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종합]인물.말씀.강연

해방과 기독교 여성 - 3.교회의 분열과 여성 1

好學 2010. 10. 2. 23:09

 

해방과 기독교 여성 - 3.교회의 분열과 여성 1

 

 

3.교회의 분열과 여성

1) 과정

해방 직후 복구,재건의 대과업을 수행해야 할 한국교회는 이 일에 앞서 교회재건의 지도자는 누가 되느냐 하는 난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성결교회나 안식교회나 동아기독교회와 같은 왜정말에 완전히 해산,폐쇄되었던 소수파의 교역자들은 아무 문제없이 총궐기하여 교회 재건에 매진할 수 있었으나 장로교나 감리교와 같은 대교파에 있어서는 일제의 요구에 순응해가며 교회를 지도해 오던 현역교역자와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투옥되었거나 혹은 추방되었던 재야 교직자와의 사이에 교회재건의 주도권 문제를 둘러싸고 쟁론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면, 신사참배 등의 문제로 일제에 항거하며 고난당하고 투옥당한 수십명의 교역자들은 6.7년의 긴 옥고를 겪으면서 일본의 패망과 한국의 독립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석방된 이들이 승리의 기쁨을 안고 교회로 돌아왔을 때 사태는 그들이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미군정이 친일세력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이승만 정권 역시 친일 세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며 결국은 반민특위를 해체시켜 버림으로써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일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러한 사회의 상황은 그대로 교회의 상황에도 적용되었다.

 

즉 그 당시의 교회 상황은 "현직 교역자들의 대부분은 통회의 기색은 별로 없고 도리어 교권에 집착되어 자기 지위 확보에 몰두한 모양이 역연히 보였으며 교회를 떠나 정게로 나아가는 교직자도 적지 않게 있었다."23)

 

물론 출옥성도들도 그 실지내용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즉 신사참배를 시인하고 나온 파, 신사참배는 죄이나 횡거요배 및 묵도나 국기배례는 양심 문제라고 하여 시인한 파,신사참배는 물론 동방 요배,묵도,국기 배례,국민 서사까지 극구 반대하고 옥중에서 겪은 고문과 옥고를 심하게 치루었던 파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교회재건의 방법 또한 달랐다. 기성교회를 인정하고 들어가서 개혁하자는 파, 전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파가 서로 나뉘었다.

 

역사의 대전환점을 맞이하여 민족적으로 어수선한 그 시점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단합하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해방된 조국을 올바르게 이끌어 나갈 역할을 담당했어야 했다. 그러나 교회는 자체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분열만을 일삼는 미숙한 태도를 보였다. 해방 이전에도 교파적인 성격이 강했던 선교사들에 의해서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하였던 역사를 갖고 있던 교회는 해방 이후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기존의 교파를 몇 갈래로 더 분열시켰다.

 

물론 분열의 역사를 보면 전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아무리 타당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 어려운 때에 오로지 서로 싸움만 했다는 인상을 준 것은 교회사에 있어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이다. 해방 후와 6.25사변을 전후해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소위 사이비,이단 종교들에 대해서 소위 정통이라고 주장하는 교단들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그 분열의 역사를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고난당하고 투옥되었던 사람들이 나와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구했지만 이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신사참배 거부자들은 따로 모여서 교단을 만들 수 밖에 없었고 그 교단을 고려파라 칭하였다. 그런데 이 신사참배 거부자들이 결국 따로 분열되어 나갔지만 그 과정에서도 의견이 갈라졌었다. 즉 경남노회 안에 들어가서 교회재건을 하자는 파와 안 된다는 파 등으로 갈리었다. 그때 안된다는 주장을 한 최덕지 전도사를 목사로 안수할 수 없다는 파와 있다는 파로 갈리어 논쟁을 벌임으로써 분열이 일어났다. 최덕지 전도사는 신사참배를 격렬하게 반대한 여성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녀가 속한 교파를 재건파 교회라 했다.

 

그녀는 재건교회의 지도 방침으로 3대주의,5대 강령을 내걸었다. 3대 주의란 1.여호와께만 충성하자. 2.철두철미 회개하자. 3.깨끗한 성전을 지어 바치자 였고, 5대 강령은 1.한국교회는 완전 재건하자. 2.마귀당을 일절 버리자. 3.불의와 위선에도 절교하자. 4.우상은 일절 타파하자. 5.너도 나도 재건운동가 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주의와 강령하에서 그녀는 특히 금식기도, 우상타파,성수주일,십일조 등을 강조하였고, 특히 외국 구제품을 일체 거절하였는데 이는 복음의 빚만도 무거운데 물질의 부채까지 져서는 안된다는 이유에서였으며, 구제를 받는 것은 자주정신과 주체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임을 주장했다. 또한 사치품과 여자 파마를 금했는데, 이는 교회가 세상풍토와 유행을 따라가면 신앙생명이 죽는다는 이유에서였다.24)

여기에는 그녀의 주체적인 자세와 민족적인 긍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녀의 신앙은 일본에 의해서도 미국에 의해서도 영향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녀의 신앙이 지나치게 세속과의 단절을 주장함으로써 聖俗을 엄격히 가르는 이원론적 사고에 빠져,"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요3:16)하나님의 복음의 본질을 왜곡하지 않았을까 하는 면도 없지는 않다.

 

아뭏든 그녀는 일제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그녀의 신앙과 민족적인 긍지를 지킨 기개높은 교역자였지만 결국은 기성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밀려날 수 밖에 없는 여성교역자들의 상황을 대변해 준다. 그녀는 제외되지 않기 위해서 결국은 소중파로 분열되어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구체적인 과정을 보면, 최덕지 전도사는 1951년 4월 3일 예수교 재건교회 중앙위원회 제6회 정기총회에서 강상은 목사에 의해 안수를 받고 명예목사에서 장립목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