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神 論]God.Jesus.성령

인 간 론 [人間論]

好學 2011. 12. 24. 21:33

인 간 론 [人間論]



제 1 부 원시상태의 인간

인간의 기원

교의학에서 인간은 피조물의 면류관일 뿐만 아니라 각별한 보호의대상이다.

성경은 인간의 기원에 관하여 이중적으로 서술한다. 인간은 창조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이 선행한다. 인간의 기원에 관한 진화론의 견해는 인간이 생득적인 힘에 의하여 전적으로 통제되는 와전히 자연적이 과정에 의하여 하등 동물의 몸과 혼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진화론이 갖는 주도적인 특징은 동물의 세계와 인간과의 철저한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진화론에 대한 반론으로 진화론이 하나님의 말씀의 명백한 가르침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구성적 본질

= 인간 본성의 구성적 요소들

신자들은 인간이 두 부분 곧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있다.이 견해를 이분설이라고 한다. 그리고 인간이 세 분분 곧 몸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삼분설이라고 한다. 신이 제 3의 본질 또는 중간적 존재를 통해서 물질계와 서로 교류할 수 있다는 것처럼, 인간의 영도 제 3의 중간적 요소인 혼을 통해서만 몸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혼은 이성 혹은 영을 소유하고 있는 한 불멸의 존재로 간주되지만 몸에 관계하는 한에 있어서는 육적이요, 또한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조약한 형태의 삼분설은 몸을 인간 본성의 물질적인 부분으로 혼을 동물적인 생명의 원리로, 그리고 영을 하나님과 관계하는 합리적인 불변하는 요소로 간주하는 것이다.

개인의 영혼의 기원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기독교 신학에서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혼의 본질, 기원 계속적인 존재등에 관한 끊임없는 논의가있어 왔다.

몸과 혼의 관계를 말함에 있어서 먼저 일원론이 있다.몸과 혼은 원초적인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이론들이다. 이원론은 본질적인 이원성을 전제하고 양자의 상호관련성을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개인의 영혼의 기원

선재설

오리겐, 스코투스 에리게나, 율리우스 뮐러와 같은 일부 사변 신학자들은 인간의 영혼은 현재 상태와는 다른 일종의 전(前)상태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전상태에 어떤 사태가 발생하여 현재와 같은 상태 안에 영혼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성경적, 철학적 근거가 없다는 것과 몸을 우연의 산물로 본다는 것과 인류의 통일성을 파괴한다는 것등의 반론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전설

인간의 영혼은 몸과 함께 혈통을 통하여 전이 된다고 한다. 즉 그것은 부모에 의해 자식ㅇ게 유전된다는 것이다. 이 유전설은 루터교회의 지도적인 견해가 되었다.

유전설에 대한 반론은 유전설은 영혼의 단순성이라는 철학적 교리와 배치된다는 것이다. 이 유전설은 현실주의 이론과 잘 접목이 된다.

창조설

각 개인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로 간주되었야 한다. 영혼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 사역에 기인한다. 이 이론은 유전설보다 성경의 지배적인 표현들과 부합한다. 원초적인 창조에 관한 수술은 몸의 창조와 영혼의 창조를 엄격히 구분한다. 창조설은 유전설보다 인간 영혼에 더 잘 부합한다. 또 이 이론은 그리스도론에서 빠질 수 밖에 없는 함정을 피하면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성경의 표현을 더 바르게 평가하고 있다.

이 창조설에 대한 몇 가지의 반론이 있다. 1) 창조설은 만일 영혼이 원래 부패 성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면 하나님을 도덕적인 악의 직접적인 창시자로 만들게 된다. 만일 이 이론이영혼이 순수하게 창조되었다고 주장하게 되면 하나님은 도덕적인 악의 간접적인 조성자가 된다는 것이다.

2) 창조설은 지상의 아버지가 다만 자식의 몸만을 낳았다는 사실은 부모의 지적, 도덕적 트성이 자식에게 재현되는 현상을 설명해 주지 못한다. 3) 찯조설은 하나님이 현재 세계와 관계하시는 방식과 세계안에서 사역하시는 방식과 조화되지 않는다.

