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書槪論/[신약성경개론] 개관

[스크랩] 데살로니가전서 - 개론

好學 2011. 2. 1. 23:27

 

데살로니가전서 - 개론

 

 

▣ 데살로니가전서 개요

1. 개인적인 내용:“우리가... 를 기억하며 감사를 드린다“/ 1-3장

교회가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기억함(이상적인 교회)/1장

(1)선택된 무리 /1장 1-5절

(2)모범적인 무리 /1장 6-7절

(3)열정적인 무리 /1장 8절

(4)기대하는 무리 /1장 9-10절

교회가 어떻게 양육되었는가를 기억함(이상적인 목회자)/2장

(1)충성된 청지기 /2장 1-6절

(2)유순한 유모(어머니) /2장 7-8절

(3)염려해 주는 아버지 /2장 9-16절

(4)사랑하는 형제 /2장 17-20절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는가를 기억함(이상적인 양육)/3장

(1)말씀을 통하여 /3장 1-5절

(2)기도를 통하여 /3장 6-13절

2. 실제적인 내용:“우리가 너희에게...를 권면한다“/4-6장

거룩하게 행하라(가정) /4장 1-8절

사랑으로 행하라(교회) /4장 9-10절

정직하게 행하라(일) /4장 11-12절

소망을 갖고 행하라(죽음) /4장 13-18절

빛 가운데 행하라 /5장 1-11절

감사하며 행하라 /5장 12-13절

순종하며 행하라 /5장 14-28절각 장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언질로 끝맺고 있다. 그리고 재림을 구원(1:9-10), 봉사(2:19-20), 안정성(3:13), 슬픔(4:18), 성화(5:23)와 연관시키고 있다."

 

▣ 데살로니가전서 서론

 

▣ 도시:오늘날의 지도에서 근대 도시인 살로니카를 찾을 수 있는데, 이 도시가 고대의 데살로니가이다. 본래는 델마였으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300년 전에 마게돈의 왕 카산더가 알렉산더 대왕의 누이를 존중하는 뜻에서 다시 이름지웠다. 이 도시는 온천 지역으로, 자유 도시였으며 자치 정부를 가지고 있었고, 마게도냐의 수도였다. 데살로니가는 로마의 대로로서 중요한 에그나티아 가도상에 자리잡고 있었다.

 

▣ 교회:사도행전 17장 1-15절에 이 교회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바울, 실라, 디모데는 빌립보를 떠나 압비볼리까지 33마일(약 53km)거리를, 그리고 아볼로니아로 28마일을 더 여행하였다. 그런데 이 두 도시에서는 복음을 전하지 않았음에 유의하는 일은 흥미롭다. 다음으로 이들은 40마일을 여행하여 데살로니가로 갔는데, 바울은 이곳의 회당에서 약 3주 동안 사역을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것을 보았다.

회당에는 이방인 개종자(“헌신한 헬라인“)가 많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행 17:4), 약간의 유대인들과 함께 이 개종자들이 열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성공이 엄격한 유대인들을 격분시켰을 것은 물론이다. 이들은 폭도들 같은 무질서한 상황을 연출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당황하게 하였으며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였다. 그러자, 신자들은 바울과 그의 일행을 위해서는 이들이 떠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였고, 이들은 이 의견에 따라 먼저 베뢰아로 갔다.

바울은 베뢰아에 이르러 조력자들을 거기 남겨 두고는 혼자서 아덴으로 갔다. 디모데가 아덴에서 바울과 만났을 때, 사도는 그를 즉시로 데살로니가에 다시 보내어 새로운 교회를 격려하게 하였다(살전 3:1-3). 이 사람들은 마침내 고린도에서 합류하였으며(행 18:5), 디모데는 이 어린 교회의 상태를 보고하였다. 바울은 50년 경 고린도에 있을 때에 데살로니가전서를 썼고, 데살로니가후서는 몇 개월 후에 기록하였다.

 

▣ 서신의 목적:데살로니가전서는 그 배후에 몇 가지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일들을 확신시키며 격려하기 위함.

-바울과 그의 사역에 대한 거짓 고발들에 답변하기 위함(2:1-12).

-죽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여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

-이교의 부도덕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인들을 경고하기 위함(4:4-).

-성도들에게 영적 지도자를 존중하고 따르도록 상기시키기 위함(5:12-13).

-그리스도가 곧 오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일하기를 포기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교회원들을 경고하기 위함(2:9).데살로니가후서는 몇 개월 후에 기록되었다. 교회에 대한 박해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1:4-5) 사람들에게는 격려가 필요했다. 교회 내의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은 일터로 돌아가지 않았고(3:6-12), 일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사람들이 주의 날(환란 시기)에 대하여 혼돈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었으며, 그날이 이미 임하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교회는 바울에게서 왔음을 주장하며 주의 날(살후 2:22 -교회가 휴거된 후에 이 땅에 올 환란의 시대)이 이미 임하였다고 가르치는 가짜 편지를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를 쓴 목적은 이러하다.

-교회가 시련에도 불구하고 참고 견디도록 격려하기 위함.

