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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督敎哲學은 可能한가? 2

好學 2010. 5. 21. 21:35

 

 

基督敎哲學은 可能한가? 2

 

 

Jocob Klapwijk. John Calvin (1509-1564)

   

1.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요한 칼빈의 역사적 배경에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있다. 르네상스는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서 개체성, 활력, 고전적인 미와 신비적 열정을 증거하며 주로 남유럽의 도시귀족 (후로렌스의 메디치가)와 상류 시민사회 (아우버그의 휴거 은행가), 그리고 로마 고위 성직자들 (교황 쥴리어스 2세와 레오 10세) 등의 환영을 받은 반면 종교개혁은 주로 조직된 교회의 생활과 교리에 촛점을 두고 회개를 촉구하면서 북유럽 대중들의 반응을 일으켰다.

 

 

2. 초자연주의에 대한 반발: 자연/초자연 영역의 구분과 종합은 단지 이론적이고 문화적 의의 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의의도 있었다. 문화적으로는 신학과 철학의 이분과 종합구조, 희랍-로마문화 유산에 대한 기독교 신앙의 관계, 그리고 신적으로 정위된 사회의 계층적 질서의 관점등이 그것이었다. 초자연주의는 교회가 주도하는 단일문화적 견해를 정당화하는 기초를 제공하였다.

 

중세말 William of Ockham (1285-1349/50) 같은 이에게서 보듯 이 세속적인 하층의 자연과 영적인 상위의 초자연의 조율은 의심받아 두영역 이론은 신빙성을 상실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신앙과 이성 사이의 종합을 꾀하는 시도 그 이상의 보다 실재의 보다 통합적인 경험을 위한 탐구가 도처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르네상스 철학과 거기서 파생한 서구적 합리론에 있어 초자연적 실재에 대한 관념은 신속하게 완전히 도외시 되거나 아니면 무용지물이 되었다. 신앙과 종교는 私的인 문제가 되고 18세기 에는 합리주의와 경건주의가 동시에 번성하면서 19세기 까지 철학은 종교에 대한 극단적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적 실재의 초자연적 성격이 철학적 논제가 되면서 신의 개념이 변화하였다. 신은 데빫ジF (1596-1650)에서 인간 이성의 기반과 보증이요, 스피노자(1632-77)의 natura naturans에서 처럼 자연 그자체의 창조적 능력으로 보게되었다. 또 니콜라스 쿠사 (1401-64, Giordano Bruno, c. 1548-1600)에서 보듯이 이탈리 르네상스 에서 벌써 신과 인간은 동등하게 자연의 수준에 놓고 무한적 대우주의 세계-영혼인 하나님과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소우주로서 신에 흡사한 보게되었다.

 

종교개혁 또한 이런 반초자연주의에 합세하였다. 물론 그 방향은 다른 것이기에 헤겔이나 딜타이의 생각처럼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같은 방향에 둘 수는 없는 것이었다. 초기 인본 (문)주의자들은 교회를 떠날 생각을 갖고있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나 시간이 감에 따라 이 두운동이 영적으로 상호조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 출발점이나 정신에 있어 이 두 운동은 서로 상극이었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고대 희랍-로마 고전에서 영감을 얻는 반면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샘에서 그들의 물을 길어냈다. (심지어 신격화된 자연이성의 빛의 인도와 시적 상상력의 창조성을 따르는 전자와 sola fide의 믿음을 기초로 시작하여 성경 계시의 빛에 따라 sola scriptura 걷는 후자)

 

 

3. 종교개혁의 독특성: 르네상스의 자연과 자연적 삶의 숭상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1452-1519)의 예에서 보듯 uomo universale 즉 신격화 (apotheosized)된 창조적으로 자신을 개진하는 우주의 형상으로서의 자충족적이고 창조적이며 교화된 교양인의 이상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이상은 곧 데카르트에게서 보듯 자충족적이고, 창조적이며, 재구성적인 이성으로서의 인간 즉 cogito의 이성주의적 이상에서 일방적이고도 극단적 축약을 낳았다. 그러나 마틴 루터 (1483-1546)에게서 예시되듯이 종교개혁은 전혀 다른 이상을 가졌다. 거기에는 죄와 허물에 대한 고뇌와 갈등의 깊음에서 하나님 자비로 나아오는 경험이 중심을 이루어 르네상스적 자연주의의 여지가 없었다. 부패함없는 자충적적 자율적 인간 대신 sola gratia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에 전적으로 의지한 그 앞에서의 삶 coram deo의 이상이 있었다. 이러한 관계성의 바른 정립에서 비로서 인간은 참된 완성과 탈淪纜 이르게 된다.

 

종교개혁에 있어 르네상스적 자연주의가 배격되나 마찬가지로 스콜라적 초자연주의도 배격되었다. 실상 자연주의는 자연에 제한적 자율 (naturalia manent integra, nature remained intact)과 인간 이성의 일정한 자충족성을 허용한 중세적 (아퀴나스적) 전통에서 그 씨앗이 이미 뿌려졌던 것이다. 이러한 허용은 시간이 감에 따라 인간적 자율성, 보편성, 완전성에 관한 보다 포괄적이고 무제한적인 이상 (a broader, unqualified ideal of human autonomy, universality, and integrality)을 예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전혀 다른 길을 가고자 했었다. 적어도 그 원리에 있어서는 그랬으나 실제에 있어서 범람하던 초자연주의 사상을 극복하기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원리적으로 맞서던 비기독교 사상에 대해 종교개혁적 입장은 부정적이고 대립적 자세이외 어떤 다른 자세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루터는 이성을 창녀라 하고 믿음이 이성을 죽인다 하지 않았는가? 이 문제는 칼빈에 있어 보다 첨예하게 거론되었다. 칼빈은 고전과 중세문화에 아주 익숙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는 전물?? 철학자는 아니었고 심지어는 학문적인 목적으로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 신앙과 당시 철학적 문화 사이의 관계에 대한 조직적 분석의 논문을 남긴 일이 없다. 그는 첫째 개혁자요, 교회의 교사로서 학문적이기 보다 실천적이요 목회적이었다. 그의 목표는 성경을 해석하고 그에 따라서 교회의 교리를 새로이 구성하고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학문과 문화에 대해서는 이 주된 관심에 관련된 한 기독교 신자의 공동체의 믿음을 세우는 일에 연관하여 언급되고 있다. 그는 또한 16세기 사람으로서 힘을 다해 성경해석이나 교리 조성에 있어 스콜라적 초자연주의를 배격하였으나 다른 면에서는 간혹 자연-초자연의 이원론에 기대는 점이 있었다.

 

 

4. 칼빈과 philosophia christiana: 특히 칼빈에게 있어 종교개혁은 단지 교회적 또는 신학적 프로그램이 아닌 정치, 경제, 도덕, 사회적 관계들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즉 칼빈에게 있어 종교개혁은 스트라스버그, 제네바, 불란서, 화란, 스코트랜드에서 보듯 세계를 개혁하는 능력 (world-transforming force)이었다. 그러의 만큼 그것은 학문세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독특하게 기독교적 인생관이란 의미의 "philosophia christiana"를 말하지만 동시에 이교도의 저자들의 글이 "진리의 존경할 만한 빛"을 발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키고 있는가?

