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書槪論/[신약성경개론] 개관

[스크랩] 디모데후서 - 개론

好學 2011. 5. 7. 16:34

 

디모데후서 - 개론

 

 

▣ 디모데후서-개요

 

바울은 젊은 디모데가 그의 사역에 충성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네 가지로 호소한다.

1. 목회적인 면에서의 호소/1장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상기 /1장 1-6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자원 /1장 7-11절

하나님의 보좌에서 받는 상 /1장 12-18절

2. 실천적인 면에서의 호소/2장

고난을 견디는 방법 /2장 1-13절

(1)이것은 너의 소명의 일부이다 /2장 1-7절

군사-운동 선수-농부

(2)이것은 그리스도께로 받은 특권이다 /2장 8-13절

교회를 위하여-주님을 위하여

거짓 선생들을 다루는 방법 /2장 14-23절

(1)말씀을 옳게 분변함 /2장 14-15절

(2)거짓말과, 우화를 거절함 /2장 16-18절

(3)거룩한 삶을 지향함 /2장 19-23절

교회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 /2장 24-26절

온유함-인내-말씀을 사용함

3. 예언적인 면에서의 호소 /3장

장래에 대한 설명 /3장 1-9절

과거로부터의 모범 /3장 10-13절

현재를 위한 권고들/3장 14-17절4. 개인적인 면에서의 호소 /4장

말씀을 전파하라 /4장 1-4절

“때가 이르리니...“

네 직무를 다하라 /4장 5-8절

“내가 벌써 부음이 되었으니... “

속히 로마로 오라 /4장 9-18절

“다른 이들이 나를 버렸으니... “

그리스도 안에서 내 친구들에게 문안하라 /4장 19-22절"

 

▣ 디모데후서 서론

 

▣ 배경:바울은 잠시 동안 자유를 누린 후 재차 체포되었다. 그가 석방되었던 기간 동안의 여행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디도서 3장 12절은 그가 니고볼리를 방문하였음을 시사한다. 거기서 그는 드로아로 간 것이 분명하며 드로아를 급히 빠져나오느라고 그의 집 주인인 가보에게 외투와 책들과 양피지들을 두고 왔었다(딤후 4:13).

우리는 그가 어디서 어떻게 체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는 것은 네로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무서운 박해를 가했다는 것과, 바울의 두번째 감금의 상태는 첫번째와는 매우 달랐다는 점이다(행 28 장). 그는 이제 로마 감옥에 있는 미움받는 죄수였고, “자신이 빌린 집“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피고가 아니었다.

바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이 마지막 편지를 읽을 때 우리는 그가 재판과 분명한 순교에 직면하여 외로움과 가슴아픔을 느끼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는 “누가만 나와 함께 있으며 ...“라고 쓰고 있는데, 이 말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가능한 한 빨리 그에게로 오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4장 14절에 언급된 알렉산더가 사도행전 19장 33절에 나오는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면, 바울이 에베소나 그 근처에서 체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하면서 “유대인들의 음모“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행 20:19) 아마도 은장색 알렉산더가 이 음모에 관련되어 있는 것같다. 어떤 학자들은 알렉산더가 우상 제조업자들의 조합에 들어 있었으며, 바울이 전에 에베소에서 도망한 것을 인하여 기분이 상해 있었다고 추정한다.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더이상 영적 지도자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지위를 대신하도록 두기고가 파송되었기 때문이다(4:12). 아마도 디모데는 에베소 지역을 여행하며 사역을 하는 부흥사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바울은 디모데가 로마로 오기를 기대했던 것이 확실하였다. 왜냐하면 디모데에게 드로아(4:13)와 에베소(1:16-18)에 가라고 쓰고 있는데, 이 도시들은 로마로 가는 길에 위치한 도시들이기 때문이다.

 

▣ 목적:이 편지는 퍽이나 개인적으로 씌어졌다. 바울은 로마에서 외로이 재판과 확실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들 디모데 보기를 갈망하고 있으며, 복음의 사역에 있어서 자기의 자리를 대신하도록 격려하고자 하였다. 바울은 그의 주변에서 배교와 좌절을 보고 있다.

시드로우 박스터(Sidlow Baxter)박사는 “책의 폭발“이란 저서에서 디모데전서에 나오는 “몇몇“이라는 구절이 디모데후서에서는 “모든“으로 바뀌어졌다고지적한다. “몇몇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딤전 1:6), “어떤 이들이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어떤 이들은 이미 사단에게 돌아갔으며“(딤전 5:15), “어떤 이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딤전 6:10), “어떤 이들은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딤전 6:21) 등. 이것이 그의 첫번째 편지의 주제이다.