-주의 날로 이끌어가는 사건들을 설명하기 위함.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일터로 돌려보내기 위함.

3장 17-18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표시“을 붙임으로써 장차 위조 문서를 쉽게 간파할 수 있게 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 대조점:데살로니가전서가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재림하시는 휴거 사건을 다루고 있는 반면에, 데살로니가후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함께 이 땅에 재림하셔서 그의 대적들을 모두 파하시고 그의 왕국을 건설하시는 “나타남“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 언급된 “주의 날“은 교회가 휴거된 후에 이 땅에 임할 환란의 시기를 가리킨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과 5장 9절은 교회가 환란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백히 가르친다."

 

▣ 모범 교회-데살로니가전서 1장

목회자가 교회에 대하여 생각하며 “우리는 언제나 여러분 모두를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회를 사랑하였으며, 이 사람들이 그의 마음에 있어 바울은 그들의 영적인 복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본 장에서 바울은 그 사악한 도시에 어떠한 교회를 남겨 두었는지를 말해 준다. 이 교회의 특징들을 살펴볼 때 우리는 자신의 생활을 검토하며 “나는 우리 교회를 주님 안에서 모범된 교회로 만드는 일에 협력하고 있는가?“라고 물어보게 된다.

 

1. 이들은 선택된 사람들이었다(1:1-5)

“교회“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인데, 이는 “불러냄을 받은 무리“라는 뜻이다. 교회는 사회적인 조직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사람들로 구성된 영적인 조직체이며(벧전 2:9), 이 부르심은 순전히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엡 1:3-). 비록 우리가, 육체적으로는 세상 안에 있지만 속한 것은 아니다(요 15:19). 이 성도들은 데살로니가에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14절에서 이러한 부르심의 이적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바울과 실라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데살로니가로 가게 하셨다. 이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믿어 구원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이들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통하여 그 안에서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벧전 1:1-4 참조)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결정에 대한 비밀은 천국의 이편에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성경이 이 두 가지를 진리로 가르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어느날 스펄젼은 “당신은 이 두 가지 진리를 어떻게 부합시킵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나는 친구들을 반드시 화해시켜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택과 결정이라는 이 두 가지 진리는 상호 모순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다. 성부 하나님이 관계된 한에 있어서 우리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우리를 선택하셨을 때 구원을 받았다. 성령이 관계될 때는 우리가 그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을 때 구원을 받은 것이다. 성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구원을 받았다. 구원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진리이며 모든 것이 꼭 필요하다.

바울은 이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것은 그들의 생활에서 나타난 증거들로 인하여 알았다.

믿음으로 행함-사람이 정직하게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의 믿음은 그의 행위로 나타날 것이다. 행위가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행위로 인도되지 않는 믿음은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변화된 생활을 낳게 마련이다(약 2:14-26 참조).

사랑의 수고-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이기적인 삶을 산다(엡 2:1-2). 그러나, 참된 신자는 사랑으로 인하여 기꺼이 수고한다. 그는 삶에 대한 새로운 동기를 가진다. 곧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히 10:24-25/롬 8:35-39 참조).

소망으로 인한 인내-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없다.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을 알기 때문에 견디며 시련의 때에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구세주께서 그를 구원하려고 오고 계심을 알기 때문이다(벧전 1:1-9/벧전 4:12-16).

9-10절은 구원의 세 가지 증거들을 말하는 것으로 지적되어 왔다. 즉, 우상에게서 하나님께로 돌아선 믿음의 행위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여 섬기는 사랑의 수고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는 소망으로 인한 인내인 것이다.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구원의 참된 증거들이다(골 1:4-5/롬 5:1-4)."

 

2. 이들은 모범적인 사람들이었다(1:6-7)

“청중“이 “추종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기쁘게 받아 들여 믿었으며, 그들의 생활로 이것을 받아 들이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였다! 말씀은 믿음을 주며(롬 10:17) 언제나 기쁨을 가져온다(행 8:8/행 8:39/렘 15:16).

믿음을 가진 후에 이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따르며 지교회의 친교에 참여하였고,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다. 이들은 바울의 추종자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었다(2:14). 왜냐하면 신약에서는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지교회의 교제에서 떨어져 지내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의 간증은 전 지역에 전해졌으며, 이들의 모범적인 생활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다."

 

3. 이들은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다(1:8)

이 사람들은 구원받은 지가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았고,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처럼 교훈을 많이 받은 것도 아니었으나 그리스도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는 열정적이었다. 이들은 그들의 행실로 증거하였으며(“본“, 7절) 말로도 전하였다(8절).

“퍼진다“라는 단어는 나팔을 불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성도들은 그들을 본향으로 부를 나팔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동안(4:16) 잃어버린 그들의 친구들에게 크고 명확하게 “복음을 불어 대고“ 있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불어 대는 대신 우리 자신의 나팔을 불어 대는 때가 너무도 많다. 우리는 받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만 한다."

