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글]긍정.행복글

[ESSAY] 고래를 기다리는 일

好學 2010. 6. 23. 20:07

 

[ESSAY] 고래를 기다리는 일

 

 

정일근 시인·고래문화운동가

고래는 또 가르쳐준다.
고래가 보이지 않아도 이 바다 안에 그가 있다는 것을,
사람의 사랑도 그렇다는 것을…

매주 수요일 아침 울산시 남구 장생포항에서 고래 조사선이 '고래바다'(鯨海)라는 공식이름을 가진 울산바다로 힘차게 출항한다.

울산바다에서 고래를 찾는 일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필자가 여기서 '공식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울산시가 올 5월 15일에 울산바다를 고래바다로 정식 명명했기 때문이다.

'고래특구'인 장생포에 크고 멋진 선언비까지 세웠다.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에서 북구 신명동까지의 해안선 155km와 그 앞바다는 이제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고래바다가 되었다.

고래 조사선은 고래바다를 촘촘하게 훑으며 고래를 찾는다. 지금은 사람의 눈으로 고래를 찾는 목시(目視) 조사가 전부지만, 울산시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고래 조사를 통해 30% 이상의 고래 발견율을 기록했다.

그런 노력을 바탕으로 울산은 고래 고기를 파는 고래 마켓이 아니라 고래 관광의 메카로 자리 잡아 나가고 있다.

'고래 보호 선봉장'을 자처하는 나에게는 그 조사선을 무시로 탈 수 있는 '특권'이 있다. 때로는 그 특권을 이용해 고래바다로 고래를 찾아온 시인들을 모시기도 한다.

시인들이 고래를 좋아하니 고래도 시인을 좋아하나 싶을 때가 간혹 있다. 한 번은 시단의 원로인 김남조 시인이 고래 조사선에 승선했는데 밍크고래 한 마리가 시인의 바로 곁에서 폭포처럼 솟구쳤다. 울산시가 고래 조사를 실시한 이래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밍크고래를 관찰한 기록은 없었고, 지금도 깨어지지 않는 '신화'로 남아 있다. 김남조 시인은 밍크고래의 환영 퍼레이드에 대한 답으로 고래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몇 편의 좋은 시를 썼다.

나에게 고래 조사선을 타는 일은 고래를 찾는 일이 아니라 고래를 기다리는 일이다. 그건 고독한 일이다. 망망대해에서 고래를 보는 일은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잃어버린 모래알을 찾는 것보다 힘든 일이다.

생각해보라. 고래가 크다고 하지만 육지보다 3600배가 큰 바다는 얼마나 넓은 곳인가. 그 큰 고래도 바다에서는 성인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쯤 된다는 '나노미터'급이다. 그건 찾아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타나길 기다리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고래를 기다리는 것은 고독하고 쓸쓸하고 아픈 일이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앞에서 고래 발견율을 30% 이상이라고 했지만 10번 고래바다로 나가면 7번은 허탕을 치고 돌아온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욕심은 언제나 자신에게 30%의 행운이 돌아오길 바란다. 그건 지속적으로, 오래, 열망으로 고래를 기다려온 사람에게 적용되는 확률이다.

울산에 올해부터 '고래바다 관광선'이 부정기적으로 출항을 하고 있다. 그 배를 타고 나가 고래를 볼 수 있지만 보지 못하는 경우가 실은 더 많다. 고래를 보지 못한 사람들이 환불소동을 벌이는 것을 자주 보았다.

바다는 고래 양식장이 아니다. 고래는 가면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동물이 아니다. 무자비한 고래 학살이 자행된 근대 포경 이후 고래는 사람을 두려워하게 됐다. 고래는 인간으로부터 여전히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멸종 위기에 있는 포유동물이다. 고래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1992년 울산사람이 되면서부터 '고래를 사랑하는 시인'이 되었다. 내 관심은 국보 285호인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들을 본 것에서 비롯됐다. 선사인(先史人)이 바위 그림으로 남긴 58점의 고래 암각화를 보면서, '그들이 왜 고래 그림을 남겼을까'라고 궁금해한 것이 돌이켜보면 내 고래사랑의 시작이었다.

1987년에 출간된 필자의 첫 시집에는 '장생포 김씨'라는, 내가 처음 쓴 고래 시가 실려 있다. 나는 한국에서 포경이 중단될 때 마지막 고래잡이 배가 동해로 떠나는 현장을 지켜본 운 좋은 시인이었다. 그 인연이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고래를 대변하는 시인으로 살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고래에 대한 나의 정의는 '고래는 문화다'라는 것이다. 고래처럼 건강한 바다의 아이콘은 없다. 세계도 고래를 잡는 일보다 고래와 사람이 바다에서 상생하는 관경(觀鯨)으로 옮겨가는 추세다. 지난 16일 울산을 방문한 미국의 유명한 고래학자 스콧 베이스 교수는 "한국은 여전히 고래의 수가 줄어드는 국가"라고 했다. 그는 "울산에서 진행 중인 고래관광은 고래만 보는 것보다는 고래를 매개로 아름다운 해안과 바다, 해양교육과 체험을 병행하여 진행하면 잠재력이 풍부해질 것으로 본다"는 조언도 했다.

울산시 남구는 매년 4월 25일을 '고래의 날'로 정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4월 하순쯤이면 회유하는 바다동물인 고래가 자신들의 고향인 울산의 고래바다로 돌아오기 시작하는 때다. '고래를 사랑하는 시인들의 모임'이란 것도 만들어졌다. 고래의 날을 기념하며 '고래 문학제'를 열고 있다. 그날 고래바다에서 당신과 고래를 만나고 싶다. 고래를 만나 고래의 이야기를 함께 듣고 싶다. 그러기 위해 당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내게는 그것이 뼛속까지 사무치는 고독과 싸워 이겨야 얻는 결과다. 그걸 고래가 가르쳐준다.

고래는 또 가르쳐준다. 고래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이 바다 안에 있다는 것을. 사람의 사랑도 그렇다. 지금 내 가슴속에 들어와 있지 않지만 언젠가는 찾아오는 것이 사랑이다. 내가 고래를 기다리는 이유도 그렇다. 그래서 내게 고래를 기다리는 일은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