 

칼빈이 처음으로 "기독교 철학"이란 말을 쓴 것은 1533년 파리대학에서 행했던 종교개혁 특유의 논조요, 그 때문에 망명하지 않을 수 없게된 유명한 Beati pauperes spiritu (blessed and the poor in spirit) 라는 Nicholas Cop 연설에서 였다. 또 1541년의 불어판 기독교 강요 서문에서도 그는 'la Philosophie Chrestienne'라는 말을 쓰고 있으나 이들은 20세기적 기독교 철학이라기 보다 기독교 신앙의 내용 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강요 3권에서는 자신이 아는 모든 철학을 "이성의 철학"이라 부르고 비판하면서 기독교철학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강요 3-6-7, 노트 8) 거기서 칼빈은 모든 철학자들이 바울이 엡4:23에서 말한 성령께서 마음을 변화시키심에 대해 무지함을 말하며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들이 이성만을 인간의 지배엿片?? 세우고, 그것 만이 청종되어야 하며, 그것에 만 삶의 행위를 내맡기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철학은 이성으로 하여금 성령에 물러나 복종하고 자신을 굴복시킬 것을 명한다." (III,7,1) 즉 기독교철학은 첫째로 순종적인 철학이어야만 한다. 그 자체를 지혜의 원천으로 선언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며 그의 뜻에 의지함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이성이 스스로 만으로는 인도의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칼빈이 당시의 철학을 배격함은 이성이 인간의 지배원리라는 의미의 자충족성을 이성에 부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순종적 기독교 철학은 하나님 말씀에 의해 인도되는 철학으로 결국 성경적 철학을 말한다. 이는 또한 성령의 역사로 새롭게된 마음 (삶의 모든 부분과 연관된)의 철학이어야 한다.

 

제네바에 대학을 설립한 칼빈은 이성적 사고를 비이성적으로 배격하거나 무시하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죄로 말미암아 맹목이 된 (II,1,9) 마음이 성령으로 새롭게 됨 (엡4:23, 롬12:2)을 강조한다. 기독교철학이 단지 성경주의 이상으로 철학적 주장들을 성경의 메시지에 외적으로 적당히 맞추거나 조읖暉纛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나는 살아있는 영성으로 어떠한 세상적 철학도 갖지 못한 것이다. 칼빈의 이러한 생각은 크리소스톰의 기독교철학의 기초가 겸손 (humiltas)이라는 점에 동의함에서 또 다른 주제로 나타난다. (II,2,11 어거스틴의 연설과 전달의 비유처럼 기독교 철학, 종교의 첫,둘,세째 원리는 모두 겸손이라.) 칼빈에게 있어 겸손은 의존성, 개방성, 수용성, 즉 하나님의 뜻과 그의 말씀과 그의 영과의 연합등 이성이 가져야 마땅한 특성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말한다.

 

 

5. 전적부패 (corruptio totalis): 아담이 의의 샘을 저버린 후 지성을 포함한 영혼의 모든 부분이 죄에 사로잡혔다. (II,1,9) 그리하여 복구 아닌 전적 재생이 필요하게 되었다 (restoration is not enough but total renewal is required.) 스스로의 지성을 믿는 것도 잘못되고 (II,1,2,3) 自力 (self-power, autexousios)이란 뻔뻔스런 철학자들의 억지에 불과하다 (II,2,4) 칼빈의 이러한 비판은 이성은 죄로 인해 손상되어 초자연 영역에서 무능하나 자연영역에서 능력있다는 donum superadditum, gratia infusa등의 자왹?초자연의 이원론적 가르침에서 자신을 멀리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 교리가 모든 죄가 동등히 악함을 말하거나 칼빈 특유의 죄 "비관론 (sin pessimism)"을 말하지 않는 것은 결국 sola gratia가 corruptio totalis의 세력을 이기기 때문이다. 죄가 인간과 세계의 구조를 바꾸는 존재론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형이상학적으로 보지 않고 "방향전환 (a change of direction, not new but renewed nature)"으로 보는 것이다.

 

 

6. 한점의 빛들: 중세의 자연 자충족 사상과 계몽시대의 이성의 빛의 덕에 충분성에 반하여 칼빈은 이성의 자연적 빛을 "맹목"으로 여긴다. (II, pref., 13) 나아가 교부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철학자들에게 너무도 가까이 가서, 성경을 절반에서 조화시키려 한적이 있음을 지적하고 (II,2,4) 이를 배격한다. 하지만 이런 배격의 자세가 세속작가의 지혜를 전적으로 배격하는 것으로 나가지는 않는다. "인간의 왜곡되고 부패한 성품 속 (특히 인간 이성 속)에 얼마간의 빛이 여전히 빛나고 있다" (II,12, 12; 참고 I, 5, 14; I,2,19).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들로 옷입고 장식되어 있으며 (II,2,15) 따라서 과학, 미? 예술등과 같은 부분에 성취가 가능하다. (II,2,14) 그러나 이것을 인간 자연적 성취나 재능으로 간주하기 보다 하나님의 영의 선물들로 보아야 한다. (II,3,4)

 

 

7. 일반은총: 칼빈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kindness, II,2,17; I,5,14), 그의 자비와 인자 (III,3,25), 모두를 또는 일부를 향한 특별한 은총 (II,2,14) 또는 죄의 영향을 제어하고 인류와 개인을 선물들로 복주시는 섭리 (II,3,3)을 언급하고 있으나 카이퍼에서 보는 것과 같은 조직적 일반은총을 논한적이 없다. 그는 자연과 은총을 병립시키지 않고 죄와 은총을 병립시킨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화란적 신학에서 보는 일반은총 논쟁 (1924년 Herman Hoeksema's Protestant Reformed Churches in America; 1944 Klaas Schilder's Vrijgemaakte Gereformeerde Kerken)의 소지가 없다.

 

 

8. 죄의 잠행성 (The insideousness of sin): 칼빈은 죄악에 떨어진 인간이 여전히 통찰력과 이해의 선물을 간직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두기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물이 불신자의 삶속에서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규명함에 있다.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에 아니면 그것이 개인의 맑弩? 권세와 명망을 높이는데 쓰이는가? 후자의 경우 그것은 자연적 선의 증거일 수 없다. (II,3,4) 여기에는 롬1장 특히 21의 증거 즉 하나님을 알되 감사치도 않고 상상력에 헛되고 마음이 허망해져 하나님을 알지만 동시에 참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음을 증거로 제시한다.

 

 

9. 대립과 종합을 넘어 겸손으로: 철학에 대한 칼빈의 자세는 근본적 비판과 진정한 숭앙을 엿보인다. 비기독교적 철학에 대한 그의 견해는 기독교인이 살며 숨쉴 수 있는 집이 아니나 그렇다고 완전히 허물어 버려야할 것도 아니다. 또 참과 거짓이 첨삭가능하도록 분리되어 있어서 상황의 요구에 따라서 어떤 부분은 헐고 어떤 부분을 복원하여 보존할 이둘의 종합은 더우기 아니다. 칼빈은 이성이 빛을 발하기는 하나 그것은 짙은 무지로 억눌려 제대로 나올 수가 없다고 한다. (II,2,12) 이러한 이중성을 감지한 칼빈은 매사에 조심스레 평가한다. 그는 비기독교적 사상을 적어도 그 가장 고상한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죄로 물들지 않은 양 감지덕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하나님 자신이 저버리시지 않으신 문화발전율 업신여길 권리를 가진 냥 그것을 무조건 무시하지도 않는다. 또 그 둘 가운데 기독교인이 기독교와 비기독교의 부분적 진리의 조야한 종합 (rudimentary synthesis, a half-harmonization, II,2,4)을 꾀하지도 않는다.

