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神 論]God.Jesus.성령

속죄일과 예수 그리스도

好學 2010. 4. 12. 20:42

 

속죄일과 예수 그리스도

 

 

레 23:26-2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7월 10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은 너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절기를 지키라고 한 것은 먹고 마시기 위해서 준 것이 아니라 그 절기를 통하여서 장차 오실 메시야를 계시하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7대 절기는 모두가 다 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절기 속에 예수그리스도가 하실 일을 담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면 국경일과 같습니다.

광복절은 일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고 삼일절은 기미 독립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것처럼 국경일마다 그 의미를 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7대 절기 중 어떤 절기는 흥겹고 즐거운 절기도 있습니다.

앞서 살펴 본 나팔절과 같은 절기는 엄청난 기쁨을 주는 축제일입니다.

 

한 해 동안 땀 흘려 지은 농사를 추수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웃과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즐기는 절기입니다.

 

반면에 오늘 살펴볼 속죄일과 같은 절기는 엄숙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기 까지는 극도로 긴장하면서 손에 땀을 쥐면서 절기를 지키게 됩니다.

 

속죄일은 글자 그대로 죄를 속함 받는 날입니다.

나팔절은 추수의 기쁨을 만끽하지만 속죄일은 죄사함 받는 기쁨을 만끽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여러 가지 제사가 있습니다.

그 모든 제사들은 죄와 상관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상번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상번제란? 아침 저녁으로 고정하여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드리라고 한 것은 인간의 삶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죄인에게 있어 죄란? 어디서 어디까지가 아니고 죄인이 산다는 것 자체가 죄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아침 저녁으로 “난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적 차원에서 상번제를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속죄일에 드려지는 제사는 대 제사장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에겐 하늘의 모형인 성막을 주셨습니다.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이라고 하였습니다.

 

히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성막의 구조는 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세 구역은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과 연관이 있습니다.

 

먼저 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습니다.

여기선 제물이 불에 태워져 하나님께 드려지는 곳입니다.

이는 곳 성자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는 모습이므로 예수님의 육체적 사역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소에는 등대와 떡상과 향단이 있습니다.

이는 성도들 안에서 진리를 분별케 하고 말씀과 기도를 행케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성소가 있는데 이곳엔 법궤가 안치 되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엔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으로서 성부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막 모두가 예수님을 계시하고 있지만 굳이 구분을 한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막엔 백성이 들어가는 곳과, 일반 제사장이 들어가는 곳과, 대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는 구역이 따로 정해져 있습니다.

 

히 9:1-12=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 ~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 가로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 ~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 ~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백성들은 성소 마당만 들어갈 수 있는데 여기선 백성들이 죄를 제물의 피로서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 제사장들은 매일 성소 안에 들어가서 향을 피우고 등대를 간검하고 떡을 진설하는 일들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지성소에는 오직 대 제사장만이 일 년에 딱 한번 들어갑니다.

그 날이 바로 속죄일입니다.

 

속죄일이 되면 대 제사장은 목숨을 담보로 하고 지성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제사를 열납하면 살지만 거부하면 즉사하게 됩니다.

 

제사가 열납되면 하나님께서 영광의 구름으로 성막을 뒤덮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은 제사를 드렸다면 대 제사장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됩니다.

 

비록 대 제사장이 지성소에서 죽었다 할지라도 아무라도 시체를 끄집어내려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 제사장은 속죄일 제사를 드리러 지성소에 들어 갈 때는 항상 옷 술엔 방울을 달고 발목에 끈을 매고 들어갔습니다.

 

백성들은 밖에서 대 제사장이 제사를 지내는 동안 숨 죽이면서 기다립니다.

방울 소리가 나면 하나님이 대 제사장의 제사를 열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방울 소리가 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제사를 거부하여 대 제사장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면 끈을 잡아 당겨서 시체는 끌어냅니다.

그리곤 다른 대 제사장을 선출하여 다시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민족에서 있어 속죄일은 긴장되는 절기입니다.

 

여섯 번째의 절기이지만 7대 절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속죄일은 온 민족이 죄사함을 받는 날입니다.

 

보편적으로 드려지는 속죄 제사와 속죄일에 드려지는 제사의 차이는 속죄 제사는 개인적인 죄를 용서 받기 위하여 드려지는 제사인 반면에 속죄일 제사는 온 국가와 민족의 죄가 사함 받는 민족적 제사입니다.

 

대 제사장은 이 날을 위하여 준비하고 살아갑니다.

 

이스라엘은 속죄일 제사에 하나님께서 열납하셨다는 영광의 구름이 떠오르면 온 나라가 대 축제로 바뀝니다.

