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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督敎哲學은 可能한가? 6

好學 2010. 5. 21. 21:51

 

 

基督敎哲學은 可能한가? 6

 

 

근대의 기독교사상 (Decartes, Locke, Kant, Hegel)

 

 

(가) 중세적 종합의 붕괴이후

 

1. 중세적 방법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기독교 전통과 인본주의(Greco-Roman 전통)이 화합할 수 있다고 믿고 기본적으로 후자 또는 근대적으로 해석된 철학전통의 입장에서 기독교적 진리를 취합하려던 시대이다. 헤겔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서구 사상가들은 스스로를 기독교 사상가로 여기거나 그에 뿌리를 둔 것으로 이해했다. 헤겔은 자신을 기독교철학자로, 자신의 작업 철학을 Gottesdienst the worship of God이라고 불렀다.  

 

 

2. 그것은 아마도 이들에게 있어 기독교란 선택사안이 아니고 문화였으므로 이들이 간단히 떨쳐버리기에 너무나 무거운 전통으로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을 수용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르네상스 정신의 핵심인 자율적 이성의 계몽을 믿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신앙을 새로운 이성적 대안이 제시될 때까지는 계속 유지되어야 할 것, 철학을 위한 전제, 신비를 설명하기 위한 제한적인 무엇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졌다. 이런 자세는 확실성의 기초로서의 신 (데카르트 브61), 하나의 가설로써의 기계론적인 신을 말한 라이프니츠의 변신론 (예정조화설, 브90,91), 스피노자는 내재적 원인으로써의 신 (natura naturans, 신에 취한 사람, 브87 Creator/creature distinction 폐지) 로크의 이성적 신앙과 종교관용론과 프랑스혁명에의 영향 (브100, 준이성, 초이성, 반이성 accroding to, above, contrary to reason) 루소는 에밀에서 "양심과 이성을 따르는 성실성"을 강조하는 자연주의적 신관과 계시종교 부정 (브131-3) <오직 이성의 한계 내의 종교>, 종교없는 종교, 예배없는 종교, 요청된 신 (칸트, 브163), 영국의 이신론자들은 자연신학의 한 유형이며, 볼테르 조차도 신이 없다면 만들기라도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헤겔은 절대관념론, 절대정신으로서의 신, 모든 세계 만물의 완성으로서의 신, 하나님의 자기의식으로서의 종교, 역사(브187)을 생각했다.  

 

3. 파스칼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이다. 그는 이성으로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직관으로 아는 하나님이시다. (브92) 팡세는 그의 변증서이다. 마찬가지로 키엘케골은 헤겔류의 관념론적 신관을 배격한다. 공포와 전율이 그것을 보여준다.  

 

4.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중심적 사고를 비판함으로써 명백히 다른 비전과 세계관을 제시했으나 후속적인 견실한 철학과 학문을 발전시키는 점에서 약했다.

   

5. 결국 초기 철학자들의 기대처럼 기독교적 세계관과 르네상스적 세계관의 통합은 철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극단적인 분리와 방향을 상실한 문화로 치닫게 되었다. 그것은 기독교의 무게가 생각보다 깊다는 의식 (쌰르트르, 카뮤, 카라마죠프의 형제 신이 없다면)이 견딜 수 없는 반발을 불러왔다는 것과 철학자들의 조심성과 인내와 실험을 대중이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과학의 발전에 입각한 맹목적이고 성급한 유토피아주의, 그리고 결국 이런 비전을 정치적으로 실험하려는 불란서혁명 같은 사건이 폭발하고 말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이런 비전을 계속 각 방향에서 투사하고 혁명을 부추기는 사람들 (Comte 1789-1800, Marx 1818-83, 프로이드 1856-1934, 니체 1844-1900)이 줄을 잇게된다.

 

 

 

(X) Friedrich Ernst Daniel Schleiermacher (1768-1834)

 

 

(가) 생애와 저작

   

1. Breslau 출생으로 조부와 부친이 목사요 본인도 (개혁파) 목사였으며 어려서부터 모리비안 학교에 보내져 경건주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결국 독일 경건주의의 본산인 (스페너, 프랑케등의 영향이 큰) Halle대학에서 공부한 후 그곳에서 가르치게 되었으나 나폴레옹의 진주로 할레가 프러시아 영토에서 떨어져 나가 무산되었다.

   

2. 그는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목회를 하던 중 그곳의 대학창설에 기여하고 신학과목과 종교학을 교수하였다. 동시에 그곳 삼위일체 교회에서 설교자로 명성을 높였다.

   

3. 그의 학문적 기여는 종교철학과 신학에 있어 철학에서 칸트에 비견될 만한 것으로 흔히 현대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울 전환점을 이루었다. Karl Barth는 이 점을 들어서 슐라이에르마허는 "학파를 창설하는 대신 한 시대를 창조했다"고 했다.

