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文學/[행복론]Seneca

행복론 제 21장 11

好學 2010. 10. 4. 21:04

 



Seneca De vita beata 행복론 제 21장 11  

죽기 전에 자기의 본분을 다하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으며, 
이와 같은 축복 가운데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은 더욱 큰 축복이다. 
즐거운 생애를 보내다가 태연히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위인의 소질이 있음이다. 
의롭고 올바른 삶은 물론 바람직하지만 
의롭고 올바른 죽음보다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수많은 용맹한 젊은이들이 자연의 본능에 따라 
모든 재앙을 멸시하면서 위대한 업적을 세웠든 것이다. 
(이것은 청년 시절에 이미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위인의 소질이다.) 
인간이 처음 태어났을 때처럼 
“아앙” 하고 보채면서 죽어간다는 것은 유치한 일이다. 
죽었을 때 우리의 육체를 매장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태어났을 때 자기를 싸고 있던 포의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육체라는 옷을 벗어버렸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연의 신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이른바 말세의 암흑에 대해 충분히 규명할 수 있고 
우리의 영혼이 영광으로 빛날 수 있다면, 
이 영광의 빛은 그림자 하나도 없이 다만 우리를 눈부시게 감싸주어 
우리는 하계를 밤낮 환히 내려다볼 수 있을것이다. 
우리들 육체의 눈은 하늘의 한 등불(태양)을 쳐다보기만 해도 
눈이 부셔서 똑바로 응시할 수 없을 정도로 흐려 있으며, 
이런 육체로는 도저히 영광스럽고 찬란한 원광을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즉 우리가 그처럼 두려워하던 죽음은 결코 삶의 종국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으므로,우리는 생명으로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의 요인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죽음과 긴밀한 인연을 갖고 있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마치 평판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즉 말만 두려워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생활이 고된 나머지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죽는 편이 낫다는 말은 죽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본심에 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차라리 신의 뜻에 맡기고 모름지기 건강과 삶을 기원할 일이다. 
살아가는 것이 도리라면 죽고 싶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실제로 죽고 싶으면 남에게 알리지 말고 몰래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인간은 죽음의 주위에 있는 가장에 놀라지만, 
죽음 자체의 본질을 놓고 생각해 보면 의외로 쉽사리 결단을 내릴 수 있다. 
죽음은 그 불가피성으로 하여 인간에게 용기를 주는 것으로 
그 죽음이 서서히 다가올 때가 우리로서는 가장 괴로운 것이다. 
보라 일단 결투에 나설 때에는 비겁하던 검사도 치명상을 입으면 
유유히 가슴을 열어젖뜨리고 상대방의 검을 받아들이지 않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은 죽고 싶지도 않고 살고 싶지도 않다고 하는데, 
이런 얼치기가 가장 가련한 존재다. 
다만 이것만은 움직일수 없는 진리다. 
”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 영원히 노예를 면할 길이 없으며, 
죽음을 무시하는 자라야 분명히 자유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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