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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督敎哲學은 可能한가? 4

好學 2010. 5. 21. 21:44

 

 

基督敎哲學은 可能한가? 4

 

 

(III) Origen (185-254)

  

(가) 생애  

 

1.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표적 인물. 헬라계 이교에서 개종한 부모하의 모태신앙 (터툴리안, 클레멘트, 져스틴 어거스틴 처럼 이교의 과거가 없다.)요 순교자의 아들 (아버지 따라 순교하려 해서 어머니가 옷감춤, 스스로 거세를 할 만큼 열정있는 교사. 그러나 평신도로서 설교하는 사람이었고 (이것이 화근되어 훗날 교회정치의 감독전제주의자인 데메트리우스의 화를 사서 장로직 박탈, 출교당함, 231-232) 70세까지 내내 큰 활약. 카파도기아 학파의 대표인 그리고리 타우마투르거스 (Gregory Thaumaturgus), 니케아의 영웅 아타나시우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 암브로시우스등이 친구요 제자들.

 

Decius황제 박해때 심한 고문당해 결국 그 후유증으로 사망.

   

2. 본격화된 핍박의 시기, 순교자의 자녀로 순교의 체험. 삶 자체도 극히 순교자적이다.

   

3. 헬라적 교양인들의 조롱과 비난. 예로서 플라톤주의자 켈소스의 True Discourse를 반대하여 Contra Celsum 을 썼다. Henry Chadwick, Cambridge: CUP, 1965.

   

4. 라틴교회/ 신학과 더불어 교회정치적 정통노선의 강화라는 부담. Ortho-doxy/ ortho-praxis)

   

5. 오리겐 개인은 매우 극적인 면이 있는 인물: 정치적 희생은 당했으나 개인적 열정과 가르침이나 행동거지의 카리스마가 대단했을 것이 틀림없는 인물. (Henk Hart???)

   

6.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나타난 정보에 의하면 오리겐도 초기에는 philology, 수사학등을 배격했으나 나중에는 자신의 학교의 학과에 철학을 비롯 희랍학문을 재도입하였다. 그 이유는 이단의 교설 뿐 아니라 철학자들이 진리에 대해 주장하는 바를 고려해볼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 했다.  

 

7. 그러나 그의 가르침의 궁극적 목표는 제자들로 하여금 최고의 덕인 <경건 piety>에 도달하도록 인도하는 것. 물리, 지리, 천문학 모두가 학생들로 우주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이성적 경외를 갖도록 인도하고, 철학은 사물의 원인에 대한 지식, 특히 덕인 자기를 앎에 이르게 하고, 성경주석은 감추어진 진리에 도달하게 한다.  

 

8. 그의 제자 그레고리에게 비친 오리겐은 <철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특징은 경건과 이성을 결합하는 것. the conjunction of piety and reason  

 

9. 희랍인들은 철학을 가장 고귀한 교육 the pre-eminent paideusis 즉 문화 Bildung 교화,와 학식을 얻는 최고, 주된 방법으로 여겼다.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사상가들은 그것을 오로지 준비적인 단계 a pro-paideusis 로 보았다.

 

 

(나) 오리겐의 사상  

 

1. 오리겐은 보기에 따라 이단에서 부터 극도의 순수주의자, 변증가, 교사, 순교자로 보인다. 또는 살기는 기독교적으로 살았으나 생각은 철저히 헬라적이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기이한 평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개종한 지도자와 달리 그가 모태신앙인 점, 순교자라는 점이 그렇다.  

 

2. 자신의 가르침에 대한 상대화를 마지않음. (신학에 대한 지나친 권위의식을 갖지않음) 즉 사도들의 전통이 말하지 않은 영역 부분들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교조적 권위를 주장하기 보다 그리고 자신의 가르침을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에 대한 해석이나 반복으로 주장하기 보다, 이성적/합리적이고 방법론적인 추론으로 진리에 근접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mere approximations of the truth  

 

3. 오리겐 시대는 기독교의 교리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기요, 아직도 많은 실험의 단계였다. experimenting stage: 철학과 심지어 영지주의 종파들 (종교들)이 제공하는 수 많은 개념들과 수 많은 체계들이 기독교의 신앙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일에 실험적으로 사용되는 시대였다. 그리고 그런 자료들은 정말 풍부했다.

   

4. 우의적 성경해석 allegorical interpretation : 오리겐의 우의적인 해석은 유대인들의 구약해석 (선민사상등)이나 말시온파와 같은 문자적 해석으로 이단에 떨어진 이들을 배격하기 위한 변증적 신학의 한 방편이었다.