결론

이런 문제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은 주의를 요한다. 성경은 아담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의 기원에 대하여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여러 이론들중에서 창조의 이론이 선호받을만 하다. 창조설의 한 형식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전설이 빠진 극복하기 어려운 철학적 난점을 마나지 않기 때문이며 유전설이 빠져 들어간 그리스도론의 오류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것이 우리의 언약 개념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인간 영혼을 창조하실때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새로운 개인을 낳는 자연적 과정과 아주 밀접학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기원을 말함에 있어서 몇가지 설이 있지만 성경적, 철학적근거에 합당하고 그래도 그리스도론의 오류를 피할 수 있는 것은 창조론이다. 이 또한 한 이론으로써 존재할 수 밖에 없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사고하고 신앙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인간론을 발전시켜 왔는데 그럼이 인간의 이성은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하게 된다. 이성을 초월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경우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때 이성을 불어 넣어주셨는가? 아니면 스스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셨는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이며 인간의 어느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인가? 인간의 죄도 하나님의 창조된 것인가? 등의 질문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의 형성이라고 한다. 그럼 모양과 형상은 어떤게 구분되는가? 어떤 이들은 "형상"을 몸, "모양"을 영혼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어거스틴은 전자는 지성을 , 후자는 도덕적 기능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지고의 완전성은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원래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개신교에서는 인간이 상대적으로 완전한 상태, 곧 의와 거룩의 상태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 로마 카톨릭의 입장은 원의는 단전한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인 능력과 기능을 부여받았으며, 이 능력들은 자연적 의를 통해서 서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고 한다. 그리고 합리주의의 견해는 인간이 순전하고 도덕적인 면이나 종교적인 면에서 중림적인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자유 의지를 부어받음으로써 선과악 그 어느 방향으로도 향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은 온전한 하나님이 모습인가? 인간의 본성을 하나님을 닮아 있는가? 어거스틴의 말대로 형상이 지성을 가르킨다고 했을때 인간의 지성을 하나님의 지성을 닮아 있다는 것인가? 그럼 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지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가?

이런 점에서 볼때 인간의 지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어 있다할찌라도 그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태초의 아담과 하와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을찌라도 그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모습은 변형되었다고 본다. 그 자체가 죄로 인식되고 그 죄에서 구원을 받음이 하나님의 원래의 형상으로 회복이라는 견해가 생기게 된다. 만약 이렇게 되었을때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도덕적인 인간이 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 왜곡된 표현은 아니다. 단지 도덕적 인간을 위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의 도덕성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자격이 아닌가 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의 형상으로 만들었고 인간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타락하게 되었을때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 하고자 하였을때 인간은 당연히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행위 언약 속에 있는 인간

인간의 원래의 상태, 곧 무흠의 상태(status integritatis)에 관한 논의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특별히 인간의 종교 생활의 기원과 본질을 고찰함으로써 완결된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이 상태에서의 최초의 인류의 삶도 언약 안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이 언약은 [자연의 언약] [생명의 언약], [에덴의 언약], [행위의 언약] 등으로 불린다. 이런 언약의 명칭중에서 가장 적절하다고 어겨지는 것이 "행위의 언약"이다.

개혁주의의 입장으로서의 행위의 언약은 어떠한 인간의 법적입장의 변화도 율법의 권위를 폐기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요구하신 순종의 요구는 인간의 타락과 그 파멸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종결된 것은 아니며, 죄의 삯은 사망이며, 완전한 순종은 언제나 영생을 약속하고 있다는 점들이다.

행위언약은 아직 폐기되지 않았다.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와 형벌에 관한 한 그렇다. 그리고 조건적인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 한 또한 폐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은혜 언약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한 새로운 긍정적인 요소를 내포하는 한에 있어서는 언약은 폐기되었다. 또한 영생을 얻는 수단으로서도 행위의 언약은 폐기되었다는 것이다.


행위언약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따라 생각해 본다. 행위언약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자연적 관계에서 아직 유효하고 죄를 범하는 자들에 대한 벌로서도 아직 유효하다 하겠다. 그러나 구원의 조건으로 행위언약이 폐기되었다는 것은 행위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선을 행하여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들에 대한 커다란 경고일 것이다.


제 2 부

죄의 상태 안에 있는 인간

죄의 기원

죄의 역사적 견해들

죄의 기원은 어디에서부터인가?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죄의 기원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이레니우스는 죄가 낙원에서의 아담의 의도적인 범죄와 그로 인한 타락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리겐은 선재설을 말하며 인간의 영혼은 선재의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범죄했으며,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이미 죄의 상태로 들어온다고 한다.

