶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오직 성경대로 살고자 했기에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았던 칼빈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대고 있는 상황에서 개혁교회의 신앙전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칼빈에 대한 연구가 보다 집중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칼빈은 그의 개혁주의적 신학의 이론을 교회의 실제목회에 적용하고 정직하게 실천하려고 했던 위대한 실천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단지『기독교 강요』가 전부인양 비춰지는 안타까운 현상을 발견케 된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진정 개혁되어지려면 칼빈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와 그의 목회원리에 대한 연구 그리고 적용이 따라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