 

칼빈의 대안은 우리 철학의 기초가 겸손이라는 것이다. (즉 비기독교 철학의 자율성, 자충족성에 대한 비판 그 자체가 자율적이거나 교만의 발로로서 자율을 또 하나의 기독교적 자율로 비판함이 아니라 겸손과 온유여야 한다는 것으로 이는 바로 벧후3:16의 정신과 통한다.) 비기독교 철학은 자충족성의 관념에 사로잡혀 겸손의 기초 즉 하나님을 향한 개방성의 기초가 결여되어 있다. 그가 이 자충족성이 자기-교만과 가장된 불충분성인 점을 보여 혹독히 비판한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닫혀있는 자충족적 사고도 그 생명과 동력은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고 부딛침으로 부터 얻는다. 하나님의 진리는 기독교와 비기독교 철학의 가능성 그 자체의 전제조건, 즉 초월적 조건이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나는 그곳이 어디이건 간에 (wherever God's truth manifests itself) 심지어눅 그것이 비기독교 철학자들의 작품들 속에서 희미하고 억압된 개념들 속에서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향해 마음을 열 겸손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열린 마음과 비판적인 마음으로 들음을 호소함 (an appeal to listen, open-mindedly and critically) 이외에 어떤 무엇도 아니다.

 

 

손봉호. 현대정신과 기독교적 지성. 서울: 성광문화사, 1978. "기독교철학은 가능한가?" "기독교철학의 방법론," "기독교철학의 전제조건들," "철학과 신앙" 216-240쪽.

 

 

 

 

1. 기독교철학의 가능성: 철학은 하나의 인생관, 세계관, 신관으로서 언제나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철학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어떠한 바탕과 기준 위에서 삶의 자세를 반성하고 비판하여 의식화된 내용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수반한다. 기독교철학의 근거와 기준은 하나님의 계시이다. "기독교철학이란 기독교인이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생관, 세계관, 혹은 신관을 의식화시키고 체계화 시킨 것인 동시에 그것은 끊임없이 성경의 비판을 받아야 하는 역동적인 것이라 할 쎕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의 한부분을 대상으로 다루는 국부가 아닌 전체에 대한 학문이기에 종교적 신앙과 가장 근사한 (그 영향과 포괄성에 있어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철학은 계시의 근본정신에 근본을 둔 우리 일상경험의 객관화요, 계시의 빛 아래서의 삶에 대한 인간적 반성이다. 그것은 따라서 "신앙이나 계시로 대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학적 권위도 가질 수 없다." 기독교철학은 인간적 과제요 그것으로 일상생활을 기독교인 답게 (예: 사고를 기독교적으로 하는 일에) 하는 일의 보조 역활을 할 수 있는 임시표준이다. 물론 신학도 임시표준인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신학은 계시 그자체의 전제가 아닌 인간적 학문으로서 철학의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 그점에 관해서는 철학의 비판을 받을 필요있다.

 

 

2. 기독교철학의 방법론: 생각을 주로 사용하는 학문이요 자세인 철학도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철학자들은 대화법, 분석적 방법, 회의적 방법, 종합의 방법, 비판적 방법, 판단중지등의 방법을 사용해왔다. 이 방법들의 목적은 "복잡한 현실을 정리하여 중요한 것들과 부수적인 것들을 구별하여,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참된 것, 그리고 가장 기본되는 것을 찾으려는 시도"였다. 직관이 중시되나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철학의 대상을 다루기에 역부족이므로 그것 모두를 체계화하여 사고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는 대개 조직적이고 일관성있는 방법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 점은 근대철학의 주된 관심을 "비판적인 숙고와 계속하여 심화하는 방법적 연구를 통하여 엄밀한 과학으로서의 철학을 만들어 보려는 것"이라고 한 훗설이 말에 잘 드러나고 있다. 또 그 좋은 예가 이러한 추세는 형이상학 기술 이전에 방법서설을 썼던 데카르트이다. 어떤 면에 있어 근대철학은 철학의 내용보다 철학방법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은 결국 방법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기독교철학도 방법을 갖게된다. 방법의 선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철학적 선택이요 종교적인 전제하에서 이루어진다. 기독교 철학은 합리론 (주로 분석적 방법)이나 경험론 (주로 귀납적 방법)의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으나 인간이성이나 경험을 완전붔 무시할 수 없다. 또 기존의 철학이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 기독교 철학의 좋은 한 방법은 비판적인 방법 (경이 자체가 하나의 일상에 대한, 전 사고에 대한 비판이다) 일 것이다. 비판이란 절대적 표준을 전제하지 않으면 않된다. 물론 여기서 비판이란 자율성을 전제로 하는 비판이 아닌 계시의 시각에서 사고를 출발시키는 것을 말한다. 칸트철학은 합리론 비판, 훗설의 현상학은 심리주의비판에서 시작했으나 우리는 비기독교적 사고 전반에 대한 비판을 그 출발점으로 해야한다. "오늘날 기독교철학이 비판해야 할 대상도 자연이 아니고 인간의 사상과 인간의 사상체계의 영향을 깊이 받은 우리 문화와 일상생활인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무의식적으로 비기독교적 사상에 젖은 자신인 것이다."

 

비판을 방법으로 삼는 철학은 인간 사고의 자율성, 자충족성과 그것에 근거한 낙관주의 역사관에 근거해있는 경우가 많다. "낙관적 역사관을 배격하면 역사의 의미를 종말에 둘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비판은 필연적으로 더 좋고 아름┫牟 진리를 산출한다고 전제하지 않고, 다만 거짓과 우상을 배격하려는 시도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서 헤겔식의 낙관론적 (보편주의 역사관과 진보사관) 변증법을 배격하는 가다머 해석학적 방법론의 철학적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서 비종말론적 사고와 낙관적 사고의 분간이 필요하다.

 

  

Charles Partee. "Calvin, Calvinism and Rationality." In Hart, Van der Hoeven and Wolterstorff, eds. Rationality in the Calvinian Tradition. Lanham: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3. pp. 1-16.

 

  

칼빈은 의식적이며 의도적으로 合理性 (rationality)을 하나의 복음제시를 위한 도구로 보고, 이 도구를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 칼빈주의자 됨에 배치하지 않고 오히려 도움되는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 첫머리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인간에 대한 지식에 선행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그의 논의, 즉 의지와 지성에 관한 논의는 고전철학과 신학적 전통에서의 고전철학 수용의 영향을 받았으나 성경적 계시의 기초위에서 이것들을 판단?함? 전제되었다.

