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종합]인물.말씀.강연

민족의 고난과 기독교 여성 - 1. 항일운동

好學 2010. 9. 5. 21:00

 

1. 항일운동

 

기독교가 복음을 전파하러 들어왔다는 것은 서구의 세력이 이 땅에 밀려 들어오는 것을 의미했다. 결과적으로 서구세력 특히 미국이 한국을 식민지화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일제하에서 신음하던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 출신의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들이 세운 병원에서 혜택을 받은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을 합병할때,아니 그 이전에도 이미 미국과 일본의 이해관게는 어느 정도 진정한 의미에서 한민족의 자주 독립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어느 한 세속적인 국가의 산물이 아니라 국가를 넘어서는 하나님을 믿고,모든 민족이 평등하게 취급받는 하늘나라를 믿는다면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말살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될 것이다. 국수주의적인 의미에서의 맹목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대등한 관게에서 서로를 보완하여 보다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그래서 인류의 미래에 기여할 수 있는 건전한 민족주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미국 선교사들이나 그들에게서 교육을 받은 기독교여성들이 얼마나 이러한 의미에서의 민족주의 수립에 기여를 했는가를 평가해 보는 일은 중요하다.

조선민족의 자생적인 성숙이 짓밟혀가고, 열강들이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서 조선을 억압하고 착취할 때 선교사들의 태도는 대체로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그렇게 가르쳤다. 1907년부터 일본은 노골적으로 반일 저항의 거점이 한국교회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한국교히의 맹렬한 항일운동에 대한 반발은 선교사들에게서 먼저 터져나왔다. 즉 게일은 "위로 애국의 미친 듯한 광란이 휩쓸어 자결,신체절단,허황한 맹세,게릴라 의거,냉혹 무정의 저항"이 차있다고 비난하고 있다.2)

 

감리교의 일부 선교사들도 이러한 비난을 하였다. "선교사의 행동"이라는 일본측의 문서에는 1907년 5월 2일 미국선교사 존스, 스크랜톤 두 박사가 이등통감을 저택으로 방문해서 자신들은 한국인의 도덕적 및 정신적 개발을 위함에 노력하고 정치상의 것에 대해서는 초연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을 밝혔다고 한다.3)

따라서 선교사들은 1907년의 교회 대부흥운동을 통하여 한국교히에서 자라나고 있던 민족주의적인 자각과 애국적인 열의 및 행동을 꺾어 버리고 비정치화의 길을 가도록 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4)

 

선교사들은 한국이 국가적으로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예를 들어 3.1운동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도 처음에는 잘해야 온정적인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선교사들의 관여는 일차적인 것이 아니고 이차적인것에 불과하였으나 충분한 효과는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들 선교사들의 관여는 인간의 고통에 대한 기독교도적인 자비를 반영한 단순한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은 경찰서와 형무소에 접근할 기회를 요구하며 고문을 정지시키는데 조력을 하였다. 그후 일본의 불의와 만행이 폭로되자 선교사들의 감정은 단순한 동정에서 의분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한국에서일어나고 있는 비참한 사태의 진상을 전세게에 호소하기로 결정하는데서 선교사의 감정은 마침내 행동으로 표출되었다.5)

 

그러나 한국기독교인들은 선교사들의 이러한 의식과 태도를 넘어서는 면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는 1910년 그리슨 목사가 블라디보스톡 한인교회인 신한촌 교회 사경회에 참석할 때의 일에서도 볼 수 있다.

한국에 개신교가 전파되었을 때에 교인들의 입교동기는 사회적,현실적인 요인이 강하였다. 즉 일반민중의 경우, 관리들의 가렴주구와 탐익을 피하기 위해서 입교했다. 또 지배층의 경우는 관료들이 개화를 통한 구국의 방편으로 기독교와 관련을 맺는다는 것이 그들의 입교의 강한 동기였다. 이들 입교한 교인들에 의하여 반봉건 개화의식을 성장되었고 이는 자주독립의식으로 연결,성장하였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은 1896년부터 국왕탄신일에 충군적이고도 시위적인 대중집회를 통하여 적극적으로 애국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하였고 협성회와 독립협회 등에도 많은 기독교인 인사들이 참여하여 활동하였다.6)

