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歷史,宗敎,哲學/(서양철학)고대·중세·哲學

基督敎哲學은 可能한가? 1

好學 2010. 5. 21. 21:32

 

基督敎哲學은 可能한가? 1

 

(I) 序論

 

   

(가) 基督敎 哲學은 과연 存在했는가?

 

  

1. 이것은 특히 서양에 있어서는 기독교 지성이 존재했는가와 동일한 질문이다. 그것은 철학이 최근까지 서양의 지적 전통의 핵심이요 기초적 위치에 있어왔기 때문이다. 이 말의 의미는 초기 철학자들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근대 문화에 있어 데카르트, 로크, 칸트, 그리고 현대에 있어 마르크스, 듀이, 프로이드등)의 위치와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들은 단지 사상가였으나 이들은 진리가 무엇이며 삶이 무엇이고, 문화의 이상과 사회의 윤리와 규범과 나아가 인간이 무엇이라는 것을 규정했고 결국 구체적인 삶이 그것에 의해 형성되었다. 서구문화는 결국 철학적 사고의 실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결국 기독교 철학이 존재했느냐는 위의 질문은 기독교회가 이들에 필적할 만한 지성과 사상을 가진 인물을 가졌는가? 즉 세속적 사상가들이 가졌던 체계에 대적할만한 교회의 인물들이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다.

 

 

3. 위에서 언급했지만 이것은 단지 지적 통찰력과 분석력 (그래서 세상과 인생을 그럴듯하게 파악/설명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과 경탄해 마지 않을 사상체계의 존재 유무에서 끝나지 않는 문제이다. 이런 인물과 체계의 존재는 바로 문화의 지도력과 삶의 형태를 구성하는 관건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철학이 삶의 지도적 위치를 점해온 서양에서 특히 중요한 문제이다.

 

 

4. 성급하지만 오늘 제기한 문제에 답을 하자면 대체로 긍정적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 일학기 내내 살펴볼 것이지만 이미 초대교회로 부터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자신을 철학자로 자처한 사람들도 있었고 또 이들의 지적 영향력은 단지 신학이나 목회적 차원을 넘어서 세속적 철학자의 그것에 비견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대개 그들의 영향력이 교회 또는 기독교인 세계내에 국한되거나 세속적 철학만큼 광범위한 영향을 주지 못했을지라도 말이다.

 

 

5. 기독교 철학이 세상 철학만큼 지속적으로 발전하거나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거기에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가지는 고유한 요인도 있고 또 그 이외의 원인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철학의 존재 여부를 따지기 앞서 서양철학사를 통해 알게된 철학의 정체에 대해 복습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나) 哲學이란 무엇인가?

 

1. (서양) 철학에 대한 한국적 오해: 흔히 동양적 문화 유산에 속한 우리는 서양철학의 성격을 오해할 경우가 많다. 동양에서의 철학은 흔히 도를 닦아 준신선이 되는 일면 신비하고 유사종교적 행위로 인식된다. 또는 한 여름에 오바입고 세상 근심 걱정 염려는 홀로지는 모습의 인물을 연상한다. 그래서 철학하면 참선, 묵상, 입산수도등을 연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 김상원 형제의 예) 또 20세기 한국의 역사상황을 바탕으로 강한 영향을 미친 실존주의로 인해서 철학이 주로 우수에 젖어 인생의 부조리와 삶은 탄하는 반시인적, 예술적 상상력을 연상하기도 한다.

 

 

 

 

2. 물론 이러한 자세가 철학의 한 유파나 자세를 반영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서양문화에 있어 철학이라 할 때에 그 말이 뜻하는 것은 이러한 신비적, 종교적, 예술적 상상력과는 크게 다른 오히려 그 반대의 자세에 해당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의미한다.

   

3. 서양, 특히 근대 서양에 있어 철학이란 하나의 학문이다. 철학은 학문의 학문, 또는 학문 중의 학문으로 여겨졌다. 학문이란 평이한 경험의 자세와 달리 실재를 대함에 있어 특수한 자세를 견지한다. 그 특수한 자세에는 실재를 추상적 분리, 객관화, 거리둠, 대상화와 원리 발견의 추구등이 포함된다.

 

예를 들면 물을 생각해보자. 물이 시원하다던가, 갈증을 풀어준다던가, 시퍼러니까 무섭다던가, 깊은 물 마음이 푸근해진다던가는 일상적 체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추상화/객관화를 거쳐 우리는 비로서 물을 과학의 대상으로 만든다. 즉 실재에서 분리되지 않는 현상, 즉 물의 화학적 면을 추상적으로 접근하며 그 추상화한 일면을 실체화한 후 대상화, 객체화하여 관찰함으로 원리를 발견하고자 하며, 결국 그 원리발견으로 주체의 유익을 도모하고자 한다.

 

과학은 원리추구, 기술은 그 원리의 실제적 적용이라는 분리는 하나의 근대적 신화이다. 후기 근대철학 비판가들이 보여주듯 과학에는 권력의지, 이데올로기, 실천적 의도, domination, control motive가 본질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은 철학도 결국 복잡한 현실을 이성적인 체계로 정신적으로 조직하려는 의도가 있는 점에서 마찬가지이다.

   

4. 철학은 학문이긴 하나 그 특성상 매우 종합적 학문이다. 철학은 실재의 어느 한 구체적 양상을 주목하기 보다 전체를 보고자 하며, 그 전체의 원리, 부분들과의 관계, 보편적 진리를 추구한다. 이러한 성격을 인해서 철학은 실재의 다양성 보다 그것의 보편적 특성을 언어적으로 모아놓은 개념 (concept)에 주목한다. 또 세계의 다양성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생각의 세계 속에서 생각을 도구로 사물을 정리하고 그 원리를 파악하고자 한다. (신동화 장로의 예: 바쁘게 서둘지 말고 앉아서 생각해라) 다른 학문들도 그러하지만 철학은 특히 생각을 주로 사용하는 학문이다.

  

5. 다른 학문들이 그렇듯이 철학도 그 대상인 실재 (그 전체)를 있는 그대로 상식적으로, 또는 일상경험적으로 파악하는 대신 특별한 자세로 접근한다. 방법론 (meta+hodos )라고 부르는 이 특별한 자세들에는 여러가지 형태들이 있을 수 있다. 즉 방법론을 최초로 거론한 데카르트의 의심의 방법, 소크라테스-플라톤의 대화, 중세의 부정적 철학 via negativa, 칸트의 비판철학, 헤겔의 변증법, 현상학, 언어분석 등등. 이 모두가 접근방식은 다르나 결국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복잡한 현실세계를 생각 속에서 이 방법을 통해 분류 정리하여 그 중 가장 중요한 실재, 원리를 파악하고 그로 말미암아 우주에 있다고 가정한 질서, 원리를 발견하거나 아니면 인간 이성의 원리를 따라 제정하여 삶의 근거와 원리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6.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철학은 첫째 논리적인, 그리고 둘째로 분석적인, 세째로 논쟁적 (논쟁이란 결국 논리적인 사고를 수단으로 삼아 알고자 하는 대상을 분석하고 그것에서 도출되는 내용을 재구성/종합하여 내린 결론을 가지고 논의하는 것이다) 생각에 치중하게 된다. 이러한 이면에는 우주의 원리가 곧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라는 서양적, 또는 희랍적 정신이 기초를 이루고 있다. 서양철학의 전통은 논리적 사고, 이성적 사고를 통하여 우주의 원리를 파악하고자 한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그 원리 파악에 있어 과정상 논리가 중시되었고, 이견들이 서로 대립함에 있어서 서로에게 설득 또는 설명의 원리 역시 논리적인 논쟁이었다. 여기서 분석적이고 논쟁적 자세가 중시되었던 것이다.