 

그는 "인간이성이 하나님이 누구이며 그가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고 본다. (II,1,18) 그러므로 칼빈은 인간의 철학을 그리스도와 혼합하는 것을 하나의 부패로 보고 (I,10,3) 이성에 기초를 둔 인간의 철학과 성경과 성령의 인도에 기초한 기독교 철학을 구별한다. "기독교철학은 이성으로 하여금 성령에 ... 굴복하도록 명한다." (III,8,1 cf. II,2,26)

 

칼빈은 논리 (dialectica)를 하나님에게서 나온 학문들 (사28:29) 중 하나로 보며 이성이 우리를 짐승으로 부터 구분한다 (II,2,12,17)고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이성을 또한 "사탄의 논리" (마27:43)로 불리울 수도 있다. 에티에느 질송은 칼빈의 기독교 철학이 이성이 아닌 신앙에 기초한 것으로 잘 지적하고 있다. 칼빈은 "육적" 이성의 빛 속에서 피조물적 이성의 한계들을 규정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그는 "구속된" 이성의 사용도 규정하지 못하였다. 그는 이성을 접근가능한 (또는 모을 수 있는) 증거들에 기초하여 "세상적" 결정을 내리는 일과 성경에 계시된 신학적 내용들을 연관시키는 일을 위한 하나의 적절한 그러나 결코 졊タ의舊 않은 도구로 간주한다. 이성은 여기 저기 분리되어 나타나 그것을 고려하는 모든 이들에게 다같이 분명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 계시적 자료들을 조심스레 반성하는 일에 중요한 역활을 한다.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의 계시를 넘어서 하나님의 신비들을 바르게 사변에 있어 무제한적 능력이나 힘을 가진 것이 부정된다. (I,14,4) 이성은 인간적 합리성의 어떠한 법칙들에 의해서건 우주적 통일성을 가진 결론과 연관을 보일 수 없다.

 

 

Jacob Klapwijk. "Calvin and Neo-Calvinism on Non-Christian Philosophy." In K.A. Bril, H. Hart and J. Klapwijk eds. The Idea of A Christian Philosophy: Essays in Honor of D.H.Th. Vollenhoven. Toronto: Wedge Publishing Foundation, 1973. pp. 43-61.

 

  

1. 문제의 제기: 철학은 계속 외면화 (현상중시, 언어중시, 언어와 사회구조 분석의 도구화 )하고 반면에 종교의 내면화 (표현할 수 없는 개인적 주관적 경험으로 치부)하는 오늘날의 추세를 감안하여 볼 때, 과연 기독교 신앙과 세속철학의 관계 규명이 여전히 중요한 문제인가? 기독궈낡 세속 철학과 사회의 위협을 당하거나 오히려 그것을 지배하던 시대에 있어서 뿐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그 관계이해는 여전히 중요하다. 이 시대의 철학은 비기독교 철학이 아니라 후-기독교 철학 (과학, 학문)으로 그 내용에 기독교의 영향, 흔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세속과학도 자신의 역사적 뿌리를 검토하려 할 때에는 기독교와의 관계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기독교가 문화에 대한 책임을 생각할 때, 또 소극적으로 학문이 기독교에 가하는 비판과 도전을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이 관계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2. 기독교인들은 이전 시대의 이교적 배경의 철학적 통찰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졌는가? 성경의 진리 수용이 철학자들에 대한 배격을 의미했는가? 아니면 여전히 그 독립적 가치를, 또는 적어도 종속적 가치를 인정했는가? 이 문제는 단지 부정과 배격아닌 복잡한 양상의 대답을 야기했었다.

 

 

3. "찬란한 악" (Splendida vitia, splendid vices): 종교개혁자들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악의 전제적(totaliterian) 성격 이해, 즉 corruptio totalis 교리는 인간의 이성이 부패하였음을 ┠纛피構 이러한 생각은 비기독교적 사상을 평가함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4. 칼빈의 반-스콜라주의: 전적부패 교리에 부합하게 칼빈은 이성의 자연적 빛 lumen naturale를 "맹목 (blind)"라 불렀고, 반면 성경을 그것이 우리들 주위의 세계 속에서 참된 하나님을 다시금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안경" (자연적 능력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개안수술적 도구)으로 보았다. (I,4,1)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인간의 부패한 성품 속에도 여전히 지식과 이해의 선물을 포함한 여러가지 선물을 (일반)은총으로 주시며, 이로 말미암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 속에도 빛의 편린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것들이 스콜라주의에서 말하듯 부분적으로 선하게 남아있는 자충족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죄악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은총으로 세상을 유지하고 계심을 증거할 뿐이다. 그들을 통해 주어진 교회 밖의 하나님의 선물을 무시하려 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자세가 그것을 주신 이에 대한 감사치 않는 자세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5. 흐른과 스콜라적 이원론: 화란의 역사가요 정치가인 흐른 반 프린스터는 스콜라주의를 "반-역사주의적"이라 불렀다. 그 이유는 스콜라주의가 상이한 종교적 뿌리를 가진 희랍적 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이론은 희랍종교에서 비롯된 것인데)과 성경적 신앙을 그 역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종합하려 했기 때문이다. 흐른의 주된 주장은 "철학이 본질상 종교의 한 파생물 (philosophy is in essence a derivative of religion)" 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기독교는 모든 종교적 계몽의 근원이다"라고 주장한다. 즉 하나님의 일반계시의 빛이 에덴동산에서 주어졌던 원초적 계시의 빛이므로 그것에 의해 진리를 발견하는 모든 종교는 원천적으로 기독교의 파생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죄악에 빠진 인간의 그 타락한 성품의 자연적 종교는 하나님을 대적함이다. 따라서 여기에 기독교인이 불신사상과 거리를 두어야 할 이유가 있다. 불신사상과 철학의 상대적인 가치를 인정하되 그것의 방향에 의해 부패된 것임을 인지함이 필요하다는 주장한다. "기독교적 기반에서 우리는 좋은 의미의 절충주의적 사상가 (eclectic think?r)가 될 수 있다." 흐른은 모든 과학적 진리가 종교적이고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적 근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주장을 펼 수 있었다.

 

 