 

4. 이들은 기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1:9-10)

그리스도의 재림이 본 서의 근본적인 주제이다. 각 장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그리스도인의 근본적인 진리에 연관시킨다(개요 참조). 본 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구원받은 자들의 복된 소망임을 본다. 잃어버린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우상을 숭배하며 섬기고 있는 반면(오늘날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우상들을 지니고 있는가!) 구원받은 사람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산 소망 가운데서 즐거워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어떤 “신비주의자들“처럼 흰 종이를 휘감고 산에 혼자 앉아서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오실 때 우리는 일을 하고 있다(마 24:44-51 참조). 5장 1-11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깨어 경계하라고 주의를 준다. 세상 사람들처럼 잠을 자서는 안 되며 술취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복된 소망은 우리의 신조에 있는 단순한 교리에 불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생활에서 하나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그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셨다. 사도행전 17장 22-34절을 읽고 바울의 논점을 알아보자. 만일 그리스도가 죽어서 그의 몸이 어떤 유대인의 무덤에서 분해되었다면 다시 오실 수가 없다! 산 소망과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분리시킬 수는 없다(벧전 1:1-5).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거절한 세계에 보내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환란의 때에 관하여 교훈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가 그 환란에 참여하지 않을 것임을 주의깊게 지적하고 있다. 10절에 나오는 “구원한다“(건지다)는 동사는 현재 시제로 되어 있어서 “우리를 구원하는 분“ 또는 제목의 형식으로 “...하시는 구원자 예수“가 된다. 교회는 환란의 시기를 통과하지 않을 것이다(1:10/5:1-9/살후 1-2 장 참조).

하나님의 일정표에 있는 그 다음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재림하시는 일이며, 이 때 교회가 휴거되어 그를 만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이 땅 위에 환란의 7년이 임하게 될 것이다. 사악함의 잔이 넘쳐 흐를 때에 그리스도와 교회는 이 땅에 다시 돌아와 사단과 그의 군대들을 쳐부술 것이며,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을 열게 될 것이다(계 19:11-20:5)."

 

▣ 모범된 종-데살로니가전서 2장

1장은 모범적인 교회를 설명하였고, 2장은 이상적인 목회자 또는 그리스도인 종을 묘사한다. 바울은 복음이 어떻게 데살로니가에 오게 되었는지를 말해 주었는데 이제는 그가 어떻게 신자들에게 사역했는지를 말해 준다. 이것은 바울의 “양육 프로그램의 요약“이라 할 수 있으며, 그의 회심자들이 주님께 진실하게 머물러 있었던 이유와 그의 교회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바울은 이상적인 일꾼의 네 가지 모습을 전해 준다.

 

1. 충성된 청지기(2:1-6)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굉장한 특권인가 !(2:4) 우리는 청지기 직분이라고 하면 흔히 물질적인 면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우리 모든 신자는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의 청지기인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바울에게 멧세지를 주셨으며(딤전 1:11) 바울은 이것을 차례로 디모데에게 위탁하였고(딤전 6:20), 디모데는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충성된 자들에게 이것을 맡기라는 부탁을 받았다(딤후 2:2). 청지기의 주된 책임은 충성되어야 하는 것이다(고전 4:1-2). 청지기 직분에 대한 근저에는 시험을 받게 될 것과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보상을 받게 된다는 뜻이 들어 있다.

자신의 청지기 직분에 충성되기 위해서 신자는 고난을 기꺼이 당해야만 한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수치스러운 취급을 받았었다(행 16:19-24). 따라서 이들은 온갖 종류의 핑계를 대고 휴가를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자신들에게 맡기셨음과 다른 도시들에도 이 멧세지를 가져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두려워하기는 커녕 좋은 소식을 전하는 데 담대하였다.

충성된 청지기는 인간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살아야만 한다(4절). 친구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멧세지를 타협하게 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신성한 방식에 따르지 않는 청지기의 멧세지나 사역을 축복하실 수가 없다. 3절에서 바울은 그의 멧세지가 속이는 것이거나 틀린 것이 아니며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언급한다. 그의 동기는 순전하였으며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의 방법은 정직하였고 간사하지 않았다(“먹이를 잡으려고 미끼로 유혹하지 않았다“).

5절은 바울이 아첨에 호소하지 않았음을 언급하는데, 아첨이란 개인적인 유익을 얻기 위하여 불성실하게 칭찬하는 것이다. 바울은 언제나 충성된 일꾼들을 높였으며 거기에 합당한 칭찬을 하였으되, 회심자나 추종자들을 얻기 위하여 아첨하는데에 굴복하지는 않았다(갈 1:10-/요 8:29/행 4:18-21)."

 

2. 유순한 어머니(2:7-8)

7절에서 남성인 바울을 “유모“로 비교하는 것이 거리가 멀게 느껴지면 복음을 통하여 고린도 성도들을 낳은 영적인 부모라고 말해 주는 고린도전서 4장 14-15절을 생각해 보자. 2장 9-13절에서 바울은 아버지의 이미지를 사용하는데, 여기서의 주된 사상은 사랑으로 돌본다는 개념이다.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음식과 부드러움과 돌봄이 필요하며,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자기의 자녀들에게 주는 것과 꼭같다.