 

  

7. 물론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은 서양철학의 일반적 추세에 관한 것이다. 철학이 반드시 이성적인 기초에 서서 그 이성의 법칙을 따라 논리와 분석을 사용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은 질문해보야 할 문제이다. 즉 논리적이지 않고 시적이나 예술적 통찰력, 계시에 입각한 사고, 천재적 지혜, 직관, 도통한 생각 등등은 아무리 체계적이고 깊이가 있어도 철학이 될 수 없는가 하는 문제이다. 즉 서양철학의 전통적 입지에서 보면 논리성이 중심되지 않은 동양철학, 히브리적 지혜, 상식 이상 (또는 이하의) “개똥철학 (자기는 심각하나 남이 들어 우스운 사고),” 또 근자에 문제되는 포스트모더니즘 과연 철학인가 아닌가? 바로 이 문제의 한 연장이 기독교 철학의 가능성에 관한 논의이다.

 

 

 

 

(다) 基督敎哲學이 可能한가?

 

  

1. 지금부터 대략 2-30년전만 해도 철학계에서는 기독교철학이란 네모난 원과 같은 모순되는 말로 생각함이 보편적이었다. (다시 김상원씨의 예: 신앙을 못갖는 변으로서 철학자의 중립성, 종교적 편견에의 경계) 이는 철학의 자율성, 중립성, 이성의 최종적 권위의 신화 때문이었다. 이러한 신화적 신앙은 근자에 이르기 까지 철학의 저변에 깔려있었다. 즉 고대 철학이 자체의 발단을 thaumazo (trauma ) 즉 경이, 공평무사하고 중립적인 이해가 결부되지 않은 관조적 앎 (theoria, ) 에서 출발하고 그 실해은 바로 philos+ sophia 愛知 라고 보는 견해로 부터 시작해서 Descartes’ Cogito (의심으로 무장한 이성의 자기 존재 확립), Kant의 이성의 자기비판 (이성보다 우위의 비판자 없으므로), 이성적 통찰을 위해 판단을 중지하는 에포케의 철학 등 모두가 인간 이성의 자율성 신화를 대변하고 있다.

   

2. 이러한 문제는 철학이 그 학문 특성상 가지고 있는 전체적 구조 파악, 본질 추구와 파악이라는 기획과 그것이 다른 학문과 문화에 미치는 영향력이 쉽게 종교의 그것을 대체할 가능성이 큰 점에 있다. 물론 이럴 경우 한 철학은 본래 의도한 philosophia의 자신의 상대성, 지속적 추구라는 성격을 잃고 하나의 도그마로 변해서 이즘화 하고, 이즘, 이데올로기화한 철학은 본질에 있어 종교와 다름없다. 철학이 세계관을 대처하게 되고 현대는 절대가 무너진 후, 인간이성에 의한 기초를 찾기 시작하면서 자연히 방법상 차이가 강조되어 수많은 세계관 (종교적 안목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3. 사실상 철학도 하나의 학문이며, 모든 학문이 그러하듯 비이론, 초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으며 그 기초는 성격상 종교적이다. 모든 학문은 전 이론적인 삶의 비젼, 상식적 체계 (비판되지 않은 자의식적이지 않고 전통적으로 주어진 삶의 종합적 안목)으로서의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

   

4. 이렇게 볼 때에 어느 철학이 기독교 철학이냐 비기독교 철학이냐의 문제는 그 철학 기초에 어떤 종교적 전제가 놓여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이점은 다른 학문들, 문화가 기독교적이냐 아니냐를 규정하는 원칙적 기준이 된다. 어떤 학문, 철학, 문화가 기독교적이냐 하는 것은 그것의 기초를 형성하는 세계관이 기독교적이냐 하는 것에 달려있다. 또 기독교적이라 함은 바로 어떤 인간적 전통을 의미하지 않고 성경적 전통을 뜻하는데, 앞으로 보게될 것이지만 대개 성경적 세계관은 세개의 기본진리인 창조, 타락, 구속의 렌즈를 통하여 세상을 이해함을 뜻한다.  

 

5. 그러나 그 기초의 문제가 일단 정리되고 난 후, 어떤 사고체계가 기독교 철학이냐 아니냐를 규정함에는 그것이 모종의 방법으로서 삶을 반성하고 있느냐 하는가에 달려있다. 철학이란 단지 상식적인 생각을 말하지 않고 평소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내용을 전체적인 시각에서 의식적 반성에로 가져오는 작업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일상경험의 내용들을 왜? 라는 질문으로 따져보는 자세라 할 수 있다. 종교적 자세는 실재에 대해 왜?를 묻기보다 주어진 답에 대해 “그러면 그것을 믿을 것인가?”를 직면한다. 반면 철학적 자세는 심지어 왜 존재가 있고 무존재는 있지 아니한가?를 묻는다.  

 

6. 기독교철학은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를 두고 (이성이란 무엇이냐 라는 기초적 질문에 대한 답을 포함해서) 성경적 세계관에 의해 삶의 내용들을 반성하는 것이다. 또 철학은 극히 인간적인 기획으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경험을 성경의 가르침에 끊임없이 비교 비판하는 중에 이루진 결과요 산물이다. 또 이는 철학의 본래적 이상대로 새로운 경험과 새로 터득한 성경의 진리에 의해 계속 개선하고 개조해야할 과제이지 일부 카토릭 철학자들이 그러하듯 중세 스콜라주의 철학처럼 어느 한 철학을 소위 philosophia perennis 만고불변의 영속적 철학으로 독단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도예베르트 자신이 이점을 강조한다.) 개혁주의의 정신은 글자 그대로 Semper Reformenda의 정신을 그 철학적 기획에서도 기본 방침으로 한다.  

 

7. 이 점이 기독교 철학을 신학과 구분하게 한다. 신학도 하나의 학문이라는 점에서는 계시 그 자체와 구분되어 하나님 말씀이 갖는 권위와 무오성을 주장할 수 없다. 신학은 시대적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신학이 실천적이고 목회적일수록 이면이 강하다. (예: 변증으로, 이단과의 싸움 가운데 체계화되는 신학의 loci, confession들) 그러나 다른 한편에 있어 신학은 성경의 계시적 내용들을 직접으로 다루고, 그것을 주로 하여 체계화 하므로 기독교 철학보다는 보다 성경에 가까이 있고 그런 면에서 더 권위가 있다 하겠다.  

 

8. 반면에 기독교 철학은 그것을 통하여 우리 일상생활을 기독교인 답게 생활하는데 보조역활을 할 수 있는 임시적 표준이라 볼 수 있다. 손봉호의 정의. 즉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이상처럼 반성되지 않은 가치없는 삶이 아닌 진정한 기독교인적 삶을 형성함에 기독교 철학의 기획이 유용하다. 이러한 철학은 성경에 의해 계속 비판을 받아야 한다.

   

9. 이러한 기독교 철학의 기획은 가능할 뿐 아니라 삶을 바른 성경적 기초에 올려놓는 일에 반드시 필요하다.

 

  

 

(라) 基督敎哲學의 發端의 背景  

 

 

 

1. 기독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특히 철학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그 이면에는 역사적 원인과 본질적 원인이 있다.

   

2. 역사적 원인: 팔레스타인에 기원지를 둔 기독교 신앙은 문화권으로는 헬라문명을 배경으로 한 지중해 연안에서 발전하였다. 헬라-로마 문명은 철학 을 기초로 발전한 독특한 문화였다. 복음 그 자체는 철학적이거나 사변적인 것이 아니다. 매우 실천적이고 종교적이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사변적인 헬라-로마 문화와 접하게 될 때에 거기에는 두가지 면에서 철학과 불가피한 접촉이 일어났다. 첫째로 복음과 교회를 옹호하는 변증적인 목적과 전도의 목적에서 희랍문화의 핵인 철학을 도외시할 수 없었다. 즉 철학적 사변에 젖은 문화에 대해 복음이 비논리적이건나 무논리한 것으로 제시하기를 주저하였던 것이다.  