그러나, 디모데후서에서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1:15), “다 나를 버렸으나“(4:16)와 같은 귀절들을 본다 ! 교회들이 믿음에서 돌아서고 있었으며, 바울은 젊은 디모데를 강권하여 소명에 충성을 다하고 자기의 사역을 완성하라고 부탁한다. 이 편지에 나타난 권면들의 여기 저기에서 이 위대한 사도의 개인적인 정취와 관심을 찾아볼 수 있다. 이 편지는 좌절 가운데 쓴 “백조의 노래“(최후의 작품)가 아니라 승리의 성가이다 !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장을 구분할 때 바울이 디모데에게 낙심되는 상황에서도 충성된 사역자가 되라고 격려하는 네 가지의 호소들을 보게 된다. 1장은 목회를 위한 호소이며, 디모데가 사역에로 소명받은 일을 상기시키고 이에 따른 책임과 특권을 말한다. 2장은 실천적인 호소로, 젊은 목회자의 문제들, 복음에 대한 박해, 거짓 교사도 교회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3장에서 바울은 예언적인 호소를 사용하여 사건들의 과정을 설명하며, 말씀을 굳게 붙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말한다. 끝으로 4장은 나이 많은 사도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개인적인 호소이며, 자신이 곧 무대에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디모데는 더욱 진실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강진하고 있다. 바울은 디모데가 또하나의 데마가 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 개인적인 의견과 충고 - 디모데후서 1장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두 편지들을 읽어 보면, 이 젊은 사역자의 문제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할 수가 있다. 한 가지 예로는, 그가 문제들을 공명 정대하게 직면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문제들을 해결하기를 망설였다는 점이다. 그의 생활에는 “두려움“(비겁)이 있었는데, 아마도 “함정을 파는“ 사람을 두려워한 것 같다. 그는 젊은이로서 일반적인 유혹들에 부딪히자 임무를 수행하는 데에 자신이 적합하지 않다고 느낀 것이 분명하였다.

바울은 그를 격려하기 위하여 편지를 썼는데, 여기 1장에는 디모데를 지탱케 하며 임무에 머물러 있도록 도움을 주는 다섯 가지의 놀라운 격려들이 나온다.

 

1. 기도 친구(1:1-5)

바울은 순교에 직면해 있었는데도 디모데를 위해 기도할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 디모데전서 1장 1절과 디모데후서 1장 1절을 비교하면 죽음에 직면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가 !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사랑과 기도를 확신시키고 있으며, 밤낮 그를 많이 생각하고 있음에 대하여 알린다.

바울은 디모데가 비록 여러 가지 문제들을 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감사해야 할 일들이 많다고 깨우쳐 준다. 그가 소유한 거룩한 유산과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믿음, 즉 구원을 위한 믿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과 그리스도인의 봉사를 위한 믿음이 그에게 있음을 상기시킨다.

디모데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당시 살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살아 있었다면 기도로 그를 뒷받침해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기도하는 친구를 소유한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격려가 되는 일이며, 그들이 영적 생활에 있어서 큰 도움을 주게 된다(삼상 12:23 참조)."

 

2. 놀라운 선물(1:6-7)

디모데의 문제들 중의 하나는 비겁 다시 말하면 문제들을 직면하는 데 있어서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 소심하다는 것이었다. 그가 아직 어리다는것이 이렇게 작용하였을 것이다(딤전 4:12).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던 은사를 무시하고 있음을 상기시켰으며(딤전 4:14), 꺼져 가는 불에 바람을 불어 넣어 불꽃을 일으키듯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은사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시켰다. 이것은 그의 구원을 잃어버리는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잃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주님을 향한 그의 열성을 잃어버리며 주님의 일에 대한 정열을 잃는다는 뜻이다.

바울은 7절에서 성령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성령은 우리 안에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으신다(롬 8:15). 오히려 능력과 사랑과 훈련(근신하는 마음-자제력)을 주시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 가지를 모두 필요로 한다! 성령은 우리의 생활의 능력이시다(행 1:8/엡 3:20-21/빌 4:13). 바울은 빌레몬서를 제외한 그의 모든 서신들에서 “능력“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성령은 또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신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기 때문이다(갈 5:22).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 말씀과 다른 신자들에 대한 사랑,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한 사랑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임이 분명하다(롬 5:5). 성령은 또한 우리에게 훈련, 곧 자기 조절 능력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정이나 환경에 쉽게 포로가 되지 않는다. 성령이 조절하고 계실 때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온전한 평강과 안정이 있다(행 4:1-22 참조)."

