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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督敎哲學은 可能한가? 8

好學 2010. 5. 21. 21:58

 

基督敎哲學은 可能한가? 8

 

 

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사상

돌아온 선교사: 레슬리 뉴비긴 (Lesslie Newbigin)


레슬리 뉴비긴은 글자 그대로 돌아온 선교사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잡지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가 작년 겨울 그를 다룬 특집기사의 제목À "우리에게 (즉 서양인들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선교사 (God's Missionary to us)" 라고 붙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그는 30세가 채 안된 청년 선교사로 영국을 떠나 인도에 갔고 거기서 거의 4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1974년 임무를 마치고 귀국했으나 그것은 결코 그가 생각했던 것 처럼 은퇴한 노인으로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번엔 영국, 아니 서구 전체를 위한 선교사로서 돌아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어쩌면 수년전 상연된 공상영화의 줄거리와 흡사하다. 오랜기간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떠났던 사람이 불시착을 하게 되었다. 지구로 생각했던 그곳은 기후조건만 비슷할 뿐 온통 원시적인 원숭이 세상이었다. 원숭이에게 잡혀 죽을 고생 끝에 탈출한 그는 도주 중 해변에서 파괴된 자유의 여신상의 잔해를 발견하고 경악하게 된다. 그곳은 바로 그가 우주에 있을 동안 일어난 핵전쟁으로 인해 바뀌어버린 뉴욕이었던 것이다.

        영국으로 돌아온 뉴비긴의 심정이 그랬을런지 모른다. 그는 젊어서 기독교 문화로 부터 복음의 사자로 이방 암흑의 세계로 나아갔었다. 그러나 노년이 되어 돌아온 고국의 모습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그는 거기서 기독교와 가장 멀어진 문화를 직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이미 이런 충격의 일부를 맛본 적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인도의 거리에는 영국 젊은이들이 거지 구도자의 모습으로 동양의 "지혜"와 "구원"을 찾아 배회하는 믿기지 않는 장면을 더러 목격했던 적이 있었다. 

        뉴비긴은 은퇴후 육로를 통해 귀국한 이야기로 유명하다. 육십이 훨씬 넘은 노부부가 등짐과 가방 하나를 들고 인도에서 터키와 남부 유럽을 거쳐 긴여행을 했던 것이다. 이미 선교사로서 국제적 명사였던 이들의 안전을 우려한 인도정부는 예상되는 여행로 상의 모든 외교공관들에 접대명령을 했으나 그 누구도 이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들이 지방버스들을 갈아타고 민박에 토속음식을 먹으며 여행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이 여행에서 이들 부부는 한 때 소아시아의 기독교 중심지였던 갑바도기아에서 단 한명의 기독교인들도 찾을 수 없어 단둘이 텅빈 거대한 교회당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한 때 그토록 강했던 교회가 훗날 완전히 파괴될 수 있음을 뼈져리게 느꼈다고 했다.

        더우기 그 불길한 경험이 영국에서는 일상적으로 부딪쳐오기 시작했다. 돌아온 뉴비긴은 난생 처음으로 선교대학에서 강의하게 되었다. 그는 거기에서 전통적인 선교란 시대착오요, 심한 경우 인종적, 문화적 우월주의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서구교회는 활력을 잃고 희망마져 상실한 것을 보았다. 무엇보다 인도의 빈민굴에서 조차 소망은 살아있었건만 정작 문명세계엔 죽음 같은 절망이 그늘을 내리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이제껏 그가 만난 그 어떤 피선교지의 사람들 보다 복음에 대해 닫혀있고 냉소적이었다. 교회 지도자들도 복음에 대한 자신감을 잃고 모든 선교지에서 뒤로 뒤로 물러나고 있음을 보았다. 사람들이 줄어드는 지역의 교회나 사회영역의  선교지는 너무도 쉽게 포기하는 정책이 그 증거였다.

        이런 비극의 근본 원인은 기독교의 기초인 성경적 세계관과 거기서 나오는 복음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이라고 뉴비긴은 진단한다. 문제의 직접적인 발단은 서구교회가 오래전 부터 이미 세속화되어 왔을 뿐 아니라 최근에는 종교 다원주의이고 상대주의적인 문화에 조차 적응한데 있었다. 

        뉴비긴은 인도의 한 사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다른 힌두교 신들과 나란히 모셔지고 있는 것을 본 경험을 이야기 한다. 매년 성탄절엔 특별한 제사가 예수의 초상 앞에서 드려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복음이 힌두교와 그 다신교적 문화에 흡수된 결과 이런 희한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뉴비긴은 서서히 자신도 그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고 고백한다. 서구인들도 흔히 예수를 그들의 문화에 맞추어 변질시켜 왔을 것이라는 자각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적 진리와 가치들을 통해서 세계를 바라보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서구인들은 그들의 문화의 세계관을 안경삼아 기독교의 진리와 가치를  판단하고 있다. 그 결과 복음은 서구문화에 적응되어 본래적 빛과 힘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에 맞서 서구문화와 사회를 선교사의 눈으로 바라보는 특이한 저술가가 되었다. 뉴비긴은 결코 학자로 자처하지 않는다. 사실 그는 은퇴할 때 까지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책을 쓴 적이 없었다. 그는 이방문화로 가득찬 선교지가 되어버린 "서구를 복음으로 도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밝히려고 썼던 소책자를 썼다. 이 책은 결국 프린스톤 신학교의 워필드 강연에서 보완되어 <헬라인들에게는 우매>라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후 <열린비밀: 선교신학의 스케치, 1979>, <끝나지 않은 논제: 자서전, 1985>, <희랍인에게 우매, 1986>, 그리고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책인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1989>과 그 외에도 3권의 책을 출판했다. 뉴비긴은 현재 88세며 노환으로 시력을 상실했으나 여전히 활발히 저술을 계속하고 있다. 또 그의 책들은 모두가 세계적 베스트셀러로서 선교사는 물론 우리 시대의 복음사역자들과 기독교 문화연구가의 필독서로 꼽힌다.  

        뉴비긴의 글은 매우 특이하다. 그것은 전통적인 학문적 논문은 아니다. 그러나 결코 가벼운 수필도 아니다. 그는 첨단 사상가들의 이론을 이 시대의 진단과 복음적 대안을 제시하는 일에 이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인격적 지식>으로 유명한 마이클 폴라니나 <덕 (德) 이후>의 알라시데르 매킨타이어 같은 철학자들의 이론을 빌려 이성의 절대성이 불신되는 포스트모던 분위기 속에선 복음전도가 과거처럼 비이성적인 것이라는 비난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도데체 누구의 합리성을 기준하여 비이성적이란 말인가 라고 되물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이 시대의 조류인 포스트모니즘의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를 오히려 전략적으로 이용하면서 역으로 복음의 세계관을 자신있게 제시하는 것이 학문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가능함을 역설한다. 모든 사상이 궁극적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인 전제에 입각해있으므로 성경적 세계관이 기독교인들의 믿음과 삶의 전제라는 사실을 증거함에 위축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것이다. 이 점에 있어 그는 조금 앞서 흡사한 주장을 했던 화란의 도예베르트나 미국의 반틸과 프란시스 쉐퍼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그는 모든 진리와 가치는 물론 절대적이어야 할 종교조차 상대화하고 다원화 되어버린 서구문화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취할 바른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이는데 주력한다. 특히 다양성을 신봉하는 현재의 문화적 추세에 따라 선교 대신 종교간의 대화를 주장하는 것은 크나큰 잘못이라고 힘주어 경고한다.               그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병폐는 복음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이라고 주장한다. 즉 "나는 어쩌다 보니 기독교인으로 태어났으니 이렇지만, 당신이 성경을 믿으리라고 생각도 않고, 그럴 필요가 없을지 모르나..." 라는 식으로 말하며 서로의 믿음에 대해 대화나 나누자고 하는 소심증이 그가 가장 경악해 마지않는 자세이다.