 

3. 본질적 원인: 기독교 신앙은 계시에 근본을 둔 신앙이다. 이 신앙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에 기초한 신앙이다. 그러나 이 계시의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 기록된 성경이 중심을 이루며, 그 기록된 계시라는 성격으로 인해 역사와 문화를 초월해있지 않다.

 

물론 계시의 내용과 그 신적기원은 초월적인 것이지만 그 형식과 전달 방식으로 인해 그것은 역사와 문화적 환경속에 있게되었다. 이것은 복음의 진리성을 약화하기 보다 오히려 그 역사성과 구체성을 통해서 복음의 진리됨, 실질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성경계시는 초월적 진리의 성육신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기록된 계시로 전해진 진리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어야 하고, 의미가 파악되어야 하는 진리이다. (예: classical Greek아닌 서민적 시장 상용어적 Koine (Common)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 성경은 주문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말로 당시의 문화와 역사속에 분명히 이해되는 문장으로 쓰여졌다. 기독교는 책 (biblos, book)의 신앙이고 그 계시인 성경의 진리를 기반으로 조직한 교리가 명제화될 수 있는 (성경자체가 명제는 아니나) 신앙이다. 이러한 진리는 의미가 파악되어야 비로서 믿어지고 고백될 수 있는 신앙이다. 이러한 계시적 신앙의 독특성 때문에 첫째로는 인간의 직관과 경험을 토대로 하는 자율적 사색의 철학과 대립관계에 들어오며, 둘 째로는 이 계시적 진리이해에 철학적 사색을 방법으로 이용하려는 시도가 있게 되었다. (로고스와 말씀의 일치 추정, 헬라적 사색의 틀과 용어로서 성경적 진리를 이해하려는 시도등. 신플라톤주의의 이원론과 영 육의 구분의 접목등의 예)

   

4. 초기의 기독교회는 이처럼 철학과 불편하지만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그것에 무지할 수 없는 특이한 관계속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철학적 용어로서 복음이 설명되고 신학이 체계화되는 경우에 얼마만한 비성경적 배경과 함축이 의식, 무의식적으로 따라 들어오게 되는가 하는 소위 logos Theology 의 논의는 요한사도 이후 오늘날 까지 신학에 있어 주요한 문제이다.)

 

 

5. 이 불편한 관계속에서의 갈등은 이미 신약성경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의 한 두드러진 예가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를 구분한 사도바울에게서 잘 나타난다. (The Philosophy of the Church Fathers: Faith, Trinity, Incarnation, 3rd ed. Harry Austryn Wolfs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6.pp. 1-23, 참고 Cornelius Van Til, Paul at Athen)

 

사도 바울에게는 팔레스타인과 알렉산드리아 (특히 필로에게서 예시된)의 유대교에서 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신 선재적 지혜와 인간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얻은 인간의 지혜의 두종류의 지혜를 구분하였다. 첫째로 하나님의 지혜는 구약에서 처음으로 계시되었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지혜이다. 그는 이것을 구약의 표현에 따라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 (epignwsis, epignosis, precise and correct knowledge, full knowledge of God)" 호4:1, 6:6, 잠2:5, 골 1:10, 또는 그리스도의 지식, 빌3:8,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한 지식 엡4:13 이라 부른다. 이 하나님의 지혜, 또는 지식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종함을 바울은 믿음 (pistis, pistis)으로 그린다.

 

이에 반해 세상의 지혜란 희랍인의 철학, 즉 고전1:22의 "헬라인은 지식을 구하고"에서 나오는 지혜를 말한다. 그가 고전 3;19에서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 있어 우매"라 하지만 그러나 거기에 일말의 진리가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헬레니스틱 유대인 저자들 (필로 같은) 처럼 바울도 희랍철학에는 한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대한 어떤 어렴풋한 이해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골2:8의 철학과 속임수에 대한 경고는 철학 전체를 무조건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교부들 (오리겐)이 지적한 바와같이 헛된 속임수에 기초한 철학에 대한 정죄이다.

 

바울 자신은 그가 철학공부를 했다는 증거를 주지않는다. 그러나 롬7:18, 21, 고후 13:7, 골4:18; 6:9, 살전5:21 등에 to kalon (kalon) 나 빌4:8의 arete (areth) 등과 같은 철학적 용어의 사용, 그리고 행17:28의 스토익 시인 O(A)ratus과 개연적으로 Cleanthes으로 부터, 그리고 고전15:33의 Menander로 부터의 인용등은 그가 철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헬레니스틱 유대 철학 문헌에 방대한 지식을 갖고있었다. 그의 선재하는 지혜에 대한 설명은 솔로몬의 지혜서에, 그리고 그의 서신의 여러곳이 필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헬라적 유대 철학자들이 율법을 전할 때 사용하던 방법과는 정반대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새로운 복음의 전파가 철학적 논증으로 증거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지혜를 헬라인이 추구하는 철학적 지혜와 구분한 고전1:20-22의 맥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은 "말의 지혜아니요 (설득력 있는 말로 복음을 치장함)"로 복음을 전하려 함이 아니었다고 확언한다. 그는 자신의 목표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한 "믿음"을 심는 것이라고 확언한다 (고전2:4,5,7) 이러한 자세가 아테네에서 그의 전도에 나타난다. 그는 철학 자들이 섞인 아레오바고의 군중들을 향해서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육체부활과 재림,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고, 그들 일부의 조롱에 굴하지 않았으며, "다시 듣겠다"는 말에 유혹되지 않았으며 오직 소수의 영접자들에 만족했던 것이다. 바울의 異敎와 이방세계의 철학에 대한 자세는 단호했다. 그는 이교를 전적으로 배격하고, 그 철학의 사용 또한 전적으로 배격했던 것이다.

   

5. 바울의 이런 태도 중 이교에 대한 자세는 초대교부들 가운데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철학에 대한 바울의 자세는 그렇지 못했다. 초기 속사도 교부들 (the Apostolic Fathers, ca. 90-160)에게서는 대체로 철학의 배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철학을 대하는 교회의 자세는 2세기 후반의 교부들 가운데 변증가들 (Apologists)로 불리우는 이들에게 있어 변화가 왔다. 하르낙 Harnack의 지적처럼 그들에게 와서는 철학이 유대교가 필로에 의해 전해지는 방식과 흡사한 방식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철학화한 기독교가 일어나는데는 다음의 세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1. 철학의 훈련을 받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함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 철학자로 알려진 Aristides (136-61), Clement of Alexandria (ca. 185-211/215)는 본래 철학자들로 이교에서 개종한 이들이었다. Justin Martyr, Tatian, Theophilus과 무엇보다도 Augustine이 잘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들에게 있어 공통점은 구약성경이 개종에 기여했다는 점, 그들이 인용하는 구약성귀로 볼 때 그들의 이해가 필로의 설교가 늘 동반되어 이해의 길잡이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적극적으로 철학을 수용하려 했던 Justine Martyr나 Clement등은 제외하고라도 심지어 철학을 극도로 반대한 것으로 알려진 Tertullian도 철학에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다. 즉 그들은 필로의 눈을 통해서 구약을 하나의 철학적 논술로서 보고있다. 필로가 그러하듯이 그들도 자신들의 철학적 지식을 성경이해에 늘 집어넣고 있다. (reading into) 이에 대해 터툴리안은 그의 De Test. Animae I 에서 "실로 고대 문헌들에 대한 그들의 탐구적 노력을 여전히 계속하여 그것의 기억에 사로잡혀있는 어떤 이들이 우리 손에 있는 이런 류 (즉 성경의 진리 옹호에 철학자들을 인용하는) 의 책들을 쓰고있다"고 평했던 것이다.

 

2. 철학이 기독교에 대한 정죄에 대항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유대교에 대한 "무신론자" 라는 비난 이외에 영아살해,식인, 근친상간, 반국가 등의 새로운 정죄에 대하여 교부들은 이방 철학자들이 이방적 종교의식 비판에 대한 논리를 사용하였다.