 

3. 거룩한 부르심(1:8-11)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은 디모데가 바울의 친구이며 함께 수고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의 죄수였다 ! 바울은 “나를 부끄러워하거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고 권면한다. “우리의 고난은 우리를 사역자로 부르신 하늘의 소명의 일부분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할 때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것이며, 우리를 구원하신 그 능력이 그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고 언급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바울은 우리의 부르심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놀라운 구원을 주신 후에 약간 고난을 당하도록 허락하셨다면 우리가 불평하거나 그만두어야 할 권리가 어디 있겠는가 ! 바울은 다음과 같은 조언을 준다. “하나님은 심중에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 그가 목적을 성취하시도록 하자.“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은 지나간 시대에는 숨겨져 있던 것이었으나 이제 바울을 통하여 계시되었다. 10절의 “패한다“는 말은 “아무 효과가 없도록 만든다. 무장을 해제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죽음을 제거하신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여전히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를 위하여는 죽음의 무장, 곧 사망의 쏘는 것을 해제시키셨다.

그리스도는 생명과 불멸(결코 죽지 않는 조건)을 밝히셨다. 이러한 일들은 구약에서는 그늘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므로, 우리는 구약의 구절들만으로 불멸과 죽음과 부활의 교리를 세우는 일을 삼가해야 한다. 많은 거짓 이단들이 욥기, 전도서, 그리고 시편 중의 일부를 사용하여 영혼이 잠든다는 등의 이상한 교리들을 세운다."

 

4. 신실하신 구세주(1:12-14)

그리스도는 신실하시며, 보호하실 능력이 있음을 우리가 안다는 것은 얼마나 격려가 되는 일인지 모른다 ! “나는 내가 믿는 분을 안다“고 바울은 확신있게 말한다. “나는 바란다“거나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다. 12절은 두 가지로 읽을수 있는데, 두 가지 방식이 다 옳다. 바울은 그와 그의 영혼을 지키실 수 있음을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바울에게 맡기신 일을 지켜나가게 하실 것임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는 이렇게 읽어도 된다. “그리스도는 그가 나에게 맡기신 일을 보호하실 수가 있다.“ 그리스도는 바울에게 복음을 위탁하셨으며(딤전 1:11),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지키시며 안전하게 보호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딤전 6:20/딤후 4:7/딤전 1:1-11 의 “청지기 디모데“ 참조).

13절의 “본“은 “체계“라는 뜻이다. 교회는 건전한(건강한)교리의 체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 체계에서 옆으로 벗어나는 것은 죄였다. 디모데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교리의 근본적인 체계를 굳게 쥐고 있었다(14절). 12절과 14절은 병행되는 구절이다.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드린 것을 지키실 수가 있으시며, 이 땅 위에 있는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지키도록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굉장한 격려가 아닐 수 없다 !"

 

5. 거룩한 본(1:15-18)

아시아에 있는 모든 이들이 바울을 버렸다(4:16). 그가 이름을 밝힌 두 사람은 아마도 에베소 교회의 회원들이었을 것이며, 디모데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실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오네시보로(“유익“ 또는 “이득을 가져오는 사람“)였다. 이 경건한 사람은 아마도 에베소의 집사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18절을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집사의 일을 했는지 네가 잘 아느니라“고 번역할 수도 있기 때문인데, 헬라어에서 “섬긴다“는 단어는 집사이다.

이 사람은 로마에서 와서 바울을 찾아내어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없이 그를 섬겼다.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이는 참으로 디모데가 본받아야 할 놀라운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모범이다 ! 여기서 우리는 목회자보다도 더욱 열성과 사랑과 용기를 보인 교회의 집사를 본다 !