 

지금까지 있어 왔던 알고 지었던 죄든 알지 못하고 지었던 죄든 개인이 지었던 죄든 민족이 지었던 죄든 그 어떤 죄도 다 용서 받았음으로 이제부턴 죄 없는 민족이라는 자세로 겨울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속죄일의 제사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죄 없음으로 선포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은 속죄일의 제사를 통하여서 용서 받게 되면 비로서 세상 속에서 죄 없는 나라로서 거룩한 국가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 용서하심을 받게 되면 이스라엘 민족의 자부심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방인과 차별성을 두고 살았던 이유도 다 이 속죄일 제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한 거룩한 민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을 개 같은 자라고 상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 너희들은 아무리 강하고 잘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개 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속죄일은 중요한 절기입니다.

 

이제 그 속죄일에 드려지는 제사 속에 담겨진 영적 의미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속죄일에는 특이하게 아사셀을 위한 제물을 드렸습니다.

 

속죄일의 관심사는 아사셀 염소입니다.

아사셀 염소란? 아사셀에게 바쳐진 염소란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속죄일이 되면 대 제사장은 두 염소를 준비합니다.

두 염소 중 하나는 제사용으로 죽임을 당하고 한 염소는 아사셀을 위하여 바쳐지는 염소가 됩니다.

 

아사셀이라는 말은 “악령”곧“사단”을 말합니다.

 

그러니 한 마리는 죽임을 당하여서 하나님께 바쳐지고 한 마리는 산 채로 마귀에게 바쳐지는 것입니다.

 

레 16:6-10=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세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여호와를 위하여 바쳐지는 염소의 피는 지성소에 있는 법궤 위 시은좌에 뿌려집니다.

 

레 16:15=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막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는데 그 속에는 세 가지 증거물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이고, 또 하나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이고, 다른 또 한 가지는 십계명이 적힌 두 돌판입니다.

 

법궤 속에 담긴 세 가지 증거물들은 모두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불 순종한 대표적인 증거물입니다.

그래서 법궤를 증거궤라고도 합니다.

 

이는 결국 법궤 속에 범죄한 이스라엘이 담겨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대로 라면 마땅히 이스라엘은 죽임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킬 수 있는지 물어 보라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만약 이 율법을 지키면 거룩한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지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출 19:3-8=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7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8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이에 이스라엘이 좋다고 하여 모세는 그 약속이 체결되었음을 공포하면서 양푼이에 피를 담아서 이스라엘에게 뿌리면서 누구든지 이 약속을 어기면 양푼이에 담긴 피의 제물처럼 죽임 당할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출 24:6-8=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이스라엘의 다짐을 하나님께 보고 하고 십계명이 적힌 두 돌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산 아래로 내려 오니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고 우상숭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은 본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두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트립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을 어기자 하나님께서 3천명을 죽이자 모세가 급히 엎드려서 이 백성들을 죽이려면 차라리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우라고 하면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듣고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곤 처음 것과 똑 같은 돌판을 만들어 주면서 법궤 속에 보관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법궤 속에 담긴 두 돌판을 볼 때마다 자신들은 죽어 마땅한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킨다 하여도 이스라엘은 이미 약속을 어긴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여도 할 말이 없어요.

이미 범죄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년에 일차씩 속죄일이 되면 그 법궤 위에 염소의 피를 뿌리라고 합니다.

이는 곧 염소의 희생이 이스라엘을 지켜 준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희생의 제물 때문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기 위해서 속죄일만 되면 대 제사장이 하나님을 위하여 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앞 세우고 지성소에 들어가 법궤 뚜껑에 피를 뿌립니다.

 

법궤 뚜껑에 피를 뿌린다는 것은 곧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뿌린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법궤 속에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증거물들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제사가 올바로 되었으면 흠향하시곤 그 응답으로 영광의 구름 기둥을 피움으로서 이스라엘이 용서 받았음을 공포하셨습니다.

 

그래서 법궤의 뚜껑은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오는 곳이란 뜻에서 시은좌라고 합니다.

 

레 16: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궤 위 속죄소 앞에서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라“

 

 

이렇게 하나님이 대 제사장의 제사를 받으면 대 제사장은 밖으로 나와서 아사셀을 위한 염소를 끌고 백성들 앞에 섭니다.

 

그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뽑혀진 염소는 대 제사장이 산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전가 시키는 기도를 하고 무인지경인 광야로 내 버려지게 됩니다.

 

레 16:21=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맞겨 광야로 보낼지니”

 

아사셀에게 바쳐지는 염소는 온 이스라엘의 죄를 홀로 짊어지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홀로 쓸쓸히 짐승에게 찢겨 죽게 됩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 버려짐 당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백성들을 죄에서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마귀에게 제물로 준 것입니다.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보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사 38:17= “나의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시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고”

 

이사야 선지자는 죄를 등 뒤로 던졌다고 하고,

시편 기자는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안 보이게 옮겼다고 합니다.

 

아사셀 염소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이스라엘이 볼 수 없는 곳으로 옮겨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속죄일은 온 민족의 죄를 벗어버리는 날인 것입니다.

 

레 16:30=“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속죄란 말은 “카파르” 라고 하는데,

이는 “덮어주다”, “닦아 내다”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덮어준다는 것은 실제로는 죄가 있지만, 없는 것으로 가려준다는 뜻입니다.

