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人生/[우주만물]세상만사

[만물상]산업체 부설학교

好學 2010. 9. 12. 21:38

 

[만물상]산업체 부설학교

 

 

1970년대 봉제공장들은 으레 밤 10시까지 잔업을 시키면서 ‘보름달’ 빵을 하나씩 나눠줬다. 여공들은 이내 허기가 졌지만 배 주리는 고향의 부모형제 생각에 빵이 넘어가지 않았다. 쉽게 상하는 빵을 모아둘 순 없어서 생긴 게 ‘빵계(契)’다. 빵을 그날의 계꾼 한 명에게 몰아줘서 곧바로 집에 부치게 했다. 걸핏하면 밤을 새우는 특근 땐 잠을 쫓으려고 작업대에 널린 각성제 ‘타이밍’을 주전부리하듯 삼켰다. 각성제 부작용 ‘타이밍 중독’이 예사였다.
▶신경숙의 반(半)자전 소설 ‘외딴 방’엔 1970년대 후반 구로공단 여공들의 삶과 생각이 섬세하게 담겨 있다. ‘나’의 공단 부설학교 짝은 원래 왼손잡이가 아니다. 사탕을 하루 2만개씩 비닐에 넣고 비틀어 싸느라 오른손 엄지와 검지에서 피가 나더니 마비되고 말았다. 홀어머니와 세 동생에게 돈을 부치느라 ‘치약 하나 사면 삼 년 쓰는’ 여공도 등장한다. 큰 회사 일당이 600~1000원이던 시절이다.
▶여공들은 가족을 돌본다는 자부심으로 ‘공순이’라는 손가락질을 이겨냈다. 그러나 ‘딸 가르쳐야 소용없다’는 낡은 생각 탓에 학교도 포기하고 오빠나 남동생 학비를 대야 했던 것만은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다. 여공들은 하얀 칼라의 교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꿈을 밤마다 꾸며 신열을 앓았다. 숙식과 학비를 모두 대주는 산업체 부설학교가 그 꿈을 이루는 배움터였다.
▶1974년 한일합섬이 마산 본사에 첫 근로자학교 한일여실고를 세웠다. 개교식 땐 4000여 학생들이 각자 고향의 잔디를 옮겨 심어 ‘팔도잔디’ 운동장을 만들었다. 잔디는 그대로 푸른 꿈과 희망이었다. 1988년엔 방직회사를 중심으로 41개 교가 4만7000명을 가르치며 번성했다. 1990년대부터는 모기업이 어렵거나 지원학생이 급감하면서 폐교가 잇따랐다. 한일여실고도 5만여 동문을 배출하고 2000년에 문을 닫았다.
▶1977년 대농이 청주공장에 설립한 대농부설여중, 지금의 양백상고가 내일 졸업식을 끝으로 폐교한다. 실업고 특별학급에 위탁하는 회사는 몇 있지만 부설학교는 부산 시온실업고 하나만 남는다. 산업체 학교의 퇴장은 가난에 무릎꿇지 않고 악착같이 일어서던 그 시대를 잊지 말라고 이른다. 아스라이 먼 시절 같지만 불과 20년 전 우리 누나와 여동생들 얘기다. 그들의 들꽃 같은 삶은 지금 우리가 겉은 풍요로워도 속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임을 일깨운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공순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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