17절에서 그가 “로마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을 눈여겨보자. 그가 더이상 거기에 없었던 것이 분명하며, 아마도 에베소로 돌아오고 있었을 것이며, 그가 이 편지를 디모데에게 전하였을 수도 있다. 어쨌든 바울은 19절에서 이 집사의 집안에 문안한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오네시보로가 죽었으므로, 18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은 죽은 자를 위한 기도라고 가르친다 ! 그러나, 그가 죽었다는 증거가 없으며, 또한 바울이 신자들에게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는 결코 가르치고 있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 신자의 완전한 모습-디모데후서 2장

 

첫 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목회 소명을 상기시켰다. 본 장에서 그는 지교회와 목회자의 사회적인 책임을 실천적인 면에서 다루고 있다. 그는 지교회를 몇가지 비유로 제시하며,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의 목회자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여러 가지 사역을 보여 준다. 여기서 지교회에 대해 알아보자.

 

1. 하나님의 가족이다(2:1)

“나의 아들“이란 말은 물론 디모데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난 것을 암시한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서 바울이 쓰고 있는 것처럼 복음을 통하여 디모데를 “낳았던“ 것이다. 바울은 지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불렀다(엡 2:19). 지교회는 성별된 지역 단체가 아니라, 교제와 예배와 봉사를 위하여 함께 모이는 하나님의 가족이다. 이 가족에 속하는 유일한 길은 성령(요 3:1-6)과 말씀(벧전 1:23)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보고이다(2:2)

“의탁한다“는 말은 “예금하다“는 뜻이며, 바울이 하나님께로 받아(딤전 1:11) 디모데에게 위탁한 복음 진리의 보화를 가리킨다(딤전 6:20). 이것은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서 지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보물을 지키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지교회의 임무는 박물관에서와 같이 진리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대로 살며, 앞으로 오는 세대에게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디모데가 이 진리를 그저 아무 신자에게가 아니라 “충성된 사람들“에게 맡겨야 했던 것에 유의하자. 말씀에 충성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

 

3. 하나님의 군대이다(2:3-4)

봉사 사역에로의 디모데의 부르심은 사도행전 16장 3절에 나타나 있으며(“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 “떠난다“는 말은 직역하면 “군사로서 전장에 데리고 가다“는 단어이다. 이것은 디모데의 병적 편입이었다 !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의 군대의 군사이다. 다만 어떤 이는 충성스럽고 어떤 이는 그렇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구원의 대장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입대되었으며“(선택됨-4절), 그에게 명령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역경을 견디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디모데는 그가 직면하고 있는 박해로 인하여 용기를 잃고 있었으나, 마귀로부터 반대받을 것을 기대했어야만 했다 !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운동장이라기보다는 전쟁터이다. 우리는 스스로 힘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견딜수 있으며, 마귀의 책략에 대항하여 버틸 수있다(엡 6:10-). 더구나 군사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빠져들어서는 안되며, 그리스도께 최고의 충성을 바쳐야 하는 것이다.

만일 모든 군사들이 시간제로 일하며 자기의 임무를 벗어나게 된다면 군대는 어디로 갈 것인가 ! 우리의 주된 임무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다."

 

4. 하나님의 팀이다(2:5)

바울의 편지에는 복싱, 레슬링, 달리기 등 경기자들에 대하여 많이 언급되어 있다. 헬라인과 로마인들은 스포츠에 대하여 열정적이었으며, 바울은 이 구절에서 신자의 실천 생활을 예화로 설명하기 위해 올림픽 경기를 사용한다. 경기자가 얼마나 강한가에 상관없이 그는 경기의 규칙에 순종해야만 한다. 만일 그가 경기에 이기고도 규칙을 어긴다면 그는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승리를 위해 싸운다“는 말은 “경기에서 겨룬다“는 뜻이다. 지교회는 달리기 하는 하나님의 팀이며,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세워 놓으신 목표점을 향해 경주하는 것이다(빌 3:12-14). 승리자가 되기 위해서는 훈련과 헌신과 방향 설정이 필요하듯이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위해서도 이와 똑같은 요소들이 필요하다. 지교회에서는 협동 작업이 있어야만 한다. 빌립보서 4장 3절의 “나와 함께 힘쓴다“는 말은 직역하면 “나와 함께 팀의 짝이 된다“는 뜻이다."