오리겐은 Marcion (최초의 성경편집, 문서설적 이단)의 (구약을 예언적, 영적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배격하기 위해 노력했다. "문자가 표시하는 것보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읽으라." 말시온은 <선>한/<공의로운> 하나님의 상반 주장: 구약/신약의 하나님, 예수님의 육체탄생 부정, 가현론 Doceticism

참고로 안디옥학파는 역사적 해석 (Alam어권, 네스토리우스 이후 정죄된 곳, 수리아어권, 삼위일체보다 모나키안적) 뚜렸한 신학자 부재. 라틴교회는 문법적 해석. Grammatical-historical interpretation/ allegorical interpretation.

   

5. 교육적 섭리 (철학적 신학): God's pedagogical providence 란 사실에 대한 우의적 해석과 같다. "Read: what it says is not what the words convey." "See: what is there is not what the eye beholds."

 

오리겐은 가시적 세계, 성육신을 포함한 역사의 전 과정이 영적인 존재 (인간)으로 하여금 물질적인 것이 아닌 신적 실재 (divine reality) 지식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보았다. 인간이 주변을 살펴 자신의 영적 근원을 바라보게 하려 함이다. (시8편, 전도서 3:11) 기독교 신앙은 영원한 로고스와 함께 있던 영혼이 본향을 그리워하며 결국 그곳으로 돌아가야 함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리겐의 이런 주장은 순수히 성경적인 것 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플라톤 철학의 이원론적 세계관과 철학이란 곧 영혼의 본연적 자세로 주장된 <회상 recollection> 의 고상한 작업이라는 이론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오리겐 당시 철학은 이미 근본적 질문을 던지며 지혜를 추구하는 전통을 떠나서 신학적이고 주석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즉 3세기의 플라토니즘은 종교화된 철학으로서 구원이나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여 삶의 안정을 주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가 철학 (특히 최고의 형태인 플라톤주의) 을 무시한다는 켈수스의 비난에 대항하여 기독교는 오히려 플라톤 철학이 추구하는 영적세계로의 복귀를 이루는 참된 철학이라 주장한다.

 

여기서 오리겐의 문제점은 영계로의 복귀의 방법을 philo-sophical 철학, 지혜의 추구, 지식으로 본 것이다. 그리하여 오리겐은 기독교 신앙을 플라톤적/희랍적 신앙, 즉 이성적 (사변적) 방법을 통한 구원의 추구 성향에 접근시키는 위험성이 있다. 이 면에서 오리겐은 철학적 신학자라 할 수 있다.  

 

6. 정죄됨: 이러한 오리겐의 철학적 자세는 553년 Constantinople에서 모인 6차 ecumenical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된다. 여기에는 종교적 이유와 더불어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유스트니안 Emperor Justinian (527-65) 과거의 로마제국을 군사력이나 황제숭배의 이데올로기로 통합했던 것 처럼 교리적으로 통합된 기독교제국 Christendom의 이념으로 회복하려는 야망가. 그 일환으로 첫째 플라톤의 유서깊은 the Academy in Athens 폐교 (529) 하고 이어서 교회와 신학영역의 이단 색출 작업에 착수하여 이미 543년에 오리겐을 정죄했던 것.

 

물론 이런 정치적 개입이나 심지어는 교회정치의 힘이 기독교와 희랍철학의 문제를 풀거나 종결시킬 수는 없었다. 이 문제는 오늘까지 내려온다.  

 

7. 오리겐은 이처럼 보기에 따라 매우 극단적으로 상반된 모습을 보인다. 즉 한편으로 순교자요 다른 면에서는 이단자이다. 과연 그는 기독교도인가 희랍철학자인가? 결국 질문은 "오리겐이 어떻게 근본적으로 희랍적인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면서도 아무런 문제없이 그 신앙에 신실할 수 있다고 믿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점에 대한 답이 그의 로고스론이다.

 

   

(다) 오리겐의 로고스론

   

1. logos 개념에 대한 현대 (개혁) 신학자들의 반대: 기독교 신앙의 인격적이고 윤리적인 요소가 논리와 객관성의 제단에 희생되었다. 또 영원불변, 단 한번에 모든 것에 통용되는 (which holds once and for all) 그 무엇을 뜻하므로 전혀 새로운 것을 바라는 종말론적 요소에 장애로 봄.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 기독교 지성인들 이 개념을 기꺼이 수용하여 매우 널리 사용했다.

   

2. 오리겐도 예외가 아니며 그는 이 개념을

   

1) 일반인과 로고스의 관계: 모든 사람이 로고스에 참여 (또는 분신임)이기 때문에 신적 진리 (divine truth, 신존재 의식, 신에 대한 막연하기도 하고 때로는 명확한 지식; 초월적 존재, 능력, 지혜, 공의, 심판, 복주는 존재, 조물주 의식등) 에 대해 다소간에 알고 있다는 설명한다.

