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韓國歷史/[전쟁역사]6.25 전쟁,이전

[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2> 낙동강 전선의 격전, 다부동전투

好學 2010. 7. 10. 08:58
 
[복거일이 쓰는 6·25의 결정적 전투]<2> 낙동강 전선의 격전, 다부동전투
 

 

 



북한군 포로 신문 다부동전투에서 백선엽 사단장이 이끄는 국군 1사단은 미 제27연대와의 연합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쳐 국군의 전투력을 불신하던 미군의 인식을 바꿔 이후 한미 연합작전에 기여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다부동전투에서 생포한 북한군을 직접 신문하고 있는 백 사단장(오른쪽).

동아일보 자료 사진


“뚫리면 끝장” 전차 몸날려 막으며 50여일간 ‘피의 사수’

파죽지세로 남하한 북한군
낙동강 방어선 돌파 위해 최정예 3개사단 투입 총공세

백선엽 사단장 수적 열세 딛고 육박전-각개전투로 고지 지켜


공격 또 공격… 양측 8000명 전사



대구 북방 약 20km에 위치한 경북 칠곡군 다부동고개는 예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국군과 미군은 최정예 병력을 동원한 북한군에 사생결단으로 맞서 승리함으로써 낙동강전선 최후 교두보를 지켰다. 사진은 경북 칠곡군 다부동에 있는 전적비. 옆에는 기념관도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우세한 북한군에 밀려 국군은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내주고 한강 남쪽으로 물러났다. 섣불리 한강교를 폭파한 탓으로 서부전선 국군 부대들은 중화기와 차량들을 버린 채 뿔뿔이 한강을 건너야 했다. 초기 전투에서는 큰 손실을 입지 않고 물러난 1사단이 중화기를 다 버리고 나룻배로 한강을 건넌 것은 뼈아픈 손실이었다. 서울이 북한군에 함락되자 육군본부는 한강에서 적군을 막으려 했다. 시흥지구 전투사령부가 새로 만들어지고 김홍일 소장이 사령관이 되었다. 김 사령관은 수도, 1, 2, 3, 5, 7사단 잔여 병력을 모아 한강 남안을 지키는 방어선을 만들었다. 이제 국군의 희망은 미군의 지원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걸렸다. 방법은 북한군의 남하를 되도록 늦추는 것이었다. 다행히 한강선 방어전이 성공해 일주일을 벌 수 있었다.》


마침내 미군이 투입되었다. 처음 투입된 부대는 24사단 21연대 선발대였다. 찰스 스미스 중령이 지휘하는 406명의 보병과 1개 105mm 포대로 이루어진 ‘스미스 태스크포스’사단이었다. 스미스사단은 7월 5일 오산 북쪽 죽미령()에 방어선을 쳤다. 그러나 이내 패퇴했다. 북한군 전력이 예상보다 강했던 것이다.

북한군의 핵심병력은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경험을 쌓은 조선족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야간전투와 포위작전에 능했다. 부대 주력이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하는 사이에 다른 부대가 우회해 포위하는 중국군의 전술에 미군이 당한 것이다. 게다가 미군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북한군 전차를 막을 무기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북한군 T-34 전차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쓰인 2.36인치 로켓포탄을 맞고도 끄떡없었다. 결국 스미스부대는 전사자 150명, 실종자 31명이라는 참담한 손실을 입고 물러나야 했다. 대전()전투(7월 18, 20일)에서는 사단 주력이 무너져 사단장 딘 소장이 포로로 잡힐 정도였다.

한미연합군을 지휘한 8군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은 7월 말 경상도 일대까지 한국군과 미군이 물러서자 더는 물러날 곳이 없다는 판단하에 ‘낙동강방어선’을 설치했다. ‘부산 해두보(Pusan Perimeter)’라 불린 이 방어선은 낙동강을 지형 자산으로 삼아 동북부 산악지대와 서남부 남강 및 남해를 이용해 이뤄졌다. 이 최후의 방어선은 멋진 구상이었다. 낙동강을 전선으로 삼았으므로 방어가 쉽고 전선이 비교적 짧고 단순했다. 좋은 교통망을 이용해 내선()의 이점을 십분 활용할 수 있어 전선이 뚫려도 이내 회복할 수 있었다.