 

5. 하나님의 정원이다(2:6-7)

“농부“는 머슴이란 뜻이며, 여기서의 비유는 농업적이다(고전 3:6-9 참조). 교회는 정원이며,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목회자는 씨를 심고 물주고, 계절에 맞추어 씨를 추수한다. 디모데는 임박한 추수에는 실패한다 해도 용기를 잃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열매 맺는 정원으로 발전하는 데는 시간과 인내와 수고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충성된 농부와 같이 목회지는 하나님이 보내신 축복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낙심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러 거두게 된다 !“"

 

6.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다(2:8-13)

바울은 그도 역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중임을 디모데에게 깨우친다. 그러나, 그들의 고난은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11-13절은 초기 교회에서 찬송가로 쓰였거나 신앙 고백에 사용된 것인 듯하다. 이 구절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하나된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죽으셨을 때 우리는 그의 몸의 지체로서 그와 함께 죽었으며, 그와 함께 일어났으며, 그와 함께 다스릴 것이다.“

우리가 불충성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한 불신자가 어떤 나이 많은 성도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하나님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나가게 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녀는 “그런 일이 어떻게 생길 수 있을까요? 나는 하나님의 손가락 중의 하나인데 !“라고 대답하였다."

 

7. 하나님의 학교이다(2:14-18)

디모데는 거짓 선생들로 말미암아 공격을 받고 있었으며 오늘날의 교회도 그러하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본질적인 일들에 달라 붙어 있어야 함과, 헛된 말과 철학에 대해 논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켜야 한다. 둘째로 우리가 옳게 말씀을 분별하고 있는 것임을 확신하며 말씀을 부지런히 다루어야 한다. “옳게 분변하며“는 말씀 전체를 조심스럽게 잘라 놓아 각시대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거짓 교리가 “암처럼, 또는 궤양처럼 삼킨다“고 경고한다(17절). 유일한 치료약은 하나님의 말씀에 속한 “건강한(건전한) 교리“이다. 거짓 선생들이 들려 주는 어리석고도 헛된 전설에 귀를 기울이기 시사하면 신자들은 영적으로 병들기 시작한다. 모든 교회는 성경 학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8. 하나님의 집이다(2:19-26)

바울은, 지교회를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진 집이며 여러 가지 종류의 담는 그릇들이라고 묘사한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흔히 성경 구절들을 집에다 썼으며(신 11:20), 이방인들도 집안에 가훈을 써 놓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는 두 가지의 문구가 씌어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을 향한 것이다(9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은 그들의 거룩한 생활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한다.“ 각 그리스도인은 큰 집에 있는 그릇이지만 어떤 그릇들은 더러워서 사용할 수가 없다. 디모데는 불명예스러운 그릇들로부터 자신을 깨끗이 하라(정결케 하라)고 경고를 받는다. 그렇지 않으면그들이 디모데를 더럽힐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분리에 대한 성경의 교리이다(고후 6:14-7:1).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시기에 적합하고 명예롭게 되기 위하여 분리되어 있는 그릇들이 되어야 한다. 젊은이의 정욕을 피하고 신령한 것을 따르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실 수 있는 준비된 그릇이 되도록 디모데를 도와 주시는 것이다.

23-26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분쟁과 다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 말세의 모습-디모데후서 3장

 

이제 바울은 시대를 거슬러 내려가서 선지자의 눈으로 장차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본 장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바울의 예언적인 호소이며, 교회의 미래라는 빛으로 디모데를 훈계하고 있다.

 

1. 미래에 대한 설명(3:1-9)

“말세“란 사실상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사역으로 시작된 한 시대이다(히 1:1-2). 그러나, 신약은 “말세“ 특히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직전의 교회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시사한다. 이 시기는 “위험한“ 시기, 즉 “다루기 힘들고 어려운“ 시기일 것이다. “고통하는“(모험적인) 때라는 단어는 마태복음 8장 28절에서 귀신들린 가다라인을 설명하는 데 사용한 것과 같은 단어이다 !

인간들이 믿게 될 “귀신의 가르침“으로 인하여(딤전 4:1-) 가다라 지방의 그 불쌍한 사람에게 하였듯이 이 세상을 “마귀의 묘지“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시대에 들어와 있다!

이기심은 말세의 보증서이다. 이기심은 탐욕적인 태도와 뽐내는 마음으로 인도해 갈 것이다. “자랑하는 사람들“이란 사실상 허풍장이를 뜻한다 ! 참다운 애정은 사라지고 매일 신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자연스러운(일부러 꾸민) 애정이 유행하고 있다. “절제하지 못한다“는 말은 “비밀을 지키지 못한다“는 뜻이며, “사납다“는 말은 “앞뒤를 헤아리지 않다, 무모하다“는 뜻이다. 여행의 속도나 돈의 낭비나 인간의 생명들에 대한 부주의함을 볼 때 우리가 참으로 조급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5-8절은 말세에 많은 종교가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단순한 모조품에 불과하며 생명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채 경건의 모양만 지니고 있을 뿐이다.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예언한 바, 믿음에서 떠나는 행위가 오늘날 우리에게 해당되고 있다.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도 오늘날 종교가 많다 !

