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그리스도의교회 초기 인물 자료 - 새 출발(Beginnings) 1

好學 2011. 7. 16.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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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돌이켜 볼 때, 알렉산더 캠벨(1788-1866)은 행동의 사람이었다. 캠벨은 장수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고, 여러 분야에서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래서 캠벨은 기독교 안에서 뿐 아니라 기독교 밖에서도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설교가로써, 개혁가로써, 출판가로써 혹은 교육가로써, 캠벨은 미국 개척지대에서 기독교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필요한 정력과 재능을 가졌고, 자력사업과 자발행동을 결합하여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다.

알렉산더 캠벨은 자신의 아버지와 같지 않았다. 토마스 캠벨(1763-1854)은 젊은 시절을 아일랜드와 스코트랜드에서 보냈기 때문에 미국에 와서도 대륙적인 관점을 버리지 못했다. 캠벨은 미국에서 태어나 개척지에서 자란 발톤 W. 스톤(1772-1844)과 같지 않았다. 알렉산더 캠벨은 그의 인격과 개성이 굳어지기 전인 젊은 시절에 북아일랜드에서 서부 펜실베니아주 개척지로 옮겨왔다. 그는 영국적인 것과 미국적인 것의 가장 좋은 점들을 결합할 수 있었다.

캠벨은 1811년 3월 12일 마가렛 브라운(Margaret Brown/1791-1827)과 결혼한 이후, 그의 부인과 함께 펜실베니아주 워싱턴군(郡)에서 그리 멀지 아니한 북서 버지니아주(지금은 서 버지니아주)에 있는 장인의 농장에 보금자리를 정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캠벨은 개척지의 기독교 문제에 관심 하였고, 그의 넘치는 에너지를 수없이 많은 일들에 쏟아 부었다. 그 가운데 많은 일들이 사회와 교회에 큰 유익을 끼쳤다.

캠벨의 농장개발은 그 자체가 하나의 화제거리이다. 그가 살던 지역이름이 원래 하 버팔로(Lower Buffalo)였는데, 캠벨은 이름을 베다니로 바꾸었다. 그의 부동산은 300에이커(약 367,264평)와 작은 집 한 채에서 시작하여 1,500에이커(약 1,836,318평) 이상과 방 20개 짜리 저택으로 불어났다. 농장에서 나오는 수입은 많았다. 따라서 그 수입금으로 목회사역에 필요한 경비를 충당할 수가 있었고, 후에는 자신의 자금으로 출판사를 발전시켰고, 대학을 세웠으며, 마을을 세웠다.

감정주의와 부흥이 기독교인의 경험을 지배하던 때에 알렉산더 캠벨은 상식과 이성으로 접근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철저하게 의존하는 칼뱅주의의 예정론이 불필요하며, 구원에로 선택되었는지를 확인하는 특별경험을 애써 찾을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믿음은 성경말씀의 "합리성"(reasonableness)에서 나오도록 되어 있었고, 구원은 복음을 듣는 개인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었다. 구원받기 위해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단지 믿고, 회개하고, 복종하는 것이었다. 구원은 그처럼 단순하고 분명하였다. 그의 강조는 개인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에 있었고, 그 생각은 개척지의 자립정신과 일치하였다.

 

새 출발(Beginnings)

발톤 W. 스톤에도 불구하고(역자 주: [스프링필드 유언서]가 1804년 6월 28일에 나옴), 1909년에 100주년을 기념한 것은 논리적이고 고무적인 일이었다. 1809년에 토마스 캠벨의 {선언과 제언}([Declaration and Address])이 나왔고, 같은 해에 알렉산더와 그와 가족이 아버지 토마스와 만난 해였기 때문에 기념할만한 이유가 충분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은 2년 이상을 떨어져 살았으나, 그들은 피차 독립적으로 장로교와 개혁전통과의 관계를 끊고 있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새로운 탐구, 그것이 그들을 어디로 인도할지를 모르는, 새로운 탐구 중에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1809년 미국은 헌법제정이후(역자 주: 1788년에 발효하여 1789년에 개최된 제1회 연방의회에서 헌법 수정안이 심의·가결되었고 수정 1조에서 수정 10조까지의 권리장전의 여러 조항은, 1791년에 발효되었다.) 두 번째 10년을 막 끝낸 해였다. 해안지역의 과밀한 인구, 턱없이 부족한 일자리, 한정된 토지 때문에 많은 가족들이 쿰버랜드(Cumberland) 도로를 따라 피츠버그(Pittsburgh)의 앨리게이니(Allegheny)와 모농가헬라(Monongahela) 강이 합류하는 서쪽을 향해 쿰버랜드 협곡을 따라 켄터키주 중부 블루그래스(bluegrass) 지대로 옮겨갔다.

