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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督敎哲學은 可能한가? 7

好學 2010. 5. 21. 21:54

 

 

基督敎哲學은 可能한가? 7

 

 

(XI) Paul Tillich (1886-1965)

 

Tillich은 Karl Barth와 함께 오늘날 장신, 한신, 감신, 연신 등에서 철학적 신학에서 가장 중시되는 신학자이다. 아마도 Vantil을 Barth에 비교한다면 Tillich은 Dooyeweerd에 비견할 수 있다. 단 Tillich은 Dooyeweerd보다 관심의 폭이 좁으나 Barth는 Vantil 보다 폭이 넓다. 그는 또한 Niebuhr 형제와 친분이 있었고, 나치의 핍박을 당했다는 면에서는 Bonhoeffer와 비견된다.

   

(가) 배경

 

1. 역사적 상황: 1914년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근대문명에 대한 포괄적 회의와 불안을 가져왔다. 근대는 이성의 시대로 생각되었으나 양대 세계대전이 보여준 것은 극도의 비이성적 상황이었다. 이 시대를 카뮤나 싸르트르와 같은 작가들은 신의 침묵과 광기의 시대로 묘사했다. 이러한 시대를 향해, 특히 비판적 지성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기독교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기독교 신앙은 이런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Tillich은 새로운 변증적 사명에서 기독교 사상을 모색해야할 사명을 느꼈다.

   

2. 신학적상황: 기독교의 초자연성과 역사성에 대한 회의에 근거하여 도덕과 정신운동으로서의 기독교로 바꾸어 놓은 자유주의의 시대가 앞서있었다. 이 시대의 기독교는 하르낙의 <기독교는 무엇인가 What is Christianity>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초대교회 공동체가 만든 경건한 사고의 산물로 보았다. Schleiermacher (1768-1834)와 Albert Ritschl은 Kant처럼 자연신학과 계시신학을 모두 거부하고 감정적 절대의존과 의지적 도덕종교요 인간의 경험으로써의 종교를 말한다. Albert Schweitzer(1875-1965)는 역사적 예수를 찾기 포기하고 역사적인 기독교 아닌 삶으로써의 기독교를 중시한다.

 

이런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역사적 신앙과 성경적 신앙을 보수하는 운동이 Princeton Seminary를 보루로 하여 1927년 Westminster 신학교 분립 이전까지 B. B. Warfield나 Charles Hodege G. Machen 등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자유주의는 이성주의의 몰락과 함께 위기에 봉착했다. 이미 1919년에 Karl Barth (1886-1968)는 30대의 신학자로서 로마서 주석을 내어 (Welt ist Welt, aber Gott ist Gott)로 대변되는 초월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통렬히 비판했다. Tillich역시 이 시대를 신학적 위기의 시대로 인식한다. 전통적인 성경적 계시의 신학이나 logos 신학 (즉 철학적-이성적 신학), 그리고 자연신론(Deism)과 윤리적 신학 모두가 무의미해진 시대에 기독교는 어떤 사상적 기초를 가져야 하는가? 이에 대한 그의 답은 존재(Being)의 신학을 말했다.

   

3. 개인적 경험: 동부독일 브란덴부르그 주의 Starzeddel에서 목사의 아들로 출생 베르린에 이주한 아버지를 따라 거기서 중고등 교육받고 Breslau에서 Schelling의 철학 논문으로 박사학위 받고 1년후 Halle 대학에서 신학박사, 1916년에는 Habilitation을 취득한다. 1912년 목사안수 후 1914년 1차대전에 군목으로 참전하여 전쟁을 몸소 체험한다. 전쟁 후 베를린, 마아르부르그, 드레스덴, 라이프지히 대학에서 가르치며 문화와 철학, 신학을 가르쳤고, 1929년에는 Max Scheler (철학적 인간학의 대가)의 후임으로 신제 비종교적 대학인 Frankfurt 대학의 철학과 사회학과교수로 초빙된다. 1933년 <사회주의적 결단>이라는 책에서 나치를 비난하고 유태인들을 학생테러단체로부터 옹호했다는 이유로 비유대인으로서는 최초로 나치에 의해 면직되었으며 라인홀드 니버의 초청으로 뉴욕의 Union 신학교에 건너가서 신학을, Colombia에서 철학을 그리고 1955년 은퇴후 University Professor of Harvard가 되고 마지막에는 Chicago에서 강의하다 미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대표적인 저작들로는 Systematic Theology, Theology of Culture 문화신학, 설교집으로 The Shaking of the Foundation, New Being, The Courage to be 등이 있다.

