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종합]인물.말씀.강연

민족의 고난과 기독교 여성 - 2) 일반 여성단체 활동 1

好學 2010. 9. 11. 16:23

 

민족의 고난과 기독교 여성 - 2) 일반 여성단체 활동 1

 

2) 일반 여성단체 활동

(1) 사회주의와 기독교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원인규명,해결방안 등에서 이른바 사상적 분화가 생겨난다. 즉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두개의 흐름으로 나뉘게 되었다. 물론 민주주의 내에서도 이른바 3.1운동 이후의 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대하여 타협하는 파와 타협하지 않는 파가 나뉘어 대립되었다. 또한 사회주의 역시 단일한 한 운동체를 이루어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체로 크게 나누어서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72)

 

그런데 이 분열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주로 민족주의 계열에 속해 있었다. 자신의 구원과 더 나아가서 이 사회, 민족의 구원의 길로서 기독교를 택한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게 되고 그 교회는 여전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적 세력의 일부였고, 따라서 그들은 쉽게 미국에 드나들수 있었고 이러한 그들의 배경은 자본주의에 익숙케 하고 사회주의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소원하게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3.1운동 이후 선교사들을 비롯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의 관심을 사회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에 쏟도록 지도했고, 권세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순종하여야 한다는 식민지 신학을 강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근본문제는 유물론과 유신론,역사관 등의 차이가 있지만 민족 문제에 관한 한 잘 협조하던 사람들이 이렇게 분열되어야 하는 요인들 중에는 이런 잘못된 신학이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이 사회,민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사회주의와 기독교가 어느 선까지 함께 할 수 있고 없느냐 하는 문제를 기독교인들이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이 없지는 않다. YMCA의 기관지인 [청년]지에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와의 관계에 대한 논ㅁ눈들이 실려 있다. "사회주의와 기독교사상","사회주의와 기독교의 귀착점이 엇더한가", "사회 개조와 기독교"등의 논문들 속에서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처해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대위같은 이는 "무삼 신세계를 조성코저 함에는 기독교사상과 사회주의가 상동하다"고 주장하였다. 1924년 1월2일부터 3월 13일까지 7회에 걸쳐 실린 "기독교가 현대자본 제도에 대하야 맛당히 취흘 태도"라는 [기독신보]의 사설에서는 자본주의의 죄악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고 이상의 사회를 조직함에도 복음이 필수라고 역설하면서 교회의 자본가나 농지주에 대한 사랑의 실현을 호소하기도 하였다.73)

 

그러다가 1925년 10월 21일-28일 제2화 조선주일학교대회가 서울에서 모였을 때 한양청년동맹이란 공산주의 단체에서 노골적인 반 기독교운동을 벌였다. 1925년 11월호 [개벽]지에는 이러한 반종교운동에 대한 주장을 듣고 기독교인의 그에 대한 반응을 싣고 있다. 이 기사에서 나타난 반대자들의 주장을 듣고 기독교인의 그에 대한 반응을 싣고 있다. 이 기사에서 나타난 반대자들의 주장은 "기독교는 모든 강자의 모든 전제와 횡폭이 이 종교의 마력에 의하야만 가능하얏스니 종교야말로 강자의 약자를 정복하는 평화의 무기이오 강자의 약자를 마취케 하는 유일한 수단물이엿다"74) 는 것을 중세의 로마교회 등을 예로 들어 주장하고 있다.

조선 기독교 역시 "과학지식이 부족하고 아직 봉건적인 인습을 벗지 못한 조선인은 각종 잡다한 미신적 생활을 영위한다. 이 중에서 기독교와 다른 양식 종교는 현대 미국식 자본가적 대규모로써 이러한 미신의식의 잠재하엿슴을 이용하야 그리스도의 미신과 허위를 선전한다. 그리하야 배후에 금력과 군벌의 권력을 의거로 조선민중에게 소위 도덕 양심이라 하야 인종과 유순을 장려하며 선전한다."75) 고 비판하였다.

또한

"조선에 기독교가 들어온지 임의 삼십년이나 되였는지라 그동안 서양문명 수입에 적지안한 공로가 잇슨 것이 사실이엿지만은 그 반면에 조선의 대중으로 하여금 현실을 등한시하게 하여 간접직접으로 신흥운동에 만흔 지장을 준 죄악은 더욱 크다... 보라... 예슈교인치고 보수적이 아닌자가 그 누구인가? 거개는 극단의 개인주의자로 유혈이라면 성지에 위반이라고 구실조케 회피하는 자들 뿐이니 이엇지 역사적 사명을 다하랴는 오인으로서 등한시한 바이랴!"76)

 

라는 비판도 하였다. 그런데 이런 반종교운동에 대해서 주일학교 연합회의 한석원 목사는 "그들은 그들이오 우리는 우리외다... 따라서 대책이나 무엇이니 하는 말도 할 것이 업는 것이 아님니까..."라는 식으로 문제를 문제로 삼지 않는 태도를 보였고 진남포교회 목사인 안경록 목사는 반기독교운동을 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가며 만일 교회 내에 유산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목사가 아니라 그 지방에 판박혀 있는 장로측들이 자기의 금전을 옹하고서 교회를 탁란하는 일이 없지 아느나 이것은 우리 교회 안에서도 배제하려던 일"77)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태도와는 달리 신흥우 씨는 반기독교운동과 반기독운동을 구별해야 함을 역설하고 반기독교 운동은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오늘날의 교회는 그저 민중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무산계급의 압 운명을 개척키 위하야 있어야 하며 따라서 현대의 기독교회는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또한 반종교운동이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면 기독교와 인류애라는 그 점에서 스스로 일치할 날이 있을 것이고 우리 교회 안에는 사실 교회의 민중화를 위하야 고심하는 사람들이 있다"78) 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반종교운동을 기독교는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선교사는 반종교운동이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우려하기도 한다.

 

"볼쉐비즘이 점차 침투해 들어왔다... 공산주의의 영향력은 특히 교회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고 있다. 우리 젊은 이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젊은이들 조차도 기독교의 타당성과 진리의 교사로서의 교회의 권위에 공격을 가하게 되었다. 성서는 비판되었다. 그리고 설교 가운데 바울과 칼 막스,레닌과 예수 그리스도를 인민의 지도자들로서 같이 언급하고 있는 현상이 나타났다... 유물론과 무신론은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모든 사람에 의해서 논의되고 있다. 공산주의적 문헌은 모든 사람들의 주머니 속에서, 모든 사람들의 집 안에서 발견되었다..."79)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기독교는 오늘날의 사회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문헌들을 많이 출판해야 한다. 즉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기독교가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학과 과학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80)

 

기독교가 이렇게 될때, 즉 "참된 사람 정의로운 그리스도의 정신을 내심에 품고 신자를 대하면 왜 종교를 배척하는 청년이 많게 되겠냐"82) 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한국기독교의 움직임은 언제나 여러 이유로 서리를 맞았고 그리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기독교에서 농촌에 관심을 가진 움직임들,예를 들어 독신전도단,YMCA YWCA의 농촌 프로그램, 또한 적극 신앙단운동등 세상의 아픔을 함께 하려는 움직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사회주의 계열에 대해서 우리는 당신들보다 더 많이 깊이 세상의 소외된 자들과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연대감을 가지고 일하였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그들의 반종교운동에 대하여 감정적인 반발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