 

바로 여기에 철학과 기독교의 연결점이 있으나 철학은 몇가지 약점을 가진다. 첫째 약점은 그것이 많은 바른 통찰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롬1:8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suppressing the truth in unrighteousness)"(예를 들면 죄를 구조화하는 것) 등의 왜곡이 있다. 둘째 철학은 대부분의 사람의 지적능력을 넘어서는 엘리트적 속성이 있다. 세째로 철학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지혜와 인간 스스로를 의존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므로 철학은 진리에 이르는 일에 꼭 필요하거나 불가결한 것이 아니다.  

 

2) 신자들에게 있어 로고스: 그리스도는 로고스의 한 이름일 뿐으로 영원한 로고스는 성육신한 로고스와 구분되어야 한다는 이단적 교리와 더불어 영원한 로고스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계단이라 봄. 즉 철학은 준비이고 신자들 가운데도 대부분은 이적을 믿는 신앙이나 목자, 치유자, 십자가에 못밖히신 이 등의 "열등한 이름들" (inferior names)로 안다. 그러나 소수는 영원한 로고스에 가까이 가는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서 종래에는 하나님 자신을 명상하는 visio Dei의 단계에 이르는다는 것.

 

오리겐의 이 교리는 신자들 간의 우열이 지적인 구분이며 자칫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his person and works 마16 (28), 막8 (16), 눅9 (24), 요12: 23 (21) 대신 명상적, 사변적 신앙을 고무할 수 있다는 위험을 내포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볼 때 이시기는 아직도 대속설이 표준교리, 정통화되는 과정에 있었던 신학적 실험시기 였다는 점을 또한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여러면으로 볼 때, 오리겐은 매우 철학적인 면에 비판정신이 약했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없다.

   

3. 결국 오리겐은 로고스론을 통해 철학과 기독교 신앙의 연속성과 보편성을 보장하고 아울러 양자의 조화 가능성을 모색했다고 볼 수 있다. 희랍인들이 만인의 영혼이 참여한 영원한 로고스를 진리의 근원으로 본 점에 주목하여 이 로고스와 요한복음 초두의 로고스를 동일시 하므로서 그는 일견 철학 (특히 훌륭한 통찰력이 깊은 플라톤 철학등)과 기독교 신앙의 연결과 조화를 보장하는 듯 하다.

 

그러나 결국 그의 철학적 신학은 연속성을 강조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영원한 로고스의 한 양상, 이름으로 축소시키는 위험한 경향을 보인다. 또 신앙의 우위를 강조하고 철학을 열등한 것으로 놓을 때에는 이원론적 분리로 나아간다.

     

 

(IV). Augustine Aurelius, Bishop of Hippo (354-430)

   

 

(가) 생애와 신/철학적 사유의 바탕

   

1. 19세에 키케로 (106-43 B.C. 희랍철학의 라틴화의 대부,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 다음으로 영향력있는 스토아 철학자)의 Hortensius를 접하고 지혜추구 시작. (철학자의 길에 들어섬) 그와 동시에 비의종교인 마니교에 가입했다 로마로 진출할 무렵 떠나 영적/지적 회의주의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세속적인 면에서는 성공적인 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결국 고향 타가스테와 카르타고와 로마에 수사학자로 진출한다 (대학교수, 변호사쯤의 입신).

   

2. 그의 삶에 대한 면모들은 386년 개종이후 15년 지난 해 Confessions 청년시기의 자서전적 정보제공. 33세까지 기독교 배경에 무관심하다 밀란의 감독 Ambrose의 설교를 정기적으로 듣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기에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책을 통해 플로티노스의 황홀경을 체험하는 등 감각적 세계 이외의 영적세계의 실재를 믿기 시작함. 이것이 마니교의 조야한 물질주의 또는 성욕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실마리를 주었을 것이다.

   

3. 386년 마침내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수사학을 버리고 그의 재능을 그리스도께 바치기로 결심했으나 아직도 철학적인 분위기가 강한 저술을 했다. 특히 세례를 받기위해 밀란 근처 카시시아쿰 Cassiciacum 이란 곳에 머물며 쓴 Contra Academicos (Against the Academics)는 이 시기에 쓴 De beata vita (On the Blessed Life), De ordine (On the Order)와 더불어 기원전 3-2세기의 철학학파들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담고있다. 이들은 대화체 저술로 그 형태에서 조차 플라톤 전통의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또 이 글들에서 특히 3-2세기의 회의론적 철학자들에 대한 반론을 펴되 인식론, 윤리, 존재론의 세부분으로 나누어 적고있다.

