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전쟁역사]6.25 전쟁,이전

[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 <4> 중공군과 첫 조우, 운산전투

好學 2010. 7. 10. 09:04

 

[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 <4> 중공군과 첫 조우, 운산전투

 

 

 

1950.10.25∼11.3

연합군, 무방비로 중공군 맞아… 방심이 부른 ‘비극의 신호탄’




맥아더 “중공 불개입” 오판
북진길 적 기습에 허 찔려
운산 지키던 8기병연대
부대원 600명 잃고 패퇴

첫 패배 뒤에도 적 과소평가
상대병력 파악 않고 총공세
30만 중공군 반격에 대패
6·25 최대실책으로 기록돼




맥아더 원수는 자신 있게 중공군의 개입이 없으리라고 단언했지만 중공군은 이미 12만 명의 병력을 북한으로 보내고 더 많은 병력을 압록강 너머 접경지역에 집결해 놓았다. 중공군은 공격할 때 나팔을 불고 징을 치며 유엔군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정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해 낙동강전선의 북한군이 무너지자 남한지역은 실질적으로 수복됐다. 1950년 9월 하순 아군 지도부가 맞닥뜨린 문제는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하느냐 마느냐 하는 결정이었다. 원래 미국을 비롯한 참전국들은 북한으로의 진격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싸움터의 논리는 달리 움직이고 있었다. 아군의 진격엔 탄력이 붙었고 북한군의 패주로 생긴 힘의 공백은 아군을 빨아들였다. 북한군 침입으로 이미 권위를 잃은 ‘국경 아닌 국경’ 38선은 이처럼 거센 싸움터의 논리를 막을 수 없었다.

이때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결정이었다. 국제정세를 잘 읽고 심지가 굳은 이 지도자에게 북한이 일으킨 싸움을 38선에서 멈춘다는 일은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9월 29일 유엔군 총사령부가 모든 작전부대들에 일단 38선에서 진격을 멈추라는 명령을 내리자 그는 한국군에게 북한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마침내 10월 1일 한국군 3사단 23연대는 38선을 넘어 북한 땅으로 진격했고 이튿날 양양을 점령했다(이 일을 기념해 우리는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삼았다).

거세게 진격하는 아군을 막을 힘이 북한군엔 없었다. 병력과 화력에서도 이미 큰 차이가 났지만 사기도 떨어진 터였다. 그래서 소규모 부대들이 잠시 저항하다 패주하는 상황이 되풀이됐다.

덕분에 아군의 진격은 순조로워 10월 19일 한국군 1사단과 미군 1기병사단은 평양을 점령했다. 10월 21일엔 이승만 대통령이 능라도비행장에 내려 열광적인 평양 시민들 앞에서 연설했다.

같은 날 도쿄에서 날아온 맥아더 원수도 비행장에서 가장 먼저 평양에 돌입한 미군부대인 1기병사단 5기병연대 F중대를 사열했다. F중대는 96일 전 한국에 상륙했던 부대였다. 맥아더 원수는 상륙 당시의 부대원 200명 가운데 아직 남아있는 병사들이 있으면 앞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앞으로 나온 병사는 겨우 다섯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세 명은 부상병이었다.

○ 중공군의 개입

평양이 아군에게 점령되면서 북한 정권은 실질적으로 무너졌다. 동부전선에선 국군이 이미 원산과 함흥을 점령한 터였다. 이제 아군에게 남은 일은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까지 진격해 북한군을 소탕하는 작전이었고 그 작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고 예상됐다.

이때 아군 지휘부가 고뇌한 것은 중공군이 북한을 도우려 참전할 가능성이었다. 10월 3일 중공 외교장관 저우언라이()는 “만일 유엔군 병력이 38선을 넘어 북한 영토로 진격하면 중공은 개입하겠다”고 선언했고 10월 9일엔 중공 외교부 대변인이 개입 위협을 되풀이했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가 만났다. 중공군의 개입을 걱정하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맥아더 원수는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단언했다. “제정신인 군사지휘관이라면 겨울을 바로 앞두고 대규모 작전을 시작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맥아더 원수의 얘기가 인천상륙작전을 고집하면서 한 자신의 말을 뒤집었다는 사실이다. 인천상륙작전이 워낙 어려우므로 제정신인 군사지휘관은 그것을 선택할 리 없고, 그래서 오히려 기습이 성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그는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자신이 거꾸로 기습당할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맥아더 원수가 그렇게 자신있게 중공군의 개입이 없으리라고 단언하던 날, 중공군은 이미 12만 명의 병력을 북한으로 보냈고 더 많은 병력을 압록강 너머 접경지역에 집결해 놓았다.

