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神 論]God.Jesus.성령

초막절과 예수 그리스도

好學 2010. 4. 12. 20:43

 

 

초막절과 예수 그리스도

 

 

레 23:33-44= “…7월 15일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7일 동안 지킬 것이라…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할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초막절은 7대 절기 중 맨 마지막으로 지켜지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을 지키는 진정한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장막을 짓고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장막절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을 추수를 마치고 곡식들을 곡간에 들이고 지킨다고 하여서 수장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그러나 초막절의 진정한 영적의미는 광야에서의 과거적 의미가 아니라 장차 예수님의 재림으로 성도들과 천국에서 영원토록 함께 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초막절이나, 장막절이나, 수장절 모두가 수고를 그치고 쉰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축제의 절기이며 잔치하는 기분으로 지켰습니다.

 

초막절이 되면 온 민족이 환호성 지르며 나팔을 불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지켜 주심과 얻어진 수확물로 인하여 풍성하고도 넉넉한 마음으로 이웃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절기라서 최고의 축제로 즐겼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절기를 통하여서 예수그리스도가 하실 일들을 조망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절기들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유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계시하는 절기였고,

무교절은 예수님의 무덤에 계신 것을 계시하신 절기였으며,

초실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계시하는 절기였습니다.

 

여기까지는 봄에 지켜지는 절기였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오셔서 자기 몸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실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실절 후 50일 째 칠칠절이라고도 하고 오순절이라고도 하는 맥추절을 지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50일 만에 이루어진 성령강림을 계시하는 절기입니다.

성령강림 후 절기는 아니지만 넉 달 농사 기간 동안은 아무런 절기가 없이 지내는데 이는 성령의 강림으로 온 세계에 흩어진 하나님의 자기백성을 찾는 구원의 농사 기간이기도 합니다.

 

넉 달 농사가 지나면 가을 절기가 시작됩니다.

가을 절기는 추수하는 절기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담고 있습니다.

가을절기의 시작은 나팔절로 시작이 됩니다.

 

나팔절은 예수님께서 장차 하늘로부터 나팔과 천사장의 호령으로 재림하실 것을 계시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속죄일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인류 역사 이래로 구원 받은 온 백성들을 위한 대 속죄사역을 담당하기 위하여 예수님 자신이 대 제사장이 되셔서 자기 피를 앞세우고 자기 백성들을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실 것을 계시하는 절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초막절은 예수님과 성도가 천국에서 신랑과 신부로서 거하는 되는 것을 계시하고 있는 절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초막절이 되면 이스라엘은 육적인 농사를 추수하여 곡간에 수장하였지만, 예수님은 성도를 구원하는 농사를 다 짓고 하늘나라 곡간인 천국 창고에 들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육적 농사는 성도들의 구원을 보여주는 영적 농사의 예표입니다.

예표를 통하여서 장차 주어질 영광을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초막절이 되면 온 이스라엘은 광야로 나가 초막을 짓고 거합니다.

 

레 23:40-42= “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 가지와 무성한 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7일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너희는 7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이 되면 그 해 수확한 각종 열매와 곡식, 포도, 기름 등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지냅니다.

 

절기 기간 7일 동안 매일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데 절기 중에서도 가장 많은 제물을 바칩니다.

 

이는 마치 구원 받은 성도가 자기가 받은 면류관까지 다 바치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구원이 되었기 때문에 천국에 가면 성도가 얻은 모든 것을 다 돌려 드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곤 광야로 나가 종려나무 가지와 버드나무 가지로 초막을 짓습니다.

 

초막 속에 7일 동안거하면서 부모는 자식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하여 광야를 어떻게 지나게 해 오셨는지를 가르쳤습니다.

 

이는 광야를 이스라엘 혼자서 지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해 오셨음을 기억케 하고 그 때를 추억하면서 기념하고자 함입니다.

 

광야를 40년 동안 지나오면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더위를 피하게 해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추위를 피하게 해 주신 것을 초막에 거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광야에서의 일주일간의 초막생활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심을 상징화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장차 예수그리스도가 재림하셔서 성도들을 하늘에 장막으로 불러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계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초막절을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적 사건으로서는 출애굽에서 가나안 까지 사십년 광야 생활을 추억하는 것이지만, 미래적 사건으로서는 장차 도래할 천국을 미리 앞당겨서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미래에 주어질 것을 미리 맛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이 장차 들어갈 삼층천을 미리 맛보고 살아간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에겐 성령이 임하면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됩니다.

