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世界信仰人]

원한경(元漢慶). 언더우드

好學 2010. 10. 6. 21:38

 

원한경(元漢慶).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1890.9.6-1951.2.20)

 

  미국인 선교사ㆍ교육가. 한국명 원한경(元漢慶). 서울 출생. 장로교의 초기 선교사 원두우(元杜尤.Horace G. Undewood)의 아들로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내한하였다. 1912년 경신(儆新)학교 교사, 조선신학교 교수 및 교장, 33년 연희전문학교 3대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영국의 왕립 아시아학회 조선지부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동 학회지(學會誌)에 한국관계 논문을 많이 발표하였다.

  태평양전쟁 때 일제에 의하여 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1945년 8ㆍ15광복과 함께 다시 와서 미(美)군정청 고문,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전기 학회의 지부를 재발족시켜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그의 큰아들 일한(一漢)은 연세대학교 교수로, 둘째아들 요한(堯翰)은 복음전도사업 등에 힘썼다.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저술가·교육가. H. G. 언더우드의 아들로 한국 이름은 원한경(元漢慶)이다. 16세기 한국을 떠나 미국 뉴욕대학교에서 교육학 및 심리학을 전공했다. 1912년 9월 선교사로 내한하여 경신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1917년 연희전문학교에서 한국 최초로 사회학이란 과목을 개설하여 강의했다.

 

  1919년 3ㆍ1운동을 맞아 제암리학살사건 등 일제의 만행을 전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1925년 뉴욕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34년 연희전문학교 제3대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영국 왕립 아시아 학회 조선지부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한국 관련 논문을 학회지에 다수 발표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에 의해 강제로 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8ㆍ15해방이 되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미군정청 고문, 미소공동위원회 고문, 미군정청 문교장관 고문 등을 맡아 활동했다.

 

  1949년 3월 공산당에게 살해당한 부인과 함께 양화진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한국 그리스도교와 교육계의 발전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으며, 첫째 아들은 연세대학교 교수 및 이사를 지냈으며, 넷째 아들은 서울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저서】<영한사전(An English-Korean Dictionary)> <한국의 현대교육(Modern Education in Korea)> <한국인(Every-Day Korean)> <한국에 관한 서양문학의 서지(A Partial Bibliography of Occidental Literature on Korea)>

【논문】<Korean Boats and Shi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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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손자까지 대 이어 한국에 몸 바쳐>

 - 이규태: 조선일보(1999. 7. 16)

 

  1985년 부활절 새벽 인천 제2부두에서는 색다른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뱃머리에 훤칠한 서양사람이 가슴에 성서를 안고 다른 한 손은 흔들며 선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로부터 꼭 100년 전 부활절 새벽 최초의 북장로교 선교사 호레이스 언더우드(元杜尤)의 내한 장면을 그렇게 재연한 것이다. 재연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언더우드의 증손자인 월리엄(元漢應)이었다.

 

  언더우드1세의 제물포 상륙을 두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 배에는 역시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가 타고 있었으며 이 소망의 땅에 누가 먼저 발을 딛나 두 목사간에 눈치 싸움을 했다는 것이다. 먼저 내리려 몸싸움을 벌였다기도 하고 손을 잡고 동시에 발을 디뎠다기도 한다. 너무 기뻐서 이 두 목사는 경쟁적으로 옷을 벗고 부두 앞 바다에 뛰어들었다기도 했다. 소망의 땅에 당도한 기쁨이 그렇게 과장되었음직하다. 그 언더우드1세가 별세한 지 83년만에 앞다투어 먼저 발을 디디려던 그 소망의 땅에 다시 발을 디딘 것이다. 그의 아내, 아들, 며느리가 묻혀 있는 합정동 외인묘지에 묻히기 위해서이다.

 

  언더우드1세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신교 교도에게 세례를 베풀고 신교교회를 세운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결실이 잇기까지의 내력은 이렇다. 황해도 장연에 솔내(松川)라는 마을이 있다. 그 마을에 한학에 조예가 깊은 서상륜(徐相侖)이라는 분이 살았다. 원래 의주 사람으로 압록강을 넘나들며 행상을 하고 사는데 만주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목사 존 로스를 만난다. 둘 다 서툰 중국말을 나누며 기독교에 관한 진리를 듣고 한문으로 번역된 신약성서도 한 권 얻어 신앙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가 돌아올 때 봇짐 속에는 한역성서가 들어있었으며 국경도시인 안동(지금의 丹東)에서 배를 탔다.

