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종합]인물.말씀.강연

기독교 여성지도자들의 행태와 민중의 고난 1

好學 2010. 9. 21. 14:53

 

기독교 여성지도자들의 행태와 민중의 고난 1

 




    조선의 민족운동은 신간회 해산 후 좌파는 노동,농민운동 형태로

    전면 지하로 잠임해 들어가 비합법투쟁을 벌였으나,

    합법의 테두리에서 민족운동을 벌여온 우파는 최린 등 1934년 시중회를 조직하여

    내선일체,공존공영 동아 제민족의 유대를 표방해 대동아주의의 기치를 내걸었으며

    그 밑바닥에는 지론인 합법자치론이 깔려 있었다.

     

    한편 학생을 동원하여 여름방학 동안 제한된 농촌 계몽운동을 벌여온

    송진우 등 동아일보측에서는 충무공 유적보존운동을 전개하여

    현충사의 중건,묘소,비각,유물의 보전 등에 힘썼다. 이 운동에 이어

    임진왜란때의 권율 원수의 사당인 홍공사를 수리하는 데도 참여했다.

     

    1930년대 후반기의 민족운동은 대체로 민족문화의 발굴,보전 등

    주로 내향적 성격으로 변해갔다.

    이 때의 객관적 정세는 합법적 운동을 전개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합법적 민족운동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동우회사건이나 흥업구락부 사건도 이 양 단체가 내건 것은

    순전히 인격 수양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나 일제는 이것마저 방치하지 않았다.

    이 무렵 민족운동 관계로 적발된 사건이라는 것은 대부분이

    산발적 소수집단에 의한 개개의 반일적 비밀결사운동이 대부분이었다.

     

    전국 도처에서 발생하는 보안법, 치안유지법 관계 위반사건의 내용을 보면

    공중 석상에서 불온한 발언, 신도간에 주고 받은 조선독립의 예언,

    교회에서의 설교가 불온했다는 것 등이 문제되었다.

    이같이 민족주의 운동이 전반적으로 지하로 잠입하고 있을 때

    몇가지 대규모 사건이 터졌다.

    그것이 바로 수양동우회사건, 흥업구락부사건, 기독교의 신사참배거부 사건 등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사건을 전환점으로 하여 민족지도자층에 속하는

    인사들의 민족운동은 거의 결정타를 입고 이후부터 대세는

    친일로 방향이 전환되기 시작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