지금은 비록 희미하나 그 때가 되면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사십년은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의 모형입니다.

 

그 험한 광야에서 초막 속에서 보호해 주신 것처럼 지금은 성령 안에서 성도들과 함께 거하면서 동행 하십니다.

 

요 14:16-20=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시면 내가 너희 안에 거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즉 하늘에 장막이 성도 안에 지어진 것입니다.

 

요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은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시곤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를 보내 준다고 합니다.

그 보혜사가 성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을 처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처소란 집입니다.

초막절식으로 말하면 장막입니다.

하나님의 장막이 성도 안에 지어진 것입니다.

 

옛 언약에선 가나안 땅을 주셨지만, 새 언약에선 성령을 주십니다.

땅에서 성령으로 바뀐 것입니다.

새 언약에선 땅을 주시지 않고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다 불에 타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타지 않을 땅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 불타지 않을 땅인 천국에서 주님과 살것을 성령께서 맛보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 하에선 초막절을 구약식으로 광야에 나가서 지내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땅 차원의 초막절을 자낸다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구약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장차 초막절의 실상으로 주어질 천국을 맛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새 언약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므로 이미 천국에 가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비록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하지만 성령 안에서 위로를 받으면서 살았고, 장차 예수님께서도 재림하시면 성도들의 눈물을 다 씻기시며 다시는 사망이나 아픈 것이나 고통이 없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초막절에 초막을 짓는 나무는 종려나무가지로 지었습니다.

 

종려나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 하실 때 백성들이 흔들던 나무입니다.

 

그래서 종려나무는 왕의 나무 또는 메시야의 나무라고도 합니다.

또한 종려나무는 평화를 상징하기 때문에 천국의 나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종려나무 가지로 환영한 것은 평화의 왕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종려나무 가지로 예수님을 환영케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왕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막절에 종려나무로 광야에 지은 초막은 평화로운 천국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광야란 두 의미가 있습니다.

 

애굽과 비교 할 땐 천국을 상징하지만, 가나안과 비교하면 세상이 됩니다.

동일한 광야이지만 때로는 천국을 상징하고, 때로는 세상을 상징하는 이중 계시가 담겨져 있습니다.

 

초막절에서의 광야란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세상과 다른 세계를 의미합니다.

애굽과 다른 세계가 광야입니다.

애굽을 세상이라고 한다면 광야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광야에선 하늘에서 양식이 내린 것입니다.

 

 

초막절엔 낮에 물잔치를 벌리고 밤에 불 잔치를 벌렸습니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행진 할 때 하나님께서 낮엔 구름기둥으로 밤엔 불기둥으로 인도한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출 13:20-23=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광야 길을 낮엔 구름 기둥으로 밤엔 불기둥으로 보호해 주셨다는 것은 곧 성도를 세상에서 보호해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속엔 엄청난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이 되면 종려나무가지를 꺾어다가 초막을 짓고 기드론 시내에 가서 물을 길어다가 제단에 흥건히 붓습니다.

 

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성령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제단에 물을 붓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이 이스라엘 속에 성취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들과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백성들에게 확인하고자 할 때 엘리야가 물을 제단에 부은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역대 왕 중에서 가장 타락한 왕이 아합 왕입니다.

아합 왕은 시돈의 왕인 엣 바알의 딸인 이세벨과 정략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 때 이세벨이 자기가 섬기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이스라엘에 데리고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세벨의 영향으로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을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왜? 여호와를 섬겨야 할 이스라엘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기게 되었을까요?

 

이는 바알과 아세라 신은 인간들에게 풍요와 다산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에 복을 준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쉽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로보건데 마귀는 항상 땅에 것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배를 신으로 섬기는 사람은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빌 3:18-19=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마귀는 광야에 사십일을 주린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땅에 것을 주면서 절하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사람들을 땅에 속한 자들을 땅에 것으로 붙잡아 둡니다.

그래서 바울은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라고 한 것입니다.