 

   

(나) 존재의 신학

 

1. 존재의 신학은 위기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Tillich의 새로운 신학의 필요에 부응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사에 입각한 삶의 자세, 존재를 향한 갈구라는 깊이의 차원(depth dimension)을 종교로 파악하는 신학이다. 전통적인 인격적 하나님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서의 신에 주목한다. 파스칼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 아닌 철학의 신을 성경의 신과 동일시 하여 인간 보편 경험의 가장 깊은 차원으로써의 의미추구,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을 다루는 것이 종교라고 본다. "신이란 인간의 유한성에 내포된 질문에 대한 답"이다.

   

2. 이 때에 신은 전통적인 성경이 계시한 삼위일체적 인격자 하나님이 아니라 존재 그자체, 무제약적인 무엇이요 (무한자), 존재의 힘, 모든 존재의 근거와 의미이다. 이런 신은 오직 간접적이고 상징적으로 진술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는 Bultmann 같은 신학자들이 성경의 비신화화를 외치며 성경을 비상징적인 과학의 언어로 바꾸려는 것을 배격하고 신화와 상징을 도덕이나 학문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상징과 신화적 인 것은 그 자체로 해석되어야 하며 이성적으로 변질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3. 신앙이란 그 분의 계시와 은총에 대한 순종과 응답으로써 인격적 관계에 들어오는 것(교리-신앙고백)과 동행하는 삶(윤리-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신비적 체험이요, 삶의 결단과 그 결단에 입각한 행위(문화)로 여겨진다. 이 때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존재론적 추구와 결단과 이에 입각한 삶의 모범으로 간주된다. 즉 본질적인 인간의 자세인 존재의 본질로부터 소외를 극복하는 용기를 가진 모범으로 그려진다. 그의 <존재에의 용기 Der Mut zum Sein>은 의심과 무의미를 넘어서 결단하는 존재로의 용기를 말한다. 삶은 그 자체가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하나 그것을 직면하는 의심의 용기는 부정적이나 긍정적 자기 표현이라는 해석이다. 따라서 이런 그리스도는 카뮤의 시즈프스 신화와 페스트의 영웅들이나 슈사쿠 엔도의 침묵에서와 포세이돈 아드벤쳐의 신부들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이 신성이 부정된 실존적 인간에 불과하게 된다. 이런 존재로의 용기를 가진 사람은 기독교인 뿐 아니라 불신자, 회의자, 무신론자 까지도 모두 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보편구원론적인 입장으로 나간다. 그 좋은 예가 A.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들 (성채)에서 보는 치셈신부의 입장이다.

   

(다) 존재의 철학과 관계

 

1. 틸리히는 존재론적 신관에 입각한 일종의 철학에 입각한 신학자요, 일종의 존재론적 범신론이며, 명상적 종교를 말한다. 그의 복음은 새로운 존재로의 결단인 인간적 복음이다. 존재의 신학은 이성적 철학을 배격하지만 또 다른 형태의 철학인 키에르케고르, 카뮤, 싸르트르, Heidegger의 존재의 철학인 실존주의의 영향을 반영한다. 실존철학은 사유보다 존재가 앞선다고 보고 주어진 존재로부터 존재의 뿌리, 존재의 의미의 발견 또는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철학이다. 즉 주어진 존재란 무엇이며, 그 존재의 본질이 무엇이며,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구조와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으려 한다. 인간의 존재는 특이하다. 던져진 존재이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규명해야할 도전에 입각한 존재이다.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 없으나 자칫 무의미로 떨어질 위험에 처한다. 인간은 이 의미 추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존재이나 이를 거부하거나 망각할 때 의미를 상실한 비존재가 되고 만다. 이 철학은 수동적 존재, 주어진 존재, 존재의 한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는 점이 특징이며, 그러나 그 존재의 본질을 비존재 또는 죽음을 인식하고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불안(anxiety)를 특징으로 생각하고 이를 어떻게 직면하고 해결해야 하는지를 모색하는 철학이다.