        현재 런던의 조그만 거처에서 살고있는 그는 늘 그래왔듯이 자신이 세계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그런 사람이다. 지금도 그는 인도에서 처럼 평범한 선교사로서의 또 다른 사역을 감당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매사에 겸허한 그이지만 복음의 절대성에 대해서는 그만큼 강경한 사람도 없다.

        그는 성경적 세계관의 회복을 단순하고 분명한 어조로 역설한다. 그리고 오늘날 처럼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절실하게 필요하는 때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단순한 복음의 진리를 서구인들에게 다시금 들려주기 위해 이 노후의 선교사를 돌아오게 하신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도 레슬리 뉴비긴의 삶과 글이 가진 교훈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90년대에 들어 교회성장이 정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로 세속화와 종교 다원주의, 상대주의등 오늘날의 문화의 영향이 흔히 거론되고 있다. 우리는 결코 서구교회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뉴비긴의 교훈은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로 보냈던 선교사를 돌아와 한국 땅에 복음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비극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다원주의 신학의 개척자: 데이빗 트레이시 (David Tracy)


1983년 5월 독일 튜빙겐 대학에서는 미래에 신학이 어떤 모습으로 바뀔 것인가를 논의하는 대규모 국제 학술대회가 열렸었다. 거기에는 세계적인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나 죤 콥스, 남미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 미국의 문화신학자 랭던 길키 이외에도 위르겐 하버마스와 폴 리꾀르 같은 철학과 인문사회학의 세계적인 대가들이 70명이나 대거 참여한 바 있다.

        데이빗 트레이시는 이 모임을 세계적인 신학자 한스 큉과 함께 주관했을 할 정도의 유명인사이지만 우리에겐 아직까지도 생소한 사람이다. 그는 다원주의 신학의 개척자: 데이빗 트레이시 (David Tracy)


1983년 5월 독일 튜빙겐 대학에서는 미래에 신학이 어떤 모습으로 바뀔 것인가를 논의하는 대규모 국제 학술대회가 열렸었다. 거기에는 세계적인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나 죤 콥스, 남미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 미국의 문화신학자 랭던 길키 이외에도 위르겐 하버마스와 폴 리꾀르 같은 철학과 인문사회학의 세계적인 대가들이 70명이나 대거 참여한 바 있다.

        데이빗 트레이시는 이 모임을 세계적인 신학자 한스 큉과 함께 주관했을 할 정도의 유명인사이지만 우리에겐 아직까지도 생소한 사람이다. 그는 카토릭 사제로서 마침 한스 큉이 교황무오설을 비판하다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에 유사한 문제로 교황청의 조사를 받은 인연이 있다. 그만큼 그의 입장은 카토릭 내에서 조차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현재 미국 시카고 대학의 신학부에서 철학적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심포지움 주제강연은 오늘날의 다원주의 문화 속에서 신학이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다원주의 상황에 대한 그의 관심은 매우 오래되고 줄기찬 것이다. 1975년 이래 출판된 그의 모든 책들의 제목에서 "다원성"이란 단어가 빠짐없이 등장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다원주의는 근대 서구문화의 기초인 이성의 객관성과 통일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상대성과 다양성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일어나면서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문화적 추세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진리추구를 생명으로 여겨온 서구 학문에 치명적인 위기를 몰고왔다.     

        트레이시는 물론 참석자 대부분이 신학도 이 위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느낀다. 더우기 교파적 다양성을 피할 수 없는 신학은 자칫 학문이 아닌 독단으로 비치기 쉽상이다. 그러나 획일적으로 통일된 신학이란 불가능하게 보인다. 이처럼 다양성과 통일성 사이의 긴장은 신학에서 더욱 심각하다. 신학이 학문으로 존속하려면 이 문제의 해결이 중요하다는 것이 트레이시와 참석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과연 "모든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 신학에 근본적 일치점이 존재하는가?" 첫발제자인 큉은 교회역사는 교리상 차이들이 오히려 공통점 모색을 가능케 한 기초였음을 증거한다고 주장했다. 즉 신학의 공통성은 차이들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때문에 모색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레이시는 한걸음 나아가 그것을 가능케 할 다원주의 신학을 제시하려 했다. 큉이 문제를 역사적으로 분석하여 해결 가능성을 논했다면  트레이시는 철학적 작업을 통해서 실제로 해법을 내놓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제시한 해법의 욧점은 다원주의 상황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아온 시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트레이시는 늘 다원성이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는 점을 부각시키기를 애써왔다. 즉 다원성은 모두를 풍요케할 가능성의 보고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넓게는 종교 다원주의 상황과 특히 기독교 교파의 다양성이라는 현실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나아가 다원주의 신학으로 그 다양성을 오히려 보강하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트레이시는 다원주의 시대에서도 신학은 여전히 학문적 위상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학이 교파에 따라 분열된 독단들로 비친다면 기독교 옹호에 유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만일 신학 같이 분열되기 쉬운 학문이 다원성과 공통성를 모두 유지할 방법적 모범을 보일 수 있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학문적 위기를 극복함에 큰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그는 이를 위해서 다원성과 신학의 공통적 학문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묘안의 발견을 그의 평생의 과제로 삼고있다. 

        이 이중적 기획의 윤곽은 이미 1975년에 출판한 첫저서인 <질서를 위한 복된 열정>에서 제시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다원주의 상황에서는 정통신학, 자유신학, 신정통주의, 급진주의 대신 "수정주의"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수정주의는 근대적 신학의 획일성을 배격하고 다원주의를 기조로 한다. 다원성은 이처럼 교파와 신학방법의 다양성 뿐 아니라 타 종교나 세속적 사상까지도 적절히 이해할 수 있는 넓은 창문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저서인 <유비적 상상>에서는 다원주의적 문화속에서 조직신학이 해야할 일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교회를 위해 기독교 전통을 재해석하는 일이다. 이어서 <다원성과 애매성>, <타자와의 대화>등의 비교적 근작에서는 기독교 밖의 사회나 타종교와의 관계를 풀어갈 신앙의 실천과 선교의 방법은 대화라고 주장한다.

        결국 트레이시는 다원주의 신학을 통해서 기독교 내의 모든 교파적 대립을 뛰어넘는 에큐메니즘을 추구하고, 나아가 타종교나 세속사상과 기독교의 대립구도 까지도 넘어설 보편적인 학문과 실천의 체계를 지향한다. 그래서 자신의 신학이 과거의 협소한 틀을 벗어나 공적인 성격을 획득했다는 의미로 "공공신학 (公共神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트레이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공공신학이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납득될 수 있는 기독교를 만들어 보려던 과거의 자유주의 신학의 의도를 계승한 새로운 자유주의 신학 또는 "후기 자유주의" 신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트레이시의 신학은 매사에 지나치게 혼합적 성향을 갖고있다. 그가 다원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것은 알고보면 최신 철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혼합성은 왠만한 다원주의 철학을 훨씬 넘어선다. 우선 이론적 기초의 면에서 보더라도 잡탕이라는 인식을 피하기 어렵다.