 

3. 철학이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예방및 해독제 로서의 소용에 더 유효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영지주의의 특성은 신약성경을 극단적 알레고리적 해석하여 기독교를 이교의 한껍대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반대하여 이레니우스나 터툴리안은 영지주의가 이교적 신화와 철학의 잘못된 가르침에 입각한 것으로 얼마나 기독교와 일치할 수 없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이에 반해 클레멘트 같은 이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헬라 철학자들의 참된 원리들과 교회의 전통적 신앙에 서있는 새로운 기독교 철학을 세우고자 했다. 특히 클레멘트는 영지주의자들이 오용하는 "그노시스" 라는 성경적 용어를 되찾고자 하며, 자신의 기독교 철학을 세우면서 그것을 "참된 철학 (the true philosophy)"이라 부를 뿐 아니라 자신의 철학이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그노시스(false gnosis) 에 대하여 "진리의 그노시스" (the gnosis of the truth)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2세기에 기독교에 들어온 철학은 간헐적인 반대가 없지는 않았으나 헬라교부와 라틴교부들 모두에 계속적 영향을 미쳤다.

 

물론 필로나 교부들이 희랍철학을 전혀 무비판적으로 수용을 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필로는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 한 프로타고라스를 비판하며 그 증거로 성경을 사용한다.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세계의 영원성을, 스토익파는 하나님을 물질적인 무엇으로 만듬에 대해 비판한다. 그들은 한 편으로 성경이 어떻게 철학자들의 바른 견해를 앞질러 예견하고 있는지를 보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예견에서 철학자들의 잘못을 정죄하고 있는지 보이는 전략을 쓰고있다. 필로는 또한 철학이 그 자체로는 우리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참된 지식에로 인도하지 못함을 보이려고 했는데 교부들도 이 전략에 있어 대동소이하다. 교부들은 철학의 오류들을 알고있었고 그것이 이단의 근원이 된다고 비판했다. 또 그들은 철학이 철학자, 학파들 간에 일치하지 못함을 들어 그것이 진리의 인도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져스틴 마터, 타티안, 특히 Hermias' "The Ridicule of Gentile Philosophers")

 

헬라주의적 유대교에 있어서와 바울에게서 처럼 초대교부들에 있어서도 철학에 대한 자세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성경적 신앙, 기독교와 다름을 분명히 하고있다. (그러므로 이 입장을 일부 변증가와 후대 아퀴나스의 노골적인 synthesis에 비해 여전히 일반적으로는 antithesis 적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은 때때로 잘못을 범하나 계시인 기독교는 늘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의 오류는 대개 인간적 한계, 인간의 능력 (즉 "인간의 감각과 인간의 이성, 논증")의 제한에서 오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이 종종 신적인 계시와 대조되고 있다.

 

이런 자세에는 다음의 세가지 질문이 따른다. (1) 성경의 진리성 주장: 이들은 필로와 거의 흡사하게 성경의 진리성을 대개 1. 기적 (모세, 또는 예수님), 2. 예언의 적중, 3. (모세나 예수님 가르침의) 내재적 우월성, 4. 그 교훈의 실제적 효능 (성결증진등) 으로 주장한다. (2) 어떻게 계시 고유의 진리가 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나: 나아가 그들은 필로와 또한 유사하게 헬라철학에 나타나는 부분적 진리의 근원에 대하여, 1. 유대인들에게서 빌려간 것 (아브라함, 모세, 욥기의 고대성 주장), 2. 그들의 자연적 이성이 (물론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던 것 아니다) 발견한 것, 3.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 설명하였다. (3) 이들은 성경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하여 계시없이 발견되어 철학적 언어로 표현된 진리들을 계시로 주어지고 성경적 언어로 표현된 진리와 일치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풀었다.

   

6. 헬라철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가 불편한 것은 세속적 서구사상 즉 헬라사상의 뿌리에 이성중심, 종교적 중립성의 신화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서구 사상사에 드러나는 이성과 신앙의 문제는 종교란 항상 반성이전의 믿음의 문제요, 일방적이고 비과학적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반면 철학은 확고부동한 논리적 기초에서 시작하여 엄밀성, 합리성, 필연성에 근거하여 전개된 확고한 지식체계라는 편견이 깔려있다.

 

 

7. 또한 철학은 그 성격상 실재에 대한 종합적이고 포괄적 이해를 지향하므로 그것이 하나의 세계관을 제시하면서 이데올로기, 종교의 대체물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의 철학이 세계관으로서 (절대적 입장을 초이론적으로 주장하는) 종교의 대체물이 된 경우 기독교 신앙과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8. 교회 역사상 이러한 대립과 조화의 양면이 늘 있어왔으나 이 두가지 면을 반성적으로 체계화하여 기독교와 철학의 관계가 대립과 종합의 역사를 거쳤음을 보인 것은 화란의 볼렌호벤과 도예베르트였고, 이러한 면에서 이들은 최초가 아니면 가장 체계적인 기독교 철학 체계를 세우려 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마) 기독교철학의 과제

   

1. 성경적 세계관의 규명을 통해서 삶 (개인, 사회, 한 문화, 시대의 삶)이 성경적으로 바른 기초에 서있는가를 돌아본다. 성경적 기초에서 우리의 경험을 분석하고 반성하여 보다 성경적인 삶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는 신앙의 수단으로서의 철학이 되어야 한다.

   

2.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한 규명, 역사적 모델들에 대한 반성.

   

3. 기독교 사고 내의 종합적 사고, 순수하지 못한 혼합적 사고에 대한 비판적 반성

   

4.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성경적 진리의 실천을 위한 세계-형성적 사고와 실천 지향적 사고 (world-formative, praxis-oriented thinking)의 발전도모

   

5.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한 우주와 삶의 구조를 규명함으로서 이원적이지 않은 바른 성경적 삶의 자세를 갖게함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

   

The Philosophy of the Church Fathers:

 

Faith, Trinity, Incarnation, 3rd ed.

 

Harry Austryn Wolfson.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6.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 (pp. 1-23)

 

 

사도 바울에게는 팔레스타인과 알렉산드리아 (특히 필로에게서 예시된)의 유대교에서 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신 선재적 지혜와 인간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노력을 통해) 얻은 인간의 지혜의 두종류의 지혜가 있었다. 하나님의 지혜는 구약에서 처음으로 계시되었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지혜이다. 그는 이것을 구약의 표현에 따라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 (epignosis, full knowledge of God)" 호4:1, 6:6, 잠2:5, 골 1:10, 또는 그리스도의 지식, 빌3:8, 하나님의 아들의 완전한 지식 엡4:13 이라 부른다. 이 하나님의 지혜, 또는 지식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순종함을 바울은 믿음 (pistis, )으로 그린다.

 

이에 반해 세상의 지혜란 희랍인의 철학, 즉 고전1:22의 "헬라인은 지식을 구하고"에서 나굻윱 지혜를 말한다. 그가 고전 3;19에서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께 있어 우매"라 하지만 그러나 거기에 일말의 진리가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헬레니스틱 유대인 저자들 (필로 같은) 처럼 바울도 희랍철학에는 한분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대한 어떤 어렴풋한 이해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골2:8의 철학과 속임수에 대한 경고는 철학 전체를 무조건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몇몇 교부들 (오리겐)이 지적한 바와같이 헛된 속임수에 기초한 철학에 대한 정죄이다.