   

4. 아프리카로 돌아가 타가스테의 수도원에서 지낸 후 히포에서 장로, 부감독, 감독이 됨 (396) 목회자요 감독으로 바쁜 중에도 저술활동: 방대한 저술했다. 특히 그의 전반기 저술에는 (그의 작품 전체에도 다소간) 그가 개종의 전후에 깊이 영향을 받은 신플라톤주의와 이제 세례를 받음으로 받아들인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복합적 영향의 요소가 보인다. 어쨋던 그의 개종은 신앙의 개종이자 그의 사상 전체, 그의 지혜추구, 철학의 방향전환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이 처음에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을 지라도.

   

5. 교회사와 기독교 사상사에 있어 어거스틴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그는 청년기까지 몰두했던 고대의 희랍-로마 문화의 전통과 개종후에 헌신한 기독교 신앙을 종합할 뿐 아니라, 그로써 기독교 신앙과 희랍-로마문명의 종합으로 특징될 수 있는 중세의 관문에 서있다. 또 교회사적으로도 그 자신이 라틴교회 출신이나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의 분위기를 종합하는 위치에 서있기도 하다.

   

6.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그는 신앙과 이성이라는 두가지의 진리의 길을 조화속에 활용하는 자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세례받기 위해 준비하던 카시키아쿰에서 쓴 Contra Academicos III, 14장에서 "우리는 권위와 이성의 이중의 힘에 의하여 배우게 된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차후로 나는 그리스도의 권위에서 결코 떠나지 않으려고 결심하였다. 대개 나는 이보다 더 타당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묘한 이성으로 추구해야 할 것에 관해서는 믿음으로만 진리를 깨닫을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도 깨닫기를 갈급한다. 그리하여 나는 플라톤주의자들에 있어서도 우리의 거룩한 그것들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라고 적고있다.

   

7. 이와 아울러 중요한 것은 그가 플라톤 철학을 진지하게 접하기 시작한 시기가 개종을 준비하던 시기와 엇비슷 하다는 점이다. 그는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과 세상적 학문의 연마, 철학의 사용사이에 터툴리안과 같은 긴장을 겪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나) 3-2세기 희랍철학 비판

   

1. 그는 Contra Academicos의 마지막 부분에서 당대철학의 경향의 분석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특히 그는 아테네에 있던 플라톤의 아카데미의 후예들이 자못 타락한 회의주의에 젖어있는 폐혜를 비판한다. 그는 철학을 참/거짓 철학으로 이분하면서 이 회의주의 철학을 거짓의 철학 이라 하였다.

   

2. 거짓의 철학으로 분류한 회의주의 전통은 진리 그자체, 진리의 성육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눈앞에 두고도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던 빌라도의 깊이없는 "지혜"와 다를바 없는 것이라 했다. 즉 소피스트적 냉소와 비판주의적 자세는 폭넓은 관용의 분위기란 연막에 감추어진 영적, 정신적 위기의 표현일 뿐이라고 보았다.

  

3. 어거스틴은 그 어떠한 이유에서건 인간이 삶의 기초를 이루는 진리와 확실성을 발견하기를 포기하거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분위기에 빠지면 삶 자체가 미로에 빠지고 마는 것으로 보았다. 그가 이러한 철학을 극구 반대하는 것은 그 철학이 살인이나 여타의 범죄를 방조하지는 않더라도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절망에 빠지게 하는 폐혜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4. 이러한 회의론 철학과 더불어 그 유파인 에피큐레스학파의 탐미주의와 유물론적 사고도 배격해야 한다고 보았다.

   

5. 또 아울러 비교적 순결이나 도덕성 강조로 적지않은 초기 기독교 사상가들에 의해 적지않은 선호와 호평조차 받았던 스토익학파에 대해서도 재고한다. 그는 이도 배격해야 할 것은 스토익파도 세상을 보는 안목이 이생과 물질적인 것에 매여있기 때문이라 했다.  

 

6. 그러나 그는 이러한 허위, 거짓된 철학과는 달리 진리의 전통이 철학에는 흐르고 있다고 인정했다. 잘못된 전통들은 서로 비난하고 불일치 하지만 참된 철학은 모든 조류를 하나로 묶어 통일체계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7. 그는 플라톤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이러한 고전적 예를 본다. 그는 이 철학들을 부정적, 회의적이고 최선의 경우 독단론을 비판하는데 그치는 소극적 철학 들과 달리 긍정적이고 바른 철학 전통으로 간주한다. 특별히 CA III 37, 42에 보면 플라톤 철학을 "희랍철학의 유익한 모든 요소를 규합하여 윤리, 존재론, 인식론, 사회철학, 정치학, 법철학 등을 고루 구비한 하나의 최고의 체계를 제시한 완전한 형태로 칭찬하고 있다."