6. 카이퍼: 그는 흐른의 추종자였으나 그의 "절충주의"와 달리 "대립"의 주제를 강조했다. 카이퍼가 일반은총을 말하면서 화란어의 보편적 의미의 은총인 genade 대신 gratie를 쓴 것은 genade가 자칫 특별은총과 혼동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특별은총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작을 하심을 말하고 일반은총은 옛것을 영구히 보존하심을 말한다. 일반은총의 목적은 부정적으로는 죄를 억제하고 피조계를 보존함이며, 긍정적으로는 하나님께서 피조물 속에 두신 가능성들을 개발함, 즉 피조물의 개현과정을 말한다. 이러한 일반은총 교리의 내용은 사고, 과학, 철학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기초함을 의미한다. 즉 과학은 "하나님 자신의 창조물이다." (GG III p. 495.) 이러한 생각으로 카이퍼는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산물인 이교적이며 세속적 사고를 인지할 수 있었다. 카이퍼는 과학들 가운데 차이를 인식한다. 자연과학은 인문과학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 관찰에 입각한 만큼 일반적 領릿煐별 공통적 수용 (general validity and common acceptance)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기원, 관계성 그리고 대상의 목적등에 관한 질문들, 즉 관찰을 통해서 풀 수 없는 질문들이 일어난기 때문에 역사, 철학과 다른 인문학에 있어서는 연구자의 주관성이 문제된다. 결국 카이퍼는 자연과학에 있어서는 기독교-비기독교적 학문의 구분과 대립을 원하지 않았으나 과학철학을 포함한 모든 인문학에서는 두개의 다른 과학이 존재함이 가능하고 특히 참된 기독교적 학문이 요구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성경적 자료들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거듭난 정신이 기독교적 학문의 특성을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GG III p.514,521.) 비기독교적 사고에 대한 카이퍼의 자세는 분명히 양면적이다. 일면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선물과 그것이 현현 (플라톤, 칸트등에서의)을 찬양하나, 다른 한편 오직 중생한자 만이 영적인 것은 영으로만 분별할 수 있음 (고전2:13)을 강조하며 기독교적 철학과 과학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전반적으로 보아 카이퍼의 입장은 후자에 기울어 "중생한 과학" 대 "중생의 영향 밖의 과학"의 대립에 기운다. 따라서 일반은총의 기능은 비기鍍떡냅 개념들의 인지를 위한 바탕이라기 보다 기독교적 활동의 주도적 역활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점은 그의 스톤렉춰에서 진일보하여 정상주의자와 비정상주의자의 다른 전제들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7. 반퍼슨과 도예베르트: 도예베르트의 신비판에 대한 반퍼슨의 비판적 논평으로 시작된 이 둘 사이의 Philosophia Reformata 24-26 (1959-61) 논쟁은 비기독교적 사고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는 일치하나 그 인지의 정도와 근거 (degree and ground of appreciation)에 있어 상이하다. 도예베르트는 비기독교적 철학이 모든 사람들에 강제되는 "창조의 법-체계들을 따르는 상태 (states of affairs)"에 직면해있는 것으로 보이는 한 인지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반퍼슨은 그러한 상태를 인정하지 않는데 이는 "상황 (affairs)"가 결코 정적이 아니고 인간의 의미부여와 인간 상호간의 해석의 유형에 따라 유동하기 때문이다. (즉 창조의 법-체계의 유동성에 있어 도예베르트 보다 덜 기계적이고 보다 주관적 요소에 강조를 두고있다.) 오히려 반퍼슨은 모든 인간적 사고행위, 의미, 또 심지어 이방에서도 나타나는 일반계시 쇨湛 하나님의 임재 (God's presence)를 그 근거로 말한다. 그러나 도예베르트는 불신자의 마음속에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적 근본동기와 대립적인 반역적인 동기가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반대한다. 도예베르트의 공로는 카이퍼의 일반은총론을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만든 것에 있다. 이로서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 중심적이나 동시에 교회중심적이지 않은 문화관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카이퍼의 문제를 종교와 신앙 (religion and faith)을 분명히 분리함으로서 해결한다. 그의 문화, 과학관은 그리스도에 종교적으로 뿌리밖고 있으나 교회적인 신앙의 조항들과 아무런 직접적 연관을 함의하지 않는다. 크라바이크는 여기서 비기독교적 사상가들의 중심에 반역적 기본동인이 자리하고 있다는 도예베르트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이것이 그 사상속에 잠재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즉 반역적 동기는 항상 종교적이며, 천국에로의 자의적 외침이며 억눌리고 왜곡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중생하지 못한 이들을 도전하고 있는 진리이다. 이것이 모든 이방종교와 철학의 애매모호한 다의성 (ambiguity)의 근원이다. 긱琉?靈? 이방철학 (종교, 문화)에 귀를 기울인 자는 늘 경이와 당혹을 경험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영께서 이방과 세속주의 속에서 역사하고 계심에 대한 경이이다. 또 하나님의 역사가 항상 인간의 무지와 죄악으로 둘러쌓여 있다는 당혹감이다. 애매모호함과 이중성이 비기독교적 사고에 항상 존재하며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열린 마음과 전적 반대를 요청한다. 우리는 반대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해 높아진 모든 것을 정복한다. 우리는 열린마음으로 모든 인간적 사고를 그리스도께 복종하도록 사로잡아 온다.

 

  

손봉호. 감수자의 머릿말. 엘 칼스베이끄 저. 황영철 역. 기독교인의 세계관: 기독교 철학개론. 서울: 평화사, 1981. pp. 3-6.

 

  

기독교는 역사적 원인과 본질적 원인에 의해 다른 어떤 종교보다 철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왔다.

 

1. 역사적 원인: 기독교가 비록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하였으나 그 발전이 헬라문명을 배경으로 한 지중해 연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 복음은 비록 그 자체로 매우 실천적이고 비사색적이지만, 매우 사색적인 철학문화와 접했을 때, 한편 변증적 목적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 전도의 목적으로 희랍적 사색을 쏠?각하?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 논리적 사고에 깊이 젖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것을 완전히 비논리적이거나 무논리적인 것으로 제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복음을 희랍적 문화에 적절하게 제시하고자 철학적 분위기에 적응시킴에 부작용과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소위 "로고스 신학"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반발도 따랐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했던 터툴리안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심지어 터툴리안도 철학에 무지했던 사람은 아니었다. (철학에 무지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이렇듯 철학과 기독교 신앙과의 이런 불편하나 분리될 수 없는 어색한 관계는 서구문화와 그 영향권 아래있는 모든 문화에서 계속되고 있다.

 

 

2. 본질적 원인: 기독교는 계시종교이다. 인간의 창조성 (직관)이나 경험을 초월한 진리가 하나님께로서 나타났으나 그것은 이해되어야만 할 언어로 나타났다. 신적 계시는 본질상 인간의 직관이나 경험의 산물인 (세상의 지혜라 할 수 있는) 철학과 충돌하는 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때로 계시의 내용이해에 철학이 방법론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관계는 늘 불편하고 긴장이 至?도? 것이었다.

 

 

3. 이 긴장의 핵심은 철학의 중립성, 객관성, 과학성에 비해 신앙은 주관적이고 편견이라는 오해에 있다. 철학은 그 반성의 범위가 전체적 성격과 포괄적 내용에 의해 삶의 방향설정과 가치관 형성에 강한 영향을 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종교의 역활을 대신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철학은 학문을 떠나 하나의 이즘의 형태로 이데올로기화 한다.

 

 

4. 과거 수세기간 서양철학이 종교의 역활을 대신해온 것을 많은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할 정도이다. 이러한 상황을 직시하고 고발한 공로가 흐른 반 프린스터 (Groen Van Prinsterer, 1801-1876) 카이퍼 (1837-1920)그 뒤를 이어 하나의 철학체계를 형성한 도예베르트 (1894-1977) 였다. 이들의 전통과 체계는 하나의 철학으로서 권위나 영구성을 가질 수 없고 그러한 주장도 하지 않는다. 많은 비판이 측근으로 부터 가해졌고 그래서 발전되어 왔다.  

 

Bernard Zylstra. "Introduction." In L. Kalsbeek. 황영철 역. Contours of a Christian Philosophy: An Introduction to Herman Dooyeweerd's Thought. 기독교인의 세계관: 기독교 철학개론. 서울: 평화사, 1981. 17-37쪽.  