새로 태어난 젖먹이들은 말씀의 젖(벧전 2:2)이 필요하며, 다음으로 젖을 떼고나면 고기(고전 3:1-4/히 5:11-14)와 떡(마 4:4 /출 16장의 만나), 그리고 꿀(시 119:103)을 먹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먹이는 방법은 무엇을 먹이는가와 거의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연장자인 그리스도인들이 어린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과 인내의 태도로 먹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3. 염려해 주는 아버지(2:9-16)

바울의 “아버지“로서의 사역을 살펴보자. 그는 수고하고, 설교하였으며(9절), 점잖게 행동하였고(10절), 권고하였으며(11절), 고난을 당하였다(14절). 아버지는 자기의 가족을 지켜야 하며 그들의 복지를 위하여 희생해야 한다. 젖먹이들은 대단한 모방가이므로 “영적 아버지들“인 우리가 모범적인 삶을 사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바울은 사도로서의 권리를 주장하여 교회에서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2:6). 그러나, 그는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희생적으로 손수 수고하였다.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그들의 식비나 숙박비를 지불하게 하지 않는다! 바울은 또한 하나님을 향해 거룩하고 인간을 향해 의로우며 자신에 대해 비난할 것 없는 삶을 사는 데에 유의하였다.

아버지들의 의무 중의 하나는 자녀들을 권고하고 교육하는 것이며,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이 일을 하였다. 교회를 위한 공정인 사역이 있듯이 또한 개인적인 가르침(“너희 각자“)도 있었다. 영적 지도자들은 공적인 사역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영적인 자녀들에게는 개인적인 격려와 상담이 또한 필요하다.

바울이 아버지로서 행한 삼중의 사역은 “권고하는 일“ 또는 간청하는 일과“위로하는 일“ 또는 격려하는 일, 그리고 “책임지우는 일“ 또는 증거하며 입증하는 일이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주님 안에서 그가 겪은 경험에 입각하여 그들을 격려하였다.

사도는 그의 영적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을 기뻐하였다. 그들이 말씀을 받고 믿었다면 하나님의 영이 그들의 생활 가운데서 역사하실 것임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 빌립보서 2장 12-13절, 에베소서 3장 20-21절,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을 함께 묶어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과 성령과 기도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의 영적인 가족에게 그들을 박해하는 원수들을 경고하였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추종자들이 되어 교회에 소속되면(1:6/2:14), 이들은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에게서 박해를 받게 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4. 사랑하는 형제(2:17-20)

바울은 정말로 이들을 사랑하여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또한 자신도 이 가족의 일원이며 이들 중의 한 사람으로 여긴다. 17절에서 그는 마치 집 떠난 어린이 같이 잠깐이나마 고아가 되었었다고 말하였다.

바울은 그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고, 그들을 다시 보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결국 인간의 영적인 생활에 대한 시험은 그가 교회에 있을 때나 형제들과 함께 있을 때가 아니라, 교회를 떠나 있을 때 치르게 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집을 떠나 “휴가를 보내는“ 종류의 교회원은 아니었다.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서신의 각 장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언질로 끝을 맺고 있다. 1장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구원과 연관되고, 여기 2장에서는 봉사와 연관된다. 바울이 이곳의 성도들에게 이처럼 충성스럽고 사랑스럽게 목회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빛가운데서 이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 앞에서 이들을 대하고 즐거워할 영광스러운 날을 내다보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 앞에 놓여진 기쁨을 위하여“(히 12:2) 십자가를 견디셨는데, 이 기쁨은 이 교회를 그의 아버지께 드리는 기쁨인 것이 분명하다(유 24절). 바울도 이와 똑같은 기쁨을 위하여 온갖 종류의 고난을 견디었다. 빈손으로, 기뻐할 영혼없이, 그리고 그리스도께 선물이 없이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 모범된 형제-데살로니가전서 3장

본 장의 핵심 단어는 “세운다“는 말이다(2, 3, 8, 13절).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시련과 고난의 때를 통과하며(3, 5절),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세워지지 않는 한(1장) 마귀에 의해 움직여지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1장) 양육되는 것에서(2장) 만족하지 않고, 믿음 안에서 세워지며 믿음안에서 다닐 수 있게 되는 것을 보고 싶어하였다(4장).

결국 어린이는 걸을 수 있기 전에 서는 법을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바울이 이 신자들을 믿음 안에 세우는 데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는가?

 

1. 그들에게 사람을 보냈다(3:1-2)

젊은 디모데는 바울에게 얼마나 큰 자산이었던가 ! 바울과 같은 입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디모데와 같은 조력자들이 있어야 하며, 나이 많은 사람과 젊은이가 함께 일해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며 어떻게 훈련시켜야 하는지 알고 있었고, 디모데는 그의 가장 훌륭한 제자 중의 하나였다.

