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정치·경제·사회·문화)

20. 혈액 순환을 닮은 경제의 흐름

好學 2011. 2. 3. 11:21

20. 혈액 순환을 닮은 경제의 흐름

 

프랑수아 케네는 경제활동을 하는 여러 집단 간의 관계를 관찰하여 <경제표(經濟表)>로 정리하고, 농업을 생산과 부의 원천(源泉)으로 보는 중농주의(重農主義)를 주장했다.
 

루이 14세의 베르사유궁전은 사치스러움으로 이름이 높았다. 앙투아 바토 같은 로코코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호화로운 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보통 프랑스 왕은 왕비 외에도 여러 명의 첩을 두었다. 루이 14세의 증손자인 루이 15세는 특히 퐁파두르 부인(1721~1764)을 총애했다. 퐁파두르 부인은 매우 똑똑하고 명예욕이 강한 여자였다. 왕은 정치와 문화에 관한 주요 문제들을 늘 퐁파두르 부인과 의논했다.
 
퐁파두르 부인에게는 프랑수아 케네(1694~1774)라는 주치의가 있었다. 케네는 농부의 아들로 정원사에게 글을 배웠지만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부인의 주치의가 되면서 귀족이 되었다. 케네는 의학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경제에 있어서는 유럽 최초의 경제학자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베르사유궁전에서 케네는 처음으로 ‘계몽주의(啓蒙主義)’를 접하게 되었다. 당시 계몽주의는 서유럽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사람들에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가르쳤고, 눈으로 본 것과 실제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계몽은 인간이 스스로 얽매여 있던 미성숙함에서 벗어나는 우일한 길이다”라고 말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전통과 관습뿐만 아니라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데도 계몽주의를 적용시켰다. 그들은 자연을 이성적으로 연구함으로써 합리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687년 영국의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은 중력과 역학에 대한 중요한 법칙들을 설명한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발표했다. 사람들은 이 책에 실린 ‘만유인력(萬有引力)의 원리’를 이용해 대포알이 날아가는 거리를 계산하고 별의 주기를 설명했다. 현미경이나 망원경 같은 기구들이 개발되면서 자연은 차츰 그 신비를 벗었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케네는 경제활동을 하는 여러 집단의 관계를 그림으로 정리한 ‘경제표(經濟表)’를 만들었다. 케네는 심장에서 나온 피가 몸속을 흐른 다음 다시 심장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상품과 돈도 일정한 규칙에 따라 흐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행성(行星)의 주기나 시계 운동, 인체의 혈액 순환처럼 ‘경제도 정해진 규칙(規則)에 따라 정확히 움직임으로 그 흐름을 방해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케네는 경제표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세 계급으로 나누었다. 첫째 계급에는 왕, 성직자, 귀족처럼 땅을 가진 사람들이, 둘째 계급에는 수공업자와 공장노동자들이, 셋째 계급에는 농부, 정확히 말하면 지주의 땅에서 일하는 소작농이 속했다.
 
케네의 주장에 따르면 경제의 순환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먼저 농부들이 1년 동안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먹을 농사를 짓는다. 가을이 되면 농부들은 수확한 곡식 중 자신이 먹을 것을 약간 남겨 놓고, 나머지는 수공업자들이 만든 물건과 바꾸거나 지주에게 세금으로 바친다. 지주는 받은 곡식을 식량으로 사용하거나 공장에서 만든 물건과 바꾼다.
 
케네는 가장 ‘순수한 생산품’이 농부에게서 나온다고 보아 농부를 ‘생산계급(生産階級)’이라고 불렀다. 수공업자는 필요한 물건을 만들기는 하지만 농부가 만들어 놓은 ‘순수한 생산품’을 먹고살기 때문에 ‘비생산계급(非生産階級)’으로 분류했다. 즉 케네의 경제표는 생산계급과 비생산계급, 지주계급 사이에서 일어나는 농업생산물의 생산과 교환, 재생산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케네는 국민의 대다수가 농민인 상황에서 중상주의는 적절치 못한 경제정책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케네는 농업을 생산과 부의 원천으로 보는 ‘중농주의(重農主義)’를 주장했다. 그는 왕에게 농사를 짓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농민들에게 똑같이 세금을 부과하라고 조언했으며, 농민들이 곡식을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도록 할 것을 주장했다.
 
케네가 농업만이 부를 창조하는 생산적인 일이며 상업과 공업은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주장한 것은 케네의 책을 읽는 사람들 대부분이 지주였기 때문이다. 케네를 비롯해 당시 궁정 귀족의 대부분은 지주계급이었고, 농민들이 바치는 세금으로 생활했다. 즉 지주의 소득이 되는 농업만이 생산적이라고 본 케네의 분석에는 당시의 선입견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20세기에 미국의 경제학자 바실리 레온티에프(1906~1999)는 케네의 경제표를 바탕으로 현대경제의 흐름을 도표로 나타내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경제순환을 보여주는 레온티에프의 표는 ‘국민경제(國民經濟) 계산(計算)’의 도구가 되었다. 그 수치를 보면 한 나라의 경제가 얼마나 빠르게 성장했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나라의 모든 국민이 행한 경제활동이 얼마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국민총생산(國民總生産)’의 계산도 가능했다.
 
콜베르, 케네처럼 훌륭한 경제학자들이 많이 나왔음에도 프랑스 국민들은 여전히 과도한 세금에 짓눌렸다. 사치스러운 생활과 잦은 전쟁 때문에 왕은 재정적 어려움에 처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 절대왕정이 끝난 유럽은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