 

1. 하일라우메 흐른 반 프린스터 (Groe? Van Prinsterer, 1801-1876)는 헤이그 왕실과 가까운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일생에 걸쳐 "프랑스 혁명 (1789-99) 이후에도 기독교가 서구문명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여전히 소금의 역활을 할 수 있는가?"라는 고독한 문제와 씨름했다. 그는 역사가, 정치가, 언론인, 수필가로서 성경적 기독교의 부활에 진력했다. 그의 모든 노력은 19세기 당시의 자유주의 비판에 모아졌다. 그는 자유주의란 프랑스혁명을 통해서 유럽에 소개된 급진적인 정치 사상이 온건하게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했다. 자유주의에 대한 그의 투쟁은 특히 (공립)학교를 자유주의자의 독점물로 허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학교교육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에 대항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노력이 물론 시대의 추세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하였으나 계몽시대 자유주의와 과학주의의 치명적 영향을 최소한 지연시킨 공로가 있다.

 

 

2. 아브라함 카이퍼 (1837-1920)은 라이덴 신학부의 신학적 자유주의에서 돌이킨 후 프린스터 휘하에서 당시 지배계급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자유주의로 부터도 개종했다. 프린스터의 "반혁명적" 또는 "역사적 기독교" (antirevolutionary, Christian-historical)운링 보수당과 연관을 맺고있었으나 1870-1년에 분열되었다. 1863년 국교회인 개혁교회 (Hervormde Kerk)에서 사역을 시작한 카이퍼는 프린스터의 후계가 되었고 1874-5년 처음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1878년 그는 조직이 약한 반혁명운동을 지금도 의회에서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반혁명당 (Anti-revolutionary Party)으로 재조직했다. 그의 정치적 이력의 절정은 1901-5년 수상직 재임에 있었다. 기독교가 새힘을 얻기 위해서는 생동적 교회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깨닫은 그의 노력의 결과 1886년 교회의 분리 (Secession)이 일어났다.

 

(N. Wolterstorff. Keeping Faith: Talks for New Faculty at Calvin College, Vol.7, No1, February 1989에 의하면 이 분리의 전주곡이라 할 수 있는 또 다른 Afscheiding는 화란의 국교회인 Hervormde Kerk가 감성에 있어 매우 지적으로 변하고 신학이 아주 자유적이어 문화의 발전에 넓게 열린 성향을 가져 계몽주의 영향 아래 놓여있던 배경에서 일어났다. 1834년 동부화란 작은 마을들에서 국교회로 부터의 분리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들은 Hendrick deCock의 주도하에 신학적으慢灌 정통이요 경건주의적이고 분리주의적이며 고급문화에 대한 의심을 갖는 집단이었다. 이 운동은 불법이었고 정부도 군인들을 일부 농가에 기숙케 하는등 조처를 취했으나 급속히 파급되어 2년내에 120여 교회가 설립되었다. 1846-7 이들 중 일부가 종교의 자유와 경제적 향상을 위해 미국으로 이주하여 지금의 Holland, Michigan과 Pella, Iowa에 정착했다. 그들은 화란계 개혁교회에 참여하려 했으나 신학적 상황이 화란 국교회보다 심각한 것을 알고 1857년 Christian Reformed Church을 설립하게 되었다. Afscheiding은 전적으로 "작은 사람들 Kleine Luyden" 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화란의 일부 엘리트들 가운데도 국교회의 상황과 계몽주의, 그리고 불란서혁명이 교회에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Reveil이라 일컫는데 그중 흐른 반 프린스터와 그 뒤를 이은 카이퍼가 뛰어난 지도자였다. 특히 카이퍼는 국교회의 상황에 대항하여 "애통자 Doleantie (weeping ones)"로 알려진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들중 미국으로 이민한 사람들은 화란개혁교회가 심지어 프리메이슨을 멤버로 허용한 것에 충격을 받고 대개는 CRC沽 합류한다.) 결국 1886년 극도의 정치적, 교회적 논쟁과 분쟁속에 심지어 양쪽의 물리적 힘의 충돌 가운데 200여 교회가 국교회에서 분리하여 Gereformeerde Kerken을 설립하였고 1892년에는 이미 50년전 국교회에서 분립한 Afscheiding 교회들의 대부분이 이 교단에 합류하였다. 카이퍼는 Afscheiding 교회의 경건과 그들의 신학적 정통성에 대해 깊은 동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전체적 비젼은 매우 달랐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에 대한,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존재 전부에의 우주적 주권을 인정하고 그것이 모든 문화와 사회 속에서 인정됨을 몸부림치는 바울의 비젼에 의해 사로잡혔다. 그는 이것을 세상의 어느 한뼘의 땅도 주 예수 그리스도에 속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념하에 Afscheiding 교회의 분리주의적이고 고급문화 지양적 성향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회와 문화를 정복하고자 하는 운동으로 바꾸어 놓았다. 카이퍼와 그의 추종자들은 기독교 학교를 세우고 기독교 대학을 설립했고, 기독교 정당과 기독교 노동조합을 만들고, 기독교 일간 신문을 발행하翎눼?)

 

그가 일했던 사회는 하나의 위기에 봉착한 사회였다. 특히 갑자기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로 인해 깨어지기 쉬운 산업혁명의 파괴적 효과를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정당, 의회, 상업연합체, 자선단체 등을 통한 활발한 사회활동이 일어나야 할 필요를 역설했다.

 

또 신교의 학자들이 현대철학과 과학의 전제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에 경각심을 느낀 그는 교회, 국가, 사회 경제적 영역, 예술, 세계의 교육을 기독교적으로 재정립하는데 필수적인 지적 지도자 양성을 위해 1880년 자유대학을 설립했다.

 

카이퍼는 유럽에서 기독교가 문화적 영향력을 상실할 가능성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시대조류를 거스려 Kleine Luyden (화란 복음주의 개혁 신교의 사람들)을 중심한 환상과 비젼을 가지고 또 북아메리카의 신천지에서 그리스도적 문화가 다시금 꽃필 가능성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은 1898년 프린스톤에서의 스톤렉춰에 나타났을 뿐, 카이퍼의 실질적 영향은 화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세계관의 기본원리가 자연과학, 사회과학, 문학등에서 기독교적 작업을 가능하게 만뒵 수 있는 이론적 골조로서 구체적이며 조직적인 기독교 철학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이 그 한 이유였다. 그의 이론적 작업은 그의 학문적 동역자인 헤르만 바빙크와 마찬가지로 주로 신학에 머물렀다.