유럽의 전통들과 선입견들에 기초하여 동부해안에 세워진 도시들을 떠나 새로운 정착지에서 이주민들은 새 출발의 꿈을 꾸었다. 교회생활의 새로운 형태들이 가능할 뿐 아니라 심지어 바람직한 것 같았다. 공공업무에서는 물론 교회에서 평신도들은 결정과 관리에 있어서 큰 몫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

캠벨 가족이 서 펜실베니아주의 개척지에 도착했을 때에 미국 국민의 대다수가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 신 서부 개척지에서는 전도, 혁신, 종교적 실험에 대한 무제한의 기회가 있었다. 종교의 자유가 줄 수 있는 그와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기 전에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남서부 펜실베니아주의 레드스톤 지역으로 알려진 곳에서는 감리교회, 침례교회, 장로교회가 이미 세워져 있었다. 감리교회가 가장 늦게(1780년) 그 지역에 들어갔고, 레드스톤 순회구역에서 의사록이 처음 나온 것은 1784년이었다. 최초의 침례교회는 1780년에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장로교회는 1766년에 들어갔기 때문에 가장 오랫동안 그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레드스톤 장로회가 1781년에 만들어졌고 서 펜실베니아주를 섬기는 교단들 가운데 가장 규모도 컸다.

불행하게도 장로교회는 이민오기 전 옛 대륙에서 다퉜던 쟁점들을 신대륙으로 옮겨왔다. 예외 없이 레드스톤 지역도 대부분의 장로교 분파 교회들이 세워졌다. 분파들은 탈퇴파(Seceder), 반탈퇴파(Anti-Seceder), 개혁파(Reformed) 그리고 1812년 이후에는 스코틀랜드 교회인 "보통" 장로교회와 준 개혁파(Associate Reformed)가 있었다. 이 복잡한 교회분열의 문제가 바로 토마스 캠벨이 교회분열을 막고 연합할 방법을 찾게된 주된 이유였다(역자 주: 탈퇴파와 반탈퇴파는 각각 옛 빛과 새 빛파로 다시 나뉘어져 있었다).

이것이 토마스와 후에 알렉산더가 기독교인 연합에 필요한 몇 가지 방법들을 주창하게 한 정황이었다. 캠벨 부자는 연합의 기초를 성경말씀이라고 믿었으며, 그 위에서 하나가 될 것을 제안하였다. 그 당시 이 제안은 넓고 자유롭고 상식적인 관점을 나타낸 것이었다.

성경말씀에서 발견되는 믿음에의 본질들이 넓게 수용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캠벨 부자는 그들이 모든 사람이 수용하게될 계획을 제안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들의 제안이 반드시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서 펜실베니아주에 있어서는 새로운 것이었다. 확실히 연합은 개척지의 기독교인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전도를 도울 것이었다.

칼뱅주의 교리들 가운데 많은 부분이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은 거의 필연적인 것이었다. 저항의 토대는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발전되었고, 그 저항은 많은 복음주의 그룹들이 신약성경에서 사도들의 전통을 재발견한데서 비롯되었다. 이 자유로 인해서 얻어진 한 가지 큰 결과는 종교에 입문하는 신선한 통찰의 원천이 신약성경이라고 주장하는 몇몇 운동들의 탄생이었다.

알렉산더 캠벨이 서 펜실베니아주에 왔을 즈음에 그와 같은 운동들이 뉴잉글랜드주에서 엘리아스 스미스(Elias Smith, 1769-1846)와 아브너 죤스(Abner Jones, 1772-1841)의 지도력아래 나타났고, 남 버지니아주와 북 캘롤라이나주에서 제임스 오켈리(James O'Kelly, 1735?-1826)의 가르침아래 나타났고, 중앙 켄터키주에서는 발톤 W. 스톤(Barton W. Stone, 1772-1844)의 설교아래 나타났다. 이들 지도자들은 거의 동일한 생각들을 했고, 그 생각들은 "신약성경에 기초한 단순한 믿음"이 성서적이라는 믿음이었다. 그들은 그와 같은 믿음을 채택하는 것이 기독교인 연합을 이루는 길이라고 믿었다.

1809년 토마스와 알렉산더 캠벨이 그들의 새로운 고국의 문제를 숙고하면서 미국 기독교의 가장 두드러진 모습으로 결론지은 것은 분열상태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몇 개의 큰 교단들이 있었고, 많은 군소 교단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도의 임무는 대단히 컸다. 기독교의 영향력의 분열은 교단이 교단과 경쟁하는 곳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헌법에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명시되었기 때문에 유럽에서처럼 국가교회의 강제적인 연합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았다.

기독교인 연합은 이제 기독교인들이 성경연구, 교리논의, 설득 그리고 자발적 행동에 의해서 그들 자신들 사이에서 풀어야할 분명한 문제였다. 캠벨 부자가 신약성경 기독교 회복(a restoration of New Testament Christianity)의 기초 위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의 연합운동을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이와 같은 이유들에서 비롯되었다. 가능하다면, 그들은 16세기 루터와 칼뱅에 의해서 시작된 교회개혁을 마칠 수 있기를 바랐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19세기 교회개혁을 제안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