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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知識]이란 무엇인가?

好學 2009. 8. 17. 14:34

 

지식의 의미, 그 정의 - 知識이란 무엇인가?

 

글: 엄정식 서강대 철학과 교수

 

 

지식이 무엇인지 논의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식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독단의 잠에서 깨어날 수 있으며 동시에 회의의 수렁에서 헤어날 수도 있다.  인간의 위대함이나 고결함은 지식을 과시하고 자랑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인정하고 자각하는데 있다.

전통적으로 철학에서는 지식을 “정당화된 진리인 신념”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그 조건들을 엄격하게 따질 때 우리는 과연 지식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산업사회”로부터 “지식사회”로 옮겨간다고 인식하면서 갑자기 ‘지식’이라는 것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졌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재산이나 금전보다 지식이 더욱 소중한 가치로 평가되며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행복의 조건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가령 택시 운전 기사의 경우에도 손님을 찾아다니기에 급급해하기 보다는 ‘길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지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규정하기가 어렵고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에 관하여 그 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지식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 이래로 지식은 “정당화된 진리인 신념”으로 정의된다.

 

모든 신념이 곧 지식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무엇에 관해서 안다는 것도 일종의 심리적 현상인 이상 어떤 사람의 신념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신념이 일시적인 정신 상태로 그쳐서는 안 된다.  어떤 신념이 지식이 되려면 그러한 정신상태가 항상 지속되어야 할 뿐 아니라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내용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을 문제삼아서 지식이 과연 신념의 일종인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또한 지식은 그 내용이 반드시 진리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무엇이 과연 진리인지 결정하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경험적 차원에서는 절대적인 확실성을 확보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상황이나 문화의 특수성에 따라 진리의 기준이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식이 진리여야 한다는 것은 무리한 요구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한 예로 여러 일간 신문에 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는 경우처럼, 기껏해야 매우 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으면 지식이 된다는 것이다.  끝으로 지식은 반드시 정당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의 신념이 우연히 진리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해서 지식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는 잘못된 전제나 추론으로부터 진리인 결론을 끌어낼 수 있으며 꿈을 꾸거나 엉터리 증언을 통해서 허위를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당화의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보통 우리는 어떤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른바 “객관적인 사실”을 근거로 제시하는데, 그것을 엄격히 분석하면 대부분의 경우 여러 사람들의 신념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신념들의 나열일 뿐이지 지식으로 승화될 수는 없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려면 정당화될 필요가 없는 객관적 지식을 동원해야 하는데, 그것은 대부분 수학적 명제와 같이 경험적 내용이 없거나 논의를 거부하는 종교적 명제일 경우가 많다.  이렇듯 철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지식을 “정당화된 진리인 신념”으로 규정하지만 그 조건들을 엄격하게 따질 때 우리는 과연 지식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은 ‘상식’과 어떻게 다른가

상식도 넓은 의미의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실제적인 지식으로서 일상 생활에서의 효용을 목적으로 하며 전적으로 경험에서 얻어진 지식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일상적’지식이기 때문에 현실을 넘어서서 이상적인 삶을 지향하고자 할 때는 별로 쓸모가 없는 지식이기도 하다.

 

또한 상식은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일반적으로 승인된 지식이며 비판이나 오류를 쉽게 허용하지 않으므로 독단적인 데가 있다.  따라서 비상시에는 그 결함이 쉽게 드러나기 때문에 상식은 기껏해야 ‘평상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상식은 특정한 시대와 사회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그 곳에서만 습관적으로 통용되는 지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통상적’지식이라고 해야 한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여 전통적으로 통용되던 가치관이 무너지고 사회가 동요하게 되면, 상식은 더 이상 지식으로 간주되지 못하고 쓸모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가령 개기 일식의 경우 아프리카의 어느 원주민들은 한동안 이것이 “태양신의 분노”라고 믿어왔다. 그것은 오래된 종교적 관습으로서 하나의 상식으로 받아들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그것은 지구와 태양 사이에 달이 들어오게 됨으로써 일어나는 현상으로 인식된다. 이것은 오늘날 천문학적 지식이면서 동시에 상식이 되어 있다.

 

이렇듯 상식은 특정한 시대와 구체적인 사회에서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통용되는 지식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로 지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지식을 평가할 때는 정당화나 검증이 필요하고,  그것은 항상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실행되기 마련이므로 지식과 상식을 구분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지식,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아마 어느 문명권에서든 고대에는 상식과 지식 사이에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 중세에는 종교적 지식이 다른 종류의 지식에 우선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과학적 지식이 상식을 비롯한 다른 지식을 압도하고 있으며 이것이 곧 이 시대의 특징으로 되어 있다.

 

과학은 실험과 이론의 상호작용에 의해 일정한 방법을 도입하여 특정한 대상에 대한 법칙을 탐구한다.  그러므로 과학적 지식도 상식과 마찬가지로 제한된 의미의 지식이지만 그 범위가 어느 특정한 시대나 사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보편적’인 지식이다.

 

또한 그것은 객관적 사실을 실험과 관찰에 의해 확인하고 추론을 통해 설명하는 지식이기 때문에 상식 못지 않게 매우 ‘실증적’인 지식이다.

 

더구나 과학적 지식과 기술 그 자체가 진보하기 때문에 다윈의 진화론이 그렇듯이 새롭게 개발되는 지식은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개방적’지식이기도 하다.

 

과학자들의 공동체를 가장 이상적인 ‘개방사회’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로 우리는 과학적 지식을 실질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지식의 형태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과학적 지식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솔직하고 개방적이며 자기 비판과 자기 혁신을 통해서 지식의 이상에 끊임없이 다가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식에 한계가 있다”

지식이 무엇인지 논의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식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독단의 잠에서 깨어날 수 있으며 동시에 회의의 수렁에서 헤어날 수도 있다.

 

인간의 위대함이나 고결함은 지식을 과시하고 자랑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인정하고 자각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지식의 추구나 진리의 탐구를 어느 지점에서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지식에 대한 갈구는 인간의 본능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멈출 수도 없고 또 멈추어서도 안될 것이다.

 

항상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강조하는 이른바 “무지”에 대한 자각을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