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정치·경제·사회·문화)

23. 세계 최고의 부자는 누구일까?

好學 2011. 4. 10. 23:07

23. 세계 최고의 부자는 누구일까?

 

 

 

로스차일드 가문(家門)의 신화는 나탄 로스차일드 때에 절정을 이루었다. 그는 남다른 정보망과 뛰어난 투자 감각으로 당대 최고의 부자이자 투자가로 이름 높았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맨체스터에는 매일같이 야망에 찬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행운을 찾아 영국과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온 젊은이들 가운데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나탄 로스차일드가 있었다. 맨체스터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는 영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탄 로스차일드는 영국에서 가장 돈이 많고 영향력이 큰 사람이 되었다.
 
나탄 로스차일드는 프랑크푸르트의 유태인 거리에서 태어났다. 유태인들은 프랑크푸르트의 ‘게토’라는 특별구역에 모여 살았다. 유태인들은 밤이나 국경일에는 집 밖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었고 결혼도 아무 때나 할 수 없었으며 시청에 보호비용 명목으로 돈을 내야 했다.
 
나탄 로스차일드의 아버지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는 하노버의 오펜하이머 은행에서 일했다. 은행에서 일하는 동안 상류층 사람들과 친해진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들인 빌헬름 공을 사귀었다. 유태인 박해가 심했던 프랑크푸르트에서 유태인 상인이 빌헬름 공과 만나 거래를 한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었다. 더욱이 빌헬름 공은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에게 개인적으로 돈 관리까지 맡겼다.
 
빌헬름 공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였다. 그는 군대를 키워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용병으로 빌려 주고 많은 동을 벌었다. 빌헬름 공은 그렇게 모은 돈을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를 통해 형편이 좋지 않은 왕이나 귀족들에게 이자를 받고 빌려 주었다. 당시 영국은 잦은 전쟁으로 늘 돈이 부족했다. 빌헬름 공은 영국의 왕에게 돈을 빌려주는 대신 나라가 지불을 보증하는 국채(國債)를 받았다. 빌헬름 공은 재산의 대부분을 국채를 받고 영국에 빌려주었다. 그리고 그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에게 맡겼던 것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프랑스혁명을 지켜본 유럽의 왕과 제후들은 자신들도 그런 처지가 될까 봐 겁이 났다. 그들은 연합군을 결성해 프랑스혁명군과 전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빌헬름 공도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연합군에 합류해 12,000명의 군인을 전쟁터로 내보냈다.
 
그러나 연합군의 병사들은 투지에 불타는 프랑스혁명군과 맞서 싸우기에 역부족이었다. 프랑스 군대는 프랑크푸르트와 헤센을 점령하고 빌헬름 공을 폐위시켰다. 왕좌에서 쫓겨난 빌헬름 공은 프라하로 망명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엄청난 재산은 프랑크푸르트 유태인 거리에 있는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의 집 지하실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피해 현금과 채권을 영국으로 몰래 빼돌렸다.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에게는 암셸, 잘로몬, 나탄, 카를, 야콥이라는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다섯 아들을 엄격하게 교육한 뒤 장남 암셸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차남 잘로몬은 오스트리아 빈, 셋째 나탄은 영국 런던, 넷째 카를은 이탈리아 나폴리, 다섯 때 야콥은 프랑스 파리로 보냈다.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와 그의 아들들이 세운 회사는 세계 곳곳에 자리 잡은 거대 금융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셋째 아들 나탄 로스차일드는 일찍부터 뛰어난 사업가로 명성이 높았다. 나탄 로스차일드는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엄청난 재산을 모아 로스차일드 집안의 이름을 다시 한 번 크게 떨쳤다.  
 
영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부터 나탄 로스차일드는 런던의 왕립 증권거래소를 자주 방문했다. 그곳에서 나탄 로스차일드는 투자(投資)의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무렵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서 유럽연합군에게 참패를 당한 후 엘바 섬으로 유배를 떠났다. 그러나 1815년 나폴레옹은 다시 병사들을 모아 파리로 진군했다. 연합군은 나폴레옹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나탄 로스차일드는 연합군에 전쟁자금을 댔다. 1815년 6월, 벨기에의 워털루에서 나폴레옹과 연합군 사이에 대혈전이 벌어졌다. 전쟁의 승패는 쉽게 판가름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을 이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프러시아의 블뤼허 장군이 나폴레옹을 격파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나폴레옹은 완전히 패했고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의 재정상태(財政狀態)는 순식간에 좋아졌다.
 
전쟁의 결과를 미리 안 사람들은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수도 있었다. 영국왕실이 이자를 충분히 지불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영국이 발행한 채권 값이 엄청나게 뛸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많은 투자가들이 영국에 지불능력이 없다고 생각해서 채권 값이 무척 쌌다.
 
1815년에는 전화도 팩스도 텔레비전도 없었다. 유럽대륙의 소식이 영국에 전달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탄 로스차일드는 배를 타고 영국과 유럽대륙을 넘나드는 선장들에게 많은 돈을 주고 유럽대륙에서 일어난 일들을 최대한 빨리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자 나탄 로스차일드에게 돈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 워털루 전투에 대한 기사가 나온 네덜란드의 신문을 런던에 있는 나탄 로스차일드에게 가져다주었다. 전쟁이 끝난 바로 다음 날이라서 영국군대가 승전보를 알려오기도 전이었다.
 
나탄 로스차일드는 우선 그 정보를 영국정부에 알렸다. 그런 다음 증권거래소로 나가 채권을 팔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나탄 로스차일드가 채권을 파는 것으로 보아 연합군이 패한 것이 분명해’라고 생각한 투자자들이 앞다투어 채권을 팔았다. 채권 값은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사람들이 채권을 파는 동안 나탄의 중개인이 그 채권을 도로 사들였다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 날 승전보가 널리 퍼지자 나탄은 전날 헐값에 사들인 채권을 많은 이익을 남기고 되팔았다. 이일로 나탄 로스차일드는 역사상 최고의 투자자라는 별명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