        그는 현재 신학에 큰 영향을 미치는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의 해석학을 기본적 입장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과 대립적 논쟁관계에 있는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데리다의 해체주의, 푸코의 계보학 등은 물론이고 그외에도 주요 문학이론등 모든 철학과 인문사회학의 유력한 이론들을 종합하려고 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도 다원성에 대한 트레이시의 편애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종합하려는 이론들도 오랜 상호 토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립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다원주의의 한계를 보여준다. 아울러 다원주의에는 긍정적 요소 만큼 부정적 요소도 있음을 무시해서는 곤란하다. 또 만의 하나 다원주의도 하나의 독단적 전제일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로 다원성에 대한 편애는 자칫 상대주의로 떨어질 위험이 높다. 오늘날의 상황이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원주의적임을 인정하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신학을 하려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상황이 그러니 신학도 다원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그것은 이 시대의 위기를 가져온 상대주의를 극복하는 길이 아니라 도리어 정복당하는 첩경이다. 사실상 트레이시는 다원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극복하려 했으나 오히려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는 인상이 짙다.

        그 한가지 증거로서 트레이시는 성경을 불경이나 코오란, 또는 플라톤의 철학작품과 같이 하나의 고전임을 인정하고 객관적 비교를 통해서 그 진리됨을 증거하고자 한다. 만약 그런 방식으로 성경이 다른 고전들 보다 오늘날의 상황에 대해 적절함을 입증한다면 독단이라는 오해를 피하면서 보다 효과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레이시가 성경을 고전과 크게 구별하지 않는 것은 성경과 더불어 자연인의 이성을 통한 진리 발견의 가능성을 말하는 자연신학과 교회의 전통의 권위를 중시하는 카토릭 신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성경 만을 성경 해석과 신학의 기준을 삼는 종교개혁의 기본원리에 정면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다.

        또 그의 전략은  기독교의 진리를 다른 신앙과 차별적으로 제시하는 일에 있어서는 도움이 되기 보다 분명히 저해요인으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성경이 다른 고전보다 우월함을 어떤 기준에서 입증할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즉 성경의 상대적 우월성이 과연 불경이나 세속적 철학의 입지나 객관주의 과학의 견지에 서있는 사람에게 증명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렇게 우월성이 입증된 기독교 신앙은 성경과 역사적 기독교의 전통에 부합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문화와 학문, 그리고 종교의 보편적 인간경험에 의해 공인된 기독교란 결국 문화의 기준에 적응한 기독교가 되기 쉽상이다. 그것은 문화의 산물이 되버려 초월성은 물론 문화를 비판할 예언자적 계기도 상실하고 만다.

        따라서 오늘날의 변화한 상황을 직시하고 그에 적합한 기독교 사상을 제시하려는 트레이시의 계획이 바로 서려면 무엇보다도 성경 만이 기독교 사상과 신학의 규범이라는 점을 확립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럴 때에 비로서 트레이시가 그렇게 했던 것 처럼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이나 그가 수용한 다른 철학의 원리들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대신 성경의 렌즈를 통하여 철학의 이론들과 자신의 신앙전통을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관점이 생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카토릭 사제로서 마침 한스 큉이 교황무오설을 비판하다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에 유사한 문제로 교황청의 조사를 받은 인연이 있다. 그만큼 그의 입장은 카토릭 내에서 조차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현재 미국 시카고 대학의 신학부에서 철학적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심포지움 주제강연은 오늘날의 다원주의 문화 속에서 신학이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다원주의 상황에 대한 그의 관심은 매우 오래되고 줄기찬 것이다. 1975년 이래 출판된 그의 모든 책들의 제목에서 "다원성"이란 단어가 빠짐없이 등장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다원주의는 근대 서구문화의 기초인 이성의 객관성과 통일성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상대성과 다양성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일어나면서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이 문화적 추세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진리추구를 생명으로 여겨온 서구 학문에 치명적인 위기를 몰고왔다.     

        트레이시는 물론 참석자 대부분이 신학도 이 위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고 느낀다. 더우기 교파적 다양성을 피할 수 없는 신학은 자칫 학문이 아닌 독단으로 비치기 쉽상이다. 그러나 획일적으로 통일된 신학이란 불가능하게 보인다. 이처럼 다양성과 통일성 사이의 긴장은 신학에서 더욱 심각하다. 신학이 학문으로 존속하려면 이 문제의 해결이 중요하다는 것이 트레이시와 참석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과연 "모든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기독교 신학에 근본적 일치점이 존재하는가?" 첫발제자인 큉은 교회역사는 교리상 차이들이 오히려 공통점 모색을 가능케 한 기초였음을 증거한다고 주장했다. 즉 신학의 공통성은 차이들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때문에 모색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레이시는 한걸음 나아가 그것을 가능케 할 다원주의 신학을 제시하려 했다. 큉이 문제를 역사적으로 분석하여 해결 가능성을 논했다면  트레이시는 철학적 작업을 통해서 실제로 해법을 내놓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들이 제시한 해법의 욧점은 다원주의 상황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아온 시각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트레이시는 늘 다원성이 위기가 아니라 기회라는 점을 부각시키기를 애써왔다. 즉 다원성은 모두를 풍요케할 가능성의 보고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넓게는 종교 다원주의 상황과 특히 기독교 교파의 다양성이라는 현실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나아가 다원주의 신학으로 그 다양성을 오히려 보강하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트레이시는 다원주의 시대에서도 신학은 여전히 학문적 위상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학이 교파에 따라 분열된 독단들로 비친다면 기독교 옹호에 유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만일 신학 같이 분열되기 쉬운 학문이 다원성과 공통성를 모두 유지할 방법적 모범을 보일 수 있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학문적 위기를 극복함에 큰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그는 이를 위해서 다원성과 신학의 공통적 학문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묘안의 발견을 그의 평생의 과제로 삼고있다. 

        이 이중적 기획의 윤곽은 이미 1975년에 출판한 첫저서인 <질서를 위한 복된 열정>에서 제시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다원주의 상황에서는 정통신학, 자유신학, 신정통주의, 급진주의 대신 "수정주의"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수정주의는 근대적 신학의 획일성을 배격하고 다원주의를 기조로 한다. 다원성은 이처럼 교파와 신학방법의 다양성 뿐 아니라 타 종교나 세속적 사상까지도 적절히 이해할 수 있는 넓은 창문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저서인 <유비적 상상>에서는 다원주의적 문화속에서 조직신학이 해야할 일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교회를 위해 기독교 전통을 재해석하는 일이다. 이어서 <다원성과 애매성>, <타자와의 대화>등의 비교적 근작에서는 기독교 밖의 사회나 타종교와의 관계를 풀어갈 신앙의 실천과 선교의 방법은 대화라고 주장한다.

        결국 트레이시는 다원주의 신학을 통해서 기독교 내의 모든 교파적 대립을 뛰어넘는 에큐메니즘을 추구하고, 나아가 타종교나 세속사상과 기독교의 대립구도 까지도 넘어설 보편적인 학문과 실천의 체계를 지향한다. 그래서 자신의 신학이 과거의 협소한 틀을 벗어나 공적인 성격을 획득했다는 의미로 "공공신학 (公共神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트레이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공공신학이 결국 모든 사람들에게 납득될 수 있는 기독교를 만들어 보려던 과거의 자유주의 신학의 의도를 계승한 새로운 자유주의 신학 또는 "후기 자유주의" 신학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트레이시의 신학은 매사에 지나치게 혼합적 성향을 갖고있다. 그가 다원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것은 알고보면 최신 철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혼합성은 왠만한 다원주의 철학을 훨씬 넘어선다. 우선 이론적 기초의 면에서 보더라도 잡탕이라는 인식을 피하기 어렵다.