중세시대에는 죄의 연계 사상을 많이 받아들이는 어거스틴적 예석을 했으나 반 펠라기우스적인 방법으로 더 많이 해석하기도 했다. 칸트는 악을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에 속한 것으로 간주한다.

죄의 기원에 관한 성경적 근거

성경에서는 세상의 죄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으로 명백히 규정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미 범법자로 묘사된다. 그럼 인간은 그의 본성을 어떻게 획득하는가? 또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는 어떤 것인가?

하나님은 죄의 조서자로 간주될 수 없다. 그리고 죄는 천사의 세계에서 시작되었다. 이 죄는 아담이 낙원에서 범죄함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최초의 죄악은 죄의 전형으로서 이를 통해서 참돈 죄의 본질이 드러난다. 이 최초의 타락은 유혹에 의해서 시작된 것이다. 이 유혹은 뱀으로부터 나온것이지만 성경은 이 뱀이 사탄의 도구로 쓰여짐을 말하고 있다. 뱀은 사탄의 도구로서 죄를 의인화한 것이요, 죄의 교활하고 기만적인 성격과 사람을 죽이는 독침과도 같은 성격을 상징한 것이다.


죄의 본질적 특성

성경적 죄의 개념

죄는 악의 구체적인 형식이다. 죄든 죄가 악은 아니다. 왜냐하면 죄는 악보다 더 구체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죄는 절대성을 갖는다. 죄는 선의 정도가 적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악을 말한다. 이 죄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과의 관계를 생가하지 않고는 죄에 대한 바른 관념을 가질 수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 죄는 죄책과 부패를 포함한다. 죄책은 율법 또는 도덕적 요구를 어긴 행위에 대해서 처벌 또는 정죄를 받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죄는 마음속에 거한다. 죄는 지성, 의지, 감서, 나아가서는 육체를 포함하는 전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죄는 단순히 외적인 행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죄는 행위와 성벽(기질)과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덕법에 순응하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펠라기우스주의의 죄관

인간에게는 선한일을 행할 수 있는 절대적인의미의 자유가 부여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악을 선택했듯이 선도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죄는 개별적인 의미에서 의지의 잘못된 선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죄악된 본성이라든지 죄악된 성품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후손들에게 유전되는 원죄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오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는 기본적인 펠라기우스주의의 전제는 양심과 하니님 말씀에 완전히 모순되며 인간의 의지와 본성에 대한 낙관적 견해는 심각한 죄의 문제와 은혜로서 구원의 역사를 약화시킬 수 밖에 없다.

죄는 악과 구별된다. 죄는 악보다 더 구체적인 개념이다. 모든 악은 죄가 될 수 있지만 모든 죄는 악이 될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죄의 개념은 악보다 더 넓게 포함하는 것이다. 이 죄는 어디서부터 시작했는지, 그리고 그 죄의 기준이 되는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다. 율법이 없었으면 죄는 세상에 있지 않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죄는 항상 세상에 있으며 그 죄를 인정하는 사람도 있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럼 죄를 짓는 것과 구원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죄를 지으면 그 죄로 인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인가? 이는 행위 율법의 카테고리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죄로 인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죄로 인해서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은 왜 죄에 대하여 그렇게 민감했으며, 인간을 왜 죄의 문제로 그렇게도 고민하고 있는가? 종교인이 되고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인가?

죄가 구원과 관계가 없는 것이라 한다면 매일 기도하고 죄를 아뢰며 회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죄의 회개를 강조하는 교회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렇게 본다면 교회는 구원만을 위한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구원 받은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 아닌가 한다.


죄의 전이

A. 역사적 개관

1. 종교개혁 이전

이레니우스,터툴리안은 인간의 죄악된 상태가 아담의 타락의 결과이라고 한다. 오리겐은 아담의 죄와 후손의 죄의 상관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어거스틴은 그는 전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으나 아담의 죄책이 후손들에게 직접 또는 즉각적으로 전달된다고는 보지 않았다. 펠라기우스는 죄의 상관성을 거부하였다.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의 정직성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안셀름,헤일스의 알렉산더, 보나벤투라 등은 죄의 상관성을 실재론적으로 생각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몸의 한 지체의 행위가 전인의 행위로 간주되듯이 인류라는 유기체에 속한 한 지체의 죄는 전 유기체에 전가된다고 했다.