 

(플라톤 철학이란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소크라테스의 대화편으로 유타이프로, 파이돈, 소크라테스의 변명, 국가편, 법등 29편의 그당시 알려진 학문의 집대성으로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사란 이 대화편의 주석이라 했을 정도이다. 또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화신같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익명의 기독교인으로 부를 유혹에 빠질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다) 플라톤주의의 과대평가

   

1. 어거스틴이 플라톤 주의를 높이 평가하게 된 첫 이유는 그 존재론에 있다. 플라톤주의의 존재론은 두개의 세계, 즉 현상, 가시계와 이념의 세계이다.

 

가지세계 intelligible 형상, 최고선 지식 지식

 

수학적 대상 (추상) 사고

 

가시세계 visible 사물, things 신념 belief

 

허상 image 상상 속견

 

물론 전자는 후자보다 저등한 일종의 타락한 세계로 본다. 이러한 존재론은 나아가 창조주와 조물주 Demiurge 사상, 정신/물질의 이원적 세계관에 있어 성경에 근접한다고 봄.

   

2. 인식론은 존재론에 따라서 가시계는 이데아의 세계의 이미지, 그림자로 보고, 그 둘의 관계가 모방, 유사 mimesis, resemblence의 관계로 보았다. 이런 인식론도 인간의 마음은 앎에 잇어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조명이 필요하다는 기독교 인식론과 통하는 것으로 봄.

   

3. 윤리를 최고로 놓는 플라톤주의는 참된 행복이란 자신의 근원인 신을 향하는 명상이라고 했던 면에서 기독교와 통하는 것으로 간주함. 그러나 나아가 플라톤주의는 바른 행위를 위한 규범을 사람 모두가 아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고도의 지성을 소유한 "소수"에 국한된다고 보았다. 이는 플라톤주의의 elitism적 요소라 할 수 있다.

   

4. 어거스틴이 놀랍게도 플라톤주의의 이러한 요소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두세계 이론이 그가 배격하고자 했던 유물론적 바탕을 가진 철학과 영지주의 배격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5. 이러한 두개의 세계 이론은 그를 마니키즘의 이원론적 세계관, 즉 세계 자체가 선과 악으로 되어있다는 견해를 벗어나 그가 성경적인 세계이론이라 생각한 영과 물질계에 대한 구분을 확신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영과 물질계 구분을 기초로 하여 에피큐레스, 스토익의 유물론을 배격하였다.

   

6. 개종이후 그리스도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과 권위를 고백한 어거스틴은 세부적으로 가서 성경의 가르침에 부딪치는 것 같이 보이는 플라톤주의의 몇가지 면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 배치되지 않는다고 보는 한 플라톤주의의 고도화된 이성을 잘 사용함으로 삶의 많은 유익과 진리 발견의 유익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특히 그는 플라톤주의의 핵인 이 두세계관에 대해 별다른 의심과 비판없이 그것을 성경적 영/육의 구분과 동일시 하였다. 그는 이러한 판단하에 플라톤주의는 바울이 철학과 헛된 신화에 대한 경고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보았다.

   

7. 이렇듯 플라톤주의는 어거스틴에게 눈을 열어 영적인 세계의 존재와 그에 대립하는 물질계를 보게하였으나 동시에 그 철학적 함의와 비성경적 동기를 인해 그의 시각을 굴절시키는 이중적 영향을 미쳤다.

   

8. 플라톤주의에 대한 과도한 평가는 그의 생애 전반에 대개 지속되었다. 이것은 반달족 알라릭에 의한 로마침공과 연관된 변증서인 말기작품 De civitate Dei (410)에서도 드러난다.

 

  

(라) 플라톤주의의 영향

   

1. 어거스틴은 De beata vita (복된 삶)에서 sapientia (wisdom)을 얻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또 복된 삶의 기초로 말하고 있다.

   

2.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이데아의 총합이며 가시세계의 원형이며 존재의 완전한 완성으로 인간은 지적 명상을 통해 그것에 참여한다고 주장 한다.

   

3. 어거스틴은 지성 (intellection)을 인간의 활동중 최고로 보고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 활동이나 일보다 훨씬 중요하고 우월한 것으로 본다. 반면에 감각적 경험을 명백히 경시한다. 즉 수학, 기하학, 음악등의 이론적 과학은 감각적 실재에 대한 연구보다 훨씬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4. 그러나 이론적 과학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만유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명상이었다. 어거스틴은 그 명상을 지칭하는 말로 visio Dei, frui Deo (enjoying God) 하나님을 즐거워 함이라 불렀다.

   

5. De ordine에서는 참철학에 관한 언급으로 참 철학은 인간을 물질적이며 부패할 수 있는 실재로 부터 해방시키는 것으로 정의된다. 플라톤철학을 natural theology라 부르고 이것만이 기독교신앙에 비견될 수 있다했다.