이 젊은이는 자신의 지교회에서 여러 해 동안 자신을 입증해 보였으며(행 16:1-3), 결국 바울은 그를 조력자로 참가시켰다. 젊은 디모데는(아마도 십대였을 것이다) 가르치는 일이나 설교하는 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여행과 생활의 책무를 맡아 그를 조력하는 바울의 “시종“으로 출발하였다. 사실상 디모데는 마가 요한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인데, 마가는 일들이 거칠어지자 돌아갔던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를 평가한 내용은 빌립보서 2장 19-24절에서와 디모데에게 보낸 두 편지 전체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교회를 강하게 만드시는 데에 사람을 사용하신다(엡 4:1-/행 14:21-23/행 15:32/행 15:41 참조). 바울은 기꺼이 아덴에 혼자 남자 있기를 원하였으며 디모데로 하여금 데살로니가로 돌아가 신자들을 믿음 안에서 격려하게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소명을 받았거나 안받았거나 상관없이 다른 신자들, 특히 새로운 신자들이 믿음 안에서 세워지도록 해야 할 그 책임이 있다. 만일 모든 성도들이 새로운 그리스도인을 “양자로 맞아“ 그를 격려하고 가르치며 그와 교제를 나눈다면 영적인 사상자는 거의 없게 될 것이다."

 

2. 그들에게 편지를 썼다(3:3-4)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세워진다(살후 2:15-17/롬 16:25-27 /벧후 1:12). 바울이 그가 전에 가르쳤던 말씀을 어떻게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그는 고난이 닥칠 것이라고 경고를 했었지만 이들은 그가 가르친 것을 잊어 버린 듯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것은 없다. 성경에 대해 무지한 그리스도인은 교리의 바람이 불 때마다 희생되며 결코 주님 안에서 세워질 수 없다(엡 4:11-16). 디모데는 바울이 그들에게 가르친 말씀을 생각나게 했으며, 이 일이 그들을 격려하여 일으켜 세웠다.

사도행전 17장 1-4절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어떻게 말씀의 사역을 하였는지 설명하는 것을 알아보자.

-설득하였다-논쟁이나 토론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말씀을 열었다-그 뜻을 설명했다는 의미이다(눅 24:32/눅 24:45)

-확실한 진리들을 강력히 주장하였다-증거를 대거나, 모두 알 수 있도록 펼쳐놓았다.

-전파하였다-복음의 선포를 뜻한다.

목회자와 그리스도인 일꾼들은 말씀에 대해 균형있게 사역하여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말씀을 설교하거나 선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가르치고 입증하고 설명하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 “강력히 주장한다“는 말은 “식탁을 배설한다“는 뜻도 되는데, 영적인 일꾼은 이처럼 “식탁에 음식을 차려 놓아서“ 젊거나 늙었거나 모든 성도의 손이 닿게 하여 식탁에 참여하게 해야 한다."

 

3.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3:5-10)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하는 이중의 사역이 교회를 세운다.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이 전부라면 사람들은 빛을 소유하나 능력이 없을 것이며, 기도만 있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없다면 감정적인 광신자들의 단체가 되고 말 것이다.

자기의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고하고, 그리고 나서 자기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목회자와 주일학교 교사, 선교사, 그리고 그리스도인 일꾼들은 균형잡힌 확실한 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와 같이 말씀과 기도를 동반하는 것이었다(눅 22:31-32). 사무엘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사역하였으며(삼상 12:23),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그리고 바울 자신도 이렇게 하였다(행 6:4/행 20:32).바울의 관심은 그들의 안전이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에 있다는 점에 유의하자. 사단은 우리 믿음의 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하여 의심을 일으키도록 할 수만 있다면 사단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모든 축복을 훔쳐갈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이 성숙한(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기를 원하였다(10절). 믿음은 내부에 들어와 좌정하면 결코 변경되지 않는 예금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겨자씨와 같아서 작아 보이나, 그 안에 생명이 있어 성장할 수가 있는 것이다. 본 장의 종결 부분을 읽어 보면, 바울은 그들이 풍성한 사랑을 가지며 소망 안에 세워지고 믿음 안에서 성장하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 것이다 !

지속적인 기도 생활과 대체할 만한 것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위하여, 그리고 잃어버린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기도와 말씀이 잘 배합된 사역이 있음으로 해서 사단은 패배하게 될 것이며, 교회는 든든히 세워질 것이다.

 

4. 주께서 속히 돌아오실 것을 상기시켰다(3:11-13)

앞서도 언급했듯이 데살로니가전, 후서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신자를 이보다 더 빨리, 그리고 더 훌륭하게 세울 수 있는 진리는 없다. 시련과 환란의 한복판에서 이들은 스스로 확신을 가지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약속으로 스스로를 격려할 수가 있었다. 시련이 그들의 앞길에 다가올 때에(이 이교도의 도시들에서는 일상적으로 시험이 닥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날에 오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가 있었다.

만일 여러 가지 수고와 전도하는 일로 지쳐 있다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함으로써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을 수가 있었다. 성경에 있는 그 어떤 진리라도 신자의 마음과 정신과 뜻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진리보다 더 큰 효과를 주지는 못한다.