 

(파스칼 Blaise Pascal (1623-62), 쉐렌 키엘케골 (Kierkegaard, Soren Aabye, 1813-55), 카알 야스퍼스 Karl Jaspers (1883- ) 등도 기독교 철학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여러가지 면에서 칼빈주의적 기독교 철학자들과 그들의 철학적 사색의 폭이나 방향성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들중 특히 얀센니즘의 영향을 받은 파스칼과 루터교적 전통의 덴마크 국교회와 긴장관계속에 있던 키엘케골의 철학은 종교철학이나 철학적 신학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종교적 실존의 윤리적 차원에 대한 사색에 촛점이 맞아있다. 독일 루터교적 전통의 야스퍼스 역시 정신병 의사 출신으로서 철학은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보고 형이상학적 존재론에 치중하였다. 즉 그의 철학은 참된 존재로서의 초월자를 향해 물어나가는 형이상학으로 그 방법은 암호독해 (Chiffrelesen)이며 초월자의 숨은 수수께끼를 푸어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들은 조쓩냅岵 철학, 특히 기독교 신학적 사고로 철학적 문제 해결에 몰입하였으나 자신들 세대의 철학이 갖는 반기독교적, 인본주의적, 비성경적 동기에 대해서 그다지 의식적인 비판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제기한 경우에도 자신의 철학을 그러한 핵심적 비성경적 사고체계에 대립될 만한 조직적이거나 그 핵심을 완전히 드러내 대항하는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특히 두 후자의 경우 그들의 철학성향이 루터의 자성적 신학이나 내면지향적 신학, 또 소위 니버가 말하는 "문화와 역설관계에 있는 기독교"의 분립주의 사고의 영향과 무관하다 할 수 없다. 또 이들은 화란의 기독교 철학자들과 달리 사회운동이나 교회의 움직임을 대변하거나 인도하던 지도자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전통적 의미에서의 개인적 철학자로서 비교적 고립된 삶을 살았다. 중세의 기독교와 그 사상이나 인생, 세계관이 공동체적이며 외면적이고 형식, 의식적이었 것에 비해 그에 대한 반발이라 할 만큼 이들의 철학은 내면지향적이고 개인주의적이었다. 이들의 삶과 철학은 따라서 파스칼에 있어서는 신비적인 성향마저 가질 정도로 내성적이씛 개인적이며 사변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에 비해 화란의 기독교 철학은 위기에 처한 신앙 공동체를 옹호하며 그들의 삶과 세계관을 강화하여 나아가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주려하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개혁적 world-formative, or world-transforming vision"을 함의하고 있었다. cf. N. Wolterstorff.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Chapter I. "World-Formative Christianity," pp. 3-22.)

   

N. Wolterstorff.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3. (1981년 화란 암스텔담 자유대학교 카이퍼 렉춰, 제목은 시85:10-11에서 채용했다. 서문으로 이 성구와 더불어 라틴 아메리카의 기도문을 실었다. "오 하나님, 굶주린 자에게 빵을 주시옵고, 빵을 가진 우리에겐 공의로 굶주리게 하소서. O God, to those who have hunger give bread; and to us who have bread give the hunger for justice.)

 

이 책 서문에서 월터스토프는 자신의 목적이 초기 카이퍼 렉춰의 주제인 "종교개혁의 정치적 결과들" The Political Consequences of the Reformation을 따라 본래 칼빈주의적 종교개혁의 사회적 비젼을 "채용 (appropriate)" 하고자 함이라고 밝힌다. 여기서 채용이라 함은 전통을 무비판하게 수용하거나 전적으로 배격함이 아니고 자신의 환경에 그 주된 요소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거기에는 자신이 개혁주의 전통에서 자라나면서 그것이 본래 그토록 뚜렸하게 가지고 있던 세계형성적 추진력 (world-formative impulse)를 거의 가지지 못함에 대한 반성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들의 비젼은 성도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질서를 개혁하기 위해 진력하는 성도의 의무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을 부르신 제자도의 한 부분으로 고백한다. 그 의무는 종교에 부가물이 아니라 기독교 영성의 동력들 가운데 위치한다. )

 

 

Chapter I. "World-Formative Christianity," pp. 3-22.

 

 

로마문명에 들어온 기독교는 초창기 사회질서에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으나 시간이 감에 따라 (약3-4세기후) 그 영향을 상실한다. 중세 기독교는 사회구조 (출신과 역활을 포함한) 에의 묵종을 가르쳤다. 16세기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이와 다른 비젼과 실천을 가져와 당시 사회제도를 악한 것으로 暾풔洑構 개혁을 선언하였다. 여기에서 세계-형성적 기독교의 재탄생을 본다. 이후 이 유형의 기독교는 때로 독재적 승리주의, 혁명으로 어떤 때는 겸손한 해방자로 간간히 역사에 나타나곤 했다. Michael Walzer, The Revolution of the Saints,에서 16-7세기 영국 청교도를 가리켜 중세인들과 달리 자신들이 속한 세상 (특히 사회구조)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그것의 향상을 위해 계속 노력하는 자들로 규정한 것은 매우 옳다. 사회구조란 자연질서의 단순한 일부가 아니며 인간적 결의의 결과이므로 합의적 노력에 의해 변개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구조는 또한 실로 타락한 구조로서 때로 변개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그들 종교의 본질적인 일부이다.

 

월터스토프의 기획은 현대 사회질서 속에 기독교인이 어떻게 참여하여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물론 그는 전대의 칼빈주의자들의 세계-형성적 기독교의 비젼을 그대로 옹호하거나 재현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적 비젼이 유일하고 가장 옳은 것은 아니나 사회질서에 참여하고자 하는 몇개의 기독교적 비젼의 항속적 패턴들 중 하나였던 것은 사실이다.

 

중세의 인생관은 극히 저세상쩜 (otherworldly)이었다. 세상적 일들 (농공상 정부등)은 종교적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야 하기에 했다. 중세 전체에 강한 영향을 미친 신의 도성에서 어거스틴은 기독교인들이 "모든 세상적이고 시공적 사물들이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에서 잘못되거나 걸림되지 않도록 이방에 사는 것과 같이 사용하고, 미래에 언약된 영원한 축복에" 시야를 고정해야 할 것을 말했던 것이다. 월터스토프는 삶에 있어 문제점을 보나 그것을 개혁하기 보다 묵과하고 피해 돌아서는 이 성향을 formative 종교와 구분하여 "회피적 (avertive)" 종교라 부른다. 회피적 종교나 형성적 종교는 세상에 어떤 문제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활동을 단지 축복 (blessing)으로만 보는 제삼의 형태와 대비하여 구원적 (delivering, salvation)종교라 할 수 있다.

 

