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정치·경제·사회·문화)

24. 왜 사람들은 공장에 나가야 했을까?

好學 2011. 4. 10. 23:08

24. 왜 사람들은 공장에 나가야 했을까?

 

 

산업혁명 시대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카를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혁명(革命)을 통해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회주의(社會主義)를 주장했다.
 

나탄 로스차일드의 성공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19세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굶주렸고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가난을 대물림했다. 사람들은 대개 노동자로 일했다. 어른들뿐만 아니라 열두 살 이하의 아이들도 방직공장이나 광산에서 일했다. 근무시간은 보통 하루 열두 시간이었고, 열다섯 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도 흔했다.
 
1833년 영국에서 제정된 ‘공장법(工場法)’은 9세 이하 어린이의 노동을 금하고 13세 이하 어린이의 노동시간을 주 48시간 이내로 제한했다. 그러나 이 공장법은 “정상적인 근무시간은 아침 5시 30분에 시작해 저녁 9시 안에 끝내야 한다. 그 시간 안에 열다섯 시간 동안 일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13세 이상 18세 이하의 젊은이들은 하루 열두 시간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일할 수 있다”라고 정함으로써 노동자의 근무시간은 여전히 열다섯 시간이나 되었다.
 
당시 노동자들이 1년간 일한 시간은 옛날에 농부나 수공업자들이 일한 시간보다 훨씬 많았다. 지역에 따라 1년에 100일이 넘던 교회의 경축일도 갈수록 줄어 노동자들은 쉴 새 없이 일해야 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이 받는 보수는 겨우 목숨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그 시절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공장에 나가 일을 해야 했을까? 영국에서는 두 번에 걸친 ‘인클로저 운동’으로 소규모 농사를 짓던 가난한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공장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했다. ‘인클로저 운동’이란 미개간지나 공유지처럼 공동이용이 가능한 땅에 담이나 울타리를 쳐서 다른 사람의 이용을 막고 사유지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16세기에 일어난 제1차 인클로저 운동은 모직물 공업이 발전하면서 방직공장의 양모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시작되었다. 농사를 짓거나 우유를 생산해서 시장에 내다파는 것보다 양을 기르는 편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기 때문에 경작지는 목장으로 바뀌었고 많은 농민들과 농장의 일꾼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산업혁명 이후 일어난 제2차 인클로저 운동은 농업의 대량생산(大量生産)을 위한 것이었다. 두 번의 인클로저 운동을 겪으며 경제적으로 완전히 몰락한 영국의 중소농민들은 도시로 나와 공장노동자가 되었다.
 
이들은 자유로운 시골에서 온 데다 교육수준도 낮아 공장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자본가들은 그런 노동자들을 ‘게을러서 일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몰아치며 더 혹독하게 다루었다.
 
1845년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생활환경>이라는 충격적인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는 이 보고서에 스코틀랜드의 수고 에든버러에서 만난 어느 성직자의 말을 옮겨 놓았다.
 
『나는 이토록 비참한 생활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사람들은 정말 아무것도 없이 살고 있다. 결혼한 부부 두 쌍이 같은 방에서 생활하는 경우도 많았다. 언젠가는 일곱 가정을 방문했는데 침대가 있는 집이 하나도 없었고, 어느 집에는 바닥에 깔 거적도 없었다. 여든 살 노인이 딱딱한 나무판자 위에 누워 잤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옷을 이불 삼아 잤다.』
 
엥겔스는 에든버러의 거리에 대해 이렇게 썼다.
 
『길이 좁아서 창문을 열어 놓으면 건너편에 있는 집 안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건물은 모두 너무 높아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화장실이나 하수구가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아 5만 여명의 쓰레기와 배설물이 한밤중에 아무 데나 마구 버려졌다.』
 
노동자들이 이렇게 형편없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1766~1834)는 노동자에게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만큼의 임금만 주어야 한다는 ‘생존임금(生存賃金) 법칙’을 주장했다. 그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받으면 그 즉시 일을 더 적게 하려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임금이 오르면 일을 하려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액수가 될 때까지 다시 임금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당시 많은 자본가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하지만 맬서스의 이론은 옳지 못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노동자 한 명이 일해서 만들어내는 이익이 빠르게 커진 데 비해 노동자의 수는 그만큼 빨리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영국의 작가 찰스 디킨스(1812~1870)는 1838년에 발표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애서 고아 소년 올리버의 삶을 통하여 초기 산업혁명시대 영국의 어두운 면을 고발했다.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도 슐레지엔에서 일하는 방직공의 불행한 사람을 시로 읊었다.
 
