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 218

[대한민국 제1호] 첫 외국인 단체관광 1972년 일본 수학여행단

[대한민국 제1호] 첫 외국인 단체관광 1972년 일본 수학여행단 1972년 10월 6일 부산 '부관(釜関)훼리터미널'. 까만 교복의 일본 학생들이 배에서 내렸다. 일본 시마네현 마쓰에(松江) 부속고교 3학년생 59명, 대한민국을 찾은 첫 외국인 수학여행단이다. 이들은 부산·광주를 구경하고 서울 워커힐 호텔에..

[대한민국 제1호] 1·21사태 이후 1968년 주민등록증 생겨

[대한민국 제1호] 1·21사태 이후 1968년 주민등록증 생겨 ▲ 1968년 1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된 1호 주민등록증. 대한민국 국민이 주민등록증을 갖고 다니기 시작한 것은 1968년 말부터다. 그해 1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1호 주민등록증이 전달됐고, 이후 국민들에게 발급되기 시작했다. 정부가 ..

[대한민국 제1호] 6·25전쟁 터지자 징병제 실시

[대한민국 제1호] 6·25전쟁 터지자 징병제 실시 광복과 함께 국내에는 군사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미(美) 군정이 1946년 군정법령 제28호에 근거해 모든 군사단체의 해산령을 내렸을 때, 국내엔 조선임시군사위원회와 학병단, 조선국군준비대, 조선학병동맹 등 30여개의 우파·좌파 군사단체가 ..

[대한민국 제1호]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1945년에 해군창설

[대한민국 제1호]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1945년에 해군창설 '조국의 광복에 즈음하여 앞으로 이 나라 해양과 국토를 지킬 뜻있는 동지들을 구함.' 1945년 8월 21일 손원일은 민병증과 함께 서울 거리에 이런 벽보를 붙이다 정긍모를 만났다. 정긍모도 비슷한 내용의 벽보를 붙이고 있었다. 그날 한갑수가 ..

[대한민국 제1호] 1988년 전화 1000만… '1가구1전화' 시대로

[대한민국 제1호] 1988년 전화 1000만… '1가구1전화' 시대로 국내에서 유선전화가 대중화된 것은 1986년 정부가 국내 기술로 개발한 교환기를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전화국에 보급하면서부터였다. 이로 인해 1988년 가입자가 1000만명을 넘어서면서 국내에서도 '1가구 1전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1980..

[대한민국 제1호] 전국민 안전의식 일깨운 이리역(현재 익산역) 폭발사고

[대한민국 제1호] 전국민 안전의식 일깨운 이리역(현재 익산역) 폭발사고 "쾅, 콰쾅!"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전북 이리역(현재 익산역) 주변은 집중 폭격을 당한 듯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화약 호송원 신모(당시 36세)씨가 켜놓은 촛불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으면서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40t..

[대한민국 제1호] 북한 대남간첩 남파는 1968년이 절정

[대한민국 제1호] 북한 대남간첩 남파는 1968년이 절정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끊임없이 무장·비무장 간첩을 내려보냈다. 이들은 남한 내 좌익 세력들과 결탁, 민·관 이간, 특정 인물·정당에 대한 모략선전, 국내 지식인을 접촉해 '평화통일론'을 주장하고, 반정부 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혁신계 용공..

[대한민국 제1호] 1984년 3월 대원외고·대일외고

[대한민국 제1호] 1984년 3월 대원외고·대일외고 1984년 3월 서울 중곡동 대원외국어학교(현 대원외고)에 신입생 720명이 입학했다. 당시 대원외국어학교는 지금처럼 특수목적고가 아닌 '각종학교'로 대안(代案)학교 성격을 띠었다. 영어에 흥미가 있는 학생들이 입학했으며, 교육과정이 일반계 고교보다..

[6·25 60주년][미니 戰史] (30·끝) 3년 전쟁이 남긴 유산과 후유증

[6·25 60주년][미니 戰史] (30·끝) 3년 전쟁이 남긴 유산과 후유증 6·25전쟁은 남북한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초래했다. 3년 1개월 동안 국군과 유엔군이 입은 인명피해는 77만6000여명이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의 피해 역시 200만명을 넘었다. 민간인의 경우 남한 100만명, 북한 150만명 등 모..

[6·25 60주년][미니 戰史] (29) 정전협정 조인

[6·25 60주년][미니 戰史] (29) 정전협정 조인 1953년 6월 8일 포로송환 협상이 타결되면서 휴전협상은 막바지로 치달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과 중공군의 보복공격으로 회담 분위기가 일시적으로 냉각되기도 했지만 양측 모두 휴전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정전을 향한 큰 흐름을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