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經信仰/[종합]인물.말씀.강연

1.개신교의 전래

好學 2010. 7. 19. 21:31

 

1.개신교의 전래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계기는 선교사들의 복음전파에 의한 것만은 아니었다. 즉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20년 전인 1864년 4월 어느 날 만주에 체재하던 조선 공자의 관가에 있던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1) 그러나 이들과 그 이후의 역사의 연결은 찾기 어렵기 때문에, 성서번역자들을 첫 개신교인들이라고 한다.

 

우선, 임오군란 이후 파견되었던 수신사 박영효의 사절단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던 이수정은 당시 일본 기독교계의 거물인 뜨다 센을 만나서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 기울이지게 되어 1883년 4월 29일 주일에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수정은 성서번역에 착수하여 복음서와 사도행전만을 포함한 [현토한한 신약성서]를 1884년에 출간했으며, 이어서 1885년에는 [신약 마가젼 복음셔언회]가 간행되었다.언더우드가 조선에 들어올 때에는 이 성서를 가지고 들어왔다고 한다. 이수정의 신앙은 조선선교로 이어지지는 못했으나 복음이 이보다 용이하게 전달되는데 도움을 준 것이다.

 

또한 1873년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의 선교사인 존 매킨타이어(John Mckintyre)와 존 로스(John Ross)가 만주에서 서상륜,이응찬을 만나 이들을 교화시켜 성서번역에 착수하였다. 이렇게 해서 1882년 가을에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와 [예수셩교 요안니복음젼서]라는 쪽복음서를 발간하였고 그후 1887년에는 신약성서 전부를 번역한 [예수셩교젼서]를 내놓을 수가 있었다. 특히 서상륜은 이 성서를 가지고 다니면서 남만주일대와 서울을 왕래하며 전도를 하였다.

 

그는 고향인 황해도 장연의 솔내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정착해서 복음을 전했고 1884년에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세워진 교회당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3) 따라서 언더우드의 전도여행시 "그는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가진, 세레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남자들을 백 명도 넘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4)

이렇게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이전에 이미 복음의 씨앗은 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씨앗을 더 많이 뿌리고 키우는데 있어서 선교사들의 입국은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개신교인으로서 기독교와 연관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와 살면서 처음으로 일한 인물은 북미 장로교 선교부의 파소을 받아서 중국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었던 호레이스 알렌(Horace N.Allen,安連,1858-1932)이라는 의사였다. 비록 국왕이 미국 공사에게 알렌이 선교사가 아니냐고 물었을 때 공사는 "그는 공사관에 소속된 의사"라고 답하였지만, 알렌은 사실상 그렇게 물은 국왕까지도 알고 있었던 선교사였다.

 

5) 그런데 알렌이 서울에 체재하게 된 것은 그 당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즉 두개의 세력이 선교사편에 유리하게 작용했으니,하나는 한국 개화당의 힘이요, 또 하나는 일본 세력이었는데 이 두 세력은 사실상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의 개화당은 일본인들로부터 배워 온 경험을 선전하고 있었고 또 일본은 서울에 있는 그의 협력자들에게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일인들과 개화당은 선굠누제에 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다. 선교단체는 "개화"의 힘이 될 것이고 그리하여 한국을 서양문화에 접하게 하고 먼저 서양식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신흥 일본의 문화에도 접하게 되리라고 본 것이다. 모든 일이 알렌을 위해서 잘 되어 가고 있었다.6)

 

그런데 알렌의 개화사업을 위해서는 너무나 불리하게 개화당이 주도한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알렌은 갑신정변때 상처를 입은 민영익을 치료해 주었기 때문에 결국 이 사건도 알렌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즉 알렌은 민영익의 상처를 치료함으로써 보수를 받았고 왕과 왕비로부터의 전갈과, 더구나 왕과 왕비의 시의로서의 임명을 받았던 것이다.

 

알렌은 이 기회에 대담한 요구,즉 선교부가 관장하는 병원을 하나 설치해 달라는 요구를 하였고 알렌의 요구는 관철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 일로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었고,다른 선교기관을 서울로 유치할 수가 있었다.7)

 

선교사들은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었으므로 알렌의 동료 선교사들은 왕실의 교용인이나 또는 정부의 고용인으로서 들어왔다. 알렌은 바로 이같은 방식으로 세 사람의 선교사를 들어오게 했다. 즉 감리교의 스크랜톤(William B.Scranton)박사와 장로교의 헤론(John W.Heron)박사는 왕립병원의 의사로서 들어왔고, 시의로서 들어왔으며 다른 사람들도 가능한 한 도와주었다.

 

안수받은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Underwood)와 아펜셀러(Henry G.Appenzeller)에서는 교육자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준(準)관료직을 얻어 주었다. 또 그는 벙커(D.A. Bunker),헐버트(Homer B.Hulbert)그리고 길모어(George W.Gilmore)목사들에게도 도움을 주어 미국공사관을 통해서 왕립학교의 교사로서 입국토록 했다.8) 이렇게 해서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교육과 의료사업을 통해서 조심스럽게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