 

암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쉽게 받아들인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바알을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선 여호와라 부른 것과 같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박성들의 종교적 정서를 고려하여 알맹이는 바알인데 껍데기는 하나님으로 위장하여 섬기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거짓선지자들이 말하는 바알이 참 하나님인지, 자신이 말하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지 확인하자고 한 것입니다.

 

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무지한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 줄도 모르고 거짓 선지자들이 바알을 하나님이라고 하니 하나님 인줄 알고 섬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등 따습고 배 부르게 해 준다고 하니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가짜 하나님을 폭로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벌린 사건이 그 유명한 갈멜산 제단에 불이 내린 사건입니다.

 

엘리야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내가 섬기는 여호와가 침 하나님인지 너희들이 섬기는 바알이라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인지 확인 하자고 했습니다.

 

왕상 18:24= “너희는 너희 신의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참 하나님을 확인하는 방법이 제단에 불이 내리는 것으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각각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는데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을 불러서 자기 제단에 불이 내려주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알 선지자들은 자기들 방식대로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왕상 18:25-29=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한 송아지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놓지 말라 26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찌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바알 선지자들은 자기 몸을 학대하면서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안 들어 주실 것입니까? 라고 시위하면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내 정성을 보시고 내 열심을 보시고 내 능력을 보시고 응답해 달라고 했습니다.

한 나절을 그렇게 정성을 쏟고 기도를 하였지만 불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비아냥거리면서 혹시 바알 신이 자거나 마실 나갔는지 모르니 더 크게 부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불러도 바알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바알이 가짜 하나님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먼저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무너진 단을 수축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제단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서 드렸습니다.

단이 무너졌다는 것은 약속을 붙잡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의 수효대로 열 두 돌을 취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제단을 수축케 하였습니다.

 

그리곤 수축한 제단에 곡식을 놓고 그 위에 기손 시내에 내려가 물을 길어다가 제단 위에 부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곤 엘리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의 제단이 불이 내려서 엘리야가 섬기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왕상 18:30-39=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31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 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32 저가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그 돌로 단을 쌓고 단으로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만한 도랑을 만들고 33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34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 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세번 그리하라 하여 세번 그리하니 35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갈멜산에서 증거해 주신 하나님은 인간의 것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절기를 통하여서 약속하신 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바알 선지자와 엘리야의 차이는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앞세우고 제사를 지냈지만 바알 선지자들은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자기들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나님을 찾았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부른 것은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아무리 이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을 받았다 할지라도 긍휼히 여겨 달라는 것입니다.

 

갈멜산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바알을 섬기라고 하지 않고 바알을 하나님이라고 속여서 섬기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떤 하나님이냐가 중요합니다.

 

이 시대로 말하면 어떤 예수를 믿느냐 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을 보면 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자신들도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알고 믿음도 안다고 합니다.

저마다 예수님의 이름은 목이 터져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예수와 그 복음과 그 성령이 가짜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목사님들이 가르치는데 당연히 진짜 인줄 알고 있습니다.

이들이 내어 놓는 신앙을 보면 바알 제사장들과 같은 자기 열심입니다.

지성이면 감천하는 하나님입니다.

자기 소원을 들어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름하여 현대판 바알이라는 하나님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과 정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자기 열심으로 신앙을 가늠하지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왜? 죽으셨는지를 모릅니다.

하나님은 왜? 옛 언약을 폐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새 언약을 세웠는지를 모릅니다.

새 언약을 모릅니다.

그러면서 내가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합 왕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땅에 복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믿는 예수는 가짜 예수라는 확실한 증거는 세상에 것을 얻기 위해서 예수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도 동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신앙이 그러하였습니다.

모두가 육적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례요한을 엘리야의 심정으로 보내서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이 가짜임을 폭로케 하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어느 시대나 동일한 성향으로 일어납니다.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초림 때 유대인들이나 이 시대 교인들이나 영적 성향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나 엘리야의 심정을 가진 종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앞세우고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세우신 새 언약을 앞세우고 백성들에게 나아갑니다.

당신들이 섬기는 예수는 가짜라고 거침없이 고발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제단을 쌓고 물을 제단 주위로 흥건하게 붓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불렀던 것입니다.