성경은 여전히 가장 잘 팔리는 책이지만 범죄율은 증가 추세이며, 이혼도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참된 기독교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이 거짓 선생들은 죄의 짐을 지고 정욕으로 말미암아 곁길로 인도된 여자들, 즉 “배우기는 했으나“ 진리에 대한 이해에는 참으로 도달하지 못하는 이들을 희생제물로 삼고 있다. 어떤 이단이든지 방문해 보면 여자들이 지배권을 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많은 거짓 종교들이 의문스러운 생활을 살고 있다는 증거들도 보게 될 것이다.

바울은 배교한 교사들인 얀네와 얌브레를 모세가 행한 일을 흉내내어 그를 반대했던(출 7:11-) 애굽의 마술사에 비교하고 있다. 사단은 모조가이며 그가 모조한 복음과 교회가 말세에 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이러한 모조가들을 이겨낸 것처럼 그리스도는 궁극적으로 말세의 이 속이는 자들을 물리치고 승리하실 것이다.

“이 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라!“ 고 바울은 경고한다(5절). 비록 미련하다고 낙인이 찍힌다 해도 디모데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기꾼들 속에 관여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2. 과거로부터의 모범(3:10-12)

만일 얀네와 얌브레가 사단의 일을 본보기로 보여 준 것이라면 바울은 우리에게 있어서 주님의 일을 위한 가장 훌륭한 본보기이다. 그는 아무것도 숨긴 것이 없었다. “네가 보고 알았거니와...“(행 20:17- 참조). 바울은 디모데의 고향 가까이에 있는 도시들의 이름을 말한다. 왜냐하면 디모데는 그 이름들에 친숙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디모데는 바울의 교리(교훈)와, 생활(행동)의 방식과, 바울의 생활에 동기를 부여했던 목적(행 20:24/딤후 4:7), 그리고 시련가운데서도 그를 지탱케 했던 믿음을 알고 있었으며, 박해를 당하면서도 바울이 보여 준 끈기, 사랑, 인내를 알고 있었다. 또한 이 모든 일에서 바울을 돌보신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 역시 알고 있었다. 바울은 젊은 디모데에게 있어서 거룩한 실물 교습이었으며, 우리도 마땅히 다른 이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박해는 그리스도께서 고의적으로 장려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신자가 거룩한 생활을 할 때에 박해는 자동적으로 오게 되는 것이다(벧전 4:12-19). 12절을 가장 알맞게 번역한다면 “거룩하게 살려는 뜻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다...“라고 된다. 의지가 하나님께로 향하게 될 때 사단은 우리를 공격한다.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기가 점점 더 어렵게 된다는 것을 확신해도 좋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게는 바울처럼 온전히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려는 의지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하다."

 

3. 현재를 위한 권고(3:13-17)

이 사단의 미혹자들이 지속적으로 일할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할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다! 사단의 거짓말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만일 모든 지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고, 모든 목회자들과 주일 학교 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면 교회는 성장할 것이며, 사단의 제자들은 패배할 것이다.

디모데가 성경과 맺은 관계가 이 구절에 요약되어 있다. 그가 어렸을 때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구약 성경을 배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들은 디모데에게 성경의 사실들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확신과 영적 이해력을 주었다. 디모데는 스스로 말씀의 진리를 알았으며,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말씀을 변호해 줄 것을 의지하지 않았다. 말씀이 그에게 믿음을 주었으며(롬 10:17),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이 구원을 가져왔다.

16-17절은 성경의 신적 기원과 성격에 대한 위대한 증거이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 또는 “성경은 세익스피어 영감을 받은 식으로 영감된 책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언급에 동의하지 않는다. 성경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영감된“이란 단어는 “하나님이 숨쉰, 하나님의 숨으로 채워진“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수 있게 하셨다(벧후 1:20-21).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숨이기 때문이다(요 3:1-8/겔 37:1-14). 세익스피어 같은 사람이 높은 자질의 문학적인 영감을 소유하였던 것은 물론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쓴 것은 아니었다. “모든 성경“이란 말은 하나님의 말씀의 각 단어들이 영감받았다는 뜻이다.

