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종합]인물.말씀.강연

기독교여성과 교육 - 3. 개신교와 여성교육 1

好學 2010. 9. 5. 20:53

 

3. 개신교와 여성교육

1) 미션계학교의 설립과 교육내용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직접적인 전도활동이 어려웠던 선교사들은 교육사업을 중요한 전도사업의 일환으로 삼았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에서의 교육열은 대단하였다. [대한그리스도인회보]의 한 기사에서는 여성교육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녀학교론]대뎌 하느님의 도는 공경하시며 인이하샤 시죵이 여일한고로 음양을 내실때에 해와 달이 쥬야를 벗하시며 칩고 더운거시 소시를 논호와 천먄년을 지내여도 변혁함이 없는지라... 집안이 화평하고 집이 화한후에 일만일을 일우는지라 학문을 가르쳐 힝실이 현숙호 부녀는 남자보다 나흔이가 만코 학문이 무식하여 마음이 안악한 사나희는 년즈만 못한이가 만흐니 남녀를 물론하고 인저를 교육하는데 잇심이라..."14)

 

따라서 "국가의 흥왕하고 쇠패함이 실노 녀즈를 가르치고 아니 가르치는데 잇느니라.. 바라건디 우리 교중 형데들은 일심으로 힘을 합하여 녀학교를 실시하고 녀오들을 가르쳐 학문이 남자와 같게하면 다만 즈긔에게 유익할 뿐 아니라 금년에 공부할 녀오가 명년에 가르치는 션싱이 될터이니 엇지 젼국에 항복이 아니리오..."15) 라고 하였다.

 

특히 선교사들은 여성을 위한 교육을 선교방침으로 정하기도 하였다. 즉 1893년 제1회 선교사공의회에서 결정된 선교정책은 "부인들을 개종시키는 일과 그리스도교 신자인 소녀들을 교육하는데 특별히 힘쓸것, 이는 가정의 주부가 후손들의 양육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16)고 하여 여성교육의 시급함을 말했다. 이와 같은 교육에 대한 열의 속에서 개교회내에서 학교를 설립하는 일이 속출하였다. 예를 들어

 

"평양남산현회당에 쇽한 녀학교는 학도가 사십명이요 션싱은 김씨또라이라...이 학교 녀학도들이 학문과 덕힝을 겸해야 비호는 ㅈ에 특별히 공부는 셩경이오 그 외에 여러 과정은 하히들의 등분을 따라 가르치더라."17)

 

이러한 학교는 대부분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였다.

"... 우리들을 그리스도 어머니의게 맛겨 교육하면 온세상을 일제때 동안 새롭게 변할지라..."18)

또한 야학이나 강습회 등을 통하여 배우지 못한 여성들을 교육하는 기회로 삼았다.

 

"부인학교 평양 안경록 씨의 통신을 거한즉 각쳐 교회에 설립한 녀학교는 만히 잇스나 쥬학교만 잇슴으로 미셩한 청년녀자의게는 항복이 되지마는 임의가스를 보실피는 부인들은 쥬학할 시간이 업셔서 빈훌 뜻은 잇스나 홀수 업슴으로 가정과 외교에 디하야 항상 지탄하는 ㅈ이더니 다힝히 평양교회에 형민 제씨가 협의한 결과로 부인야학교를 설립하고 위치는 리간동 회당으로 뎡하엿느디 형미 제씨가 소무의 빈주함을 불고하고 교회ㅈ 쥬학에 참여치 못하는 부인들을 모집하야 밤마다 열심 교수하매 부인학성이 삼십여명에 달하엿다하니 우리는 이일에 디하야 찰셩할뿐 아니라 이와같은 부인야학교가 만히 설립되기를 보라노라."9)

 

야학에서 가르치는 과목들은 대개 "국한문셩경 죠션어독독,산슐등"20)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맨 처음에 시작된 여학교는 스크랜톤 여사가 세운,이화학당이라고 할 수 있다.그는 1886년 5월에 여학생 한 명을 상대로 학교를 시작하였다. 그후 1894년에 평양에 정의여학교가 설립되어 지방 미션여학교의 효시가 되어주었고 그러다가 1897년에는 선교부의 지방학교 설치에 관한 정책이 결정되어 전국 주요 도시마다 미션여학교가 설립되어 갔다.

 

그런데 스크랜톤 여사가 맨 처음 받은 학생은 정부관리의 첩이었고 한달 후에 받은 학생은 가난 때문에 의복,침식,학비가 보장되는 학교에 온 것이었고 그 다음 학생은 성문 밖에서 스크랜톤 여사가 줏어오다 시피하여 병을 치료한 여인의 딸로서 집도 없는 걸아였다고 한다.21) 즉 초기의 여학생들은 대개, 하층계층의 자녀이거나 고아이거나 과부, 시집갔다 쫓겨난 여성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예를 들어 캐롤라이나 학원(후기 배화학당)에서도 캠벨 여사는 학생모집을 위한 가정방문이란 말도 못낼 때이므로 지방에 순회할 때와 거리에서 방황하는 고아를 모아서 교육을 하였는데 맨 처음의 여학생은 박수지라는 아이였는데 리드 박사의 사택(남송현에 있던 선교사주택)에서 수위하는 이의 딸이었다"22) 고 한다.

 

그 후 이화학당은 1888년에 학생수가 18명으로 다시 1893년에는 30명으로 늘어났다. 1890년대에는 박영효의 딸이 이화학당에 와서 공부했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여성교육에 대한 뜻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딸들이 소수이지만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23)

 

초기에 있어서는 여학생들을 모집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웠지만 미션계 학교에서는 위에서 말한 방법이나 기독교 신자가 된 가정의 자녀들을 받아들여 학생들의 수는 점차로 늘어갔다. 그 당시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아뭏든 개화에 대한 열의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의 딸들이나, 혹은 본인 자신들이 원해서 교육받으러 오는 학생들은 미션계 학교의 소중한 재산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소수의 교육받은 여성들로서 이 사회의 지도적인 인물들이 될 학생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김활란은 인천에서 기독교 교리를 일찌기 터득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기독교를 알고 난 후 처음으로 얻은 아기 헬렌을 참된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보고자 하여,또한 자신은 굳은 신앙심에서 생긴 신념, 즉 딸들도 아들과 같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녀는 헬렌을 다른 언니들과 함께 학교에 보냈다는 것이다.24)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생으로서 BA학위를 받은 하란사는 인천 감리로 있던 하상기의 부인이었으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의 생을 초월하여 새 개척의 영향을 이화학당에서 구하였다고 한다. 처음 프라이 당장을 만나러 왔을때,가지고 온 등불을 끄고는 자기의 생이 그와 같다고 애소하면서 교육받기를 허용해 줄 것을 간청한 그녀는 기혼여성이었으나 결국 그의 열성에 의하여 이화에 받아들여졌다고 한다.25)

 

물론 교육을 받겠다고 생각한 여성들이 다 이처럼 쉽게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