누가복음 12장 42-48절을 읽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잊은 종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보자. 이 사람은 공개적으로 무슨 말을 한 것은 아니었으며 다만 그의 마음에 “내 주인이 오시는 것이 늦어지는구나 !“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원하고 있지 않았다. 이 종이 타락하여 다른 일꾼들과 함께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겠는가?

바울은 이들의 마음이 책망할 것이 없도록 일으켜 세워지는 일에 열심이었다(5:23). 그리스도인은 흠이 없고 순전하도록 되어 있다(빌 2:15). 이 말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완전함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칠판에 자기의 이름을 쓰는 작은 아이가 실수없이 쓸 수 없다. 왜냐하면 아직 그는 어린 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최선을 다한다면 흠없이(나무랄데 없이) 쓸 수는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빛에 따라 살아가며 주님 안에서 성장하기를 노력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흠 없는 생활을 살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매일 기대한다는 것은 신자가 그의 생활을 깨끗하게 유지하는 일에 도움을 줄 것이다(요일 2:28-3:3)."

 

▣ 신자의 소망-데살로니가전서 4장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신자들을 위하여 실제적인 교훈들을 다루고 있는 후반부로 이동해 간다. 본 장의 핵심 단어는 “행하라“(walk-4:1, 12)이며,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그들에게 간청한다(4:1/4:10/4:12/4:14). 그리스도인의 행실이 걷는 것과 비교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생명이 있어야 한다. 죽은 죄인은 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장을 필요로 한다. 젖먹이는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가 필요하다. 묶여 있는 사람은 걸어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빛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어두움 속을 걷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숨겨질 수가 없으며 모든 사람에게 목격된다.

하나의 목표를 향한 진보를 의미한다.

바울은 신자가 지녀야만 하는 행실의 종류를 묘사한다.

 

1. 거룩하게 행하라(4:1-8)

여기서 바울은 결혼과 가정에 대해 다룬다. 이방 도시들에서의 결혼 서약은 순전함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으므로,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가정 생활에 있어서 부도덕은 큰 위험이었다. 물론 사랑과 순전이 보존된 이방 가정들도 많이 있었지만, 복음이 이르기 전의 이 민족들 중에 퍼져 있는 일반적인 분위기는 탐욕과 이기심으로 팽배해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첫번째 책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할 그리스도인 가정을 세우는 것이었으므로, 바울은 이 점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부도덕은 근본적으로는 이기심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목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권면한다. 바울은 본을 세우고(2:4) 이제는 그들이 따라오기를 기대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대로 그들을 명령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거룩하고 순전한 삶을 살게 하였다.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이들이 성결케 되는 것이었다. 성결하다는단어의 뜻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따로 떨어져 있다“는 뜻이다. 당신은 워싱톤시에 있는 제퍼슨 호텔을 빌릴 수는 있으나 백악관을 빌릴 수는 없다. 백악관은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따로 구별된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는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어 있다. 그는 성도, 곧 따로 구별된 자이다. 그는 매일 더욱 더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결국은 그의 몸, 혼과 영, 이 모두를 완전히 주님께 넘겨드리게 된다. 몸과 영과 혼을 더럽히는 것 가운데 성적인 죄 이상의 것은 없다(고후 7:11/고전 6:13-20). 그리스도인이 결혼 서약을 위반할 때 그는 하나님께, 자신에게, 그리고 형제 그리스도인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진리 가운데서 그를 처리하실 것이다.

4절에 나오는 “그릇“은 신자의 몸을 가리키는 말일 수 있고, 또는 아내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벧전 3:7). 어떤 경우든지, 이 그릇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값주고 산 바되었으며 성령으로 정결케 되었으므로(고전 6:9-1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져야만 한다. 성적인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는 것은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며 징계를 자초하는 것이다. 다윗, 삼손, 유다, 그리고 이 외에도 이러한 죄에 빠졌던 많은 성경 인물들을 기억해 보라."

 

2. 사랑으로 행하라(4:9-10)

사랑에 대하여는 그들에게 쓸 필요가 없었다. 그가 사랑에 대해 가르쳤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성령을 통하여 그들을 가르치셨다(롬 5:5). 신자에게 있어서 사랑은 날 때부터 찍혀 있는 점과 같다(요일 3:14/벧전 1:22/요일 4:9-12). 이교도들은 교회의 교제를 보고는 “보라, 이들이 정말로 서로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외쳤다.

그러나, 우리의 교제 안에 있는 사람들만을 사랑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처럼 우리는 모든 형제들과, 그리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더욱 더 사랑해야 한다(3:12)."

 

3. 정직하게 행하라(4:11-12)

이제 바울은 직장을 가진 신자와, 세상에서 구원받지 않는 사람들과 접촉해야 하는 신자들의 문제를 다룬다. 이 교회에 있었던 문제들 중의 하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오해하여 직장을 그만 두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식객 노릇을 하면서 폐를 끼치며 살았던 점이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5-15절에 이들에 대한 바울의 권고가 나와 있다. “종용하기를 힘쓰라“는 말을 직역하면 “종용하게 되는 것을 갈망하라“는 뜻이다. 즉, 세상에 속한 활동들의 한복판에서 좌절하며 근심하지 말라는 뜻이다. “자기 일을 하라.“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지내라.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의 일에 참견자가 된다는 것은 대단히 나쁜 일이다!