○ 운산전투의 서막

1950년 10월 하순 아군은 온 전선에서 빠르게 국경을 향해 북진하고 있었다. 미군 1군단 예하 한국군 1사단은 청천강을 넘어 운산으로 향했다. 10월 25일 사단의 선봉인 15연대는 운산 바로 북쪽의 전투에서 중공군 한 명을 생포했다. 아군이 생포한 첫 중공군 포로였다. 이 포로는 근처에 2만 명의 중공군 병력이 있다고 말했다.

미군 8군 지휘부는 중공군 포로의 진술과 대규모의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1사단장 백선엽 준장의 얘기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소규모의 중공군이 북한군을 지원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아군이 잇달아 전투에서 밀리자 워커 중장은 평양에 머물던 미군 1기병사단에 운산을 지나 압록강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0월 30일 1기병사단의 선봉인 8기병연대가 운산에 이르러서 한국군 12연대의 임무를 맡았다. 12연대는 구룡강 남쪽 입석의 재집결지로 이동했고 11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에 궤멸된 한국군 2군단 8사단과 접촉하기 위해 동쪽으로 움직였다. 북쪽의 15연대는 중공군의 공격을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11월 1일 운산지역의 아군은 삼탄강을 경계로 동쪽엔 한국군 1사단이 있었고 서쪽엔 미군 8기병연대가 있었다.

○ 운산전투의 경과

이처럼 미군 지휘관들이 중공군의 개입에 대비하지 않는 사이 중공군은 운산지역을 포위하려고 시도했다. 이 작전에 투입된 부대들은 115사단과 116사단이었다. 11월 1일 정오에 1기병사단 5기병연대는 운산으로 가는 길목을 점령한 중공군 부대를 축출하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운산의 미군 8기병연대와 한국군 15연대는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돼 고립됐다.

이때 미군 1군단 오른쪽의 한국군 2군단은 중공군의 공격에 와해됐다. 그래서 운산은 전선의 돌출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운산을 지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미군 1군단 사령부는 미군 8기병연대와 한국군 15연대에 철수명령을 내렸다. 15연대가 마지막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불행하게도 중공군의 집중공격을 받은 15연대는 진지를 지킬 수 없었다. 퇴로가 중공군에 점령된 상태였으므로 철수도 어려웠다. 로이 애플먼은 ‘남으로 낙동강, 북으로 압록강’에서 “대략 오후 11시 이후 한국군 15연대는 빠르게 분해됐고 밤 12시 조금 지나서 전투부대로서 존재하기를 멈췄다”고 기술했다.

미군의 철수를 엄호하기로 한 한국군 15연대의 붕괴는 미군 8기병연대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이 부대의 철수는 2대대, 1대대, 3대대 순으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이미 중공군이 단 하나의 퇴로를 차단했으므로 2대대와 1대대는 차량들과 중화기들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었다.

