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전쟁역사]6.25 전쟁,이전

[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5·끝> 유엔군 자신감 되찾은 지평리

好學 2010. 7. 10. 09:05
 
[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5·끝> 유엔군 자신감 되찾은 지평리 전투

 

 

 

중공군에 첫 승리… ‘인해전술 공포’ 씻고 재반격 교두보 확보

중공군 공세로 全전선 고전…서울까지 다시 내주고 후퇴
새로 부임한 리지웨이 중장 화력 재정비… 재북상 명령양평

지평리 지키던 연합군, 4배 넘는 적군에 포위 당해
사흘간 격전 끝에 물리쳐…적 4946명-아군 353명 피해

 



순시 중인 리지웨이 장군 맥아더 장군(오른쪽)과 전장을 순시 중인 리지웨이 장군(왼쪽에서 두 번째). 워커 장군 후임으로 미8군사령관에 임명된 그는 지평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정세

1950년 10월 하순에서 11월 초순에 걸친 중공군의 ‘1차 공세’로 대규모의 중공군 병력이 6·25전쟁에 개입한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맥아더 원수는 정세를 낙관했고 곧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맥아더 원수가 “종전을 위한 총공세”라고 부른 아군의 전면적 공세는 1950년 11월 24일 오전 10시에 개시되었다. 그러나 아군의 북진은 이내 중공군의 저항에 부딪혔고, 11월 26일엔 모든 전선에서 아군이 중공군에 밀리기 시작했다. 특히, 서쪽 평안도 지역의 미군 8군과 동쪽 함경도 지역의 미군 9군단 사이의 큰 틈새는 중공군 대부대의 침입을 손쉽게 해서, 8군의 우익인 한국군 2군단은 포위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중공군의 공세에 전선이 무너지면서, 아군의 모든 부대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가장 심각한 피해를 본 부대는 군우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미군 2사단이었다. 미군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 전투에서 2사단은 2개 연대가 실질적으로 궤멸되었으며 무려 4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패배는 아군에 큰 충격을 주었고 아군 병사들은 공황에 빠졌다.

중공군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12월 5일 아군은 평양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빠르게 북한 지역에서 물러났다. 12월 20일에는 임진강 남안에서 화천을 거쳐 양양에 이르는 새로운 방어선을 마련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12월 23일 서부전선을 지휘하던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이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낙동강전선을 지켜낸 명장이 후퇴 과정에서 뛰어난 군인 경력을 허무하게 마감한 것이었다.

○ 리지웨이의 수습

워커 중장의 후임은 매슈 리지웨이 중장이었다. 한국에 부임했을 때, 그는 목적을 잃은 군대를 발견했다. 미군 병사들은 자신들이 조국에서 멀고 낯선 땅에서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바로 미군 병사들에게 6·25전쟁의 뜻을 설명하는 성명서 ‘왜 우리가 여기 있는가?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싸우는가?’를 발표했다. 아울러 한국 정부와 군대를 서둘러 안심시켜야 할 필요를 느꼈다.

한국 사람들도 자기 나라가 미국에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할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 각하, 나는 당신을 만나 기쁘고 이 자리에 서게 되어 기쁘며 나는 여기 머물 생각입니다”라고 인사했다. 그제야 굳었던 이 대통령의 얼굴이 밝아졌다고 그는 회고했다.

이어 리지웨이 장군은 중공군에 대한 두려움으로 패배주의에 빠진 아군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에 착수했다. 그의 기본 전략은 우세한 화력과 기동력으로 중공군이 지닌 병력에서의 우세를 꺾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보병, 포병, 기갑의 협동을 강조했고 해군과 공군의 지상 작전에 대한 지원을 좀 더 효율적으로 만들려 애썼다. 특히, 포병 부대의 증강을 시도했다.

이런 전략은 성공해서, 전선은 차츰 안정되었다. 위력 수색에서 한강 이남엔 중공군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자 리지웨이 장군은 재반격을 명령했다. 아군의 공세에 따라 1951년 2월 중부전선에서 싸움이 치열해졌는데, 결정적 전투는 경기 양평군 지평리에서 나왔다.



