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漢字文學/[동양명언]

제125주 동양명언

好學 2010. 8. 21. 10:11

 

제125주 동양명언 : 참된 사회정의의 실현은 正道를 바탕으로 한 隨時處中의 본질적 가치가 실천되는 것입니다.


◈ [금주 명언] - 待小人不難於嚴이나 而難於不惡이며, 待君子不難於恭이나 而難於有禮니라.

◆ [독음] - 대소인 불난어엄 이난어불오, 대군자 불난어공 이난어유례.
◆ [한자] - 대우할 대/ 작을 소/ 사람 인/ 아니 불/ 어려울 난/ 어조사 어/ 엄할 엄/ 말이을 이/ 어려울 난/ 어조사 어/ 아니 불/ 미워할 오// 대우할 대/ 임금 군/ 아들 자/ 아니 불/ 어려울 난/ 어조사 어/ 공손할 공/ 말이을 이/ 어려울 난/ 어조사 어/ 있을 유/ 예절 예

▶ [출전] - 『菜根譚(채근담)』〈前集(전집)〉

◈ [해석] - 소인을 대함에 있어 엄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미워하지 않기는 어려우며, 군자를 대함에 있어 공손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예를 지니기는 어려운 것이다.

▶ [어구풀이]
☞ 待小人 不難於嚴(대소인 불난어엄) : 소인을 대하는 데는 엄격함에 어렵지 않다는 뜻으로, 단순한 소인잡배(小人雜輩)에 대한 인도책(引導策)을 제시한 것이지만 본격적인 가치로 보자면 기존의 질서체계 속에서 관습적인 방법으로 엄격한 통제와 제어만으로 대처하는 것으로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 而難於不惡(이난어불오) : 미워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어렵게 여긴다는 뜻으로, 기존의 선입견으로 재단하고 규정해 버림으로 해서 보다 전향적인 포용력을 지니기가 어렵다는 의미인데, 역시 기존의 왜곡된 질서 체계 속에서 전향적인 방향으로 포용과 함께 자기 혁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으로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 待君子 不難於恭(대군자 불난어공) : 군자를 대하는 데에 있어 공손함을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으로, 구절의 기본적인 해석으로 의미를 보면 기본적인 예의를 갖춘 바른 자세에 대한 표현이지만, 역시 기존의 질서 체계에 안주하고 머물러 변화를 도외시하는 속성을 비유적으로 제시해 봅니다.

☞ 而難於有禮(이난어유례) : 본질적인 예의 가치를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뜻으로, 정중한 예의의 가치를 넘어서면 왜곡된 아첨으로 전락하고 말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역시 기존의 왜곡된 질서 체계의 극복하고 개혁하기 위한 중요한 가치는 본질적인 정도의 원칙이 바로 적용될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제시해 봅니다.


[해설] -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참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평생을 부단한 노력으로 살아가면서 올곧은 선비정신을 실천에 옮긴 성현(聖賢)들을 많이 접하곤 합니다. 이러한 전통사회 지식인들의 모습은 언제나 단순한 개인을 넘어 공동체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앞서 누차(屢次)에 걸쳐 확인했던 화두(話頭)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昨今)의 현실은 우리들에게 또 다시 바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정의를 외치게 하고, 개인의 이기적 속성에 일침을 가하는 고전의 명구(名句)들을 되새김에 있어 조금도 식상(食傷)함을 느낄 수 없는 것은 현실의 모순점을 제대로 집어내고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구조적 기틀을 마련하는데 아직 미흡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획일적이거나 타율적인 정신 개조(改造)를 논한다면 또 다른 병폐와 모순을 양산하는 결과만 벌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많이 경험해 왔습니다. 과거의 관(官) 주도의 사업이나 관변단체(官邊團體)들의 구호성 행사 등은 대표적인 전시행사의 표본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워야 할 바른 가치는 무엇보다 개인적 수양(修養)의 축적이 자연스럽게 사회 공동체가 미래지향적인 바른 사회정의로 귀결되는 실천적 가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주의 명언에서 수용해야 할 가치는 정도(正道)를 지키면서 포용과 관용을 베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인배(小人輩)에게 제시될 바르고 엄정한 가치는 지켜져야 하지만, 언제나 관용과 포용으로 감싸는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 것은 이 시대를 함께 걸어가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라 할 것이고, 군자에게 정중하고 공손한 자세를 보이는 것은 당연한 정도(正道)이지만, 그것이 정도를 넘어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식의 왜곡된 권도(權道)만을 꾀한다면 그것은 이미 정도를 무너뜨린 결과 그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결국 상식과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 투명성과 일관성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개인의 삶과 정신적 가치가 바른 덕성(德性)과 실천의 의지(意志) 속에서 정도(正道)를 지켜나가면서 포용과 배려의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아울러 우리가 반드시 경계하고 염두에 두어야 할 가치는 기존의 질서가 왜곡된 권도(權道)로만 유지된 질서라면 그러한 질서를 바로잡는 길을 단순한 이분법적인 현실론으로 동일한 양보를 요구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곡된 질서를 바로잡자는 주장에 대해 그 왜곡 자체를 인정하면서 동일하게 양보하라고 한다면 그 왜곡은 이미 바로잡힐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맹목적 양비론(兩非論)과 양시론(兩是論)으로는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을 수 없듯이 대립하고 있는 두 양상을 바라볼 때 진정한 대승적 합의는 단순한 동일분할식의 타협이 아닌 본질적 가치에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하는 방향에서 타협될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중용(中庸)의 가치는 고정불변(固定不變)의 고집이 아닌 정도(正道)를 바탕으로 한 수시처중(隨時處中)의 대응이라는 것을 새삼 되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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