   

6. 하나 특이한 것은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신앙의 유사성에 대한 설명에 있어 그는 당시의 널리 사용되던 간접적 모세의 영향설을 지지한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이렇게 차용된 진리는 본래 피조계에 숨겨진 진리로서 그것을 이교도들이 찾아내었을 뿐이라고 한다.

   

7. 그러나 여기서 어거스틴은 이 진리의 소유권이 본래 기독교인에게 속한 것임을 주장한다. (터툴리안의 이단을 향한 취득시효론을 연상케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비롯한 기독교철학자들의 이교철학 이용을 spoliation 탈취, 수복의 행위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마치 출애급 당시 애급의 보화를 취하듯이 (출12:36) 그러나 이런 자세에 무비판적인 면이 문제이다. 이방의 보화에는 이교의 우상숭배의 찌꺼기가 남아있음을 주의해야 했다. 이교도의 건물을 예배처소로 전용함에 벽화, 장식, 또 그 기초가 남아있는 상태로 사용되는 것은 과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가?

   

8. 플라톤주의는 오늘날 관념론적 이성주의라 부르는 것과 가깝다. 그는 관념을 감각적 세계의 근원으로 보았는데 이는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반박되었다. 플라톤의 핵심적 문제는 우리의 이해기구인 이성, 사고능력을 이해의 내용, 가능성인 감각과 경험과 분리하고 이성, 사고능력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천상적인 무엇으로 취급한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이성의 실체화 hyperstatization이라 할 수 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실체화된 이성을 잠언 3:19-20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동일시 한 것이 문제이다. "여호와게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그 지식으로 해양이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 이 지혜는 생명나무, 이것을 가지는자는 복됨 17절.

 

9. 이러한 자세는 결국 하나님의 창조 가운데 관념적, 이성적인 면을 물질적이고 유기적인 면 위에 군림하게 하는 비성경적인 (서구의 고질적인) 이성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을 드러낸다. 물론 여기서 그가 유물론적 사상과 싸움에서 유용성을 본 점은 감안할 수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경우 이러한 비성경적 구분과 서열매김이 바울의 영/육의 구분과 동일시되어 자연스레 받아들여지고 있음도 주지할 만 하다.

   

10. 어거스틴에 있어 기독교의 우월성은 하나님의 아들의 겸손의 방식과 고통, 죽음을 통한 말씀이다. 철학은 지적 소수를 상대하나 복음은 만민을 상대할 수 있다. 특히 가시적으로 오신 그리시도는 특히 징표요 이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진리를 구체적으로 보이셨다. 어거스틴이 성육신을 강조한 이면에는 이런 생각과 관련이 깊다. 물론 그의 말기작품에서 예수의 오심이 육체로 부터 풀어주기 위함이 아니라 죄로 부터 풀어주심을 위함이요, 모범설이 아닌 대속설에 대한 이해가 확실하다.

   

11. 어거스틴이 플라톤주의등 고전철학에 대해 전폭적으로 무비판한 자세로 일관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펠리기우스와의 자유의지 논재엥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자연인의 절대무능의 개념에는 이미 서구사상의 이성의 자충족성에 대한 비판이 엿보인다. (파르메니데스식의 전통에서 감각, 경험보다 이성을 우위에 놓고 그 독립성을 주장하는 전통)

 

 

(마) 정리

   

1. 어거스틴은 라틴신학의 전통/권위에 입각한 역사적 신앙 (fides historica 그의 표현에 의하면 "이성으로 발견한 것이 아니라... 기억에 맡겨진 것")을 중시하며 개혁자가 아닌 전승의 수호자로 자처했다.

 

2. 그러나 그에게는 알렉산드리아의 탐구정신도 강하게 작용했다. 그는 전통에 입각하고 권위를 존중하여 받아들인 신앙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하여 이성의 사용과 나아가 이교도들의 학문중 자신의 판단으로 가장 훌륭하다고 인정한 플라톤 철학의 활용을 주저하지 않았다.

   

3. 이것이 바로 "신앙은 찾고 지성은 발견한다 (fides quaerit, intellectus invenit)"라는 말로 정착된 어거스틴 특유의 원리다. 그는 신앙과 이성을 대립시키기 보다 오히려 이성은 신앙을 북돋우는 것으로 이해한다.

   

4. 한철하의 지적처럼 어거스틴에게서 터둘리안과 클레멘트가 조화됨. (언제나 위대한 인물은 전통위에 서서 그 전통을 의미있게 살려내는 능력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다.)

 

5. 그는 신앙을 더 잘 이해하고 보존하고 설명하려 했다. 그는 특히 처한 상황에 따라 동시대인들에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설명하기 위해 고대의 모든 지적유산을 연구하고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로 인해 자연히 고대문화의 내용물들이 기독교의 문화적 유산으로 변형되어 흡수되기 시작하였다.

