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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빈 봉투

好學 2010. 6. 29. 21:05

 

[ESSAY] 빈 봉투

 

 

권지예·소설가

희고 순결한 겉모습에 속에는 엉큼한 계산이 든 돈봉투가
우리 결혼식의 상징인 것 같아 마음이 영울적한데…

"우야꼬…."

얼마 전, 친정어머니가 전화하셨다.

"니 그날, 부조금 어쨌나?"

"막내이모한테 전달하라고 큰이모 줬는데…."

"좀 전에 막내이모한테서 전화가 왔다. 봉투 잘 받았다고. 그런데 그 봉투가 빈 봉투라 카더라. 겉봉에 니 이름 석 자는 있는데 속에 돈은 없더라고…. 그래 두 양주가 이틀 동안 고민하다가 전화했다 카더라."

아니, 이게 무슨 소린가? 축의금 봉투가 비었다니! 분명 돈을 넣은 것 같은데….

"아들 결혼식 덕에 바쁜 조카가 와줘서 몇십 년 만에 얼굴을 봤으니 고맙다고 부조는 안 받아도 된다고 다시 부칠 생각 말라고 하더라. 알고나 있으라고 전화했다 카더라."

순간 나는 당황했다. 나는 당연히 봉투 안에 돈을 넣었다고 생각했다. 집을 나서기 전에 바쁜 마음에 봉투를 찾아 이름을 쓴 것까진 기억났다. 그러나 요즘엔 간혹 내 기억을 확신할 수 없다. 어쨌거나 민감한 사안이었다. 큰이모와 막내이모의 입장이 자칫 곤란해질 것이다. 진위가 어찌 됐든 나는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오히려 지금부터 실수하면 안 된다고 나는 바짝 긴장했다.

"아아, 내가 그날 너무 급히 나오느라 그랬나 봐. 정말 내가 큰 실수를 저질렀네. 빈 봉투를 펼쳐보고 이모 내외가 얼마나 난감했을까. 두 분께 심려 끼쳐 드려서 정말 죄송하다고 전해 드리세요. 당장 부조금을 인터넷뱅킹으로 보낼게요."

사태를 그렇게 수습하고 나자 우리나라 모든 봉투 문화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부조금 문화는 계산이 깔려 있어서 좀 복잡미묘하다. 엄밀히 말해 부조금은 빚이다. 더치페이가 일반화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부조금 액수 정도의 식사비를 내고 한턱 쓰는 것 정도야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문제가 부조금이라면 그렇지 않다. 자신은 전에 부조를 했는데, 상대가 봉투를 들고 하객으로 참석하지 않은 경우에는 원망과 배신감이 들어 절교를 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그뿐이면 좀 참아보겠는데 결혼식의 풍경조차 별로 아름답지 못하다는 느낌이다. 정말로 그렇게 쫓기고 여유가 없는 결혼식과 피로연은 우리나라가 유일하지 않을까?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그날 인천에서 열리는 막내이모 아들의 결혼식에 나는 40분 정도 지각했다. 교통정체 때문에 식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결혼식은 끝나고 부조계도 철수한 상태였다. 행여 내가 밥을 못 먹을까 봐 식당에서 어머니가 애타게 불러서 이미 결혼식 전에 식사를 마친 하객들 틈에 끼어 남은 음식을 허겁지겁 먹었다. 수십년 만에 만나는 외갓집 친척들과 정신없이 인사를 나누었다. 혼주인 이모 내외와 신랑신부에게 인사를 하고 나니 시골에서 대절한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며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혼주인 이모 부부가 정신이 없어 보여서 나는 같은 버스를 탈 큰이모에게 축의금 봉투를 건넸던 것이다. 어쨌거나 결혼식은 구경도 못했지만 밥도 먹고 할 도리도 했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 아니라 결혼의 계절인가보다. 요 몇 주간 주말에 연일 친척과 지인의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 장면은 더 화려해지고 음식은 더 풍성해졌다. 요즘엔 내숭 떠는 신랑신부들은 없다. 모두들 입이 귀에 걸렸다. 목젖이 보이게 활짝 웃는 신부도 예쁘고 스스럼없이 애정을 과시하며 자신이 축가를 직접 부르는 신랑도 정말 멋지다. 예전에 비해 사랑과 행복을 마음껏 드러내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나는 정말 좋다.

그러나 결혼식에 가면 늘 좀 씁쓸한 느낌이 든다. 외상장부(?)에 기재할 돈봉투를 손에 쥔 어른들, 짧은 예식에 참석하는 것보다 먼저 자리 잡고 배부터 채우고 보는 하객들. 그 짧은 시간 안에 치러지는 겉치레의 예식과 느긋하게 즐기지 못하는 잔치음식의 낭비는 결국 누구의 부담인가. 결혼식의 간소화도 그렇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결혼의 아름다운 본질을 흐리는 우리 사회의 부조문화에 대해 대안은 없는 걸까 생각하게 된다.

뭐니뭐니해도 돈 봉투가 문제다. 인간의 순수한 마음에 돈이 끼어들면 욕망이 생긴다. 욕망은 원망을 부른다.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나는 걸까? 20대 초의 어느 날, 나는 너무 가난해서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에게서 다정한 안부 편지가 왔다. 부유하고 마음도 따뜻한 친구가 보낸 편지를 다 읽고 나서 보니 봉투 속에 시퍼런 만원권 신권이 몇 장 딱 붙어 있는 게 아닌가! 편지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돈을 보낸 친구의 속 깊은 마음에 나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돈을 긴요하게 썼다. 그런데 며칠 후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편지를 넣을 봉투가 없어 찾다가 아버지 책상에 놓인 봉투에 모르고 편지를 넣어 부쳤으니 돌려달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의 요구는 당연했지만, 나는 그 돈을 다시 마련하면서 홀로 울었다.

돈으로 부조를 하지 않고도 축하할 수 있는 선물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부티크 드 마리아주를 이용한다. 백화점이나 웨딩숍에 신랑신부가 자신들이 필요한 모든 물건의 리스트를 만들어두면 하객들은 성의껏 선물을 하게 된다. 결혼식 당일에는 마음껏 축하하고 즐기기만 한다. 결혼은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주인공이 되는 축제이자 또한 카니발이다. 겉만 희고 순결한 봉투에 속은 엉큼한 계산이 든 돈봉투가 우리나라 결혼의 상징인 것 같아 마음이 울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