        그는 현재 신학에 큰 영향을 미치는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의 해석학을 기본적 입장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과 대립적 논쟁관계에 있는 하버마스의 비판이론, 데리다의 해체주의, 푸코의 계보학 등은 물론이고 그외에도 주요 문학이론등 모든 철학과 인문사회학의 유력한 이론들을 종합하려고 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도 다원성에 대한 트레이시의 편애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종합하려는 이론들도 오랜 상호 토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립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것은 다원주의의 한계를 보여준다. 아울러 다원주의에는 긍정적 요소 만큼 부정적 요소도 있음을 무시해서는 곤란하다. 또 만의 하나 다원주의도 하나의 독단적 전제일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면 그것은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로 다원성에 대한 편애는 자칫 상대주의로 떨어질 위험이 높다. 오늘날의 상황이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원주의적임을 인정하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신학을 하려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상황이 그러니 신학도 다원주의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그것은 이 시대의 위기를 가져온 상대주의를 극복하는 길이 아니라 도리어 정복당하는 첩경이다. 사실상 트레이시는 다원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극복하려 했으나 오히려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는 인상이 짙다.

        그 한가지 증거로서 트레이시는 성경을 불경이나 코오란, 또는 플라톤의 철학작품과 같이 하나의 고전임을 인정하고 객관적 비교를 통해서 그 진리됨을 증거하고자 한다. 만약 그런 방식으로 성경이 다른 고전들 보다 오늘날의 상황에 대해 적절함을 입증한다면 독단이라는 오해를 피하면서 보다 효과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트레이시가 성경을 고전과 크게 구별하지 않는 것은 성경과 더불어 자연인의 이성을 통한 진리 발견의 가능성을 말하는 자연신학과 교회의 전통의 권위를 중시하는 카토릭 신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성경 만을 성경 해석과 신학의 기준을 삼는 종교개혁의 기본원리에 정면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다.

        또 그의 전략은  기독교의 진리를 다른 신앙과 차별적으로 제시하는 일에 있어서는 도움이 되기 보다 분명히 저해요인으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성경이 다른 고전보다 우월함을 어떤 기준에서 입증할 것인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즉 성경의 상대적 우월성이 과연 불경이나 세속적 철학의 입지나 객관주의 과학의 견지에 서있는 사람에게 증명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렇게 우월성이 입증된 기독교 신앙은 성경과 역사적 기독교의 전통에 부합하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문화와 학문, 그리고 종교의 보편적 인간경험에 의해 공인된 기독교란 결국 문화의 기준에 적응한 기독교가 되기 쉽상이다. 그것은 문화의 산물이 되버려 초월성은 물론 문화를 비판할 예언자적 계기도 상실하고 만다.

        따라서 오늘날의 변화한 상황을 직시하고 그에 적합한 기독교 사상을 제시하려는 트레이시의 계획이 바로 서려면 무엇보다도 성경 만이 기독교 사상과 신학의 규범이라는 점을 확립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럴 때에 비로서 트레이시가 그렇게 했던 것 처럼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이나 그가 수용한 다른 철학의 원리들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대신 성경의 렌즈를 통하여 철학의 이론들과 자신의 신앙전통을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관점이 생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David Tracy의 신학적 해석학


트레이시의 학문적 노력은 첫째로 오늘날 서구사회와 문화의 전반적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다원주의적 분위기를 그 기본적 밑그림으로 하고 있다. 그의 신학적 노력은 특히 종교 다원주의적 상황과 신학적 다원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틀 위에서 그 현상들의 실체를 규명하고 또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트레이시는 오늘날 다른 서구의 여러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흔히 포스트모던적 상황이라 불리우는 크게 변화한 사회와 문화속에서 신학의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고 이 시대의 도전을 대응하고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새로운 신학적 모델을 찾고자 하는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다원주의적 상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트레이시는 결코 상대주의적 결과의 위험성을 간과하지 않고 그에 대한 깊이있는 대안을 모색하려는 면에서도 이 시대의 다른 여러 철학자를 비롯한 학자들과 그 맥을 같이한다. 그는 거듭해서 신학자로서의 자신의 노력이 일반 학문세계의 연구자들과 그 기반을 같이하는 공통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가 한편 다원주의 상황을 반기고 나아가 그것을 옹호하려는 자세에서 그치지 않고 모든 신학자들이 공동적으로 일치할 수 있는 학문적 방법과 기준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밝히려 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그 스스로가 택한 "수정주의자 (revisionist)"라는 이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 명칭은 그가 한편으로 근대적 전통인 획일적 정통신학을 배격하면서 신학적 다원주의를 환영함과 동시에 그것을 폐기하기 원하기 보다 오늘의 변화된 현실의 필요에 따라 재해석함으로서 신학이 다시금 의미있는 무엇이 되도록 하려는 시도를 잘 보여준다. 그는 특히 자신의 수정주의 모델을 정통신학, 자유신학 (신신학), 신정통신학, 그리고 급진신학과 구별함으로 그 의도를 더욱 분명히 하고있다.

        


폴 리쾨르 (Paul Ricoeur, 1913- ) 종합과 화해의 철학자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 (Paul Ricoeur)는 현대철학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해석학의 대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특히 프랑스 철학자 가운데서는 매우 보기드문 개신교 기독교인이다. 프랑스는 근래에 들어 가장 극단적 형태의 반기독교적 사상인 포스트모니즘의 온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사상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신앙인임을 밝힐 뿐 아니라 실제로 성경적 주제들에서 철학의 기초를 취하여 발전시키려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오히려 기이하게 여겨질 정도이다. 

        기독교적 진리를 현재적 상황과 직결되는 철학적 논의에 포함시키려는 리쾨르의 평생에 걸친 노력은 1986년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에딘버러의 기포드 강연과 그 강연 내용을 출판한 <타인으로서 자신, oneself as Another>이라는 논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기포드 강연은 자연신학을 주제로 매년 세계적인 학자중 한명을 강사로 초빙하는 역사깊은 강좌로서 신학과 철학의 노벨상으로 비교되기도 하는 명예로운 강연이다.

        이토록 세계적인 학자로 우뚝 선 리쾨르의 생애 전반부는 비극의 연속이었다. 그는 1913년 프랑스 동남부 발렌스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의 출생 직후 사망했고 영어교사였던 부친은 그가 두살때인 1915년 1차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전사했다. 조부모와 고모의 손에 자란 그는 수업에 임하기 앞서 교재를 완전히 독파하는 뛰어난 학생이었지만 막상 명문 고등사범학교 입학시험에는 낙방하여 그의 말처럼 평생 잊을 수 없는 좌절을 겪었다. 소르본느 대학에 진학하여 철학을 전공하고 철학교사 자격을 획득하였으나 마침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징집되어 장교로 싸우던 중 포로가 되어 종전후 석방될 때 까지 수용소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 독일 포로 수용소에서 훗셀을 연구하여 그의 첫 작품인 <의지의 철학>을 구상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회상할 정도로 고난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리쾨르는 이런 사정으로 인해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던 1950년 즉 40세가 가까워서야 철학박사 학위를 마치게 된다. 이처럼 그는 어려운 삶의 조건을 이기며 성실한 연구로서 자신의 명성을 바닥에서 부터 쌓아온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결국 다소 늦게나마 철학계의 거목으로 떠올라 모교 소르본느 대학의 교수를 지냈고 그 후에는 파리 10대학의 책임자로 있다가 은퇴했다.