 

 

이처럼 초막절에 제단에 물을 붓는 것은 광야에서 인도하셨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기억케 하기 위함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서 성막을 지시 받고 모세가 시키는 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막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광야에서 열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하여 스스로가 애굽 사람과 같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성막의 법궤 속에는 하나님께 불 순종한 증거물들이 담아 놓음으로서 늘 불순종한 사실을 기억케 하셨습니다.

 

법대로 하면 당장 멸절 당하여야 함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을 인도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와 긍휼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잊게 되는 자는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래서 초막절이 되면 광야의 일을 상기 시키면서 우리가 여기까지 와 살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다름 아닌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 때문에 너희들을 용서해 주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초막절에 제단위에 붓는 물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제단위에 물을 부으면서 하나님이여! 우리 행위대로 보지 마시고 주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러한 본질적인 의미를 모른채 초막절을 지냈습니다.

초막절만 되면 어김없이 실로암에서 물을 길어 제단에 붓는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물 설교를 하셨던 것입니다.

 

요 7:37-38=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은 초막절에 제단에 물을 붓는 모습을 보시곤 그 물은 곧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지는 성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 물이 제단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겔 47:1-12=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2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3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 다시 일천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6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7 내가 돌아간즉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방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찌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 가므로 바닷물이 소성함을 얻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11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말씀하신 물은 장차 예수님께서 가셔서 보내 주실 성령이십니다.

그 물이 제단에서 나왔듯이 성령도 참 성전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올 것임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오실 것은 구약시대부터 이미 약속이 되었던 것입니다.

 

겔 36:26-28=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에스겔이 말한 새 신이란? 다름 아닌 성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수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행 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옛 언약에선 가나안 땅을 준다고 하셨지만, 새 언약에선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땅이 성령으로 바뀐 것입니다.

 

신약에 가나안 땅은 성령입니다.

이 성령은 하나님의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간에 맺은 새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항시 성도로 하여금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로서 세운 새 언약을 붙잡도록 인도하십니다.

 

이미 구약에 약속하시기를 새 언약이란? 예수님께서 성도들 속에 침투해 들어와서 말씀을 지켜 내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는 주체가 인간에게서 예수님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렘 31:31-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이제 하나님의 약속대로 새 신이신 성령이 성도들 속에 들어온 사람은 마음속에서부터 성령이 생수처럼 흘러넘치게 됩니다.

 

성령이 새 언약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십니다.

진정한 초막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그 성령이 눈에 불을 켜고 성도를 새 언약으로 지켜 낼 것입니다.

 

그래서 초막절이 되면 초막 근처에 환하게 불을 밝혀 놓았던 것입니다.

초막을 불이 지켜 준다는 것은 성령께서 성도를 지켜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빛이 있으므로 낮에 다닌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빛이 있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는 제자들 속에 진리의 성령이 계시게 될 것을 아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곤 예수님께서 성령이 임하면 너희 안에 천국이 임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는 곧 성령이 초막절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성도는 예수님을 바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와 계신 예수님과 성령께서 처소로 마련해준 초막 안에서 신혼의 맛을 느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성취가 되어질 미래적으로 남은 절기이지만 성령 안에 있는 성도에겐 이미 영적으로 성취가 된 절기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절기들은 예수님을 계시하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초림 속에는 이미 재림의 약속이 포함되어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는 모든 절기는 성령 안에서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초막절을 가다릴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이 몰고 온 초막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심령 제단에 물 잔치를 벌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엘리야의 제단에 철철 넘쳐흐르던 물처럼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철철 흘러 넘쳐 세상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다 태워내는 일들이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고 누리는 것입니다.

누리는 신앙은 기쁨이지 수고가 아닙니다.

 

바울은 숱한 고난 속에서도 이 누림 안에 있었기 때문에 기뻐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한 것은 이미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약속을 믿음으로서 천국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부디 이런 초막절의 즐거움이 생수 같은 그대 속에서 봇 물 터지듯이 솟아나시길 축원합니다.

성령이 몰고 온 초막절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마음속에 초막절에 물이 넘치듯이 성령에 충만 함으로 새 언약이 믿어지게 하옵소서. 초막절에 누림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에 모든 불안과 두려움들이 사라지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을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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