   

6. 그는 전통의 바른 해석, 의미있는 이해를 위해서 당대의 문화의 분위기와 이슈를 배경으로 자신의 신앙과 소명을 발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위해서는 문화의 현주소와 이슈를 심도있게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며 어거스틴에게는 이런 준비가 되어있었다. 또 그에게는 당대의 사람들 특히 지식인들에게 설득력있고 이해시킬 수 있는 언어및 지적 도구를 최고의 수준에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물론 이런 능력만 있고 바른 신앙이 없었으면 그것도 아무런 기독교적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시대의 문화를 열어가는 기독교인은 이렇게 학문성과 전문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7. 그는 자신의 시대에 충실하고 그의 한계속에서 신앙의 선포와 기독교적 사상체계를 세우는 일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그 어느 누구도 이 이상을 바랄 수도 성취할 수도 없으며 단지 우리는 그의 한계나 문제점을 발견하고 우리의 사명을 바로 수행함에 타산지석으로 삼을 뿐이다.

   

8. 그러나 고대교회의 사상가들의 사상적 노력을 평가하자면 미흡하다는 말로 결론내릴 수 밖에 없다. 이들은 이교문화와 그 철학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 그 종교성에 대한 철저한 의식에 이르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중세인들 처럼 노골적인 종합의 방향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으나 그것을 사용하여 복음을 이해함에 차원을 높이거나 동시대인에게 설명하거나 변증하려 함에 별다른 주저가 없었다. (이는 심지어 터툴리안에게서도 거의 마찬가지였던 것 처럼 보인다.)

 

 

    

(V). John of Fidanza, Bonaventura 보나벤츄라 (1217-1274)

   

(가) 배경

   

1. 초대교회 교부들은 적대적인 환경에 있었다. 유대-기독교 전통과는 다른 이교와 이방철학의 도전이나 핍박 뿐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영지주의 같은 매력적인 혼합주의적 이단의 내적인 도전도 있었다. 그러나 그후 천년이 지나 이제는 유럽이 기독교 세계로 확립된 시대인 중세의 환경은 아주 달랐다.

 

1-1 기독교 신앙이 중세의 삶과 사상의 구심적 요소였음은 누구나가 아는 일이다. 중세초 까지도 신앙은 대부분 학식이 높지 않은 평신도들이 이루어 놓은 유산이었다. 중세초기는 이면에 있어 전체적 기독교인이 소수이지만 그에 비해 지도자들은 강력한 지성을 갖춘 인물들이었던 것과 차이점이 있다. 그 이유는 게르만 민족의 유럽침공과 로마제국의 몰락, 이들의 대규모적 기독교화는 초기 변증가들의 시대나 어거스틴 시대와는 다른 문화적 양상을 만들어냈다. (예:한 게르만 군대 장관의 세례식: 칼을 빼어들고 검에는 세례받지 않겠다는 것) 북방 이주민족의 대규모 개종과 지배로 말미암아 유럽은 어떤 면에서 "암흑시대"라 지칭할 만한 그 무엇이 있었다.

 

1-2. 8세기 말로 9세기 초 Carolingian 카롤링왕조 시대에 오면 중세의 소위 "암흑시대"를 지나 중흥이 싹트기 시작한다. 여기에 이성적 원리를 교회생활 속에 정착시킴으로서 서로마 제국의 황제 샬레망 (Charlemagne 742-814)의 문화정치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 알퀸 (Alcuin 730-804)의 공이 크다. 그는 이성적 원리를 기독교적 삶 속에 정당한 요소로 자리잡게 하고자 진력했다.

   

2. 이 시대는 심지어 황제들 조차 교황청 (the Holy See)의 권위를 존중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달랐다. 이교도 철학자들의 명맥이 끊긴지도 오래되었다. 플라톤을 제외한 고대철학도 대부분 무지속에 뭍혀버렸다.

   

3. 기독교 교리가 잘 정립되어 있었다. 이단이 없던 것은 아니나 누가 정통이요 이단이냐를 가리는 어려움이 아니라 어떻게 박멸하느냐 만이 문제였다. 결국 이교사상과 기독교 신앙의 문제는 초대교회에서 처럼 교회의 사활이 걸린 실천적인 문제가 아니라 학적인 문제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4. 물론 중세에도 신앙과 이해, 계시와 이성, 은총과 자연의 관계가 중요한 이슈였던 것은 사실이다. 꼭 반대자 핍박자만이 신앙의 의미를 삶과 연관지워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 신앙 그 자체가 철저한 반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중세인들은 어거스틴 이후 이러한 자세를 충실히 견지해왔다. 그 대표적인 예가 Anselm of Canterbury (1933-1109)요 보나벤츄라였다.