        그는 또 1970년 이래 폴 틸리히가 맡았던 자리를 이어받아 매년 정기적으로 미국 중부의 명문 시카고 대학에서 강의하여 미국의 철학계와 신학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시카고 대학은 이미 앞선 글에서 소개한 포스트모던적 해석학 신학자 데이빗 트레이시를 비롯해서 창조와 문화의 신학자로 유명한 랭던 길키와 세계적인 종교학자 미르세아 일리아데등이 교수로 있어 리쾨르는 그곳에서의 강의를 기회로 하여 이들과 함께 신학과 종교연구에 동참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리쾨르 자신은 결코 전통적인 의미의 신학자이거나 변증학자 또는 철학적 신학자도 아니다. 또 그의 학문적 방법론 역시 신학적이지 않다. 그는 가브리엘 마르셀이나 에드문드 훗셀 같은 프랑스와 독일의 주요 현대철학에 대한 연구로 부터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과 문학비평, 그리고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해석학을 거쳐 마침내는 사회과학에로 나아가 문화와 정치, 사회에 이르기 까지 그의 저술은 인문사회학 전분야에 걸쳐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쾨르는 자신의 철학적 작업에 있어 성경적 주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함으로서 의식적으로 종교를 멀리하려는 현대철학의 방향을 역행하는 매우 특이한 철학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개신교적 성장배경으로 인해 고교시절 철학에 입문할 당시부터 이미 신앙과 이성 관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또 하나님에 대한 전적 의존, 죄의식, 그리고 속죄의 개념이 자신의 철학에 있어 중요한 역활을 했다고 말한다. 더우기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보다 앞설 뿐 아니라 죄악보다 심오하고 보다 강력한 힘이 담겨있다고 확신하는 점 등은 이 시대의 어떤 철학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분명한 기독교적 면모를 드러낸다.

        리쾨르 철학의 기독교적 요소는 <악의 상징론>, <은유의 법칙>, <시간과 담론>등의 거의 모든 작품들에서 드러난다. 특히 <타락할 수 있는 인간>에서 드러난 악과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그의 관심은 서양철학자들이 거의 다루지 않는 매우 독특한 주제이다. 파스칼의 영향을 보여주는 이 책은 인간의 타락가능성이 드러나는 악의 모습을 창세기 3장에 나타난 타락의 기록을 통해 분석한 것이다. 리쾨르는 악이 인간의 본성 깊이 뿌리밖고 있는 현실을 분명히 인식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비관에 빠지지 않는데 그것은 그가 악을 극복하는 구속의 능력을 확신하기 때문이라고도 고백한다. 

        그러나 리쾨르는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앙인에겐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는 면도 적지않다. 특히 다른 철학적 논의와 마찬가지로 죄와 악에 대한 설명도 지극히 추상적이며 철학적이다. 예를 들어 그는 인간의 연약성 즉 죄와 도덕적 악으로 떨어질 가능성에 대해 인간에게 주어진 시험이라는 단순한 말보다는 유한성과 무한성의 양극 사이의 균형 상실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또 인간의 타락가능성을 구약의 기록속에서 드러난 종교적 상징속에 나타나고 있는지를 밝히는 과정도 극히 복잡한 철학적인 논의를 통해 전개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많은 노력을 기울인 니체와 프로이드 같은 극단적인 무신론적 사상가들에 대한 비판을 예로 보더라도 전통적인 변증적 신학자는 아님이 분명해진다. 그는 처음부터 니체나 프로이드의 기독교 비판을 부정적으로 조목별로 반박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이들의 무신론이 종교를 파괴하는 부정적인 면이 있으나 아울러 이 시대의 참다운 신앙을 위한 터전을 닦는다는 긍정적인 면도 있음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오히려 우리들의 잘못된 종교적 자세를 고쳐야 참다운 변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상인 리쾨르의 이런 자세는 어쩌면 영국의 신학자 앤토니 씨슬톤의 지적처럼 오늘날 기독교가 직면한 새로운 위협인 포스트모던 사상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대응일지도 모른다. 씨슬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이제껏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파괴적 위협이 되고있음을 지적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니체나 프로이드를 따라서 모든 진리란 결국 보편성이 결여된 하나의 의견이요 나아가 권력을 탐하고 남을 지배하려는 구실에 불과하므로 마땅히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들은 바 복음을 의심없이 믿는 자세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에 모든 진리주장 이면의 숨은 의도에 대한 의심을 부추기는 이 새로운 도전은 로마의 박해나 진화론을 위시한 과학과 철학의 위협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라는 주장이다.

        아마도 리쾨르는 이 시대의 기독교가 직면한 이러한 위협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과학정신 보다 오히려 오늘날 점차 서구사상의 주류를 장악해가는 포스트모던 사상을 주된 적으로 생각하고 이들의 원조격인 니체와 프로이드의 사상을 비판했다 할 수 있다. 리쾨르가 이들을 대항해서 내세운 전략은 그들의 의심과 비판의 원리 대신 신뢰를 이해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일이다. 그는 인간의 삶에 있어 신뢰가 의심이나 비판보다 더 근본적 바탕임을 주장한다. 즉 믿기위해서 뿐 만이 아니라 의심이나 비판을 위해서는 먼저 이해해야 만 한는데 이해는 신뢰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들어 논박하고 있다.

        또 그런 맥락에서 그는 실제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들의 극단적 공격에도 귀를 귀울이는 자세를 실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논적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을 가지는 자세야 말로 오늘날 무차별한 비판과 의심을 부추기는 사상에 가장 적절한 대응이라는 생각이다. 이렇듯 그는 의심과 비판이 가득한 세계 속에서 신뢰를 되찾기 위한 철학을 정초하고자 노력한 사람이다.

        리쾨르는 이러한 정신은 서로 상반되거나 논쟁적 관계에 있는 이론과 학문의 분야들을 종합하려는 그의 철학적 노력에서도 잘 드러난다. 특히 그는 철학에 신학을 접목하려 했을 뿐 아니라 무신론적이고 반기독교적인 프로이드의 심리분석 방법도 채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또 가다머와 하버마스의 해석학 논쟁과 같은 대표적인 대립적 이론의 중재적 입장을 개발하는 등 여러 철학 이론을 절충하여 종합하는 독특한 방법론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리쾨르는 현대의 거의 모든 학문의 영역들을 섭렵하여 그 내용들을 자신의 철학에 종합하고 있다. 물론 이런 그의 관심이 철학적 해석학과 성경해석학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는데 미치지 않았을리가 없다.