낙동강방어선은 왜관을 기점으로 동북쪽은 국군이, 서남쪽은 미군이 맡았다. 국군은 왜관부터 1, 6, 8, 수도, 3사단이 배치되었고 미군은 왜관부터 1기병, 24, 25사단이 자리 잡았다. 낙동강방어선은 초기 방어선인 ‘X선’과 최후의 방어선인 ‘Y선’으로 이루어졌다.

마지막 방어선에서 벌어진 싸움이었던 만큼 전투는 지속적이고 치열했다. 가장 치열했던 곳이 서북쪽 북한군 지역에서 대구로 가는 길목인 왜관 동북쪽 다부동이었다.

북한군은 대구 점령을 일차 목표로 삼았다. 교통중심지인 데다 국군과 미군의 사령부가 있었으므로 정치적 중요성도 무척 컸다. 북한 입장에서는 또 이곳을 지키는 군대가 미군이 아니라 국군이었다는 점도 이점이었다. 뒤에 중공군도 마찬가지였다.

북한군 2군단은 김천에서 대구에 이르는 축선을 주공()으로 삼고 3, 13, 15사단을 다부동에 투입했다. 3개 사단 가운데 이영호 소장이 지휘한 3사단은 북한군의 최정예 부대로 서울에 맨 먼저 입성했고 이어 미군 24사단이 친 방어선들을 뚫고 내려왔다.

이곳을 지킨 국군은 백선엽 준장이 이끄는 1사단이었는데 넓은 정면을 방어하면서 잘 싸웠다. 미국 육군부가 낸 6·25전쟁 공식 전사()인 ‘남으로 낙동강, 북으로 압록강’을 쓴 로이 애플먼은 책에서 “백 소장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1사단은 대구에 이르는 산악 접근로에서 용감하고 피 흘리는 방어전을 수행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압력은 갈수록 거세어져 1사단은 8월 12일 Y선으로 물러났다. 백 준장은 13연대를 왼쪽에 배치해 낙동강을 굽어보는 328고지를 점령하게 하는 한편 12연대를 중앙의 수암산(519m)과 유학산(839m)에 배치하고 우익인 11연대를 전차 접근로인 천평동 계곡(다부동의 북쪽 계곡) 좌우에 있는 산줄기에 배치하기로 했다. 그러나 12연대가 유학산과 수암산에 이르고 보니 북한군이 밤사이 샛길로 들어와 미리 점령하고 있었다. 사단의 중앙부 고지에 적군이 자리 잡은 것이었다. 1사단은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공격해야 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낙동강방어선의 이점을 살리려면 유학산과 수암산을 확보해야만 했다. 전선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싸움도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싸움마다 접근전이었고 소총을 쏘기도 어려워 수류탄전으로 치러졌다. 육박전도 드물지 않았다. 당연히 병력 손실이 많았다. 이 어려운 상황을 1사단은 잘 버텨냈다.

한편 북한 최고사령부가 대구 점령 시한으로 정한 8월 15일이 가까워지자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1사단이 맡은 전선 전부에서 근접전이 벌어졌다. 이즈음 북한군 105전차사단은 새로 보급 받은 전차 21대를 모두 대구 공격 사단에 배정했다. 화력이 약한 데다 전차를 갖지 못한 1사단으로선 중대한 고비였다. 백 준장은 상부에 거듭 증원을 요청했다.

미 8군사령부도 1사단의 절박함을 듣고 증원군을 보냈다.

낙동강방어선을 지키는 미군과 국군을 지휘하는 워커 중장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예비병력 부족이었다. 위급한 상황에 대체 투입할 병력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고심 끝에 고안해 낸 대책은 ‘소방대(fire brigade)’를 운용하는 것이었다. 특정 부대를 위험한 전선에 투입해 ‘불을 끄는’ 임무를 맡긴 것이다. 이것은 미군의 뛰어난 기동력을 감안한 매우 현실적인 전술이었다.

임무는 미군 25사단 27연대가 맡았다. 이 부대는 존 마이켈리스 중령이 이끄는 부대로 이미 미군 24사단 지역으로 진출한 북한군을 격퇴해 소방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터였다.

마침내 8월 17일 미군 27연대가 다부동에 이르렀다. 1개 전차중대와 2개 포대가 배속된 강한 화력을 가진 부대였다. 이튿날 국군과 미군은 일제 공격에 나섰다. 미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계곡을 따라 수월하게 전진했으나 산줄기를 따라 공격에 나선 국군은 많이 나아가지 못했다.