 

바울 자신은 그가 철학공부를 했다는 증거를 주지않는다. 그러나 롬7:18, 21, 고후 13:7, 골4:18; 6:9, 살전5:21 등에 to kalon ( ) 나 빌4:8의 arete ( ) 등과 같은 철학적 용어의 사용, 그리고 행17:28의 스토익 시인 O(A)ratus과 개연적으로 Cleanthes으로 부터, 그리고 고전15:33의 Menander로 부터의 인용등은 그가 철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헬레니스틱 유대 철학 문헌에 방대한 지식을 갖고있었다. 그의 선재하는 지혜에 대한 설명은 솔로몬의 지혜서에, 그리고 그의 서신의 여러곳이 필로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헬라적 유대 철학자들이 율법을 전할 때 사용하던 방법과는 정반대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새로운 복음의 전파가 철학적 논증으로 증거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지혜를 헬라인이 추구하는 철학적 지혜와 구분한 고전1:20-22의 맥락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은 "말의 지혜아니요 (설득력 있는 말로 복음을 치장함)"로 복음을 전하려 함이 아니었다고 확언한다. 그는 자신의 목표가 인간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한 "믿음"을 심는 것이라고 확언한다 (고전2:4,5,7) 이러한 자세가 아테네에서 그의 전도에 나타난다. 그는 철학자들이 섞인 아레오바고의 군중들을 향해서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육체부활과 재림,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고, 그들 일부의 조롱에 굴하지 않았으며, "다시 듣겠다"는 말에 유혹되지 않았으며 오직 소수의 영접자들에 만족했던 것이다. 바울의 異敎와 이방세계의 철학에 대한 자세는 단호했다. 그는 이교를 전적으로 배격하고, 그 철학의 사용 또한 전적으로 배격했던 것이킒?

 

바울의 이런 태도 중 이교에 대한 자세는 초대교부들 가운데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철학에 대한 바울의 자세는 그렇지 못했다. 초기 속사도 교부들 (the Apostolic Fathers, ca. 90-160)에게서는 대체로 철학의 배격이 이어졌다. 그러나 2세기 후반의 교부들 가운데 변증가들 (Apologists)로 불리우는 이들에게 있어 변화가 왔다. 하르낙 Harnack의 지적처럼 그들에게 와서는 유대교가 필로에 의해 전해지는 방식과 흡사한 방식으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철학화한 기독교가 일어나는데는 다음의 세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1. 철학의 훈련을 받은 이교도들이 기독교로 개종함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 철학자로 알려진 Aristides (136-61), Clement of Alexandria (ca. 185-211/215)는 본래 철학자들로 이교에서 개종한 이들이었다. Justin Martyr, Tatian, Theophilus과 무엇보다도 Augustine이 잘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들에게 있어 공통점은 구약성경이 개종에 기여했다는 점, 그들이 인용하는 구약성귀로 볼 때 그들의 이해가 필로의 설교가 늘 동반되어 이해의 길잡이가 되고 있늙募 점이다. 즉 그들은 필로의 눈을 통해서 구약을 하나의 철학적 논술로서 보고있다. 필로가 그러하듯이 그들도 자신들의 철학적 지식을 성경이해에 늘 집어넣고 있다. (reading into) 이에 대해 터툴리안은 그의 De Test. Animae I 에서 "실로 고대 문헌들에 대한 그들의 탐구적 노력을 여전히 계속하여 그것의 기억에 사로잡혀있는 어떤 이들이 우리 손에 있는 이런 류 (즉 성경의 진리 옹호에 철학자들을 인용하는) 의 책들을 쓰고있다"고 평했던 것이다.

 

2. 철학이 기독교에 대한 정죄에 대항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유대교에 대한 "무신론자" 라는 비난 이외에 영아살해,식인, 근친상간, 반국가 등의 새로운 정죄에 대하여 교부들은 이방 철학자들이 이방적 종교의식 비판에 대한 논리를 사용하였다.

 

3. 철학이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예방및 해독제 로서의 소용에 더 유효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영지주의의 특성은 신약성경을 극단적 알레고리적 해석하여 기독교를 이교의 한껍대기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반대하여 이레니우스나 터툴리안은 영지주의가 이교적 신화와 철학의 잘못된 가르침에 입각한 것으로 ?얼마? 기독교와 일치할 수 없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이에 반해 클레멘트 같은 이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헬라 철학자들의 참된 원리들과 교회의 전통적 신앙에 서있는 새로운 기독교 철학을 세우고자 했다. 특히 클레멘트는 영지주의자들이 오용하는 "그노시스" 라는 성경적 용어를 되찾고자 하며, 자신의 기독교 철학을 세우면서 그것을 "참된 철학 (the true philosophy)"이라 부를 뿐 아니라 자신의 철학이 영지주의자들의 잘못된 그노시스(false gnosis) 에 대하여 "진리의 그노시스" (the gnosis of the truth)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2세기에 기독교에 들어온 철학은 간헐적인 반대가 없지는 않았으나 헬라교부와 라틴교부들 모두에 계속적 영향을 미쳤다.

 

물론 필로나 교부들이 희랍철학을 전혀 무비판적으로 수용을 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필로는 인간을 만물의 척도라 한 프로타고라스를 비판하며 그 증거로 성경을 사용한다.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세계의 영원성을, 스토익파는 하나님을 물질적인 무엇으로 만듬에 대해 비판한다. 그들은 한편으로 성경이 어떻게 철학자들의 바른 견해를 앞질러 예견하고 있는지를 보잠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예견에서 철학자들의 잘못을 정죄하고 있는지 보이는 전략을 쓰고있다. 필로는 또한 철학이 그 자체로는 우리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참된 지식에로 인도하지 못함을 보이려고 했는데 교부들도 이 전략에 있어 대동소이하다. 교부들은 철학의 오류들을 알고있었고 그것이 이단의 근원이 된다고 비판했다. 또 그들은 철학이 철학자, 학파들 간에 일치하지 못함을 들어 그것이 진리의 인도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져스틴 마터, 타티안, 특히 Hermias' "The Ridicule of Gentile Philosophers")

 

헬라주의적 유대교에 있어서와 바울에게서 처럼 초대교부들에 있어서도 철학에 대한 자세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성경적 신앙, 기독교와 다름을 분명히 하고있다. (그러므로 이 입장을 일부 변증가와 후대 아퀴나스의 노골적인 synthesis에 비해 여전히 일반적으로는 antithesis 적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은 때때로 잘못을 범하나 계시인 기독교는 늘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학의 오류는 대개 인간적 한계, 인간의 능력 (즉 "인간의 감각과 인간의 이성, 논증")의 제한에서 오는 것으로 여겨지고 그것이 종종 신적인 계시와 대조되고 있다.

 

이런 자세에는 다음의 세가지 질문이 따른다. (1) 성경의 진리성 주장: 이들은 필로와 거의 흡사하게 성경의 진리성을 대개 1. 기적 (모세, 또는 예수님), 2. 예언의 적중, 3. (모세나 예수님 가르침의) 내재적 우월성, 4. 그 교훈의 실제적 효능 (성결증진등) 으로 주장한다. (2) 어떻게 계시 고유의 진리가 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나: 나아가 그들은 필로와 또한 유사하게 헬라철학에 나타나는 부분적 진리의 근원에 대하여, 1. 유대인들에게서 빌려간 것 (아브라함, 모세, 욥기의 고대성 주장), 2. 그들의 자연적 이성이 (물론 하나님의 도움이 없었던 것 아니다) 발견한 것, 3.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로 설명하였다. (3) 이들은 성경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하여 계시없이 발견되어 철학적 언어로 표현된 진리들을 계시로 주어지고 성경적 언어로 표현된 진리와 일치시키느냐 하는 문제를 풀었다.