중세의 회피적 모델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연합하는 명상적 (contemplation) 의무들이 강조되며, 아울러 모든 실재는 매우 계층적 구조 (hierarchical structure)의 연속적 체인을 이룬다는 관념이 지배적이다. 이 연쇄속에 모두가 상이하고 계층적으로 불평등한 위치로 션프떫퓸駭? 따라서 중세인은 사회적 역활들 이나 그 불평등을 생각하는 대신 상이한 역활들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천부적이고 자연적인 불평등을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모반자와 반역(rebels, usurpers)을 익숙히 알고 있었으나 급진주의자, 혁명자 (radicals, revolutionaries)에 대해 아는 바 없었다. 중세에는 심지어 군왕도 주어진 (given)제도를 수정하는 일은 상상하지 못했다. 군왕 (교황이나 감독도 교회를 돌볼 뿐)은 주어진 제도를 단지 돌볼 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중세후반과 16세기에 들어서 단지 주어진 제도의 개념 대신 만들어진 그래서 수정될 수 있고 잘못이 발견되면 반드시 고쳐야만 할 대상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그 변화의 주체도 천부적으로 권위를 위탁받은 어떤 일부가 아니라 바로 시민들임으로 바뀐다. 즉 중세의 수동적인 臣民 (subject)가 능동적 市民 (citizen)이 되면서 변화한다. 월터스토프는 왈저를 인용하면서 이런 시작이 바로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 최초로 군왕으로 부터 성도들 (또는 일단의 성도들)에게로 정치적 사고의 강조를 전환핌構 독립적인 정치적 활동을 이론적으로 조직화한 것은 바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즉 영국 청교도들에 있어 성도들이 불평등한 제도를 고쳐야할 임무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루터주의 역시 형성적 동기가 강하나 그 촛점이 "종교적"인 면에, 주로 교회 구조와 개인적인 "내면성 (inwardness)"에 주어졌다. 반면 "비종교적"인 면, 정치나 사회적 변혁에 대해서는 중세만큼이나 묵종적이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들에게 있어 세계-형성적이라 할 때, 그 세계는 자연이 아닌 사회적 세계를 말한다. 이들에게 있어 형성활동은 하나님에게의 순종이었으며, 그것은 실재를 하나님의 뜻에 보다 가깝게 만들고자 하는 동기로 추진되었다. 변혁의 대상이 내부가 아닌 외부적 실재일 경우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 또는 기구라고 (servant or agent)라고 생각하였다. 회피적인 종교에서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님의 그릇 (하나님을 명상을 통해 연합한, 담은 그릇, a vessel of God)이기를 소원하나 세계-형성적 종교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 (an instrument of God)이길 원하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메타퍼가 세계?형성적 종교의 목표와 희망에 있어 중요한 참조점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형성적 동기가 반드시 자신의 능력으로 천국을 가져오는 유토피아적 혁명이나 승리주의적 환상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요약하자면, 본래적 칼빈주의의 등장은 하나님과 보다 가까운 연합을 찾기 위하여 사회적 세계로 부터 돌아서는 환상과 실천으로 부터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사회적 세계를 개혁하고자 일하는 실천으로의 기독교적 감성에 근본적 변화를 나타낸다. (... the emergence of original Calvinism represented a fundamental alteration in Christian sensibility, from the social world in order to seek closer union with God to the vision and practice of working to reform the social world in obedience to God.)

 

칼빈의 기독교 강요는 중세적 신학저술의 전통을 따라 신지식에 대한 서술로 시작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 획기적인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즉 신지식이 더이상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명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하신 일 (works)에 대한 적절한 반응 (response)로 구성되어 있다. 신지식은 하나님에 대풂 인지 (acknowledgment)로서 그것은 신뢰, 존경, 감사와 봉사등 삶 전체에서 일어난다. 제네바 요리문답 (1541)의 인간의 목적에 대한 부분에서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과 선은 그를 만드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참되고 바른 신지식은 그에게 바른 존경을 돌리는 지식이 얻어짐이며, 바른 존경의 방법은 "우리를 그에게 온전히 의탁함이며; 그의 뜻에 순종함으로 우리들 삶 전체를 통해 그를 섬김을 연구함이고; 구원과 그에게서 얻어질 수 있는 모든 선한 것을 갈구하며 우리의 모든 필요에 있어 그에게 간구함이며; 마지막으로 마음과 입술 모두에서 모든 복의 유일한 근원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칼빈주의가 흔히 하나님은 주로 법을 주신 분이요 우리는 거기에 복종한다는 이해가 있으나 그 이면에 하나님께서 선히 주시고 성도는 그에 대한 감사로 복종한다는 바탕의식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회에 있어서도 순종은 그 감사의 표현이요, 하나님의 영광에로의 순종이다. 칼빈의 요리문답에는 인간의 삶이 세상을 향하고, 나아가 도피적 종교를 부정함이 뚜렸하다. (칼빈주의가 이러한 성향으로 현대적 세속화를 야기시킨 도구였다는 비판이 있다. 물론 칼빈주의가 도피아닌 세상을 향하게 하고, 그 속에서 신적 권위를 가진 모든 것의 권위를 박탈하고 예배하기를 거부함으로 세상을 "속화 (secularized)" 한것이 사실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흔히 칼빈주의가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해 순종의 형태로서 세상에 도장을 새기려 함을 통하여 세상을 성화 (sacralized)한 것을 간과하고 있다.) 칼빈주의자의 사회적 경건의 중심에는 감사에서 동기되고 소명으로 표현된 순종 (감사, 순종, 소명)이 깔려있다. 칼빈주의자의 소명의식은 단지 "직업" (occupation)의 개념보다 넓어 감사, 순종, 소명의 삼요소를 가진 사회적 역활 모두를 포함한다. 즉 칼빈주의자들은 자신의 직업을 그것을 통하여 자신의 순종을 실행하는 그 무엇으로 보았다. (트렐취가 말하는 바 중세적 Christian morality was exercized in vocatione but not per vocationem 이었는데 반해서 Calvinist saw his occupation as something through which to exercise his obedience 였다. 즉 단지 자신의 직업을 버리지 壺歌 그 역활을 지키는 것 (remaining in that role)의 순종이 아닌 순종적 감사에 바탕을 두고 그 역활에서 담당하는 활동 (the actions performed in that role) 으로 직업을 생각했던 것이다.) 또 이들은 단지 자신이 타고난 직업에 충실히만 하면 공동의 선에 기여한다는 무비판적 생각을 넘어서 자신의 직업이 공동의 선에 참으로 기여하는가를 반성했다. 성경이 보여주는 대로 자신이 사는 세계와 그 사회적 질서가 자연적 세계 아닌 인간의 질서로 거기에는 인간적 악이, 그 영향이 스며있는 것을 인식하고, 거기에 대하여 책임의식을 가지는 새로운 사고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점이 실로 중세적인 사고를 넘어 사회 개혁과 심지어 혁명에 이를 수 있는 혁신적인 사고였다.

 

이러한 초기 칼빈주의의 혁신적 세계형성적 성향이 훗날 (루터주의에서 내면성과 교회 중심적 사고로 국한된 것에 반해) 칼빈주의에서는 쑞탭逵 철학형성을 위한 관심 집중의 에너지로 빠져나가면서 소멸하였거나 그러할 위기에 놓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초기 칼빈주의는 사회적 세계를 하나님에게서 유리되지 않은 것으로 재구성하려는 열정적 욕구를 가졌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은 사회가 인류의 공동복지를 위해 봉사하는 질서있는 "형제체계 (brotherhood, or solidarity)"을 이룩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또한 인류로부터도 유리되지 않은 것이 될 것이었다. 물론 칼빈주의는 초기에 그들과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정의로운 사회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깊히 생각하지 못한 결과 정의를 말하면서도 매우 억압적인 성향을 지닌 것이 사실이다. 또 칼빈 주의자들은 자주 승리주의 (triumphalism, dominon theology)에 빠지곤 했다. 쑡結 대해 월터스토프는 이렇게 제언한다. 주의 말씀과 백성들의 외침들이 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우리들의 축복을 세아리는 것 이상의, 우리들의 내면세계를 가다듬는 것 이상의, 우리들의 생각을 개혁하는 것 이상의 것을 하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의 싸움의 목표가 궁극적으로 우리들에게 허락될 것이라는 소망과 기대 속에 새로운 사회를 위해 투쟁해나가라고 부른다.

  

 

(the Word of the Lord and the cries of the people join in calling us to do more than count our blessings, more than shape our inwardness, more than reform our thoughts. They call us to struggle for a new society in the hope and expectation that the goal of our struggle will ultimately be granted 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