그날 밤 북한군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우고 공격해왔다. 미군은 3.5인치 로켓포, 전차포, 그리고 야포로 적군 전차들과 자주포들을 파괴하고 보병 100여 명을 사살했다. 북한군은 이내 물러났다. 북한군의 이런 야간공격은 모두 일곱 차례 있었는데 모두 패퇴했다. 실패한 공격방식을 계속 되풀이한 것은 ‘독전대()’를 동원해서 병사들을 몰아세우는 전체주의 군대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8월 19일엔 미군 2사단 23연대와 국군 8사단 10연대까지 1사단을 돕기 위해 27연대 후방에 배치되었다. 국군과 미군의 3개 연대가 동원됐을 만큼 다부동전투는 중요했다.

북한군의 마지막 야간공격은 8월 24일에 있었다. 전차 2대를 앞세운 보병 2개 중대가 공격했지만 미군에게 쉽게 격파되었다. 27연대가 8월 18일에서 25일까지 파괴한 북한군 중무기는 T-34 전차 13대, 자주포 5문, 차량 23대였다. 8월 25일 소방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미 27연대는 국군 1사단에 다부동지역을 인계하고 떠났다.

치열한 전투였던 만큼 피아() 간에 많은 전사자가 났다. 국군은 2300명이, 북한군은 5690명이 전사했다. 1사단이 미군에 다부동지역을 인계하고 이동하게 되었을 때 미군 병사들이 “저 위에 있는 시체들을 모두 파묻기 전엔 지역을 인수하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였다고 백 장군은 그의 영어 회고록 ‘부산에서 판문점까지’에서 술회했다.

낙동강전선에서 죽은 북한군의 상당수는 ‘의용군’이라는 이름을 붙여 강제로 징집한 젊은이들이었다. 당시 종군 문인으로 싸움터를 찾았던 조지훈은 뒷날 ‘다부원에서’라는 시에서 끔찍한 정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생령()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간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다부동전투가 끝난 뒤에도 낙동강방어선은 안정되지 않았다. 8월 공세가 실패하자 북한군은 남은 병력과 자원을 다 모아 마지막 공세를 기도했다. 9월 2일 북한군 2군단은 1, 2, 13사단과 17전차여단으로 이루어진 ‘제3공격집단’을 국군 1사단과 미군 1기병사단의 정면에 투입하고 8사단과 15사단으로 이루어진 ‘제4공격집단’을 국군 6사단과 8사단 정면에 투입해 공격해 왔다. 이 공세로 대구가 거의 포위될 지경에 이르렀고 9월 5일 국방부와 육군본부 및 미 8군사령부는 대구에서 부산으로 이동했다.

이 같은 위기에 워커 장군은 국군 담당지역을 축소했다. 북한군이 화력이 약한 국군을 집중 공격하는 것을 고려한 조치였다. 이 대응은 성공해서 북한군의 공세는 실패했고 9월 중순에는 마침내 전세가 역전되어 반격의 바탕이 마련되었다.

낙동강방어전에서 아군이 승리하도록 도운 요인은 여럿이다.



먼저 더 물러날 곳이 없다는 현실은 아군 병사들로 하여금 비장한 각오로 싸움에 나서도록 했다. 워커 장군의 ‘현지 사수(Stand or Die)’라는 명령에 담긴 결의는 적군의 발악적 공세를 막아낸 힘의 원천이었다.

둘째, 아군은 내선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병력 부족을 빠른 기동력으로 메울 수 있었다. 셋째, 여유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미군 27연대와 같은 특정 부대에 ‘소방대’의 임무를 맡긴 것은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넷째, 미국의 인적 물적자원이 본격적으로 동원되면서 아군의 전력이 빠르게 강화돼 8월 말에는 적군을 압도했다. 반면 적군은 병력과 물자 보충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다섯째, 패퇴하는 아군의 뒤를 따르는 피란민 행렬이 더할 나위 없이 선연하게 보여준 것처럼 당시 민심은 대한민국을 따랐다. 비록 당장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이런 민심은 장기적으로는 전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복거일 시사평론가·소설가


▲ 동영상 = 대 잠수함 로켓형 어뢰(ASROC) ‘홍상어’ 발사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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