일상의 일에 열심을 다하여 좋은 간증을 유지해 가는 데에 조심하는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골 3:22-25/골 4:5 참조). 만일 사람이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아야 한다(살후 3:10). 주님의 돈을 가져다가 “빈둥거리는 그리스도인“을 지원하여 부주의한 생활을 살도록 격려하는 식의 비성경적인 “인정“을 베풀지 말도록 하자."

 

4. 소망을 갖고 행하라(4:13-18)

본 장은 교회의 휴거에 관한 고전적인 부분이다. 성도들의 생활에 슬픔이 찾아들었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뒤에 남게 되면 어쩌나 하고 의아해하였다. 바울은 그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여 공중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임을 확신시킨다.

교회의 휴거(공중에서 그리스도와 만남)를 교회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 땅에 오게 되는 나타남의 사건(살후 1:7-12)과 혼동하지 말자. 휴거는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돌아와 그의 적들을 패배시킬 “나타남의 사건“은 휴거가 있은 지 7년 후에 생기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소망이 없는 세상 사람들처럼 슬퍼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리스도는 우리가 골짜기를 통과할 때에 눈물을 흘리며 외로움을 느끼게 될 것을 예측하시나(요 11:33-36), 슬픔의 와중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가진 바 산 소망을 간증해야만 한다(벧전 1:3). 슬픔의 때를 당하여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위로를 알아보자.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잠자는 것이다-14절에서 말하는 “예수 안에서 잠든다“는 것은 직역하면 “예수를 통하여 잠이 들다!“로 해석된다. 신자가 어떻게 죽었거나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잠들게 하시는 데에 계신다. 물론 영혼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해 가지만(빌 1:20-24/고후 5:6-8) 잠든 것은 영혼이 아니라 육신이다. “묘지“란 단어는 “잠자는 장소“라는 뜻으로서, 이곳은 부활을 기다리며 몸이 잠자는 곳이다.

하늘에서 다시 결합하게 된다-죽음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 우리는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살아 있는 성도들은 죽은 자들을 앞서지(이끌지) 못할 것이다. 모두들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하여 함께 일으켜 올림을 받을 것이다.

영원한 축복의 위로-“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이것은 새로운 몸을 의미할 것이다(요일 3:1-3/빌 3:20-21). 우리가 무덤에 두게 될 몸은 추수를 기다리는 씨앗과 같다고 바울은 말한다(고전 15:35-58). 물론 몸은 흙으로 돌아가며 그 흙은 자연의 일부가 된다. 성경에는 신자의 몸의 각 부분을 다시 일으킨다고 가르치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부활한 몸이 묻었던 몸과 동일한 것임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심겨진(땅 속에서 죽은) 한 씨에서 나온 씨들이 그 심겨졌던 씨와 동일하며 연속성이 있는 것과 같이, 부활한 몸은 장사지낸 몸과 동일시되며 연속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끌어 올려“라는 말은 뜻하는 바가 많다.

빠르게 채가다-경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5:1-10).

군대가 호위하다-사단이 우리가 하늘로 휴거되는 것을 방해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다-신랑이 신부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

새로운 장소로 옮기는 것이다.

위험에서 구하는 것이다-교회가 환란을 통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5:9/1:10)."

 

▣ 모범된 행실-데살로니가전서 5장

 

마지막 장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빛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교훈하는 권고의 연속이다. 많은 권고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유아 상태의 교회에 몇 가지 뚜렷한 문제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부주의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그들의 교회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있지 않다. 공적인 예배를 남용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성도들 간에는 사랑과 조화가 필요하였다.

이 권고들은 지교회가 어떻게 조화와 순전함 가운데 살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지를 지적한다.

 

1. 경계하라(5:1-11)

여기에 그리스도인들과 잃어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일련의 대조점들이 나와 있다.

빛과 어두움-세상이라는 면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재림은 갑작스러웁고 기대하지 않은 때에 한밤중의 도적같이 임하게 될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가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다. 불신자들은 어두움 가운데 있어 이해력이 어두우며(엡 4:18/엡 5:8), 어두움을 사랑한다(요 3:19-21/엡 5:11). 그는 어두움의 권세에 의해 조절당하며(엡 6:12) 영원한 어두움을 향하고 있다(마 8:12).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빛과 연합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이다(요 8:12). 그리스도인은 한때 어두움에 속했었을지라도 빛의 자녀이다(엡 5:8-14). 이러한 변화의 역사는 고린도후서 4장, 골로새서 1장 13절,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묘사되어 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낮에 속하였으므로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비하여야 한다.