        그러나 한편 깊고도 넓은 그의 학문적 자세는 찬사와 함께 절충주의에 대한 적지않은 비판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볼 때, 그가 철학자들이 도외시하는 성경의 주제들을 철학의 중심에 끌어들인 것은 칭찬할만 하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기독교의 입장에 서서 희랍철학을 수용하려는 점에서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비슷한 면이 있다. 또 우리는 아퀴나스의 종합적 신학의 문제점을 통해서 희랍정신과 성경이 절충될 때에 생기는 어려움을 익히 알고있다. 그러므로 만일 누가 리쾨르로 부터 신앙과 신학에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그가 철학적으로 관심과 방법으로 타락이나 악과 같은 성경의 주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혹시 복음의 내용이 부분적으로 나마 가리워지거나 다른 사상과 혼합되어 왜곡되지나 않는지는 세심히 살펴보아야 함을 반드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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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Aquinas (1224/5-1274)" by Jan A. Aertsen


8세기 말로 9세기 초 Carolingian 시대에 오면 중세의 소위 "암흑시대"를 지나 중흥이 싹트기 시작한다. 여기에 이성적 원리를 교회생활 속에 정착시킴으로서 샬레망의 문화정치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 알퀸 (Alcuin 730-804)의 공이 크다. 그러나 본격적인 이성론적 기독교의 발달은 서구가 고대의 철학적 이성에 의해 전격적으로 도전을 받은 13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양상을 띄며 활달해졌다.

        (1) 대학과 스콜라주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소년기에 몬테카시노 (Monte Cassino)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맡겨진 이후 Naples의 대학에 입학하고 후일 가족들의 바램과 달리 새로 생긴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는 Cologne과 당시에 최고의 기독교 학문 중심지인 Paris에서 수학하고 59년 이후 이탈리아에서 가르치다 69년 파리에 와 가르친 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 74년 49세로 죽음.

        그의 삶에는 처음 형성된 대학이 큰 역활을 하였다. 1200년대는  볼로나, 파리, 옥스포드의 대학이 생기던 시대로  대학은 당시 산업이나 상업처럼 길드를 이루어 magistrorum et scholarium의 결합으로 universitas (본래 대학에 국한되기 보다 집단의 공동적 명칭이었다) 를 이루었다. 이는 학문도 하나의 직업화 함을 보여준다. Alexander of Roes (c. 1280)의 지적처럼 당시는 sacerdotium, imperium, studium의 세기관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대학이 교회와 왕궁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대학의 교육은 magister의 두가지 역활, 즉 講讀과 爭論 (legere et disputare)으로서 강독에는 정관(statutes)에 따라 정해진 권위적 텍스트 (auctoritates)를 읽고 설명하는 것이어서 자연히 "주석"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논쟁은 주석적 읽음에서 자연히 수반되는 질문들을 다룸에서 발전하였다. 권위적 문헌으로 부터 야기된 논쟁과 반론의 변증법은 생각이 가능한 모든 선택여지를 재는 일에 있어 근본적 개방성과 하나의 조직적 해결에 도달하기 위한 시도 속에 그 한계까지 밀어붙여진 이성의 엄밀한 적용 둘다를 요구하였다. 여기에서 schoolmaster or 'of school'을 뜻하는 scholasticus로 부터 중세철학과 거의 동의어라 할 수 있는 scholasticism이 유래하였다.

        (2) 인문학부: 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facultas artium (faculty of arts)는 중세대학의 4개 학부중 하나로서 오늘날 (영어권의) 문학사, 석사에 해당하며 신학, 법학, 의학부의 예비단계로서 어거스틴의 De doctrina christiana에서 결정해놓은 세속적 지식의 전부를 포괄하는 전통적 체계를 가리킨다. De doctrina christiana는 성경연구에 중점을 둔 "기독교 학문체계" (Christian scholarship)에 인문학부가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본적 사상으로 하고있으며 13세기까지도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 책의 정신은 과학은 그 자체가 목적을 가지고 있을 수 없고 그 의미와 연계 (meaning and coherence)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연관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가면서 인문학부는 점차 "서구에 아리스토텔레스 전체가 소개 (the introduction of the complete Aristotle in the West)"라 불리우는 중대사건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맞게된다. 이 때까지 만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저술만이 알려져 있었으나 12세기 중반에 Physica, De anima, Metaphysica, Ethica가 번역되었다. 사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아리스토텔레스 (the Stagirite)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희랍 주석서들 방대한 희랍-아라비안 문헌이 도입되었고 신플라톤주의 문헌과 심지어는 유대인 사상가들의 문헌도 라틴어로 번역 소개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시대에는 다양한 영역들에서 고대문화로 부터의 방대한 내용들이 채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많은 이들은 이 비기독교적인 고전문화와 중세문화 사이의 대립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 좋은 예로 Absalo of St. Victors는 "그리스도의 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이 지배하는 곳에선 지배하지 않는다" (The spirit of Christ does not rule where the spirit of Aristotle reigns)라고 했다. 고대문화를 채용함과 배격의 두 입장은 결코 온전히 조화되지 못한채 양극으로 남아있었다.

        이것은 1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강독에 교회가 크게 반발하여 1210년에는 막 설립된 파리대학에서 그의 자연철학 저술의 강독은 파문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수수께끼처럼 그의 강독은 번져나갔고 1255년 결국 공식적으로 허용되어 이제는 반드시 대학 학과목에 그의 저술에 대한 강독이 들어있어야 했었다. 이렇게 해서 인문학부 (facultas aritum)은 사실상 철학부가 되었고 모든 학생들을 위한 예비단계였던 인문학부는 이교적 철학에 푹젖게 되었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부르듯 "그 철학자" (the Philosopher)가 되어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견해를 받아들임은 실재에 대한 전통적 견해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요, Ferdinand Sassen의 말처럼 "중세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속에서 자신에 대해서와 그들이 가진 자연적 능력들에 대해 의식하게 되었다." 

        (3)신학부: 성경학과 수도회: 신학부 교수도 역시 강독과 논쟁을 중심으로 가르쳤으나 여기서 주된 권위적 문헌은 물론 성경이고 그 강독이 중심과제였다. 13세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중흥 뿐 아니라 성경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이 일어난 시대였다. 스콜라적 방법이 성경연구에 확대된 결과 그 연구도 학문의 일부가 되어 아퀴나스의 Summa theologiae에서 처럼 최초로 조직화되어 theo-logy로 발전되었다. 13세기의 수도원의 새로운 발전은 후랜시스와 도미니칸 수도회의 신학발전으로 1250이후 대부분의 주요 신학자는 수도승이었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이전의 수도회와 달리 도시적 분위기에 적대적이지 않고 설교와 선교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활동의 관점에서 학문연구에 강조를 두게된다. 도미니칸은 ordo studentium이라 할 만큼 수도원 생활의 핵심적 일부로서 연구를 둔 첫 수도회였다. 이 수도회가 당시 세워지던 유럽의 대학들에서 주요 교수직을 차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4) 아리스토텔레스: "만인은 본능적으로 앎을 원한다."

