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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10년 전, 10년 후

好學 2010. 6. 23. 20:06

 

[ESSAY] 10년 전, 10년 후

 

 

윤제균 '해운대' 영화감독

머릿속에는 '나는 왜 이렇게 가진 게 없는가'
라는 생각만 맴돌았다.
하루 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니…

나의 영화 '해운대'가 기대 이상의 사랑을 받으면서 여러 매체들과 인터뷰를 하게 됐다.

수많은 질문들에 대답하는 시간은 내 삶을 되돌아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10년 후에 어떤 모습일 것 같습니까?"

순간적이었으나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난 과연 10년 후에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그 대답을 하기에 앞서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제 인생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생각이 납니다."

그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내 인생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는 단어였다.


 

10년 전인 1999년, 나는 지극히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아니, 경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가난한 샐러리맨이었다.

그에 앞서 98년 4월에 결혼을 했고 그해 8월엔 한달간 집에서 월급도 받지 못하고 쉬어야 했다.

우리나라가 IMF 구제금융을 받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 무급휴직 제도를 실시했기 때문이다.

비록 월급은 나오지 않았지만 직장인들에게 한 달간의 휴가란 평생 다시 오기 어려운 소중한 기회이다.

나의 회사 동료들은 대부분 이 휴직 기간에 해외여행을 떠났다.

나도 아내와 함께 외국여행을 가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는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돈이 없었던 것이다. 해외는커녕 3박 4일짜리 국내 여행 갈 만큼의 여유도 없었다.

나는 그런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했다.

머릿속에는 '나는 왜 이렇게 가진 게 없는가'라는 생각만 맴돌았다.

하루 종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 보니 자연스레 아내와의 다툼도 잦아졌고 또 커졌다.

다툼을 피하려면 외출해서 친구들이라도 만나야 할 텐데, 친구에게 소주 한잔 살 돈조차 없는 처지가 한심해서 그러지도 못했다.

그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골방에 처박혀 글을 쓰는 일뿐이었다.

어려서부터 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소설을 쓸 수는 없었지만 시나리오를 쓸 자신은 있었다.

그해 여름 한 달간, 나는 골방에서 시나리오를 썼다.

이것이 내가 영화감독이 된 첫걸음이다. 그때 썼던 시나리오 한편이 다음 해인 99년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이 됐고 다른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 다음 썼던 시나리오 '두사부일체'로는 감독 데뷔를 하게 됐다. 그때 회사에 사표를 내고 영화에 모든 것을 걸게 됐다. 내 인생이 크게 원을 그리며 선회하기 시작했다.

만약 우리나라에 IMF 사태가 없었더라면 나에게 한달간의 무급휴직도 없었을 것이다. 설령 무급휴직을 해야 했더라도 내가 돈이 많았더라면 해외여행을 떠났지 골방에 처박혀 시나리오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IMF와 무급휴직, 그리고 골방에서의 한달이 결국 내가 1000만 관객 영화의 감독이 되는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10년 전 그 당시 나의 꿈은 무엇이었던가. 아마 그 당시 나의 꿈은 하루빨리 승진해서 좀더 풍족한 급여를 받는 임원이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 당시 내가 "1000만명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면 아마 주위 모든 이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흡사 초등학생 아이가 아무 생각 없이 "나의 꿈은 대통령"이라고 얘기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회사 임원이 되고자 했던 그때의 꿈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그것도 100% 내 의지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새옹지마 격으로 연달아 벌어져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내가 잘났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10년 후의 자신의 모습은 그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다. 당장 1년 후의 모습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겠지만 10년 후의 모습은 정말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솔직히 10년 후의 내 모습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성공한 감독이 되어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다시는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정말 아찔하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성격이 예민하지 않고 비교적 낙천적이며, 긍정적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기에 큰 걱정을 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단 두 가지만 마음에 두고 살아가려 한다. 하나는 어떤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선을 다한 다음의 모든 결과는 운명에 맡기는 것이다. 최선을 다할 때는 분명히 목표가 있겠지만 설령 실패한다 해도 낙담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려 한다. 하느님은 벌 받아야 할 인간을 파멸시키는 도구로 교만과 낙담을 이용하신다고 한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잘됐다고 교만해서도 안 되고 앞으로 하는 일이 실패하고 잘되지 않는다 해서 낙담할 필요도 없다. 교만과 낙담은 곧 내 인생을 파멸 쪽으로 몰고 갈 것이기에.

지금 나는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내 영화가 생각보다 훨씬 흥행도 잘됐고 언론과 평단으로부터도 과분한 격려의 말을 듣고 있다. 하지만 나는 10년 전 샐러리맨이었던 그 시절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꿈을 꿀 생각이다. 가난한 샐러리맨이 1000만 영화감독이 됐듯이, 내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10년 후에는 내가 가늠할 수 없는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10년 후엔 어떤 모습일 것 같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나도 정말 궁금하다"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