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그리스도의교회 초기 인물 자료 - 행동의 사람 알렉산더 캠벨2

好學 2011. 7. 16.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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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르는 지도자로써(As Emerging Leader)

 

미국에 도착한 후, 알렉산더 캠벨은 목회사역을 하기로 결정하였고, 성경에 근거를 두고 기독교인 연합을 진작하는 목적에 투신하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 토마스의 지도아래 즉시 학업을 시작하였고, 글래스고우 대학교에서 겨울학기 동안에 배운 지식을 불려나갔다. 착실하게 학업을 마친 후에 캠벨은 그의 22번째 생일을 두 달 앞둔 1810년 7월 15일 매주 모이는 이웃 사람들의 집회에서 그의 첫 설교를 하였다.

토마스 캠벨의 {선언과 제언}은 신자들의 친교를 도모하고 설교나 다른 기독교인의 일을 할 목적으로 워싱턴군(郡) 기독교인 협의회로 조직되었는데 널리 수용되지를 않았다. 1810년 가을까지 알렉산더와 그의 아버지가 주창했던 원칙들 위에서 교회들의 개혁은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었고, 그와 같은 사실이 시간이 흐를수록 분명해졌다.(역자 주: 토마스 캠벨의 {선언과 제언}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단단한 교단의 벽을 허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음 해인 1811년 초에 장로 캠벨은 협의회가 그리스도인 친교의 기능들과 의무들을 수행하기 위해서 독립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므로 1811년 5월 4일에 열린 협의회의 그 다음 모임에서 구성원들은 브러시 런 교회(Brush Run Church)로 알려진 교회를 조직하였다.

이 모임에서 토마스 캠벨은 장로로 선출되었고, 알렉산더는 복음을 설교할 자격을 얻었다. 독립교회를 조직함에 있어서 구성원들은 중요한 단계를 밟았는데, 그것은, 만일 이전 교회와의 관계들에 긴장이 초래된다면, 지금 그 모임을 해체해 버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설립자들의 염원과는 반대로 그들은 하나의 별개의 운동이 되었다.

교회로 조직한 후 첫 주일에 구성원들은 처음으로 주의 만찬을 축하하였다. 그로부터 매주일 성도들은 떡과 잔에 참여하였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침례에 관한 논의가 일어났다. 성경을 깊이 연구한 끝에 토마스 캠벨은 침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침수라고 선포함으로써 교회를 이끌었고, 그로부터 침수는 그들이 가르치고 행하는 것이 되었다.

1812년 1월 3일 브러시 런 교회는 알렉산더 캠벨을 목사로 안수하였다. 이 때가 23세 때였다. 그와 마가렛(Margaret)의 첫 아이 제인(Jane)이 1812년 3월 13일에 태어났다. 그녀의 출생으로 알렉산더는 침례에 관한 연구를 다시 시작하였다. 그 결과 1812년 6월 12일 캠벨과 그의 부인 마가렛, 토마스와 그의 부인 제인(Jane), 그리고 장로 캠벨의 딸 도로티아(Dorothea)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버팔로 개울에서 침례교 목사에 의해 침수세례를 받았다. 출발한지 일 년밖에 되지 아니한 이 운동은 이제 침수에 의한 신자의 침례(believer's baptism by immersion)에 헌신하였다.

침수문제에 있어서 젊은 알렉산더는 선도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환원운동의 지도력은 어느 사이에 토마스 캠벨에서 알렉산더 캠벨의 손으로 넘어갔다. 수년이 흐른 후 알렉산더는 기독교 사상과 실천에 있어서 분명한 체계를 발전시키면서 제자들을 이끌었다. 이 행동의 사람이 1866년 죽을 때까지 참여했던 수많은 활동들을 되짚어 봄으로써 우리는 알렉산더 캠벨이 왜 그리고 어떻게 그처럼 위대한 영향력을 미국의 종교생활에 강력히 발휘할 수 있었는가를 살피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