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전쟁역사]6.25 전쟁,이전 76

[6·25 60주년][미니 戰史] (30·끝) 3년 전쟁이 남긴 유산과 후유증

[6·25 60주년][미니 戰史] (30·끝) 3년 전쟁이 남긴 유산과 후유증 6·25전쟁은 남북한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초래했다. 3년 1개월 동안 국군과 유엔군이 입은 인명피해는 77만6000여명이었다. 중공군과 북한군의 피해 역시 200만명을 넘었다. 민간인의 경우 남한 100만명, 북한 150만명 등 모..

[6·25 60주년][미니 戰史] (29) 정전협정 조인

[6·25 60주년][미니 戰史] (29) 정전협정 조인 1953년 6월 8일 포로송환 협상이 타결되면서 휴전협상은 막바지로 치달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과 중공군의 보복공격으로 회담 분위기가 일시적으로 냉각되기도 했지만 양측 모두 휴전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정전을 향한 큰 흐름을 뒤..

[6.25 60주년 미니 戰史](28) 포로송환 협상과 반공포로 석방

[6.25 60주년 미니 戰史](28) 포로송환 협상과 반공포로 석방 제네바협약 제118조는 “포로는 적극적인 적대행위가 종료한 후 지체없이 석방하고 송환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조항에 따른 6·25전쟁 포로의 ‘전원 송환’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어려움은 공산포로 구성이 단순하지 ..

[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5·끝> 유엔군 자신감 되찾은 지평리

[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lt;5·끝&gt; 유엔군 자신감 되찾은 지평리 전투 중공군에 첫 승리… ‘인해전술 공포’ 씻고 재반격 교두보 확보 중공군 공세로 全전선 고전…서울까지 다시 내주고 후퇴 새로 부임한 리지웨이 중장 화력 재정비… 재북상 명령양평 지평리 지키던 연합군, 4배 넘는 ..

[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 <4> 중공군과 첫 조우, 운산전투

[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 &lt;4&gt; 중공군과 첫 조우, 운산전투 1950.10.25∼11.3 연합군, 무방비로 중공군 맞아… 방심이 부른 ‘비극의 신호탄’ 맥아더 “중공 불개입” 오판 북진길 적 기습에 허 찔려 운산 지키던 美8기병연대 부대원 600명 잃고 패퇴 첫 패배 뒤에도 적 과소평가 상대병력 파..

[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3> 전쟁사에 빛나는 인천상륙작전

[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lt;3&gt; 전쟁사에 빛나는 인천상륙작전 맥아더, 3개 해변 시간차 공략… 최악 조건서 최고 전과 얕은 수심 등 지리적 장벽 속 배 230척 동원 7만명 상륙 보급로 막으며 포위망 완성 낙동강 전선 북한군 7만명…고립된채 달아나기 시작 2만5000명만 38선 넘어가 《6·25전..

[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2> 낙동강 전선의 격전, 다부동전투

[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lt;2&gt; 낙동강 전선의 격전, 다부동전투 북한군 포로 신문 다부동전투에서 백선엽 사단장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은 미 제27연대와의 연합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쳐 국군의 전투력을 불신하던 미군의 인식을 바꿔 이후 한미 연합작전에 기여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다부..

[복거일이 쓰는 6·25]<1>38선을 사수한 춘천지구 전투

[복거일이 쓰는 6·25]&lt;1&gt;38선을 사수한 춘천지구 전투 1950.6.25∼27 소양강 사이두고 사흘 혈전… 北 ‘서울 포위작전’ 좌절시켜 6사단 천혜 지형 이용 적의 공세 꺾어 ‘화염병’ 심일 소위, 北자주포 킬러 활약 한강 방어선 구축-미군 도착 시간 벌어 北‘한강북쪽 국군주력 섬멸’ 기도 실패 김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