   

5. 이들은 자신들이 믿음의 깊은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도구인 이성이 이교도 철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져 세련되어진 도구로서 필로나 변증가들에 의해 채용되고 기독교화 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이미 천년이상 교부들로 부터 기독교인들이 이 도구를 사용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그 전통을 따라 이 도구 사용을 익히고 나름대로 새로운 색갈을 입혔다.

   

6. 중세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희랍의 이성적 전통 즉 철학을 어떤 자세로 대하는가에 따라 논쟁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Peter Abelard (1079-1142)같은 사람은 희랍철학에 매우 우호적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플라톤이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막연한 생각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한편 Bernard of Clairvaux (1091-1153)는 이러한 아벨라드를 향해서 플라톤이 기독교인임을 보이려 애쓰는 것은 자신이 이교도임을 입증하는 것에 다름아니라고 경고할 만큼 강성이었다.

   

7.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기독교와 비기독교 사상의 문제는 결코 세계가 외면적으로 기독교화 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은 영속적 문제이다. (기독교와 문화의 문제처럼) 중세에서 달라진 것이란 단지 일반적 환경이 기독교적인 분위기였다는 차이 뿐이다.

   

8. 이 배경의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있어 신앙과 이성의 문제는 이전과 전혀 다른 형태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13세기의 중요한 문화적 변천인 (1)대학의 설립, (2) 아리스토텔레스의 소개 (아랍과 유대인들 주석가들을 통해 이들의 사상과 더불어), (3) 탁발 수도승 교단들의 설립과 발전이라는 배경을 바탕으로 생각함이 중요하다. 특히 보나벤츄라는 아리스토텔레스 소개와 탁발 수도회중 후렌치스 교단의 설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다.

   

9. 보나벤츄라는 여전히 플라톤주의의 영향하에 있었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13세기 이전의 기독교 사상가들은 대부분 플라톤 영향하에 있을 만큼 플라톤주의는 확고한 지위를 구축했었다. 교부시대에도 그러했지만 후대에는 특히 희랍철학에 대한 지식이 미약해진 관계로 해서 그리고 교부들의 권위의 확립으로 인해서 교부들의 사상속에 얼마나 희랍적 사고가 취합되어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고 비판정신도 거의 없었다.

   

10. 역사가들이 12세기의 Renaissance라고 부르는 사건은 고전연구나 잊혀진 전통의 복구라는 다른 것과 함께 그 이름에 걸맞게 매우 자연주의적 성향을 띈 것이었다. 그것은 자연질서와 사물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발견할 인간의 사고능력에 대한 발견이 있었다.

   

11.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소개와 더불어 12세기 르네상스는 상상했던 이상의 사건이 되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과 형이상학을 포함한 작품들은 이제껏 초자연적 이데아의 세계와 기독교적 신비의 세계에 익숙했던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철저히 자연적이고 경험적인 안목으로 비쳤으나 반면에 그 과학적 접근의 수준이 높음은 경탄해마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발견으로 인해 이제껏 익숙한 전통인 초자연주의적 플라톤적 기독교에 일대 직접적 도전이 일어났다.

   

12. 최초의 반응은 아리스토텔레스 문건에 대한 공적인 연구와 학습을 금지하는 칙령들의 반포였다. 그러나 곧 이런 시도는 무위한 것이 밝혀졌다. 탁발 수도사들이 이에 도전하여 아리스토텔레스를 연구하고 전파하는 역활을 담당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14세기 초의 수도사 기록...)  

 

13. 그 결과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앙과 근접시켰고 (이전에 플라톤의 철학을 그렇게 했듯이, 그의 사상의 눈으로 그의 세계관으로 성경적 진리를 보았듯이) 당연히 이전 교부들과는 다른 안목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의 입장은 곧 교부들, 특히 어거스틴에 의해 발전된 기초적 입장에 대한 근본적인 재평가를 불가피하게 했다.

   

14. 보나벤츄라는 이러한 새로운 신학사조를 비판하는 입장에 섰다. 그는 이러한 사조가 어거스틴이 생각했던 바 플라톤 철학의 (exemplarism and divine enlightenment)를 부정한 결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가운데 기독교 신앙과 배치되는 최악의 요소를 끄집어 내어 철학을 하고있다고 비판했다.

   

15. 그는 플라톤이 이데아의 세계를 바라보는 고상한 안목을 지닌 것이 조금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인간이 죄인이며 그 세계에 스스로 이를 수 없다는 의식이 결여된 것이 문제였다고 보았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눈에 매우 현실주의적 철학으로 비쳤던 것이다. 보나벤츄라의 이러한 자세는 토마스 아퀴나스 이전의 중세 철학자들의 일반적인 성향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