성경의 목적은 무엇인가? 물론 구원이 첫째 목적이다(15절).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포함된다. 말씀은 교훈(교리)과 깨우침(책망)과 바로잡음(교정)과 훈련(교육)에 유익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어린이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게 하며, 주님의 일에 성숙한 사람이 되게 한다. “온전케 한다“는 말은 “온전히 준비를 갖추게 한다“는 뜻이다. 결국 성경은 15절의 어린이를 성인으로 만들며, 성도들을 종이 되도록 준비를 갖추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연구 과정을 밟으며 봉사의 방법을 배우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하여 자신을 가장 잘 준비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연구 서적들은 우리에게 방법을 말해준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동기를 주고 우리가 배운 것 대로 생활할 능력을 준다!

성경을 사용하는 것과 서신서들의 순서를 비교해 보면 재미 있다.

-교리-로마서

-책망-고린도선후서-교정-갈라디아서

-의로 교육함-에베소서-골로새서

오늘날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가상 필요로 되는 것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만일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사단의 속이는 자들이 이들을 넘겨 받을 것이며, 수 백만의 사람들이 태만함으로 인하여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다."

 

▣ 바울의 마지막 말-디모데후서 4장

 

본 장은 바울의 영감받은 펜에서 나오는 마지막 멧세지이다. 이 말씀을 받아 쓴 후 얼마 안 되어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교를 당하였다. 바울이 본 장에서 디모데에게 주님을 향한, 그리고 사랑하는 바울을 향한 충성을 강렬하게 개인적으로 호소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본 장에는 네 개의 교훈 또는 권면이 들어 있다.

 

1. 말씀을 전파하라!(4:1-4)

그는 앞 장에서 디모데가 개인 생활을 통해 말씀 안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권면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는데, 이제는 다른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권면한다. 우리가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받아야 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고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너무도 중차대한 일이어서 디모데에게 말씀을 계속 전파하라는 한 가지 의무(“군사적인 명령“)를 부과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의무를 부과함에 있어 그리스도께서 증인이 되어 주실 것을 요청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셔서 그의 사역을 검사하실 것임을 상기시킨다.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은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이해하게 만들며, 사람들의 생활에 적용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말씀을 전하여 그 말씀이 일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하여, 또는 말씀으로부터 전하는 설교자들이 너무도 많다. 위대한 성경 강해자인 캠벨 몰간(G. Campbell Morgan)은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의 첫 사업은 지식을 부여하는 것이며, 다음으로 우리의 목적은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들이 순종하도록 인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는 이런 말도 하였다. “전파란 이론의 선포가 아니며, 의심에 대한 토론도 아니다! 설교란 말씀의 선포이며, 이미 계시되어진 진리의 선포이다.“

“항상 힘쓰라“는 말은 “준비를 하고 있으라 끈기 있으라“는 뜻이며, 이와같은 자세는 편안할 때나 불편할 때나 목회자의 자세가 되어야 한다(2절 / 3:16-17 과 비교). 그러면 설교자의 의무들이 말씀을 주신 목적들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말씀의 사역자는 자신의 말로 증명하고, 책망하고(경고하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한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사람들이 말씀을 원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며, 그 때가 우리에게 해당된다 !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건강한(건전한) 교리를 원하지 않는 대신 그들의 귀를 간지르는 그리스도인들 연기자들이 베푸는 종교적인 향연을 원한다.

우리는 오늘날 교회에서 정서적인 영화들, 화려한 행렬, 발장단을 맞추는 음악, 갖가지 색깔의 불빛 등 “귀족성“을 사랑한다. 성경을 펴는 사람은 거절을 당하고 얄팍한 종교적인 향연을 벌이는 사람은 명성을 얻는다. 4설은 사람들이 진리를 떠나 인간이 만든 우화들을 믿을 때에 근질근질하던 귀가 귀머거리로 될 것을 시사한다."

 

2. 네 직무를 다하라(4:5-8)

바울의 논점은 명확하다. 그는 이제 막 무대를 떠나려 하고 있으므로 누군가 그의 자리를 대신해야만 하였다. 우리 교회의 젊은이들은 미래의 교회인 것을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다. “관제와 같이 내가 부어질 준비가 되었고 닻을 거두고 돛을 달 때, 장막을 거두어 이동해야 할 때가 가까웠다.“

바울은 영원에 직면하여 아무런 후회가 없었다. 그는 좋은 군사로, 충실한 경기자로, 복음의 보화를 맡은 충성된 청지기였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면류관을 받을 것을 내다본다 ! 바울로 하여금 30년이 넘도록 고난과 고생의 이 길을 가도록 지속시켜 온 것은 무엇일까? 그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을 사모하였다 ! 이것이 그의 삶의 동기였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도다 !“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성도들은 지금 주님을 섬김에 있어 바울처럼 충성스러울 것이다.