 

 

 

序論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가 자신의 저술을 De doctrina christiana로 부르고, "우리 기독교 철학" (Contra Julianum IV, 72)을 언급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초기부터 자신들의 신앙의 지적 함의와 결과에 대해 반성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비기독교적 희랍-로마 철학과 근대철학도 종교적 함의와 이념적 열망을 보여준다 (또는 쎇㉲少?. 초기 교부들의 경우 조소적인 희랍-로마의 엘리트들을 직면하여 기독교인들은 희랍적 지성과 더불어 단지 이론적으로가 아니라 실존적 (핍박과 순교라는) 문제들을 다루지 않으면 않되었다. 또 이들은 교회 내적으로 영지주의와 마니키안과 같은 이단의 침입을 대항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후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고도로 발달된 이지적 문화속에서 영향력을 갖게됨에 교회는 그 문화를 배척할 것인가 수용할 것이냐 사이에서 망설이게 되었다. 이러한 '대립'과 '종합' 사이에서의 망설임은 중세교회에 있어서도 계속되었다. 또 기독교 신앙과 비기독교적 사상 사이의 관계의 문제는 '후-기독교 문명시대'라 할 현대에 들어와 없어지거나 퇴화한 것도 아니다. 또 이 문제는 서양 (유럽과 북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기독교가 전파된 어느 곳에서건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문제는 고후10:5에 제시된 바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나니"의 두가지 파라독스적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걸㎎좇獵?

 

  

"Thomas Aquinas (1224/5-1274)" by Jan A. Aertsen

 

  

8세기 말로 9세기 초 Carolingian 시대에 오면 중세의 소위 "암흑시대"를 지나 중흥이 싹트기 시작한다. 여기에 이성적 원리를 교회생활 속에 정착시킴으로서 샬레망의 문화정치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 알퀸 (Alcuin 730-804)의 공이 크다. 그러나 본격적인 이성론적 기독교의 발달은 서구가 고대의 철학적 이성에 의해 전격적으로 도전을 받은 13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양상을 띄며 활달해졌다.

 

 

(1) 대학과 스콜라주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소년기에 몬테카시노 (Monte Cassino)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맡겨진 이후 Naples의 대학에 입학하고 후일 가족들의 바램과 달리 새로 생긴 도미니크 수도회에 들어갔다. 그는 Cologne과 당시에 최고의 기독교 학문 중심지인 Paris에서 수학하고 59년 이후 이탈리아에서 가르치다 69년 파리에 와 가르친 후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가 74년 49세로 죽음.

 

그의 삶에는 처음 형성된 대학이 큰 역활을 하였다. 1200년대는 볼로나, 파리, 옥스포드의 대학이 생기던 시대로 대학은 당시 산업이나 상업처럼 길드를 이루어 magistrorum et scholarium의 결합으로 universitas (본래 대학에 국한되기 보다 집단의 공동적 명칭이었다) 를 이루었다. 이는 학문도 하나의 직업화 함을 보여준다. Alexander of Roes (c. 1280)의 지적처럼 당시는 sacerdotium, imperium, studium의 세기관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대학이 교회와 왕궁과 더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대학의 교육은 magister의 두가지 역활, 즉 講讀과 爭論 (legere et disputare)으로서 강독에는 정관(statutes)에 따라 정해진 권위적 텍스트 (auctoritates)를 읽고 설명하는 것이어서 자연히 "주석"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논쟁은 주석적 읽음에서 자연히 수반되는 질문들을 다룸에서 발전하였다. 권위적 문헌으로 부터 야기된 논쟁과 반론의 변증법은 생각이 가능한 모든 선택여지를 재는 일에 있어 근본적 개방성과 하나의 조직적 해결에 도달하기 위한 시도 속에 그 한계까지 밀어붙여진 이성의 엄밀한 적용 둘다를 요구하였다. 여기에서 schoolmaster or 'of school'을 뜻하는 scholasticus로 부터 중세철학과 거의 동의어라 할 憺 있는 scholasticism이 유래하였다.

 

 

(2) 인문학부: 그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facultas artium (faculty of arts)는 중세대학의 4개 학부중 하나로서 오늘날 (영어권의) 문학사, 석사에 해당하며 신학, 법학, 의학부의 예비단계로서 어거스틴의 De doctrina christiana에서 결정해놓은 세속적 지식의 전부를 포괄하는 전통적 체계를 가리킨다. De doctrina christiana는 성경연구에 중점을 둔 "기독교 학문체계" (Christian scholarship)에 인문학부가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본적 사상으로 하고있으며 13세기까지도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 책의 정신은 과학은 그 자체가 목적을 가지고 있을 수 없고 그 의미와 연계 (meaning and coherence)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연관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가면서 인문학부는 점차 "서구에 아리스토텔레스 전체가 소개 (the introduction of the complete Aristotle in the West)"라 불리우는 중대사건으로 말미암아 변화를 맞게된다. 이 때까지 만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저술만이 알려져 있었으나 12세기 중반에 Physica, De anima, Metaphysica, Ethica가 번역되었늚? 사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아리스토텔레스 (the Stagirite) 뿐 아니라 그에 대한 희랍 주석서들 방대한 희랍-아라비안 문헌이 도입되었고 신플라톤주의 문헌과 심지어는 유대인 사상가들의 문헌도 라틴어로 번역 소개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시대에는 다양한 영역들에서 고대문화로 부터의 방대한 내용들이 채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많은 이들은 이 비기독교적인 고전문화와 중세문화 사이의 대립을 감지하게 되었다. 그 좋은 예로 Absalo of St. Victors는 "그리스도의 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이 지배하는 곳에선 지배하지 않는다" (The spirit of Christ does not rule where the spirit of Aristotle reigns)라고 했다. 고대문화를 채용함과 배격의 두 입장은 결코 온전히 조화되지 못한채 양극으로 남아있었다.

 

이것은 1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 강독에 교회가 크게 반발하여 1210년에는 막 설립된 파리대학에서 그의 자연철학 저술의 강독은 파문으로 금지되었다. 그러나 수수께끼처럼 그의 강독은 번져나갔고 1255년 결국 공식적으로 허용되어 이제는 물訃壤 대학 학과목에 그의 저술에 대한 강독이 들어있어야 했었다. 이렇게 해서 인문학부 (facultas aritum)은 사실상 철학부가 되었고 모든 학생들을 위한 예비단계였던 인문학부는 이교적 철학에 푹젖게 되었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부르듯 "그 철학자" (the Philosopher)가 되어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견해를 받아들임은 실재에 대한 전통적 견해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요, Ferdinand Sassen의 말처럼 "중세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속에서 자신에 대해서와 그들이 가진 자연적 능력들에 대해 의식하게 되었다."

 

 

(3)신학부: 성경학과 수도회: 신학부 교수도 역시 강독과 논쟁을 중심으로 가르쳤으나 여기서 주된 권위적 문헌은 물론 성경이고 그 강독이 중심과제였다. 13세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의 중흥 뿐 아니라 성경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이 일어난 시대였다. 스콜라적 방법이 성경연구에 확대된 결과 그 연구도 학문의 일부가 되어 아퀴나스의 Summa theologiae에서 처럼 최초로 조직화되어 theo-logy로 발전되었다. 13세기의 수도원의 새로운 발전은 후랜시스와 도미鍛謳 수도회의 신학발전으로 1250이후 대부분의 주요 신학자는 수도승이었다는 점에 있다. 이들은 이전의 수도회와 달리 도시적 분위기에 적대적이지 않고 설교와 선교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활동의 관점에서 학문연구에 강조를 두게된다. 도미니칸은 ordo studentium이라 할 만큼 수도원 생활의 핵심적 일부로서 연구를 둔 첫 수도회였다. 이 수도회가 당시 세워지던 유럽의 대학들에서 주요 교수직을 차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4) 아리스토텔레스: "만인은 본능적으로 앎을 원한다."