 

 

2. 틸리히는 이런 철학과 신학의 연속성을 모색한다. 즉 logos 대신 pathos 또는 on을 중시하는 철학과 theos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은 존재의 구조를 연구하며 신학은 궁극적인 관심사인 존재에 의해 야기된 실존적 질문에 답하는 행위와 노력이라고 보았다. 그의 신학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이 철학에 비추어 인간이 전 존재를 바쳐서 삶의 의미와 방향을 그것에서 찾는 무엇이 바로 신이요 그 추구행위가 종교라고 해석한다. 이런 종교는 데카르트가 자기 지식의 확실성을 위해, 칸트는 자신의 도덕과 윤리를 위해, 헤겔은 체계의 종합의 극점으로 신을 요청한 것과 같이 인간의 존재와 존재의 의미를 정당화하기 위한 철학적으로 요청되고 결론된 신이다. 이런 신을 중심한 종교는 절대적 은혜와 의존을 말하는 수동적인 Barth와 마찬가지로 보편론적 기독교로 변질된다. 차이는 틸리히는 수동적 은혜를 말하기 보다 능동적 결단과 실존적 추구 강조에 있다.

 

 

3. 문화는 이런 행위를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문화는 종교와 분리되거나 대립되지 않고 종교에 기초한 구체적 삶을 통한 표현이 된다. 틸리히는 자유주의 신학의 인본주의적 자세나 이성적 신학의 한계를 비판하고 거부하는 Barth의 초월주의적 신학와는 다른 자세를 갖는다. 그는 반박과 배타성이 아닌 연결의 신학적 자세를 가진다. 그는 Barth와 달리 신학과 철학, 교회와 사회, 종교와 문화, idealism과 materialism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대화적이며 변증적으로 매개하려는 자세를 갖는다. 그리하여 신과 이성, theos와 logos를 매개하려는 그의 새로운 종합적 신학을 Vermittlungstheologie, Theology of Correlation, 그리고 문화신학이라고 부른다.

   

(라) 평가

 

1.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Tillich에 있어 죄란 존재로부터 소외 또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용기나 의지의 부재, 무관심이다. 이는 합리론적 기독교 사상에서 비이성과 무지로, 이신론적 신관에서는 무질서와 비과학이, 윤리적이고 도덕적 기독교에서 윤리적으로 축소된 죄와 흡사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total depravity와 영적사망과 육적 사망을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다. 이는 일종의 죄의 구조화이다.

 

  

2. 이런 신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마치 신이 없는 것 처럼" 행동하는 사신신학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Althuiser의 You fathered me. 신의 세속화를 말하는 Harvey Cox나 Honest to God을 쓴 울리치의 John Robbinson 감독의 신학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신학은 존재로의 용기를 신에 조준하기 보다 신이 없음을 전제하여야 인간의 실존적 결단 또는 세속적 삶의 긍정의 강도가 세어진다고 보는 관점이다.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니코스 카쟌차키스의 그리스도의 최후의 유혹, 거슬러 올라가 도스토에프스키의 <카라마죠프 형제>의 이반의 대심문관, 사르트르의 오해과 김은국의 <순교자>에 나오는 목사 등도 이런 반열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모두가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몸부림치는 인간의 모습 그 자체가 이미 구원을 배태하고 있다고 그린다. 그러나 구원은 그런 진지한 고민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아감에 있다.

 

   

3. 정통신학은 계시에 입각한 유신론에서 출발한는 반면 틸리히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 특히 극도의 불합리하고 모순된 위기 상황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의미있게 하려는 갈등이 한계에 부딛친 상황, 즉 어쩌면 그것이 여전히 이성적 극복을 모색하기 때문에 오는 위기와 한계 상황에서부터 철학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신학이다. 결국 Tillich을 비롯해서 오늘날의 위기의 신학조차 위기 속에서 성경으로 돌아가기 보다 여전히 이 세상의 철학과 대화 또는 종합을 모색하고 변혁적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 체계에 귀속되어 문제의 해결을 제시하지 못하고 철학이며 대화에 그치고 만다. 이런 종교는 dialogue와 conversation을 말하고 conversion을 말하지 않는다. 궁극적 관심으로 표명된 신과 존재의 근원은 이름만 다를 뿐, 그 내용은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틸리히 신학은 마치 피카소의 그림을 보는 것과 같다고 평한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익숙한 것이 있어보이는 듯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신학과 특히 설교는 전통적인 용어들을 여전히 사용하지만 그것이 실존적 개념으로 바뀌어 있어서 피상적으로 들어 독자의 선이해의 틀 속에서 이해했을 때에는 여전히 매우 은혜롭게 들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특히 경계해야 한다.