영혼을 잃은 채 지옥으로 간 후에는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이 영원한 가장자리에 찾아들게 될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갔다는 것과 열매 없는 일시적인 일들에 우리의 삶을 낭비했음을 발견할 것이다."

 

3. 빨리 로마로 오라 !(4:9-18)

왜 오라는 것일까? 데마가 그를 버렸으며(골 4:14 /몬 24절) 그레스게와 디도는 사역하러 떠났다. 두기고는 에베소서를 가지고 에베소로 파송되었고 의사인 누가만이 그와 함께 있었다. 바울은 주께서 본향으로 데려가시기를 인내로 기다리며 믿음의 아들과 그리스도인의 동료 의식을 나누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21절에서 겨울이 오기 전에 오라고 강권하고 있는데, 이는 배편이 끊어지기 때문이며 너무 오래 기다린다면 바울이 죽게 될 것 같기 때문이었다.우리가 의사인 누가를 처음 만난 것은 사도행전 16장 10절에서인데 그는 “우리가 힘쓰니...“라고 말하고 있다. 누가가 바울의 일행에 가담한 것은 이 지점에서였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임이 분명하다. 누가는 골로새서 4장 14절과 빌레몬서 24절에서 데마와 함께 언급되고 있는데, 그 대조점이 분명하다. 누가가 그리스도와 바울에게 충성스러웠던 반면 데마는 불충성하였다.

마가 요한은 사도행전 15장 37절 이하에서 바울에게 거절을 당하였으나 이제 영접되었다. 마가는 바나바와의 사역에서 자신을 입증하였으며, 바울은 기꺼이 잊기를 원하였는데 이러한 자세는 위대한 사람의 표지이기도 하다. 4장 11절에서 “유익하다“는 단어는 2장 21절에서 “쓰심에 합당하다“는 것과 똑같은 단어이다. 마가는 주인이 사용하시기에 “합당함“을 스스로 증명했던 것이다.

바울은 그가 드로아에 남겨둔 외투를 요청하였다. 겨울이 오고 있으며 로마감옥에서 그것이 필요하였다. “책“이란 아마도 그가 쓴 것일 가능성이 있으며, 가죽 종이에 쓴 것이란 구약 성경의 사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체포되어 급히 로마로 압송되는 바람에 뒤에 남겨 둔 것인 듯하다.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에 바울은 그의 시간을 말씀을 연구하는 데 보냈을 것이다. 따라야 할 좋은 본보기이다!

바울은 그의 말에 저항하였던(3:8) 알렉산더를 디모데에게 경계시킨다(딤전 1:20/행 19:33). 바울의 첫번째 변호(대답)에서는 아무도 그의 편에 서지 않았으나 주님은 여전히 그와 함께 계셨다. 따라서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 일은 언제나 어려운 시기에 처하여서 그에게 격려가 되었다(행 18:7-11/행 23:11/행 27:19-25)."

 

4. 내 친구들에게 문안하라!(4:19-22)

죽음이 확실해졌으나 바울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랐을 때와 참으로 비슷하다 ! 바울은 디도서 1장 8절에 주어진 “선한 사람들을 사랑하며“라는 목회자의 필수 조건을 성취하였다. 우리는 전에 브리스길라(브리스가)와 아굴라를 만나본 일이 있다(행 18:2/행 18:18 참조).

에라스도는 사도행전 19장 22절에 나오는 인물이며, 드로비모는 사도행전 20장 4절과 21장 29절에서 언급된다. 바울이 드로비모를 고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특별한 이적의 은사들이 무대에서 사라졌음을 시사한다. 이 경우는 모든 성도들이 치유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며, 또한 치유의 은사가 없다고 하여 반드시 영성이 결여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 셈이다.

“은혜가 너희에게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바울은 말하며 신약성경을 쓰는 그의역할을 종결짓는다. “은혜“가 그의 사역에서 핵심 단어였듯이 또한 우리의 생활에서도 핵심 단어가 될 것이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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