   

4. 헤겔이 이제까지 기독교 역사내의 철학적 사유가 신학적 철학의 전통을 가져온 것에서 떠나 신학자체를 철학의 기초에서 이루려는 철학적 신학의 길을 열었다면 그와 동시대인 슐라이에르마허는 또 다른 차원에서 현대신학의 문을 열어놓았다. 그리하여 헤겔과 더불어 현대신학의 양대지류를 이루고있다.

   

5. 그의 대표적 저작은 <On Religion: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 1799, <The Christian Faith>, (1821-22, 1830-31) 후자는 750쪽이 넘는 대작.

 

  

(나) 낭만주의적 반계몽사상

   

1. 슐라이에르마허는 헤겔과 더불어 데카르트이후 점차 고도화되어 그 문제점을 확연히 드러낸 근대 인본주의적인 과학문명의 이성주의와 자율성이 내포한 근본문제인 인간성의 소외현상에 대한 문제점을 그 학문적 바탕으로 하고있다.

   

2. 헤겔이 이성의 소외현상을 합리주의적이요 보다 능동적이며 통일지향적인 이성에 호소해서 해결하려 하고 있어서 전형적인 서구 희랍적 전통에 서있다면 슐라이에르마허는 희랍적인 방법을 배격하고 감성적이고 인격적인 면의 회복과 부양에 관심을 두고 나아가 능동적이기 보다 오히려 피동적인 이성이 지닌 관계성과 의존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헤겔의 이상이 자유라면 슐라이에르마허는 의존이다.)

   

3. 슐라이어르마허는 특히 계몽사상의 반종교적 분위기에 대한 강한 반발을 대변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계몽사상에 대한 반발에서 일어난 낭만주의 운동과의 연계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계몽사상에 대한 그의 비판의 뿌리는 더 깊은 경건주의적 성향에서 찾는 것이 더 정당할 것이다. 즉 그의 낭만주의는 종교적 성향의 부차적인 점일 것이다.

 

 

(다) 직관과 감정의 신학

   

1. 슐라이에르마허의 가장 큰 기여는 종교를 형이상학이나 도덕과 분리하여 그 독자적 성격을 부각시킨 일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전통적 신학이나 근대에 발전된 자연신학등이 모두가 서양의 형이상학에 방불하는 것으로 여기고 나아가 칸트의 <이성의 한계내의 종교>는 도덕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2. 그는 종교의 본질을 직관과 감정이라 보았다. 이것은 형이상학이 이성적 사유와 연관되고 도덕이 행위와 연관되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특히 여기서 감정이란 느낌이 아니라 보다 추상적인 통찰력 즉 영적 직관과 같은 것이다. 그의 사고에는 약간이나마 동양적 신비의 모습이 엿보인다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한예로서 그는 종교를 우주의 직관이라고 하였다. (소위 직통파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경건주의, 신비주의의 후예다운 점이다.) 그의 신관 역시 인격신에 덧붙여 스피노자식의 범신론의 영향이 강하게 풍긴다.

 

  

3. 자연을 이성적으로 반성하는 자연신학을 가진 중세와 세계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형이상학에 근거해서 철학적 신학을 해보려는 이성주의 신학은 말할 나위없이 종교개혁이후에도 칼빈의 경우에서 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 (종교)는 언제나 성경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처럼 언제나 서양의 전통은 교회, 사제, 자연, 계시 (성경), 사유 (로고스 신학), 그리스도를 통하는 종교였다. 이에 반해 슐라이에르마허는 개개인이 신적 존재와의 직접적 교통을 중시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4. 칸트의 자연신학과 자연신론 비판은 근대주의적 이성에 입각한 신학에의 시도에 매우 파괴적이었다. 그는 물자체/초자연세계 (본질의 세계)에 대해 현상계 (시/공계)만을 알 수 있는 이론적 이성이 알 수 없는 것이므로 그것은 신학의 하부구조로 기능할 수 없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5. 슐라이에르마허는 바로 이러한 난관을 실증신학 positive theology로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절대의존의 감정이라 하였고 기독교의 우월성은 <경건의 감정>에 있다고 했다. 절대의존의 감정이란 한 인간이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신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신과의 관계속에 있는 자신을 의식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6. 이러한 강조점을 인해 그는 흔히 주관주의, 낭만주의, 체험주의로 불리우고 헤겔의 객관주의적인 절대적 관념론에 비교된다. 그 내용은 실증신학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라) 실증신학

 

  

1. 그의 성경관은 독특하다. 그는 성경이 신적언어로 되어진 계시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 즉 종교적 경험의 기록이라고 본다. 여기서 출발하여 그는 종교적 경험분석에 집중한다.

 

  

2. 그는 종교가 인간이 신적 실재에 대한 관계요 경험이므로 기독교적인 경험도 타종교와 공유할 수 있는 인간 공통적이요,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수용될 수 있는 용어로서 기독교 신앙이해가 이런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졌다.

 

   

3. 슐라이에르마허는 종교가 사유나 행위가 아닌 무한자를 향한 의식과 체험 sense and taste for the Infinite 라고 보았다. 여기서 중심은 절대의존의 감정 sense of absolute dependence이다.