 

  국내에 들 대 세관에서 짐 수색을 당할 것이요 성서는 반입할 수 없는 금물이고 해서 뱃머리를 아예 제물포로 돌렸다. 그러고서 짐을 세관에 맡겨놓고 미국 공사에게 말해 그의 주선으로 최초의 신약성서를 상륙시키는 데 성공한다.

  서상륜은 곧바로 황해도 솔내로 가 한문을 아는 그 마을 식자들에게 성서를 나누어 주어 읽게 했다. 이렇게 한톨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고 있는데 이 지역의 감독을 맡은 언더우드와 솔내가 만나게 된 것이다. 언더우드가 왔을 때에는 이 마을뿐 아니라 이웃마을에까지 믿음이 번져 있었으며 1886년 저물 무렵에는 서상륜이 로스 목사의 소갯장을 들고 언더우드를 찾아왔다. 그리고 솔내에는 목사의 세례를 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말도 했다.

 

  언더우드가 한국에 발을 딛기 전에 갑신정변의 여파도 있고 해서 일본에서 꽤 오래 머물렀었다. 그 일본에서 이수정(李樹庭)이라는 한국 사람을 만난다. 그분이 북장로교회에다 조선에 선교사 파견을 요구하는 요청문을 보낸 사람이기에 굳이 찾아본 것이다. 그는 1882년 박영효를 정사로 한 사절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농학과 법학 연구를 위해 남아 있었으며 당시 일본의 대표적 농학자인 쓰다(津田仙)에게 사사, 그의 인도로 입신하여 세례를 받고 1884년에 국역성서인 ‘마가복음’을 풀판한다. 그는 1886년 갑신정변 실패 후 귀국했는데 종적을 찾을 길 없으니 새 학문이나 개화파가 수난받고 있던 당시인지라 수구파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언더우드는 이수정으로부터 한국의 정세를 듣고 또 한국말을 배웠다. 서투르나마 이수정으로부터 배운 한국말이 밑천이 되어 그는 행길가나 약수터 정자나무 밑에 앉아 지나가는 손님과 대화식으로 선교하는 소위 ‘한길 선교’를 시작했다. ‘아무 책이건 들고서 읽는 체 하고 있으면 호기심 많은 한국 사람은 반드시 다가와서 그게 무슨 책이며 그 안에 평란(平亂)된다는 말이 적혀 있느냐는 둥 말을 걸어오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선교쪽으로 이끌어가면 순한 양떼처럼 따라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수십명이 모인 야외 설교장이 삽시에 형성되기도 하고 바람이 차다 하여 사랑방에 안내 받아 초기 전도에 성과를 올렸던 소위 ’사랑방 전도‘를 창출하기도 했다.

 

  언더우드1세가 후배 선교사들에게 체험을 말하는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사랑방 전도를 할 때 방에 들면 반드시 그 방에서 가장 서열이 낮은 공간을 찾아 앉아야 한다. 만약 서열 높은 아랫목에 가서 앉으면 건방지다 하여 아무리 고상한 하느님 말씀을 해도 마이동풍이다. 그럼 후배 선교사들은 한국의 사랑방에는 퍼스트 세컨드―하는 식으로 서열이 매겨져 있는가 하고 묻게 마련이다. 방에 들어가 주인이 쓰고 다니는 관이 어느 벽에 걸려 있는가를 확인하고 그 아래가 가장 서열 높은 공간이니 그 반대편에 앉으면 된다고 가르쳤다. 한국인의 강한 서열 의식을 선교에 활용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가 솔내로 2차 전도 여행을 했을 때 많은 신도들이 한데 모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배를 볼 교회를 짓겠다는 것이었다. 허락을 하고 터를 잡아 기초를 닦았다. 그러고서 언더우드를 찾아와 건축자금은 언제 나오느냐고 물었다. 천주교에서는 터만 잡으면 선교사들이 선교 자금으로 성당을 지어 준다는 소리를 듣고 언더우드 목사가 지어줄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이들에게 물었다.

 

  “자기 살 집을 지을 때 어떻게 짓습니까?”

  “자재는 자기가 마련해서 이웃의 도움으로 힘을 합쳐서 짓지요.”