 

이는 마치 겨울에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밤새 내린 눈으로 온 천지가 너무 하얗게 되어 눈이 부시지 않습니까?

 

이 눈부심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비록 눈 속에는 각종 더러운 것들로 널 부러져 있지만 눈이 내림으로서 더러움은 보이지 않고 깨끗함의 장엄함을 연출해 내지를 않습니까?

 

밤새 내린 온 천지를 뒤덮은 눈을 보고 “야! 아름답다” 라고 탄성을 저절로 자아내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하연 눈 밭에 멍멍이와 철수가 뒹굴고 노는 것입니다.

이 때는 그 어떤 세상 근심과 걱정은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져 흰 눈이 만들어낸 장관을 느끼고 감사하고 즐길 뿐입니다.

 

만약 눈이 없는 땅이라고 한다면 그 바닥에 뒹굴고 놀 인간은 없습니다.

 

속죄일이 바로 온 천지를 하얀 눈으로 뒤덮는 것과 같은 날입니다.

 

이스라엘 속에 각종 더럽고 추한 죄들을 다 피로서 덮어주는 날입니다.

 

이 날이 되면 사람과 사람 간에 쌓였던 죄와 허물도 다 사함 받고, 나라 안에서 일어난 갖가지 죄악된 사건과 사고들을 다 사함 받는 날입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온 천지에 죄 용서하심이라는 흰눈이 덮이는 날입니다.

이 날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허물을 찾아 볼 수 없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대 제사장이 드린 속죄 제사를 받으시고 덮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곤 즐거운 성회로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만 해도 희열을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기쁘고 즐겁겠습니까?

 

이럴 땐 이런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찬송가 210장입니다.

 

1절) 내 죄사함 받고서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지금 나의 가는 길 천국 길이요 주의 피로 내 죄를 씻었네

 

<후렴> 나의 모든 것 변하고 그 피로 구속 받았네

하나님은 나의 구원 되시오니 내게 정죄함 없겠네

 

2절) 주님 밝은 빛되사 어둠 헤치고 나의 모든 것 다 변했네

지금 내가 주 앞에 온전케 됨은 주의 공로를 의지함일세

 

3절) 내게 성령 임하고 그 크신 사랑 나의 맘에 가득 채우며

모든 공포 내게서 물리치시니 내 맘 항상 주 안에 있도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만큼 속죄일에 주어지는 거룩이라는 것은 중요하고도 귀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의미에선 속죄일은 아직 기다려야 할 절기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께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셔서 하늘 지성소에 들어갔기 때문에 성취가 된 것입니다.

 

성도는 장차 도래할 것을 미리 앞당겨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미래 속에 현재를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이미 이루어진 것 속에서 누리고 있습니다.

성령은 성도 안에서 이미 그리스도께서 성취한 절기들을 맛보도록 하십니다.

 

주님의 재림은 이미 거룩 안에 들어와 있는 성도를 하늘에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그때 가서 거룩해 지려고 하면 안됩니다.

이는 마치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이 신랑이 온다고 하니 기름을 준비한다고 부산을 떠는 것과 같습니다.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속죄일을 성취하시겠지만 그것은 이미 속죄 받은 성도와 받지 못한 자들을 구별하는 것 뿐입니다.

 

열처녀 비유에서 기름을 준비한 처녀는 늘 신랑이 있는 것처럼 살았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아직 신랑이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신랑이 온다고 하자 부랴 부랴 기름을 준비한다고 분주했습니다.

 

이미 속죄일 안에 사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속죄일을 기다라고 사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속죄일을 기다리는 자는 속죄일의 축복에서 제외 됩니다.

왜냐하면! 속죄일의 즐거움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만 효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어떤 교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한다고 법석을 떱니다.

 

그들이 준비한다는 것은 고작하여서 종교적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재림하시는 주님은 종교적 열심히 맞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리스도의 약속 안에 있는 사람이 맞이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성도는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고 감사하며 기쁨으로 삽니다.

 

하지만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맞이하려는 행동들을 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자기의 열심히 믿음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믿음은 열심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물로 주어집니다.

 

선물로 이미 받은 사람은 믿음을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을 인간 쪽에서 뭔가 만들어 내려는 사람들은 모두가 믿음이 없다고 보면 됩니다.

마음에 믿음이 없기 때문에 열심히 믿는 척 하는 겁니다.

 

믿음과 믿는 척 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소관이고 믿는 척 하는 것은 인간의 소관입니다.

 

믿음엔 일체의 증명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져 믿어지는 것으로 살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믿어지면 그 믿어지는 것으로 감사하며 삽니다.

그러나 안 믿어지면 자기 쪽에서 믿어지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고작하여 열심과 충성으로 믿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주어지는 것이지 외부에서 만들어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는 속죄일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속죄일의 축복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속죄 받은 자로서 속죄일을 소망하시며 사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