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종합]인물.말씀.강연

해방과 기독교 여성 - 1.이승만 정권과 기독교 여성 1

好學 2010. 9. 25. 17:17

 

해방과 기독교 여성 - 1.이승만 정권과 기독교 여성 1 

 

1.이승만 정권과 기독교 여성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은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해방은 한민족 전체가 너나 할 것 없이 일제 식민지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새로운 기회를 맞게 된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해방이 엄격히 말해서 민족의 주체적인 힘의 축적의 표출이 아니었기 때문에 한민족이 무엇이든 자주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사태가 되지 못했다.

해방을 전후해서 우리나라는 대륙세력의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해양세력의 자본주의 국가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함으로써 독립을 동과정에서 나타난 민족 내부의 좌우대립과 함께 민족분단의 위험이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우선 일본은 패전 후 국내의 지도급 인물인 여운형에게 행정권을 넘기자 건국 준비위원회가 발족되어 활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미국은 정식 항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조선총독부가 행정권을 유지하도록 했고 이는 일본의 총독 통치가 바로 미국의 군정 통치로 대치되도록 하는 계기를 이루어 주었다.

 

조선총독부의 항복을 받은 미국은 조선총독부의 행정기구와 그 조선인 관리를 그대로 인계받아 운영했다.한편 38도선 이북에서 항복을 받은 소련군은 일본의 군인, 경찰관,행정관을 억류하는 한편 친일세력을 제거하고 공산주의자를 중심으로 하는 인민위원회를 각 도마다 결성하여 행정권을 이양했다.

 

얄타회담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정한 연합국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이를 공개했다. 삼상회의 결정이 전해지자 국내에서는 우익의 반탁과 좌익의 찬탁이 맞서서 좌우대립이 급격히 심화되어 갔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수립을 위해 함께 협의할 정당,사회단체를 선택하는 일에 난관에 부딪히면서 38도선 철폐문제,남북한의 경제적 통일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결렬되었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 이승만은 소위 "정읍발언"을 통해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나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도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다"하여 남한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하였고 한민당을 비롯한 극우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이리하여 반탁운동을 펴온 우익진영은 두 갈래로 갈라져 이승만과 그의 추종세력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함으로써 분단국가를 성립시키려 했고 김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독립당 계열은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미,소 양군의 철수와 남북요인의 협상에 의한 총선거를 주장했다.

 

유엔위원단의 입북이 거절되자 유엔은 그 미소총회에서 한국위원단 단장인 인도대표 메논이 제의한 "가능한 지역 안에서의 총선거"를 가결받고 이에 따라 38도선 이남에서만의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후에 구성된 국회에서 헌법이 제정되고 정부수립이 선포됨으로써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분당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 성립되었다.1)

 

그런데 이 과정에서 기독교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계기가 있다. 우선 이승만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 이승만은 일찌기 독립협회의 일원으로서 활약하다가 투옥된 이후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즉 그는 감옥에서 배재학당 시절에 들었던 하나님의 메시지를 다시 듣게 되었고 "하나님 내 나라와 내 영혼을 구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처음 드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후 1904년 감옥으로부터 풀려나자 이승만은 미국으로 가서 조지 워싱톤 대학을 졸업하고 하바드에서 M.A 학위를,프린스톤에서 Ph.D를 획득했다.

그후 서울에 YMCA의 간사로서 취임하기도 하였으나 다시 호놀룰루로 가서 한국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가 임시정부의 의장이 되기도 하였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