  “그렇다면 교회도 그렇게 지으면 되는 것이오. 나무가 필요하면 마을 둘레에 가서 나무를 베고 돈을 주지 않고도 주워올 수 있는 돌이며 필요한 모래와 흙이 널려있지 않습니까. 신도 가운데 목수와 석수(石手)가 있을 것이오. 힘을 합치면 교회 하나 못 지을 것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 최초의 신교교회가 솔내에 탄생된 것이다. 분에 맞게 자조자립하여 하느님과 직결 중간에 의존을 배제케 하는 전도를 네비어스식 전도라 한다. 중국에서 그같은 산교로 성공을 한 네비어스 박사의 권유로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에 접목시켰으며 그 최초의 작품이 솔내교회인 것이다.

 

  나지막한 기와집이지만 솔내의 신도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크기의 이 교회에서 첫 예배를 보고 나자 언더우드를 주례로 한 한국 최초의 신식 교회 결혼식이 그 자리에서 베풀어졌다. 전기 서상륜씨의 아우로 목사 지망을 하고 있는 서경조씨 부부가 당사자인데 신랑신부 앞에 세우는 화동(花童)으로 그의 14세와 12세 난 자녀를 앞세운 이상한 결혼식이었다. 그는 전통 결혼식을 거부하고 우ㅠ리 나라에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 그곳에서 교회식으로 식을 올리겠다고 혼례를 미루어온 것이다. 이 서경조씨는 후에 평양에 신학교가 세워지자 목사가 되어 이 솔내교회의 정규 목사가 되는 집념의 사나이다.

 

  총각 목사 언더우드는 선교 의사로 한국에 와 있던 시카고대학 출신 여의사 릴리언스 호톤양과 결혼한다. 서양 여자치고 키는 작았으나 당찼던 이 부인의 결혼식에 명성황후는 말 다섯 마리에 동전 꾸러미 등 많은 결혼 선물을 했는데 바로 그녀가 황후의 시의로 있었던 친분에서였다. 언더우드1세도 오랫동안 고종을 가까이 모셔 사석에서 ‘형’으로 불린 영광까지 누렸으며 황제가 손수 내리는 태극훈장을 받기도 했다.

  22년간의 한국 활동 중 후반은 한국에 대학을 세우는 일이었다. YMCA 안에 경신학교 대학부로 출범한 그의 야망은 연희궁이 있던 풍수의 명당을 형인 존 언더우드로부터 얻어낸 돈으로 사들이고 미국 독지가들에게 통신으로 읍소하여 본관 건물을 지을 돈을 마련한다. 한데도 바랐던 대학이 아니라 연희전문학교로 총독부의 인가가 났다.

 

  한국인에게 고등교육을 시킬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언더우드1세는 이 결실을 보지 못하고 병 치료차 가 있던 애틀랜틱시에서 숨을 거둔다. 임종에서 ‘거기 가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하기에 부인이 물었다. 거기가 어디냐고. 그는 거기를 말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렇게 대답을 유보한 지 83년만에 선영에 잠자던 그가 ‘거기에’ 돌아왔다. 한국 사람은 객지에서 죽더라도 고향에 돌아가 묻히려 하는데 언더우드는 선영에 묻혔으면서 객지에 돌아와 묻힌 것이다.

 

  언더우드 스토리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외아들인 2세 원한경(元漢慶)이 연희전문학교에 와 강의, 1934년에 3대 교장으로 취임한다. 한국 문화와 역사에 애정이 유별나 연희전문에 정인보(鄭寅普), 김윤경(金允經), 최현배(崔鉉培), 백락준(白樂濬), 백남운(白南雲), 홍이섭(洪以燮)으로 이어지는 한국학 인맥을 형성시킨 것도 그의 공이 컸다. 한국 전쟁으로 부산 피란시절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맏아들인 언더우드3세 원일한(元一漢)이 교수로 와서 일하다가 지금은 재단일을 보고 있다.

 

  언더우드의 51주기 바로 그날에 태어난 원일한의 맏아들 원한광(元漢光)이 전통을 이어 연대에 와 영문학을 강의하고 있으니 언더우드4세 시대를 맞고 있는 셈이다. 언젠가 3세에게 조손이 모두 한(漢)자 돌림이니 잘못된 것 아니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내 큰놈 이름은 정인보 선생이 짓고 둘째(漢應), 셋째(漢石)는 백낙준 선생이 지었으니 항렬이 틀렸다면 그건 두 선생의 책임이지 제 잘못은 없습니다.”

하며 웃던 일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