참전용사의 헌화 지난달 26일 경기 양평군 지평리에서 열린 ‘지평리 전투 기념행사’에서 먼저 간 전우들을 추모하며 헌화하는 참전용사. 양평=연합뉴스
○ 지평리 전투의 배경

지평리는 동서로 놓인 중앙선과 홍천에서 여주로 가는 도로가 교차하는 곳이어서, 한강 남쪽에 방어선을 친 아군에겐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지평리는 2월 3일부터 미군 23연대전투단이 지키고 있었다. 미군 2사단 23연대장인 폴 프리먼 대령이 지휘하는 이 부대는 23연대를 중심으로 프랑스군 1개 대대, 1유격중대, 37야전포병대대, 503야전포병대대 B포대, 82방공포병대대 B포대, 그리고 2전투공병대대 B중대로 이루어졌으며 총병력은 5400명가량 되었다.

23연대는 원래 1950년 겨울 청천강 군우리 전투에서 2사단의 후위를 맡았었다. 프리먼 대령은 작전 계획에 나온 퇴로가 아닌 도로를 이용해서 자신의 부대를 무사히 철수시켰다. 덕분에, 군우리 전투에서 궤멸된 다른 2개 연대와는 달리, 23연대는 전력이 강했다. 1월 31일에서 2월 1일 사이에 지평리 동남쪽 중앙선의 터널 두 개를 놓고 벌어진 ‘쌍굴(Twin Tunnel) 전투’에서 그는 포위한 중공군을 격파한 터였다. 23연대의 2개 대대와 프랑스군 대대의 2000명 남짓한 병력이 800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중공군과 싸웠는데, 미군의 사상자는 225명이었고 중공군의 사상자는 3600명으로 추산되었다.

프랑스군 대대를 이끈 랄프 몽클라르 중령은 이색적인 인물이었다. 몽클라르는 전명(nom de guerre·부대가 적군에게 정체를 감추기 위해 임시로 쓰는 이름)이고 원래 이름은 마그렝-베르네리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공을 세웠고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3성 장군이었다. 프랑스 정부가 1개 대대 병력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그는 자신이 지휘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명령 계통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그는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되었다.

이처럼 뛰어난 지휘관들이 이끈 터라, 비록 압도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의 압박을 받았어도, 미군 23연대와 프랑스군 대대는 사기가 높았다. 게다가 이미 쌍굴 전투에서 함께 싸워 승리한 터라, 두 부대는 서로 친근하고 믿는 사이였다.

당시 전황은 아군에게 점점 불리해지고 있었다. 한국군의 전열이 무너지면서, 측면을 위협받은 미군 부대들이 서둘러 물러났다. 전선이 남쪽으로 물러나자, 지평리 지역은 전선의 돌출부가 되었다. 게다가 이 지역으로 점점 많은 중공군이 모여들어서, 23연대전투단은 압도적인 중공군에게 포위될 상황이 되었다. 실제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파견된 부대들이 중공군에게 막혀서 지평리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2월 12일부터 프리먼 대령은 2사단장 닉 러프너 소장에게 철수 허가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리지웨이 장군이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는 13일까지 계속 철수 허가를 요청했지만 늘 같은 답변을 들었다. 리지웨이 장군은 “만일 23연대전투단이 지평리에 남아서 싸운다면, 꼭 구원군을 보내겠다”고 프리먼 대령에게 약속했다.

리지웨이 장군이 그렇게 지평리에 집착한 까닭은 둘이다. 하나는 지평리가 한강 남안의 방어선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맥아더 원수는 2월 11일 한강 남안의 방어선을 지킬 수 있으리라고 워싱턴에 보고했고 리지웨이 장군은 그렇게 하겠다고 맥아더 원수에게 확약한 터였다. 다른 하나는 그가 지평리 고수 작전을 중공군의 우세한 병력에 미군의 우세한 화력으로 맞선다는 자신의 전략을 시험하는 마당으로 삼았다는 사실이었다.

○ 지평리 전투의 경과

중공군은 예상대로 2월 13일 밤에 공격해 왔다. 이 공격에 투입된 중공군 부대들은 115사단의 344연대, 119사단의 356연대, 120사단의 359연대, 그리고 126사단의 376연대였다. 중공군은 오후 10시에 공격준비사격을 하고 오후 11시 30분에 사방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아군이 이런 공격을 잘 막아내자, 중공군은 새벽에 둘레의 고지들로 물러났다. 13일 밤의 전투에서 23연대전투단은 100명가량의 사상자들을 냈다. 중공군의 손실은 훨씬 컸다.