 

이시대 대학의 좌표를 정한 原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일 것이다. "만인은 본능적으로 앎을 원한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우리들이 감각에서 취하는 기쁨을 들 수 있다. 그것들은 효용성을 떠나서 그것 자체로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최고는 시각적 감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자연적 앎의 욕구의 징표는 봄에 대한 無私한 감지이다 (the disinterested appreciation of seeing) 봄은 앎의 최선의 길로 여겨진다. 봄과 앎은 theoria, Idea, visio등과 같은 용어에서 보듯이 언어적으옆琯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이데가도 이점에 대해 "Being is that which shows itself in the pure perception which belongs to beholding, and only by such seeing does Being get discovered. Primordial and genuine truth lies in pure beholding. This thesis has remained the foundation of western philosophy ever since. This Greek priority for 'seeing' is today often brought into connection with the theme of the 'Hellenization of Christianity' and is then opposed tot he decisive experience of reality in the Old Testatment." 희랍인들은 청각보다 시각적 접근을 중시하고 셈족의 경우 보다 청각적 접근에 강조점 둔다. A. J. van der Aalst)

 

 

앎의 본능은 어떤 일의 원인 (causa)를 파악하는 지식 (scientia)에서 채워진다. 앎이 선이라면 앎의 본능은 선에의 지향이고 무지(ignorantia)도 긍정적으로 말해서 부족함에 대한 인식이다. 앎의 충동은 보는 것에 대한 (즉 그 뒤에 숨은 원인에 대한) 경이 (wonder)에 놓여있다. 데카르트와 달리 보편적이고 방법적으로 시행된 의심이 아니라 경이걸 사람으로 하여금 철학의 길에 접어들게 하는 철학의 근원이었다. 경이에서 처음 발생하는 것은 질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든 질문은 1. 무엇이 존재하는지 (whether something is), 2. 본질에 관한 결정적 질문인, 그것이 무엇인지(what something is)의 두개의 질문이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반해서 본능적 앎의 욕구에 대해 "본능적" 이라는 점을 주제화하는 세가지 "선험적" (a priori)인 논증, 즉 만물은 자체의 가능성의 완성을 추구한다는 의미의 선 (bonum)을 지향한다는 존재론적 논증을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사고의 핵심은 유기적 목적론: 즉 생명은 발아-성장-결실한다는 것에 있다.) 우선 두가지는 앎의 욕구의 동력은 만물이 자연히 완성 (perfection, or may be salvation: ontologically perceived salvation)을 추구하듯, 그것이 '인간으로 인간답게' 완성한다는 것과 만물이 자신의 고유한 기능 (열은 뎁히고 무거운것 떨어지듯)을 발현하는 바 앎의 욕구는 '인간의 특수한 활동'의 완성이라는 면에서 설명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백지(tabula rasa)이다. 즉 인간의 이성은 그자체로서는 하나의 가능성이어서 실제적 앎을 통해서 실재를 파악함으로서 획득되어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인간의 지성은 앎으로 자체의 완성을 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자연적 활동은 그의 본질인바 이해 (to understand, intellegere)이다. 여기서 'omnis scientia bona est. 모든 과학 (학문, 앎)은 선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앎 (학문)은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완성이고 그의 자연적 욕구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토마스의 시대는 모든 앎을 정당화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뿐 아니라 오히려 "호기심, curiositas" 즉 알고자 하는 '덕스럽지 못한 (unvirtuous)' 욕구를 정죄하는 (발동된 욕구의 방향성에 대한 질문) 어거스틴적 전통이 또한 대등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호기심은 주로 고백록 10권에서 요일 2:16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는 말씀에 근거한 논지이다. 특히 35장은 안목의 정욕을 호기심과 동일시한다. 호기심이란 학문의 외투로 위장된 졸治컥 헛된 욕구이다. 왜 그것은 안목의 정욕이라 하는가? 그것은 봄이 지식추구에 우선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봄의 기쁨이 본능적 지식욕구의 증거이나 어거스틴은 그것이 세상에 굴복하는 징표로 이해한다. 호기심의 "유혹"은 지식을 위한 지식을 위해 만물을 시험하도록 꼬인다. 호기심은 어거스틴의 근본적 구별인 사용 (uti, using)과 즐김 (frui, enjoying)의 구분을 토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의 De doctrina christiana에 있어 과학의 개념도 이 구분에 기초한다. 그는 지식은 반드시 인류 구원에 봉사할 수 있는 것 (uti)이어야 한다. 하나님 만이 안식을 주고 즐거워할 우리의 모든 갈구의 궁극적 목적이다. 사람들은 즐거워할 것을 사용하기 원하고, 사용하여야 할 것을 즐기는 反轉으로 이 관계를 왜곡한다. 따라서 어거스틴에 있어 무사한 관조 theoria로서의 세속적 지식에 연연하지 않고 기독교 학문적 지식은 도구적 의미를 가짐을 역설함이 그의 호기심 정의에 두드러진다. 즉 그의 관심은 하나님을 앎과 이 종교적 목적에의 효용에 의해 정해진다. 즉 질문의 동인은 그 방향도 결정해야 므磯募 것이다. 에트엔느 질송에 의하면 중세 기독교 철학의 가장 특징적 점은 철학적 문제들 가운대 선택을 행한다는 점이다. 즉 어거스틴은 하나님과 영혼을 알기를 원한다. 그외에? 전혀 아무것도." (독백 1,2,7) 기원을 아는 지식과 연관된 자기을 아는 지식, 이 둘 만이 가치있는 지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어거스틴은 자연과학을 본능적인 무엇이 아니라 "앎 자체를 위해 알고자 하는" 호기심의 맥락에 넣는다.

 

토마스는 앎을 자연본능적 욕구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호기심을 왜곡된 욕구로 보는 이 둘 사이를 어떻게 조화시키고 있는가? 토마스는 신학대전 II-II, 166ff 에서 원죄에 대한 논의 직후 호기심에 대해 언급하면서 "진리 자체에 대한 지식과 진리를 알고자 진력하고 연구하는 것을 분리해서 판단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진리 자체는 선한 것으로 보는 이 구분은 어거스틴에게서 거리를 둠을 의미한다. 토마스는 지식 달성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완성되고 자연적 욕구인 지식소유가 완성되는 것으로 봄과 연관된다. 토마스는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철학연구는 그 자체에 있어 적법적이고 찬양할 만하늦? (신학대전 II-II, 167, 3) 물론 지식의 추구에 있어 잘못될 수는 있다. 이 잘못됨의 근원을 밝힘에 있어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육체의 욕구와 영의 욕구의 구분을 언급하며 죄가 이 둘 사이의 조화를 깨트린 것 (즉 육체의 욕구는 지식추구를 꺼리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반드시 자신의 추구를 통제해야 하는데 여기서도 토마스는 중용 mesotes, 德, 즉 "right mean" between two extremes 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의 핵심개념에 의존한다. 호기심은 앎의 욕구에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의 극단이므로, 절제 (temperantia, temperance)의 가능적 부분인 학구열 studiositas (zeal for learning)의 덕에 의해 합리적인 통로로 유도되어야 한다. 즉 그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극단적 형태의 앎의 욕구인 호기심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덕의 지배에 들어와야 한다. 문제의 불화는 지식의 바른 목적인 하나님을 앎에 관계시킴 없이 피조물에 대한 진리를 추구 하는데서 기인한다. 이리하여 어거스틴이 말하는 바 호기심의 종교적 동기가 이론적 고찰의 위계속으로 이전되어 들어온다. (Augustine's religious motivation of the curiositas is transposed into the hierarchy of the theoretical consideration.) 그러한 갈구는 존재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탐구하지 않는 과학에서 악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5) 순환 동기 (circulation motif)와 인간의 행복: 토마스의 종교적 동기를 이론적 고려로 바꾸어 놓음은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완성을 이루는 바, 그 원리와 연합되고자 욕구한다"는 그의 제3논증에서 더 두드러진다. 이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외에도 Proclus, Pseudo-Dionysius와 같은 신플라톤적 순환교리의 채용으로 말미암는다. 신플라톤주의는 모든 실재가 두개의 상반된 동시적 운동, 즉 유출과 회기 (emanation and return, a turning around, conversio, from the first principle, the one or the Good)의 역학관계로 본다. 유출된 모든 것이 근원으로 돌아가기 원함은 거기에 완성 (존재론적으로 미완의 존재, 결핍의 존재가 완성되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 회기란 참된 자신들로 부터 멀어진 물질적-감각적인 것으로 부터 분리되어 그 원리와 합일됨을 통해서 순수하게 영적이고 신적인 존재로 됨 (이런 동기의식을 에로스라 함)을 말한다. 탉訝떽병 인간 이성 (human intellect)의 원리 또는 근원을 비물질적 본질들 (incorporeal substances, substantiae separatae)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인간영혼, 천사, 하나님의 불멸적 존재를 부르는 통칭이다. 인간됨의 한 본질은 이성을 통하여 비물질적 본질에 연관됨 이다. 앎이란 아는자와 대상의 합일인데 인간의 최고 목표는 최고의 원리를 앎으로 사유하는 인간이 그에 합일되는 것이다. 여기서 산출 (exitus, procession)과 회기(reditus, return)의 신플라톤주의 원리가 기독교적으로 바뀌어 하나님으로 부터와 하나님을 향한 이중적 과정이 실재에 있어 근본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이로써 창조교리와 다른 유출의 교리마저 수용된다. 토마스는 자연에 의해 강제된 단계적 유출은 부정하고 하나님 만이 모든 것의 창출적 근원으로서 궁극적 목적이 되신다고 한다. 그리하여 토마스도 어거스틴 처럼 오직 하나님에게서 만이 인간d의 참된 안식이 있다는 고백으로 귀결한다. 그러나 토마스에 있어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의 원인들을 알고자 욕구하는 그것은 바로 이성의 안식없음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됨은 바로 그잉 이성을 통해서 이기 때문이다.

