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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督敎哲學은 可能한가? 3

好學 2010. 5. 21. 21:38

 

基督敎哲學은 可能한가? 3

   

(II) 古代 敎會의 基督敎哲學

 

  

(가) 지난주 서론의 정리: 철학적 문화 속의 기독교회  

 

1. 바울의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와 세상의 지혜의 구분과 후자의 배격은 2세기 후반의 교부들 가운데 변증가들 (Apologists)로 불리 우는 이들에게 있어 변화가 왔다. 철학적 분위기를 지닌 기독교가 일어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A. 철학의 훈련을 받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함을 통해서

 

 

B. 철학이 기독교에 대한 정죄에 대항하는데 도움으로 사용되었다. "무신론 자" 라는 비난은 유대교 뿐 아니라 흔히 소크라테스 같은 비판적, 반체제적 철학자들에게 적용된 정죄였다. 따라서 변증가들은 이들의 자신들 입장 변호의 논리를 차용하여 (예: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변증의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이외에 영아살해, 식인, 근친상간, 반국가 등의 새로운 정죄에 대한 변증에 교부들은 이방 철학자들이 이방적 종교의식 비판에 사용한 논리를 차용하였다.

 

 

C. 철학이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유효한 처방으로 생각되었다. 영지주의의 특성은 신약성경을 극단적 알레고리적 해석하여 기독교를 이교의 한껍데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레니우스나 터툴리안은 영지주의가 이교적 신화와 철학의 잘못된 가르침에 입각한 것으로 단정하고, 그것이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참고: 터툴리안의 이단에 대한 처방) 그러나 클레멘트 같은 이는 자신의 교리적 가르침을 그 문화에서 존대받는 철학중에서도 "참된 철학 (the true philosophy)"이라 부를 뿐 아니라 그것을 영지주의자의 잘못된 그노시스(false gnosis)에 대립시켜 "진리의 그노시스" (the gnosis of the truth)라고 불렀다.

 

 

2. 이렇게 해서 2세기에 기독교에 들어온 철학은 간헐적인 반대가 없지는 않았으나 헬라교부와 라틴교부들 모두에 계속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들의 철학에 대한 자세는 중세의 아퀴나스나 현대의 철학적 신학자들의 의도적이며 노골적인 synthesis에 비해 기본적으로는 antithesis 적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철학에 대해 비교적 유화적인 져스틴, 클레멘트도 철학은 잘못을 범하나 계시인 기독교는 늘 옳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들은 기독교 신앙이 당시 문화의 주류인 헬라철학 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인지? 혹시 협력을 강구할 접촉점이 없는지를 찾고자 하는 매우 소극적인 동기에 이끌렸던 것이다.  

 

 

3. Justine Martyr (100-165): 변증철학자, 순교자. 이교도 양친 하에 사마리아 세겜 출신. 청년시기에 스토아, 아리스토틀, 플라톤등을 익히고 훗날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만나 개종함. 개종의 동기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성취에 감명받아 구약과 신양연구, 교회를 찾아 가르침받음. 에베소에서 유대인 학자 Trypho와 논쟁을 벌이고 Tatian을 제자삼아 가르침 두권의 변증론과 트리소와의 대화가 있다. 그의 주된 논점은 이교도들의 반대와 중상에 대항하여 이론적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다.

 

  

4. Tertullian, Quintus Septimius Florens (150/60-220) 칼타고 백부장 아들. 법률, 수사학과 희랍고전 배움. 최고의 학적수준. 법률가로서 명성을 떨침. 이교도적 방탕생활 청산 훗날은 엄격주의 이단인 몬타누스 운동에 가담.

 

라틴신학의 본산인 칼타고는 이탈리아 바로 남부에 위치한 지리적 영향 때문이다. 대표적 신학자 Cyprian, 키프리안. 칼타고의 라틴신학은 paradosis 전승 傳承 tradition을 중시함 (정통파, 보수파)

 

Tertullian-> Cyprian-> Ambrosius -> Augustine -> Catholic

 

알렉산드리아 신학이 형이상학적 전통, 철학적 신학의 시조라면 (Logos 중심) 라틴신학은 전통, 역사적 기독교 (historical Christianity, fides historica 멜랑흐톤 = fides informis 단순한 신앙, 즉 역사적 사실 만을 믿는 칭의의 조건이 되지 않는 신앙) 그리고 사도들의 전통을 중시하는 교회였다. (교권주의, 정통주의) 암부로시우스, 황제를 혼내준 주교.

 

이 전통에서 중요한 논제는 취득시효 De Praescritptione Haereticorum 이단의 취득시효논쟁, 최초의 이단 논박 논문. "너희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성경을 소유할 권한 없다. 너희는 누구나, 내 영토에서 무엇을 하는가... 이 것은 나의 소유이다 (복음의 구전, 전승)나는 이것을 본래 소유하고 있었다. 너희보다 먼저 나는 그것을 소유하였다... 나는 본래 소유자로 부터 받은 양도증을 갖고있다.. 나는 사도들의 상속자요, 법적 절차를 따라 위탁받아 소유한다. (기독교의 역사성을 내세워 신비주의, 영지주의, 철학적 기독교 신학을 배격하는 입장에 서있었다.)

   

 

(나) Clement of Alexandria (150-215)

 

   

1. 앞서 말한대로 고대교회가 철학에 대한 소극적인 분위기를 갖고있던 것을 감안할 때, 클레멘트와 오리겐으로 대표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오히려 기독교인들을 향해 희랍철학을 두둔했다 할 정도로 가장 철학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졌다.