 

독립협회 사건 이후 선교사들에 의한 교회의 비정치화가 강력히 추진되었지만 3.1운동 때의 기독교인들의 참여, 105인사건,물산장려운동, 신사참배 거부운동 등은 항일의식의 면면한 이어감이라고 할 수 있다.7)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일화는 기독교인들의 항일의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예정한 대로 사경회 날이 다가왔다.사경회 날이 다가왔다. 그리슨목사는 남자반을 맡아 인도하고 그의 아내 레나여사는 여자반을 맡아 인도했다. 사흘째 되는 저녁집회 때였다. 레나여서는 십계명을 가르치게 되었다. 여섯번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에 가서는 더욱 힘을 주어 가르쳤다. 왜냐하면 그때 신문에 끔찍한 살인기사가 많이 실려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그중에도 한인들이 일본인 암살을 마치 의로운 행위처럼 쓴 것을 보고 놀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레나여서는 살인이란 무조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힘주어 가르쳤던 것이다.

 

교인들은 잠자코 레나여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날밤 부인들은 말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 얘기를 남편들에게 전했다. 그러자 큰 분노가 터져 나왔다. '한인이 왜놈 죽인 것이 왜 죄냐?그렇다면 왜 성경은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돌로 쳐죽인 소년 다윗을 영웅시하느냐'이렇게 말하면서 노발대발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그리슨 목사는 왜놈들의 앞잡이다'라는 소리가 높아졌다. 사태가 이쯤 험악해지나 사경회는 중단되었다. 최관흘 목사는 입장이 매우 난처해졌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나! 최 목사는 교인들을 하나 하나 붙들고 사정했다. 타일렀다. 겨우 노기가 가라앉아 위험한 고비만을 넘길 수가 있었다."8)

 

여성들도 또한 민족의 구성원으로서 일본의 침략과 지배에 대하여 저항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여성들이 이러한 문제를 자신들의 힘으로 해결하기에는 힘의 축적이 부족했다. 황신덕 씨는 그 당시 여성들이 활동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던가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내가 동경에서 돌아와 얼마쯤 시간을 보낸 후 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여성운동을 한번 시작해 보겠다고 작정했을 때 현실적으로 부딪친 문제가 바로 그런 문제였습니다. 여성단체를 하나 조직하려 해도 자유롭게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여성들을 모으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요.대부분의 여서들은 가정살림에 꼼짝없이 얽매여 한발짝도 울타리 밖을 나올 수가 없고 거기다가 그 동안의 여자천시 사상으로 교육을 시키지 않아 어떤 운동에 필요한 기본지식이나 능력을 갖춘 여성이 그리 흔하지 않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단체에 들어가 한 3년 활동해 보았습니다만 여성의 기본적인 문제에 관한 생각은 항상 머리에 남아 있었습니다...(중략)

 

지식수준이나 의식의 면에서 기초가 잡혀져 있지 않은 상황에서 여성단체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어떤 단체를 만들어 활동을 전개하려고 하면 처음에는 한 50명쯤 모여요. 그러다가 다음에는 30명,그 다음에는 10명 이런 현상이라고는 볼 수 없었어요. 엄한 시부모를 모시고 복잡하고 전근대적인 가정살림을 꾸려나가야 하는 환경, 의식의 부족,지식의 결여 등이 그 주요원인이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볼때 가정생활을 과학화하고 근대화하며 여성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의식을 심어주는 것이 여성운동 또는 독립운동의 절대적인 전제조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9)

 

따라서 이때 여성들이 애국운동에 가담한 것을 여성들의 조직화된 역량의 표출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여성들이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마침내 그녀들의 전통적인 가정적 삶까지도 위협당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나서는 것을 여성의식의 신장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를테면 행주산성 전투 때 여성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나른 것을 여성운동의 효시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적어도 우리가 기독교 여성운동이라고 했을 때는 기독교적 신념하에서,여성문제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조직적인 운동을 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원칙하에서 기독교 여성들의 민족과의 관계, 사회참여를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