후위를 맡은 3대대의 운명은 훨씬 참혹했다. 2일 오전 3시에 3대대 본부는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혼란에 빠지고 큰 손실을 입었다. 일부 병력은 걸어서 남쪽으로 탈출했지만 나머지는 포위된 채 진지 안으로 들어온 중공군들과 백병전 및 수류탄전을 펼쳤다. 새벽이 되자 미군 항공기들의 지원을 받아 생존자들은 임시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에 들어갔다. 이들 가운데 전투능력이 있는 병력은 약 200 명이었고 부상자들이 170명가량 됐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5기병연대 병력이 차단된 퇴로를 뚫으려고 나섰다. 2일 오전 4시부터 시작돼 종일 계속된 작전에서 5기병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은 530명의 손실을 입고서도 중공군 115사단의 343연대가 점령한 길목을 빼앗지 못했다. 마침내 오후 늦게 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은 8기병연대 3대대의 구출을 포기하고 5기병연대에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결정은 미군에겐 더할 나위 없이 치욕적이었으니 미군 역사상 고립된 부대의 구출을 포기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2일 오후 늦게 8기병연대 3대대의 생존자들은 항공기가 떨어뜨린 전문을 받았다. 구원의 시도가 실패했으므로 생존자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밤에 탈출하라는 명령이었다. 생존자들은 협의 끝에 2일 밤은 그대로 버텨보기로 했다. 그날 밤 중공군은 박격포 사격에 이은 보병 공격을 여섯 차례 시도했지만 많은 손실을 입고도 미군 생존자 진지를 점령하지 못했다. 그리고 낮에 산속에 숨어 있었던 2대대 병사 50여 명이 합세했다.

3일 낮엔 항공지원이 없었고 밤엔 중공군의 공격이 이어졌다. 생존자들은 탄약이 거의 떨어졌으므로 적군의 무기를 주워 싸웠다. 4일 새벽 3대대의 생존자들은 전투 가능한 병력 200여 명에 부상병이 250명가량 됐다. 상황이 너무 절박했으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탈출하기로 결정됐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죽거나 포로가 됐다. 연대에 복귀한 3대대 병력은 장교 10명에 200명이 채 안 되는 병사뿐이었다.

운산전투에서의 아군 손실을 정확히 계산하기는 어렵다. 애플먼에 따르면 “야간 전투에서 한국 15연대의 병력 손실은 자인한 것처럼 무척 컸다. 연대의 무기와 장비 손실은 실질적으로 총체적이었다.” 8기병연대는 병력 600명 비롯해 많은 무기와 장비를 잃었다.

○ 운산전투의 중요성

운산전투는 미군과 중공군의 첫 싸움이었다. 당연히 이 전투의 과정과 결과는 흥미롭고 중요했다. 이 전투에서 미군이 입은 손실도 무척 컸다.

그러나 운산전투를 결정적 전투로 만든 것은 전투 자체보다는 전투에 대한 미군 지휘부의 분석과 대응이었다. 한국군 2군단이 궤멸되고 운산전투에서 한국군 15연대와 미군 8기병연대가 포위돼 심대한 피해를 보고서야 중공군이 대규모로 개입했고 전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미군 지휘부는 그런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8군 정보참모부는 북한에 들어온 중공군을 대략 2만7000명으로 추산했다. 이런 비현실적 판단이 나온 가장 큰 원인은 맥아더 원수의 낙관적 견해였다. 그의 견해는 정보참모부의 부족하고 부정확한 정보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결정적 요인은 공군력으로 중공군에 대적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이었다.

이런 맥아더 원수의 판단을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회의론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가 거의 혼자 힘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자 그의 권위는 누구도 도전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마침내 11월 24일 맥아더 원수는 ‘종전을 위한 총공세’를 명령했다. 그래서 30만 명이나 되는 중공군이 숨어 기다리는 산맥 속으로 아군은 진격했다. 적군에 대한 지식도 없고 적의 기습에 대한 준비도 없이. 결국 아군은 중공군에게 대패했고 북한지역에서 급히 물러나야 했다. 운산전투 뒤에 아군 지휘부가 내린 판단은 6·25전쟁에서 가장 결정적인 실책으로 판명됐다.



운산전투는

운산전투(1950년 10월 25일∼11월 3일)는 중공군이 한국에 침입해 최초로 전선에 출현하였을 때 한국군 제1사단과 미군 제1기병사단이 구룡강 연안 운산지역 일대에서 중공 제39군의 기습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전개한 방어전투다. 이 전투에서 유엔군은 중공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가했으나 결국 방어에 실패하고 대부분의 장비를 잃은 채 영변과 용산동 지역으로 철수하게 됐으며 특히 미 제8기병연대는 운산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돼 병력 과반수를 잃었다. 이 전투로 미 제8군은 진격작전을 중지하고 청천강 연안으로 병력을 철수시켜 방어태세로 전환하게 됐으며 중공군은 전과를 확대해 구장동-영변-용산동 선까지 진출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