 

  

4. 하나님의 속성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맺고자하는 관계의 태도를 언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즉 하나님의 고유한 성품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드러내는 자세의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중심주의 종교 anthropocentricism라 비판된다.

 

  

5. 죄역시 하나님의 정하신 법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태도라고 본다. 즉 의존성의 본성을 벗어나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자세를 말한다. 그래서 죄를 Gottlosigkeit, Gottvergessenheit 하나님 상실 또는 하나님 망각이라고 했다.

 

  

6. 따라서 구속은 절대의존의 감정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절대의존 감정의 화신이자 완성이요 모범이라고 한다. 예수는 신인으로 보아서는 안되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 인간이다. (즉 성육신을 부정하여 인간에게 가까이 온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 God-Consciousness 신의식을 지속적으로 가진 점에서 다른 인간과 구별되고 모범이 되신다. 그의 사역은 다른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처럼 신의식을 강하게 갖도록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이다.

 

 

6. 위에서 보는 것 처럼 슐라이에르마허의 특별한 점은 전통적인 신학의 용어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으되 그 내용이 매우 상이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점에서 그는 현대 (주관주의적)신학의 시조라고 불리울 수 있는 것이다. 그 한예가 그도 삼위일체를 "기독교교리의 최후의 보루"라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감정에서 신의식으로 움직이는 성자를 말하고, 나아가 성령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경험에 대한 언술이라고 한다. 이처럼 그는 삼위일체를 말함에 있어 본질의 통일, 그러나 삼위의 분립등의 이원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여 정통적 삼위일체론의 핵심을 부정하고 거기에서 완전히 일탈하여 오히려 uniterian의 모습으로 나아간다.

 

   

7. 그의 주저인 <기독교 신앙>은 매우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언어로 중세 스콜라 신학/철학이나 헤겔의 합리주의적 신학에 못지않게 난해하다. 이점에 있어 그도 결국 감정을 강조하는 반면 결국 이성주의적 전통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본다.

 

   

 

(마) 그의 기독교 사상의 영향

 

  

1.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은 인간의 경험과 감정에서 출발하는 인본주의적 신학이다. 특히 계시에서 출발해온 전통적 신학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 그는 계시란 결국 인간의 영감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2. 그는 이성과 감성의 치명적 타락성 (전적 타락)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인간 속에 연약하고 부패할 가능성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존재하는 신의식 God-Consciousness가 있다고 확증하고 거기서 출발한다. (피터 버거의 천사의 소문등과 같은 소리) 이는 전적타락과 하나님 형상의 상실을 말하는 칼빈주의적 신앙과 매우 대조적인 면이 있다. 아마도 현대신학의 인본주의적 모습이 강조되는 것은 훗날 자유신학의 대명사가 되는 리츌등에 이러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3. 슐라이에르마허는 변증가 시대이래 서양철학의 영향을 받아 신학도 희랍적 형이상학에 따라 영향을 받고 있는 점을 누구보다 강하게 의식하고 비판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 자신이 성경적 계시나 그 세계관에 의한 바른 토대의 회복에로 나아가지 않았기에 전통적인 이성중심주의/객관주의 로고스중심주의의 신학은 피할 수 있었는지 모르나 또 다른 비성경적인 모티브에 빠져들었을 뿐 바른 성경적 철학이나 신학을 열지는 못했다.

   

4. 긍정적인 면이 있다면 그는 물질에 익숙해져서 모든 초자연과 무한성에 대한 의식을 잃은 세속적이고 불신적인 현대인에게 가시적 세계 이면의 또 다른 궁극과 초월의 세계가 있음을 주지시키려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초월의 개념을 잃고 신학조차 자연신론과 합리론으로 떨어졌으나 그에 반반하여 개인의 감정, 신성의 경험에 집착할 때 그 또한 바르지 못한 철학에 접목될 뿐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현대신학, 현대의 또 하나의 비성경적 기독교 세계관을 열어놓았다. 이는 개인의 정서와 통찰에서 열리는 영원을 향한 몸짓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자율을 떠나서 공허를 향해서 자신을 내던짐, 누군가가 받으리라고... 이 또한 위험하다. 후라이판에서 오븐으로)

   

5. 그 뿌리가 낭만주의와 같은 수맥에 닿아있듯이 슐라이에르마허는 미학, 예술이 종교의 적이 아니라 동행자라고 보았다. 이러한 면에 있어 그에게 다소간에 포스트모던적 요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6. 그의 신학적 방법론에 영향은 해석학의 줄기를 타고 딜타이, 하이데가, 가다머와 오늘날 해석학자인 에벨링과 훅스에로 이른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John Robinson, Paul Tillich, Karl Barth 등 신정통신학과 소외, 인간성 상실등을 중시하는 현대신학에 태두가 되었다. 그 예로 틸리히의 ultimate concern, depth dimension, ground등은 현대인이 잊고사는 의존의 대상, 관계성의 신학을 강조하고 상대적으로 성경적 신학 biblical theology를 배격하며 객관적 계시에 입각한 반성적 신학아닌 감정의존과 주관적 사변과 경험의 신학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