이시대 대학의 좌표를 정한 原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일 것이다. "만인은 본능적으로 앎을 원한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들이 감각에서 취하는 기쁨을 들 수 있다. 그것들은 효용성을 떠나서 그것 자체로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최고는 시각적 감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자연적 앎의 욕구의 징표는 봄에 대한  無私한 감지이다 (the disinterested appreciation of seeing) 봄은 앎의 최선의 길로 여겨진다. 봄과 앎은 theoria, Idea, visio등과 같은 용어에서 보듯이 언어적으로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이데가도 이점에 대해 "Being is that which shows itself in the pure perception which belongs to beholding, and only by such seeing does Being get discovered. Primordial and genuine truth lies in pure beholding. This thesis has remained the foundation of western philosophy ever since. This Greek priority for 'seeing' is today often brought into connection with the theme of the 'Hellenization of Christianity' and is then opposed tot he decisive experience of reality in the Old Testatment." 희랍인들은 청각보다 시각적 접근을 중시하고 셈족의 경우 보다 청각적 접근에 강조점 둔다. A. J. van der Aalst)

        앎의 본능은 어떤 일의 원인 (causa)를 파악하는 지식 (scientia)에서 채워진다. 앎이 선이라면 앎의 본능은 선에의 지향이고 무지(ignorantia)도 긍정적으로 말해서 부족함에 대한 인식이다. 앎의 충동은 보는 것에 대한 (즉 그 뒤에 숨은 원인에 대한) 경이 (wonder)에 놓여있다. 데카르트와 달리 보편적이고 방법적으로 시행된 의심이 아니라 경이가 사람으로 하여금 철학의 길에 접어들게 하는 철학의 근원이었다. 경이에서 처음 발생하는 것은 질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든 질문은 1. 무엇이 존재하는지 (whether something is), 2. 본질에 관한 결정적 질문인, 그것이 무엇인지(what something is)의 두개의 질문이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반해서 본능적 앎의 욕구에 대해 "본능적" 이라는 점을 주제화하는 세가지 "선험적" (a priori)인 논증, 즉 만물은 자체의 가능성의 완성을 추구한다는 의미의 선 (bonum)을 지향한다는 존재론적 논증을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사고의 핵심은 유기적 목적론: 즉 생명은 발아-성장-결실한다는 것에 있다.) 우선 두가지는 앎의 욕구의 동력은 만물이 자연히 완성 (perfection, or may be salvation: ontologically perceived salvation)을 추구하듯, 그것이 '인간으로 인간답게' 완성한다는 것과 만물이 자신의 고유한 기능 (열은 뎁히고 무거운것 떨어지듯)을 발현하는 바 앎의 욕구는 '인간의 특수한 활동'의 완성이라는 면에서 설명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백지(tabula rasa)이다. 즉 인간의 이성은 그자체로서는 하나의 가능성이어서 실제적 앎을 통해서 실재를 파악함으로서 획득되어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의 지성은 앎으로 자체의 완성을 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연적 활동은 그의 본질인바 이해 (to understand, intellegere)이다. 여기서 'omnis scientia bona est. 모든 과학 (학문, 앎)은 선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앎 (학문)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완성이고 그의 자연적 욕구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토마스의 시대는 모든 앎을 정당화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뿐 아니라 오히려 "호기심, curiositas" 즉 알고자 하는 '덕스럽지 못한 (unvirtuous)' 욕구를 정죄하는 (발동된 욕구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 어거스틴적 전통이 또한 대등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호기심은 주로 고백록 10권에서 요일 2:16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는 말씀에 근거한 논지이다. 특히 35장은 안목의 정욕을 호기심과 동일시한다. 호기심이란 학문의 외투로 위장된 지식의 헛된 욕구이다. 왜 그것은 안목의 정욕이라 하는가? 그것은 봄이 지식추구에 우선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봄의 기쁨이 본능적 지식욕구의 증거이나 어거스틴은 그것이 세상에 굴복하는 징표로 이해한다. 호기심의 "유혹"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위해 만물을 시험하도록 꼬인다. 호기심은 어거스틴의 근본적 구별인 사용 (uti, using)과 즐김 (frui, enjoying)의 구분을 토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의 De doctrina christiana에 있어 과학의 개념도 이 구분에 기초한다. 그는 지식은 반드시 인류 구원에 봉사할 수 있는 것 (uti)이어야 한다. 하나님 만이 안식을 주고 즐거워할 우리의 모든 갈구의 궁극적 목적이다. 사람들은 즐거워할 것을 사용하기 원하고, 사용하여야 할 것을 즐기는 反轉으로 이 관계를 왜곡한다. 따라서 어거스틴에 있어 무사한 관조 theoria로서의 세속적 지식에 연연하지 않고 기독교 학문적 지식은 도구적 의미를 가짐을 역설함이 그의 호기심 정의에 두드러진다. 즉 그의 관심은 하나님을 앎과 이 종교적 목적에의 효용에 의해 정해진다. 즉 질문의 동인은 그 방향도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트엔느 질송에 의하면 중세 기독교 철학의 가장 특징적 점은 철학적 문제들 가운대 선택을 행한다는 점이다.  즉 어거스틴은 하나님과 영혼을 알기를 원한다. 그외에? 전혀 아무것도." (독백 1,2,7) 기원을 아는 지식과 연관된 자기을 아는 지식, 이 둘 만이 가치있는 지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어거스틴은 자연과학을 본능적인 무엇이 아니라 "앎 자체를 위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의 맥락에 넣는다.

        토마스는 앎을 자연본능적 욕구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호기심을 왜곡된 욕구로 보는 이 둘 사이를 어떻게 조화시키고 있는가? 토마스는 신학대전 II-II, 166ff 에서 원죄에 대한 논의 직후 호기심에 대해 언급하면서 "진리 자체에 대한 지식과 진리를 알고자 진력하고 연구하는 것을 분리해서 판단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진리 자체는 선한 것으로 보는 이 구분은 어거스틴에게서 거리를 둠을 의미한다. 토마스는 지식 달성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완성되고 자연적 욕구인 지식소유가 완성되는 것으로 봄과 연관된다. 토마스는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철학연구는 그 자체에 있어 적법적이고 찬양할 만하다. (신학대전 II-II, 167, 3) 물론 지식의 추구에 있어 잘못될 수는 있다. 이 잘못됨의 근원을 밝힘에 있어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육체의 욕구와 영의 욕구의 구분을 언급하며 죄가 이 둘 사이의 조화를 깨트린 것 (즉 육체의 욕구는 지식추구를 꺼리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반드시 자신의 추구를 통제해야 하는데 여기서도 토마스는 중용 mesotes, 德, 즉 "right mean" between two extremes 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의 핵심개념에 의존한다. 호기심은 앎의 욕구에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극단이므로, 절제 (temperantia, temperance)의 가능적 부분인 학구열 studiositas (zeal for learning)의 덕에 의해 합리적인 통로로 유도되어야 한다. 즉 그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극단적 형태의 앎의 욕구인 호기심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의 지배에 들어와야 한다. 문제의 불화는 지식의 바른 목적인 하나님을 앎에 관계시킴 없이 피조물에 대한 진리를 추구 하는데서 기인한다. 이리하여 어거스틴이 말하는 바 호기심의 종교적 동기가 이론적 고찰의 위계속으로 이전되어 들어온다. (Augustine's religious motivation of the curiositas is transposed into the hierarchy of the theoretical consideration.) 그러한 갈구는 존재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탐구하지 않는 과학에서 악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7) 순환 동기 (circulation motif)와 인간의 행복: 토마스의 종교적 동기를 이론적 고려로 바꾸어 놓음은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완성을 이루는 바, 그 원리와 연합되고자 욕구한다"는 그의 제3논증에서 더 두드러진다. 이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외에도 Proclus, Pseudo-Dionysius와 같은 신플라톤적 순환교리의 채용으로 말미암는다. 신플라톤주의는 모든 실재가 두개의 상반된 동시적 운동, 즉 유출과 회기 (emanation and return, a turning around, conversio, from the first principle, the one or the Good)의 역학관계로 본다. 유출된 모든 것이 근원으로 돌아가기 원함은 거기에 완성 (존재론적으로 미완의 존재, 결핍의 존재가 완성되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회기란 참된 자신들로 부터 멀어진 물질적-감각적인 것으로 부터 분리되어 그 원리와 합일됨을 통해서 순수하게 영적이고 신적인 존재로 됨 (이런 동기의식을 에로스라 함)을 말한다. 토마스는 인간 이성 (human intellect)의 원리 또는 근원을 비물질적 본질들 (incorporeal substances, substantiae separatae)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인간영혼, 천사, 하나님의 불멸적 존재를 부르는 통칭이다. 인간됨의 한 본질은 이성을 통하여 비물질적 본질에 연관됨 이다. 앎이란 아는자와 대상의 합일인데 인간의 최고 목표는 최고의 원리를 앎으로 사유하는 인간이 그에 합일되는 것이다. 여기서 산출 (exitus, procession)과 회기(reditus, return)의 신플라톤주의 원리가 기독교적으로 바뀌어 하나님으로 부터와 하나님을 향한 이중적 과정이 실재에 있어 근본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이로써 창조교리와 다른 유출의 교리마저 수용된다. 토마스는 자연에 의해 강제된 단계적 유출은 부정하고 하나님 만이 모든 것의 창출적 근원으로서 궁극적 목적이 되신다고 한다. 그리하여 토마스도 어거스틴 처럼 오직 하나님에게서 만이 인간d의 참된 안식이 있다는 고백으로 귀결한다. 그러나 토마스에 있어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의 원인들을 알고자 욕구하는 그것은 바로 이성의 안식없음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됨은 바로 그의 이성을 통해서 이기 때문이다.