지식과 무지-사단은 사람들을 어두움 가운데 두기를 좋아한다(행 26:18). 유다는 어두움 속에 있었고(요 13:27-30)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러하였다(행 5장). 세상은 그리스도와 성경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이사야 8장 20절에서 세상의 지성적인 지도자들도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어두운 이유를 알아보라. 이들은 나타난 것만을 보고 “그가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에 있는가?“(벧후 3장 참조)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기의 성경을 읽으며 눈을 뜨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일하고 계신 방법을 알고 있으며 무지하지 않다.

기대와 놀라움-구원받지 못한 세상은 거짓된 안정에서 살고 있으며, 마치 1912년 “가라앉을 것 같지 않은 배“였으나 빙산에 부딪혀 침몰해 버린 타이타닉호에 탄 사람들과 같다. 해안 경비대는 타이타닉호에 빙산을 주의시키는 전보를 몇 차례나 보냈으나 무선사는 이 경고를 무시하였으며, 마지막에는 “나를 괴롭히지 마시오! 나는 바쁘단 말이오“라고 전신을 보내왔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시간도 안 되어 그 배는 가라앉고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것을 두 가지로 묘사하였는데, 도둑의 예를 들어 깜짝 놀라게 됨을 나타내었고, 해산하는 여인의 예로 갑작스러움과 고통이 관여됨을 나타내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상 밖으로 데리고 가실 때 “주의 날“ 곧 7년간의 환란과 고난이 시작될 것이다. 이리하여 주의 날은 밤의 도둑처럼 세상에 임할 것이지만 신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근신함과 술취함-그리스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은 깨어 있어 경계를 하며, 세상 사람들처럼 술에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서 “깨어 있다“와 “잠들어 있다“는 말은 4장 13-18절에서와 같이 “살아 있다“와 “죽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경계하다“ 또는 “주의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 깨끗하고 헌신된 삶을 살고 있어야 한다."

 

2. 지도자들에게 존경을 표하라(5:12-13)

교회의 가족은 반드시 영적인 지도력을 소유해야 하며, 이 지도력은 목회자에게 수여된다. 교회는 좋아할 만한 어떤 조직을 성경을 따르는 한도 내에서 세워도 되지만 목회자만이 양떼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대로 인도할 수가 있다. 물론 그는 사람들의 기도와 조언을 필요로 하고 또한 원하는 것이 사실이며, 특히 선택된 지도자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사람들은 목회자의 지도력을 존중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지도자들을 받아들여야하며(엡 4:7-11/벧전 5:1-5) 그들의 지도자들을 존중하고, 이들이 하는 일을 주시하며 지도자들을 사랑해야하고, 지도자를 따라야만 한다(히 13:7-9/히 13:14/히 13:17).

교회가 단합하지 못하는 때는 대개 목회자가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감당하지 않기 때문이라도, 성도들이 그에게 지도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지도력이 명령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 지도자는 모범을 보이고, 댓가를 지불하며, 그리스도인의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고 노력한다. 그러나,명령자는 사랑이 아니라 법을 사용하며, 지도하려고 하지 않고 몰고 가려고 한다. 그의 동기는 이기적이고 교회의 유익을 위하지 않는다.

 

3. 서로를 염두에 두라(5:14-15)

교회 지도력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도들 각 사람이 일을 나눠야하며 동반자 의식이 작용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4장 7-11절은 우리 각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은사를 소유한 청지기인 것과 이 은사를 다른 사람들의 유익과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 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바울은 도움이 필요한 그리스도인의 유형을 몇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규모없는 자들:부주의한 사람들, 성 밖에 있는 사람들-경고를 받아야 한다.

-마음이 약한 자들:겁많고 무기력한 사람들-격려를 받아야만 한다.

-힘이 없는 자들:주님 안에서 성숙지 못한 사람들(롬 14장)-주님 안에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지원해 주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인내와 사랑이어야 하며,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롬 12:17-21).

 

4. 감사하라(5:16-18)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는 말은 평범한 권고같이 들린다. 그러나, 여기에 부사를 첨부하면 참으로 도전이 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주님과 함께 걸으며 그와 지속적인 의사소통을 유지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루 종일 기뻐하고 감사할 여러 가지 이유들을 보게 될 것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계속해서 기도의 말을 중얼거리라는 뜻은 아니다(마 6:7). 참된 기도는 마음의 태도이며 마음의 욕구이다(시 10:17/시 21:2/시 37:4/시 145:19).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안에서 중재하시므로 하루 종일 기도를 하게 된다(롬 8:26-27)."

 

5. 예배 시에 주의하라(5:19-21)

초대교회의 “예언“은 성령의 즉각적인 사역으로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멧세지를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단은 흉내장이이므로 그 멧세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었다(고전 12:10/고전 14:29-33). 감정을 남용하여 “지나치게 열중하거나“ 이와는 반대로 주님의 계시를 거절함으로써 성령을 소멸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6. 일상적인 행동에서 신실하라(5:22-28)

“악의 모양“이란 말은 “악에 속한 모든 형태“라는 뜻이다. 물론 성도는 생활에서 다른 사람들이 오해할 수 있을 만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님에게 자신을 양도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함 가운데 세우시는 일에 신실하시다. 기도, 형제의 사랑,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은 성도를 성결케 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한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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