14일 낮엔 일본에서 날아온 수송기들이 23연대전투단에 필요한 물자들을 투하했다. 고립된 이 부대를 구원하려는 노력도 시작되었다. 이 부대의 주보급로인 여주에서 주암리를 거쳐 지평리에 이르는 24번 도로를 다시 열기 위해서 영국군 27여단이 북상했다. 그러나 그 도로를 막은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27여단은 지평리 남쪽 7마일 지점에서 멈췄다.

영국군의 진격이 부진하다는 소식을 듣자, 미군 5기병연대가 여주에서 곡수리를 거쳐 지평리에 이르는 24A번 도로를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부대도 지평리 남쪽 8마일 지점에서 끊어진 다리를 우회하기 위해 멈췄다. 그래서 23연대전투단은 14일 밤에도 원군 없이 중공군과 싸워야 했다.

14일 밤 중공군은 치열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사방에서 아군 진지를 압박했다. 주공은 방어 진지 남서쪽을 맡은 G중대 지역이었다. 엄청난 손실을 보면서도 계속 공격해오는 중공군에 맞서, G중대는 분전했다. 특히 폴 맥기 중위가 이끈 3소대의 분전은 영웅적이었다. 뒤에 3소대 지역에서 발견된 중공군 시체는 800구가 넘었다.

맥기 중위의 분전을 기려, 3소대가 지킨 고지는 ‘맥기 고지(McGee Hill)’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줄기찬 공격에 밀려 G중대는 결국 진지를 내주었다. 프리먼 대령이 미리 2차 방어선을 마련해둔 덕분에, 미군은 중공군이 더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만, 여러 차례의 반격에도 원래의 진지를 되찾지는 못했다.

15일 낮에 포병과 전차의 화력을 집중하고 공중 지원을 받고서야, 미군은 오후 4시 30분에 가까스로 중공군을 몰아낼 수 있었다. 그때 5기병연대의 구원군이 이르렀다. 두 부대는 협력해서 물러나는 중공군을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중공군은 큰 손실을 입었으니, 미군이 추산한 중공군의 손실은 4946명이나 되었다. 23연대전투단의 손실은 전사자 52명, 전상자 259명, 실종자 42명이었다.

○ 지평리 전투의 의의

지평리 전투는 그리 크지 않은 싸움이었다. 작전 기간 중에 투입된 병력은 아군 2개 연대와 중공군 6개 연대였고, 사흘에 걸쳐 지평리에서 벌어진 싸움 자체엔 아군 1개 연대전투단과 중공군 4개 연대가 투입되었다. 규모에서나 기간에서나 큰 싸움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싸움의 영향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지평리 전투에서의 승리는 중공군에 줄곧 패배해서 두려움에 질린 아군에 잃어버린 자신감을 되찾아주었다. 적진 속에 고립된 작은 부대가 몇 배나 되는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큰 전과를 올린 이 전투는 중공군이 맞설 수 없을 만큼 강한 군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군 지휘관들과 병사들에게 일깨워주었다.

아울러, 지평리 전투는 리지웨이 장군의 전략의 타당성을 증명해 주었다. 그는 중공군의 우세한 병력은 아군의 우세한 화력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는데, 지평리 전투는 그 전략이 중공군이 선택한 싸움터에서도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그 뒤로 아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적군의 출혈을 강요하는 작전을 펼쳐서 성과를 거두었다. 전선이 꾸준히 북쪽으로 옮아간 것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지평리전투는

1951년 2월 13∼16일 경기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미군 2보병사단 23연대와 여기에 배속된 프랑스군 1개 대대가 중공군 4개 연대에 맞서 3일간의 격전 끝에 승리한 전투다. 혁혁한 전과로 세계 전투사에 이름을 올렸다. 중공군을 상대로 한 유엔군의 첫 승리로 2차 반격 작전의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지난달 26일 현장에서 미군 및 프랑스 참전용사와 가족들을 초청해 ‘지평리 전투 재현행사’를 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