 

 

(6) 철학의 고민과 인간의 행복: 토마스는 신학자나 철학자 공히 인간 이성과 신적 본질 사이의 "거리"의 문제에 봉착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답하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본 이 문제를 토마스는 인간 지식의 위상과 관해 부정적으로 대답할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즉 학문은 단지 감각이 달하는 곳에 유효하므로 비물질적 본질들에 대해 알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의 궁극적 행복은 본질적으로 추상적 과학들을 철학적 이론으로 고려함에 있지않다. 본능적 앎의 욕구는 사색적 과학에서의 완성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최종적 목적을 초월하며 철학은 완전한 행복을 이루지 못하고 단지 불완전한 행복을 유추할 뿐이다. 철학자들이 얻을 수 있는 가장 높은 하나님 지식은 그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가 어떠한 분이라는 것은 알 수 없다. (the knowledge that he is, not what he is) 그러나 본능적 앎의 욕구가 거기에 만족할 수 없다. 토마스는 인간의 완전한 행복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명상인 the visio Dei (the contemplation of God's essence)에만 연관된다고 했다. 여기서 theoria와 흡사한 언어사용을 본榮? 이 하나님의 명상은 철학적 탐구의 질서에 상충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연구는 결국 궁극적 원인인 하나님의 본질을 알지못하기 때문에 앎의 욕구와 성취 사이의 괴리를 이루어 인생의 초험적 성취를 이룰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해결은 철학의 고민과 낙망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해결은 포기, 체념 (resignation)의 그것이었다. 인간의 행복은 제한된 것이고 미완성과 불완전에 머물 뿐이다.

 

 

(7) 신앙을 통한 (합리적) 해방: 만일 앎의 자연적 욕구가 채워질 수 없다면 완전한 행복이란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것이나 인생이 무의미하고 목적이 없을 수 없으므로 그것은 불합리하다. 토마스는 여기서 "이성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것이 가능해야만 한다"고 거듭 주장한다. visio Dei의 불가능성은 신앙과도 상치한다. 하나님에 대한 즉시적 명상은 성경에 약속되어 있고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성경의 권위를 통해서 철학의 고민으로 부터 해방된다. 그의 신학대전이 이런 맥락에 부합한다: 인간의 구원에 관하여, 철학적 훈련들과 더불어 신적으로 계시된 교리들이 있다. 그는 이 해결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거듭 강조한다. 여기서, 기독교 신앳湛 종말론이 앎의 자연적 욕구의 궁극성 (the finality of the natural desire to know)와 조화 (종합)되는 점이 충격적이다. 이것의 불길한 의미(portent)인즉 신적 계시는 이성을 초월하나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 반대로 계시는 이성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마5:8의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함의 원문이 마음으로, 즉 이성으로 (God is seen by the heart, that is, by the intellect) 볼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신에 대한 명상은 하나님 본질에 대한 명상으로 (visio Dei = vision per essentiam) 해석되어 그것이 철학적 사색의 지평을 초월하는 것으로 되어있으나 본질적으로 theoria의 아이디얼에 의해 결정되는 상태에 머문다.

 

 

(8) 자연 위의 초자연적 목적에로 부상함: 토마스는 자연/초자연의 이중적 완전을 말한다. "자연적 원리들 위에 하나님에 의하여 사람에게 운행의 초자연적 원리들이 주입되어야만 이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은총이다. 여기서 은총은 사죄와 교제회복으로 이해되지 않고 최종적 목적을 위해 인간성의 초자연적 완성 (the supernatural perfection of humanity for the final goal)이눼?

 

 

(9) 자연과 초자연: 13세기의 인식론적 문제의 핵심은, 실재내의 인간의 방향성에 있어 희랍적 이성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었다. 토마스는 이 문제를 자연과 초자연의 구분을 통해서 대답한다. "... 은총의 선물들이 자연의 선물들 위에 더해지되 그것이 후자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는 방식으로 더해졌다." (신앙의 빛이 이성의 빛을 파괴하지 않는다). 1. 이 둘 사이에는 조화가 있다. "만약 철학자들의 가르침 가운데 신앙에 상치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본래 철학이라기 보다 이성의 불완전성에 기인하는 철학의 오용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보듯이 치성의 자충족성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 없다. 또 철학의 오용은 이성 그자체에 의해 밝히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인용문은 인문학부의 어떤 교수들의 주장처럼 신앙에 병립하거나 대립되는 '이중적 진리'를 배격하고 진리란 나누어질 수 없는 것임을 보인다. 하나님께서 이 둘의 근원이시고 조화를 보증하신다. 이 조화론에도 결국 유출 (앎의 욕구)과 회기 (앎의 완성으로서의 계시, 은총) 라는 순환逞逞┛ 엿보인다. 2. 여기서 gratia perficit naturam의 주제가 나온다. 기독교 삶은 자연적 질서의 완성이다. 3. gratia prae-supponit naturam (grace presuppose nature). 자연은 은총의 prae-ambula이다. 이러한 이유로 토마스는 자연과 초자연적 목표를 말한다.

 

 

(10) 결론적 관점: 카토릭과 종교개혁의 근본적 차이는 자연과 은혜의 관계에 대한 상이한 견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개혁자들에게 있어 은총은 인간 본성의 高揚이 아니라 회복이요 해방이다. 즉 방향성에 관한 문제도 언급된다. 인간의 본성은 관계적 relational이라고 본다. 그러나 토마스는 자연의 개념에 사물 그자체들의 존재론적 일관성에 대한 표현이 나타난다. 물론 토마스에게 있어 자연이 피조물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적) 관계임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 관계성을 (비본질적인, 우연한) 범주 (the accidental categories)의 하나로 본다. 즉 논리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모두 본질 이후에 나오는 비본질적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세계의 관계가 피조물의 본질에 후속한다는 문제를 낳으므로 여기에 새로운 관계, 즉 범주적 관계가 아닌 초월적 관계 (not catagorical but transcendental)를 필요로 한다.

 

토미즘의 또 다른 문제는그것이 인류를 두종류의 목적으로 갈라놓는 것이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화란 철학자 쉴레벡스가 말한대로 토마스는 이원론으로 삶을 나누기보다 오히려 그의 가장 깊은 의도는 인간의 삶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삶, 하나의 마지막에 예정된 바, 근원과의 관계 속에서 움직이고 존재함을 보이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