침침한 눈에는 눈물도 마르고
베틀에 앉아 이빨을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짠다. 너의 수의를.
세 겹의 저주를 거기에 짜 넣는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두 번째 저주는 왕에게, 부자들의 왕에게.
우리들의 비참을 덜어 주기는커녕
마지막 한 푼마저 빼앗아 먹고 그는
우리들을 개처럼 쏘아 죽이라 했다.
우리는 짠다. 우리는 짠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노동자들이 직접 나서서 노동환경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802년에는 영국 런던의 한 조선소에서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罷業)을 일으켰다. 이 파업이 아무 소득 없이 끝나자 절망에 빠진 노동자들은 ‘기계파괴(機械破壞) 운동’을 벌였다. 자기들이 받는 고통이 기계 때문이라고 생각한 노동자들은 방직기계를 마구 망가뜨렸다. 이 기계파괴 운동은 영국 경제에 큰 위협이 되어 1813년에는 기계를 부순 사람이 사형당하기도 했다.
 
1818년, 런던에는 최초의 노동자 교육기관이 세워졌다. 노동자들이 교육을 받으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1842년 랭커셔에서 공장주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줄이려 하자 다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우여곡절의 많은 노동운동 끝에 공장자대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생활환경은 차차 개선되었다. 여자와 청소년의 근무시간은 열 시간으로 제한되었으며 1849년에는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또 그동안 영국으로 들어오는 곡물의 수입을 막아 결과적으로 노동자들에게 비싼 빵 값을 치르도록 했던 법이 의회에서 폐지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社會主義者)와 공산주의자(共産主義者)들은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그들은 애덤 스미스 같은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생각에 반대했다. 사회주의자들은 한 사회의 구성원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는 말이 이상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사유재산에 대한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빈곤이 생겨났다고 보았다.
 
사회주의자들이 보기에 공장이나 광산의 주인인 자본가는 노동자의 힘을 빌려 부자가 된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의 약탈(掠奪)이 한쪽에는 부유함의 원천이 되었지만 다른 쪽에는 가난의 원천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유재산을 허용해서는 안 되고 땅과 공장건물은 모두 공동의 소유가 되어야 했다. 그러면 세상에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게 될 것이었다.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사람은 독일 트리어 출신의 젊은 변호사인 카를 마르크스(1818~1883)였다. 마르크스는 많은 사람의 영향을 받았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쓴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생활환경>이라는 보고서와 독일 철학자 헤겔의 철학과 고전경제학은 마르크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가 역사의 법칙에 따라 등장했듯이 머지않아 무너질 것이며 이상적인 사회주의 사회가 건설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 이론은 세상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카를 마르크스는 그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과 함께 공산주의자동맹(共産主義者同盟)을 결성해 1848년 ‘공산당선언(共産黨宣言)’을 발표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경제적(經濟的)인 격차(隔差)가 있는 집단 간의 계급투쟁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고 주장했다. 노예는 주인을 상대로, 시민계급은 귀족을 상대로 싸웠으며 이제는 자본가와 노동자들이 맞서 싸워야 할 때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부르주아’라는 계급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전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고 외치며, ‘프롤레타리아’라는 노동자계급이 혁명을 통해 사유재산재도를 폐지하고 계급 없는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혁명 이후의 사회주의 국가의 모습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가 역사의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므로 미래를 애써 계획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의 이념을 좇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사회주의자들 중에 몇 가지 점에서 마르크스와 생각을 달리 했던 사람들은 ‘민주사회주의자(民主社會主義者)’라고 불리었다. 그들 역시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의 변화를 주장했으나 혁명을 변화의 방법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와 방향을 달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