   

 

2. 북아프리카의 로마제국 제2의 도시인 상업중심지요 인구 50만.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스틱 유대인의 본고장이었고 (누가 행18: 24,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특히 기독교 변증가들에 앞서 헬라철학의 통찰력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건 모세오경의 지혜에서 유래된 것으로 해석하려는 필로의 지적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다.  

판타이누스 Pantaenus가 신학교 (Catechetical School)에서 클레멘트, 오리겐 키워냄.

 

 

3. 클레멘트는 아테네 출신. 개종에 대해 별로 알려진 바 없다. "헬라인에의 권고," "교사," 논설집 (Stromateis)

기독교적 학구 속에 고대 희랍철학의 위치를 인정한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터툴리안이 철학은 이단의 아버지라 했다면 클레멘트는 철학은 복음에 이르는 준비로 유명함

그는 교회가 철학을 배격함은 그 철학의 본질을 익숙히 알아서가 아니라 첫째는 철학에 대한 일반적 무지와 둘째로 고전 1:18이하, 골2:8 의 바울의 교훈, 즉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는 말씀에 근거한 편견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았다.

   

 

4. 따라서 그는 사도바울의 철학에 대한 경고가 철학 전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철학, 특히 모든 영적 실재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배격하는 에피큐레스 학파의 유물론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 자신의 작업을 착수했다.

4-2 또한 교회가 일반적으로 철학에 무지한 형편이었기에 모르는 것을 비판함이 잘못이라는 지적과 함께 자신의 접근이 우월하다는 주장을 세우기는 비교적 수월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5. 그러나 그보다 희랍철학에 대해 이런 혁신적 자세를 갖게 만든 근본적 원인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의 특이한 신앙관이었다. 그는 기독교 복음이 인류 구원에 있어 불가결한 지혜의 교훈, 이성적 지식을 준다고 보아 그것을 철학, 즉 지혜를 찾고자 하는 추구와 동일시 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6. 클레멘트에 앞서 져스틴 마터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즉 그리스도인 이전의 사람들은Logos의 일부인 spermatic logos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성육신하신 Logos로 부터 계시된 온전한 지식을 얻었으므로 기독교는 유일의 참된 철학, 지혜, 지식이라 부르기 주저하지 않았다고 그의 변증은 이 확신에 기초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7. 그러나 져스틴과 달리 클레멘트는 희랍철학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우위를 말함에 있어서 그의 Stromateis (The Miscellaanies)에서 "신비"라 칭한 사도들의 구전된 전통의 소유에 강조를 두었다.

 

 

8. 정리하자면 클레멘트는 기독교 신앙도 이성적이고, 헬라철학도 그러하나 후자는 온전하지 못한 것으로 단지 준비의 과정, 헬라인들에게 율법대신 주신 것으로 보았다. (참고: 클레멘트의 Stromateis, I, ch. 5.)

   

 

9. 클레멘트에 의하면 철학은 두가지 효용이 있다.

 

A. 헬라인들에게 있어 철학은 사다리였다. 철학은 그들이 의롭게 살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는 심지어 "철학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진" 경우를 언급한다. (Stromateis, I, ch. 4.) 헬라인들에게 있어 철학은 "그들에게 특수한 언약 (covenant peculiar to them)"이요 "그리스도를 따른 철학에로의 디딤돌 (a stepping-stone to the philosophy which is according to Christ)"이라 했다. (Stromateis, VI, ch. 8.)

 

B. 기독교인에 있어 철학은 엘리베이터였다. 철학은 기독교인이 하나님 나라의 "앞선, 고급한 (advanced citizens)"이 됨에 준비물로서 효용있고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기독교인이 교회의 가르침에 참된 통찰력을 갖고, 신앙을 옹호하는 일에 나서려면 철학은 필수적이다. Stromateis, I, ch. 5. 마지막 부분)

 

   

10. 클레멘트는 자신이 기독교인으로서 이 후자에 대하여 매우 강한 의견을 갖고 있었다. 혹자는 만약 희랍철학이 태양이 떠오르기전 촛불같은 것이요, 예비라면 이제 대명천지에 왜 필요한가? 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클레멘트에게 이러한 질문은 떠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철학이 유용성은 너무도 자명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어떤 정당화도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11. 이러한 클레멘트의 자세는 기독교인들이 기존의 문화, 특히 그 문화의 지적 핵심을 이루는 과학과 철학을 정당한 영역으로 받아들이는 하나의 모범적 케이스를 제공한다. 아마도 이러한 클레멘트가 없었더라면 기독인들은 철학은 악의 세력이요 산물 이상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했을 것이고, Augustine, De doctrina christiana (On Christian Science)는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 있어 클레멘트는 기독교 학문, 기독교 철학의 시조적 역활을 담당했다 할 것이다.

 

  

12. 그러나 그와 더불어 그는 기독교 학문, 철학이 지금까지도 갖는 문제의 핵심을 동시에 그 전통속에 심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너무도 무비판적으로 희랍적 전통, 희랍인들의 철학과 기독교가 접합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희랍철학의 종교적 뿌리를 충분히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궁극적 믿음과 충성은 기독교에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철학의 효용 (이지적 효용, 변증적 효용, 교리적 효용등)을 과신한 나머지 비성경적인 지적 엘리트주의적 구분을 교회 공동체에 들여오는 우를 범했다. 즉 단순한 믿음의 무식한 교인과 철학적으로 깨인 진보된 교인의 구분이 그것이다.

 

   

13. 물론 우리의 입장에서 클레멘트를 비난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기독교철학은 (일반적으로 철학이 그러하듯) 하나의 의도이고 사명이다. 즉 기독교철학은 하나의 실재이라기 보다 결단이다. 그것은 성취라기 보다 명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