  

 

 

(XII) Cornelius Van Til (1985-1987)과 Herman Dooyeweerd (1894-1977)

 

   

Cornelius Van Til

 

 

(가) 배경

   

화란출생, 10세 이민, Calvin College와 Princeton 석사, B.D., Th. M. Ph. D. (철학의 최고)

 

전제주의의 신학자: 코넬리우스 반틸 (Cornelius Van Til 1895-1987)

   

요즈음 세계적으로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쟈크 데리다나 미셸 푸코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의 근대 학문과 특히 철학에 대한 극단적 비판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들은 철학과 학문이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이 아니라 항상 정치 사회적 이념을 밑에 깔고 있음을 폭로했다. 이는 학문이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고 확증한다고 믿어온 상식에 파괴적 충격을 주기에 족한 것이었다. 나아가 객관성과 중립성을 담보하는 진리의 주체로 자처하며 문화위에 군림해온 학문의 자만심에 찬물을 끼얹고 근본적 반성을 촉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오래 전부터 철학과 학문이 중립적이지 않음을 주장해온 것은 기독교 사상가들이었다. 그것은 학문의 주체인 이성이 보통 생각처럼 독립적이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미 어거스틴이나 루터와 칼빈도 이성은 종교적 신념에 입각해서 만 기능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근래에 들어 와서는 화란의 헤르만 도예베르트, 미국의 코넬리우스 반틸, 그리고 이들의 사상을 대중화한 프란시스 쉐이퍼 같은 이들이 이 오랜 전통을 대표하는 철학자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은 근대사상과 학문의 종교적 성격을 드러내어 그 중립성 주장의 허구성을 비판하려 했기 때문에 지식과 권력의 불의한 관계를 폭로하려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들과는 의도에 있어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기서 소개하려는 반틸 (Cornelius Van Til 1895-1987)의 경우에도 근본의도가 철저히 복음적이요 변증적이었다.

 

반틸은 미국 동부 필라델피아시 근교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변증학을 가르쳤던 금세기의 대표적인 개혁주의적 사상가이다. 그는 화란에서 미국으로 이민해 칼빈대학을 졸업한 후 오늘날도 미국내 최고의 철학부로 인정받는 프린스톤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마쳤고 프린스톤 신학교를 거쳐 장로교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반틸의 공로는 객관성과 과학적 중립성을 토대로 철학과 과학이 진리를 판정함에 있어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며 종교를 억누르던 시대에 학문도 하나의 종교, 즉 이성의 능력을 맹신하는 종교임을 밝힌 점이다. 근대 문화를 지배하는 철학과 과학이 종교적으로 중립이 아니며 따라서 객관적이지도 않음을 보인 것이다. 또 인본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기독교 신앙이 근거없는 편견이거나 고집이 아니며 오히려 더 이성적이며 합리적이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의도는 신앙을 옹호하고 나아가 복음의 능력으로 불신자를 도전할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려는 것이었음은 말할 나위없다.

 

이런 반틸의 변증학은 흔히 전제주의 (presuppositionalism)라고 불리운다. 그것은 그의 변증학이 비판하고자 하는 사상체계의 가장 핵심적 전제를 파악하여 그것의 모순됨을 드러내는 근본적 비판의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유물론을 비판함에 있어 공산주의 국가의 경제적 빈곤이나 정치적 독재와 억압을 들어 비판하기 보다, 물질을 만유의 기본으로 내세우는 사상이 결국 어떤 모순과 문제점에 봉착할 수 밖에 없는지를 보이고 그와 비교해 기독교 신앙이 우월한 삶의 기초라는 점을 보이는 전략이다.

 

한편 반틸은 성경이 계시하는 독특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하신 일에 대한 신앙고백을 자신의 제일되는 전제로 삼는다. 그는 칠판에 커다란 원 아래 또 하나의 조그마한 원을 그리고 둘 사이에 평행선을 그어 나누어 놓는 도식으로 자신의 근본 전제를 설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큰 원은 창조주 하나님을, 작은 것은 피조물 우주를, 그 중간에 그어진 선은 둘 사이의 절대적 차이를 강조하기 것이다.

 

본질상 철저히 구분되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사이는 평등의 관계일 수 없다. 반틸은 그것이 당연히 유비(類比)의 관계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피조물은 모든 면에서 창조주를 닮고 그의 법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모든 면에서 그를 따라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해야 한다.

 

만약 그 순종적 유비를 의도적으로 벗어난다면 그것이 곧 죄요 타락이다. 창세기 3장에서 보는 바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는 행동이 그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를 거절하고 독자적인 판단과 행동으로 나가는 자율선언의 결과이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 섬김을 거절하고 자신을 섬김을 삶의 목적으로 삼게된다.