        (8) 철학의 고민과 인간의 행복: 토마스는 신학자나 철학자 공히 인간 이성과 신적 본질 사이의 "거리"의 문제에 봉착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답하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본 이 문제를 토마스는 인간 지식의 위상과 관해 부정적으로 대답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즉 학문은 단지 감각이 달하는 곳에 유효하므로 비물질적 본질들에 대해 알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의 궁극적 행복은 본질적으로 추상적 과학들을 철학적 이론으로 고려함에 있지않다. 본능적 앎의 욕구는 사색적 과학에서의 완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종적 목적을 초월하며 철학은 완전한 행복을 이루지 못하고 단지 불완전한 행복을 유추할 뿐이다. 철학자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하나님 지식은 그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가 어떠한 분이라는 것은 알 수 없다. (the knowledge that he is, not what he is) 그러나 본능적 앎의 욕구가 거기에 만족할 수 없다. 토마스는 인간의 완전한 행복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명상인 the visio Dei (the contemplation of God's essence)에만 연관된다고 했다. 여기서 theoria와 흡사한 언어사용을 본다. 이 하나님의 명상은 철학적 탐구의 질서에 상충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연구는 결국 궁극적 원인인 하나님의 본질을 알지못하기 때문에 앎의 욕구와 성취 사이의 괴리를 이루어 인생의 초험적 성취를 이룰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해결은 철학의 고민과 낙망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해결은 포기, 체념 (resignation)의 그것이었다. 인간의 행복은 제한된 것이고 미완성과 불완전에 머물 뿐이다.

        (9) 신앙을 통한 (합리적) 해방: 만일 앎의 자연적 욕구가 채워질 수 없다면 완전한 행복이란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것이나 인생이 무의미하고 목적이 없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불합리하다. 토마스는 여기서 "이성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것이 가능해야만 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visio Dei의 불가능성은 신앙과도 상치한다. 하나님에 대한 즉시적 명상은 성경에 약속되어 있고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성경의 권위를 통해서 철학의 고민으로 부터 해방된다. 그의 신학대전이 이런 맥락에 부합한다: 인간의 구원에 관하여, 철학적 훈련들과 더불어 신적으로 계시된 교리들이 있다. 그는 이 해결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거듭 강조한다. 여기서, 기독교 신앙의 종말론이 앎의 자연적 욕구의 궁극성 (the finality of the natural desire to know)와 조화 (종합)되는 점이 충격적이다. 이것의 불길한 의미(portent)인즉 신적 계시는 이성을 초월하나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 반대로 계시는 이성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마5:8의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함의 원문이 마음으로, 즉 이성으로 (God is seen by the heart, that is, by the intellect) 볼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신에 대한 명상은 하나님 본질에 대한 명상으로  (visio Dei = vision per essentiam) 해석되어 그것이 철학적 사색의 지평을 초월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본질적으로 theoria의 아이디얼에 의해 결정되는 상태에 머문다.

        (10) 자연 위의 초자연적 목적에로 부상함: 토마스는 자연/초자연의 이중적 완전을 말한다.  "자연적 원리들 위에 하나님에 의하여 사람에게 운행의 초자연적 원리들이 주입되어야만 이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은총이다. 여기서 은총은 사죄와 교제회복으로 이해되지 않고 최종적 목적을 위해 인간성의 초자연적 완성 (the supernatural perfection of humanity for the final goal)이다.

        (11) 자연과 초자연: 13세기의 인식론적 문제의 핵심은, 실재내의 인간의 방향성에 있어 희랍적 이성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 토마스는 이 문제를 자연과 초자연의 구분을 통해서 대답한다. "... 은총의 선물들이 자연의 선물들 위에 더해지되 그것이 후자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는 방식으로 더해졌다." (신앙의 빛이 이성의 빛을 파괴하지 않는다). 1. 이 둘 사이에는 조화가 있다. "만약 철학자들의 가르침 가운데 신앙에 상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본래 철학이라기 보다 이성의 불완전성에 기인하는 철학의 오용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보듯이 치성의 자충족성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 없다. 또 철학의 오용은 이성 그자체에 의해 밝히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인용문은 인문학부의 어떤 교수들의 주장처럼 신앙에 병립하거나 대립되는 '이중적 진리'를 배격하고 진리란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임을 보인다. 하나님께서 이 둘의 근원이시고 조화를 보증하신다. 이 조화론에도 결국 유출 (앎의 욕구)과 회기 (앎의 완성으로서의 계시, 은총) 라는 순환주제가 엿보인다.  2. 여기서 gratia perficit naturam의 주제가 나온다. 기독교 삶은 자연적 질서의 완성이다. 3. gratia prae-supponit naturam (grace presuppose nature). 자연은 은총의 prae-ambula이다. 이러한 이유로 토마스는 자연과 초자연적 목표를 말한다.

        (12) 결론적 관점: 카토릭과 종교개혁의 근본적 차이는 자연과 은혜의 관계에 대한 상이한 견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개혁자들에게 있어 은총은 인간 본성의 高揚이 아니라 회복이요 해방이다. 즉 방향성에 관한 문제도 언급된다. 인간의 본성은 관계적 relational이라고 본다. 그러나 토마스는 자연의 개념에 사물 그자체들의 존재론적 일관성에 대한 표현이 나타난다. 물론 토마스에게 있어 자연이 피조물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적) 관계임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 관계성을 (비본질적인, 우연한) 범주 (the accidental categories)의 하나로 본다. 즉 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모두 본질 이후에 나오는 비본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세계의 관계가 피조물의 본질에 후속한다는 문제를 낳으므로 여기에 새로운 관계, 즉 범주적 관계가 아닌 초월적 관계 (not catagorical but transcendental)를 필요로 한다.

        토미즘의 또 다른 문제는그것이 인류를 두종류의 목적으로 갈라놓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화란 철학자 쉴레벡스가 말한대로 토마스는 이원론으로 삶을 나누기보다 오히려 그의 가장 깊은 의도는 인간의 삶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삶, 하나의 마지막에 예정된 바, 근원과의 관계 속에서 움직이고 존재함을 보이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