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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모두가 때를 기다린다

好學 2010. 6. 26. 20:55

 

[ESSAY] 모두가 때를 기다린다

 

 

성석제·소설가

시멘트로 뒤덮인 도시에 살면서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풀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때가 있으니
그게 바로 요즘,산소의 벌초를 할 때이다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덮인 도시에서 살게 되면서 풀에 대해 생각할 일이 별로 없어졌다. 하지만 일 년에 적어도 한 번은 풀에 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때가 있으니 그게 바로 요즘, 산소의 벌초를 할 때이다.

하지만 이번에 산소에 간 것은 벌초를 하려고 간 게 아니었다. 여름에 비가 많이 왔다는데 별일이 없는가 싶어서였다. 내 능력 범위를 넘는 벌초는 누군가에게 부탁할 요량이었다. 손에는 북어와 청주 한 병이 들려 있었을 뿐 장갑조차 끼지 않았다.

막상 높지 않은 산이나마 중턱에 자리 잡은 산소에 들어서니 턱이 빠질 일이 생겨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증조부의 산소에는 칡과 찔레나무가, 조부의 산소에는 아까시나무 두세 그루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아버지의 산소였다. 봉분 위를 일 미터는 넘을 쑥대가 뒤덮고 있었다. 쑥대머리, 쑥대밭이 무슨 말인지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평소에 효자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그 순간만은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양 쑥대에 달려들었다. 손으로 무턱대고 뽑으려니 손바닥만 쓰릴 뿐 쑥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쑥대 속에 꿩처럼 머리를 들이밀고 들어가 정신없이 팔을 휘저었다.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살갗이 풀에 베여 팔이 따끔거리고 흘러내린 땀이 눈으로 들어가 눈을 뜰 수가 없다. 어디서 왔는지 모기에 물린 자국도 여러 곳이다. 가려워도 긁는 손가락이 땀에 미끄러진다. 이러다가는 지레 지쳐 떨어질 것 같아서 휴대전화로 구원을 청했다.

전화를 받은 친구는 도시에서 몇 년 전 귀농해서 유기농 허브 농사를 짓고 있다. 그는 "가을 햇빛이라고 우습게 알았다가 일사병 걸리기 쉽다. 말벌도, 뱀도 있을 수 있으니 일단 산소에서 내려오라"고 한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몇 달 못 본 사이 이 농부 친구, 전보다 훨씬 말랐다. 반면에 구릿빛 팔뚝의 근육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무슨 풀이 일 미터씩이나 자라느냐고 했더니 그는 이 미터, 삼 미터씩 되는 나무 같은 풀도 농사를 짓다 보면 흔히 본다고 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백지 같은 땅이 있다고 하자. 농사를 짓기 위해 땅을 갈고 거름을 넣기 시작한 순간 풀씨가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거름은 가축의 배설물이 섞인 천연 유기비료에서 나오고 가축은 풀씨 섞인 사료를 먹는데 밭에서 난 사료작물과 곡물로 만들어지는 사료에는 반드시 풀씨가 들어간다. 곧 거름이 되는 풀은 밭에서 나서 동물의 소화기를 거쳐 밭으로 돌아가는 순환체계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또한 풀씨는 바람을 타고 우리 국토의 칠할인 산에서 하늘에서 이웃집에서 끊임없이 날아오고 땅거죽을 파고들어 은인자중하며 때를 기다리다 기회가 되면 싹을 틔우고 여건만 되면 쑥쑥 자란다.

"풀하고 너 죽든지 나 죽든지 서로 박멸하자고 하면 농사 못 지어. 내가 농사짓는 작물이나 허브도 본질은 풀이야. 어느 정도 선에서 서로 타협하고 필요한 만큼 양보를 하고 얻어내고 하면서 살아가는 거지."

그는 일상적으로 예초기나 낫을 들고 풀을 깎으러 갈 때 가장 겁나는 것은 뱀도 땅벌도 아니라고 했다. 뱀은 사람 기척이 나면 피해가고 땅벌은 벌집을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면 된다. 그런데 모기는 어떻게 할 수가 없게 공격해 오고 반드시 물리고 만다. 그는 식초를 넣은 천연 모기약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휴대용 모기 퇴치기를 구입하기도 했다고 한다.

사람을 무는 모기는 산란기의 암모기다. 휴대용 모기 퇴치기는 일 단계로 산란기의 암모기가 싫어하는 수모기의 날갯소리를 초음파로 발생시켜 암모기가 그곳을 떠나게 한다. 이 단계는 모기의 천적인 잠자리의 날갯소리를 가청 음파로 나게 한다. 반경 오 미터까지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산 바로 밑에 있는 우리 밭에는 사람이 거의 가지를 않으니까 암모기들도 누가 오기를 내내 기다리고만 있는 거야. 기회가 오면 죽자사자 달려드는 거지."

잠자리가 모기의 천적이라는 건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논 위에 잠자리 수백 마리가 떠 있었다. 허공을 유유히 주유하며 머리 위 푸른 하늘이 느끼게 해주는 초월적인 자유로움, 하늘과 땅 사이의 긴장을 즐기는 줄 알았더니만, 그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었다고?

"잠자리는 곤충의 세계에서는 최상위급의 포식자야. 동물의 세계에서는 호랑이지. 조물주가 날개를 달아준 호랑이."

수채라고 부르는 잠자리의 애벌레는 주로 물속에서 생활하는데 먹잇감은 올챙이나 새우의 치어, 모기의 애벌레인 장구벌레, 깔따구, 하루살이의 애벌레들이다. 곤충이면서 어릴 때부터 어류와 양서류를 잡아먹기까지 하는 잠자리야말로 수륙 곤충의 제왕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가 예초기를 들고 풀을 깎기 시작하면 때를 기다리며 한철 내내 은인자중하고 있던 모기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달려들 것이다. 그 모기를 향해 공중에서 정찰하고 있던 잠자리들이 날갯소리도 요란하게 공습해온다. 그의 윗주머니에 든 모기 퇴치기가 일 단계, 이 단계 소리를 번갈아 내지만 윙윙거리는 예초기 소리에 묻히고 만다. 어떻든 때를 기다리던 그들, 각자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이런 것이 삶의 한 국면이리라.

가을이 깊어지면 공중에 고추잠자리가 많이 떠다닐 것이다. 잠자리를 보면 날개 달린 호랑이 생각이 날 것 같다. 그 호랑이는 모기, 하루살이, 깔따구를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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