 

반틸은 타락한 인간에게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정면충돌"이라고 부르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 방법은 롬1:18-25의 죄인의 근본속성에 대한 바울의 진단에 기초해있다. 이 말씀에 따라 반틸은 인간 누구나 본성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신성에 대해 알고있다고 확신한다. 그 진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심성에 너무나 깊고도 분명히 박혀있어 그 어떠한 억지와 변명으로도 불신앙을 "핑계할 수 없다." (19절) 불신앙이란 단지 "불의로 진리를 막는" 것이요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짖누르는 것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가 아니라 억지이다.

 

따라서 이 억지를 꺽는 일에는 "정면충돌" 이상 유력한 방법이 없다고 보았다. 불신자에게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할 수 있으나 역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자연의 위대한 창조를 말하고, 고고학적 증거를 제시하고, 부활과 다른 기적의 사실성 증명할 수 있으나 결국 기독교인은 불신자를 향해서 어떤 형태로던 "회개하라"고 도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전통적인 변증이 추구하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합리적인 증거의 추구와 제시와 논증은 복음으로 사람을 회심시키기에 불충분하다. 불신앙의 억지스러운 고집으로 맹목이 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증거보다 회개를 촉구하는 일이 더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중립성의 부정이나 정면충돌 전략은 포스트모던 사상과 일면 비슷한 점이 없지않다. 포스트모니스트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중립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모든 진리주장에 대해 그것이 누구의 합리성에 근거한 것인지 따져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반틸은 종교적 중립은 가능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따라서 불신자와 어떤 사실의 진위를 논하고자 할 때, 판단의 기준 자체가 인본주의적인 사상이거나 성경적 원리 둘 중 하나일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불신자와의 대화에 있어 공통적으로 논의를 펼 중립적 기준을 상정하게 되면 그것 자체가 이미 성경적 진리가 타협없이 제시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홰손하는 것이라고 것이다.

 

이런 반틸의 변증학이 불신앙의 논적들로 부터 독단이라고 비난을 받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전제주의는 기독교 내에서도 강성으로 인식되어있다. 그것은 그가 전제주의 비판을 불신사상 공격 뿐 아니라 신학 내적 논쟁에도 적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정통신학자 칼 바르트 뿐 아니라 심지어는 학문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친분을 나누었던 도예베르트나 쉐이퍼 까지도 엄격히 비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전적 비판가라는 강성의 이미지로 정평이 있다.

 

그러나 필자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유학시절 그의 주저인 <변증학>을 번역하며 친숙해진 반틸은 정말 소박하고 따듯한 분이었다. 반틸은 한국

 

유학생을 특별히 좋아해서 자주 집에 부르곤 했다. 부인을 사별한 후라 밖에 나가 저녁을 사주곤 했는데 헤어질 때는 언제나 모든 방문객에게 서명한 자신의 책을 한아름씩 안겨주곤 했다. 한글판에 실으려고 사진을 찍으러 갔을 때 일이었다. 모든 책들을 기증했으나 그의 서가에는 유독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독어판 전집이 남아있었다. 그는 그 중 두권을 빼내어 양손에 들고는 자신은 이 공룡과 싸웠던 기사였노라며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하는 것이었다.

 

어쨌던 반틸은 과학에 의해 위축된 기독교를 옹호하고 자유신학에 의해 수세에 몰린 정통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싸웠던 투사였다. 그가 평생 교수로 있던 웨스트민스터는 장로교 신학의 중심이었던 프린스톤 신학교 마저 자유화하는 추세에 반발하여 독립한 학교였다. 반틸은 복음적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유신학과의 싸움의 선봉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이렇듯 그에게 붙은 강성적 이미지는 시대 형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편 그의 이러한 모습은 과거 어느 때에 못지 않는 치열한 믿음의 싸움을 해야할 우리에게 모범이 된다. 요즘 화제를 일으키는 포스트모던 사상가는 고작 학문의 객관성과 중립성의 신화를 깨트렸을 뿐이다. 그러나 반틸은 중립의 불가능성이 보다 더 깊은 종교적 차원에 뿌리밖고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사상과 학문이 하나님의 존재를 고백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를 대적해서 인간을 높이고 섬긴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바로 이 점에서 반틸은 기독교인이 세상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변치않는 비판의 정석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