2. 종교개혁 이후

루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가 우리안에 내주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아담이 인류의 조상이자 뿌리이기 때문에 모든 그의 후손들은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며, 이는 생득적인 부패성으로 후손에게 전가되는 것이라 한다. 사우무르 학파의 플라케우스는 아담으로부터 죄악된 본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마치 원초적인 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아담의 죄가 후손에게 전이된다는 교리를 전적으로 불신한다.

바르트,부룬너의 경우, 인류의 보편적인 죄성을 아담의 죄의 결과로 간주하지 않는다.

B. 죄의 보편성

종교사의 철학사는 죄의 보편성을 입증한다. 많은 철학자들은 도덕적 악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다. 성경은 죄의 보편성을 명확히 가르치고 있다. 곧 죄는 원초적인 어떤 것으로서 모든 사람이 그 안에 참여하고 있으며 이것이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사람이 저주아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을 필요로 한다고 가르친다.

C. 아담의 죄와 인류의 죄와의 관계

1. 관련을 부인하는 견해

펠라기우스 주의자들과 소지니주의자들을 들 수 있는데 이는 죄는 개별적인 것이므로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의 문제인 것이고 아담이 보여준 것은 인간의 약한 면모일 뿐이라는 것이다. 신학파(뉴헤이븐) 이론에서는 단지 인간은 선천적으로 죄를 지을수 있는 경향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보며 이러한 경향이 곧 죄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위기신학에서는 인류의 죄의 연대성을 강조하나 아담과의 관련성을 부정되고 있다.

그 외에 관련을 설명하는 다양한 이론으로는 실재론은 인간의 본성이 포괄적으로 뿐만 아니라 수직적으로도 단일한 단위를 구성한다고 보며 아담은 전인류의 계약의 대표였기 때문에 언약의 관계에서 볼때 그의 불순종은 모든 후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한편 간접적 전가론의 입장에서는 아담의 죄책이 후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가된다는 것은 부인하며 단지 후손들은 자연적인 출생과정을 통해 아담으로부터 내적인 부패를 물려받았으며 아담과 함께 공유하고 있는 생득적인 부패성 때문에 그들도 역시 배역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다고 한다.곧 아담안에서 죄책을 짊어졌기 때문에 부패한 상태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패했기 때문에 죄책을 진 자로 간주된 것을 뜻한다.

죄의 전이는 아담의 죄의 전가를 주장하게 되는 것은 계약신학이 등장하면서 아담이 인류의 대표라는 생각이 전면에 등장했으며 죄책의 전이와 죄의 부패의 전이를 엄격히 구분하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선천적인 부패성이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구성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아담의 죄책이 그가 계약의 머리로서 대표한 모든 인류에게 "즉각적으로" 전이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전의 전이를 말 할 수 있다.


인류의 삶에 나타난 죄

원죄

인간은 죄악된 상태와 조건안에서 태어난다. 이 상태를 신학에서는 원죄라고 부른다.

역사적 개관

펠라기우스적는 의지의 자유는 타락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신체적 부페에 의해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희랍 교회에 나타난 경향은 원죄를 단호하게 거부한 펠라기우스주의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반 펠라기우스적 입장은 온 인류가 아담의 타락에 관여 했으며, 인간의 본성은 유전적인 죄에 의해서 오염되었고, 온 인류는 본질상 악을 향하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어떤 선행도 이룩할 수 어벗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나,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사실과 원죄의 죄책, 그리고 자유의지의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자범죄

자범죄라는 용어는 몸을 통하여 행해진 외적인 행위들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안간의 선천적인 본성 및 경향과 구분되는 개별적인 죄의 행위를 가리킨다. 이는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의식적인 의심이나 악한 계획 또는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특별한 의식적인 욕망이나 탐욕 같은 내적인 자질을 말한다. 성경은 악으로 범한 죄와 무지나 연약성이나 실수로 인하여 부지중에 범한 죄를 구분한다.

죄에 대한 개혁파의 견해는 죄는 증거와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성령의 증거를 의식적으로, 악의를 가지고, 그리고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중상함과 동시에 질시와 증오심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어둠의 권세 잡은 자의 일로 돌리는 행위를 말한다.

아담이 인류의 머리라는 개념으로 인해서 죄가 후세에게 전가 되었다면 아담이 인류의 머리라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가?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면 그 죄의 해결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범했을때, 그 죄를 용서받지 못하는 이유는 죄 그 자체의 문제인가 아니면 그로 인한 다른 문제로 인한 것인가? 개혁주의 견해에서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로 인해 회개를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럼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죄의 형벌

죄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하나님은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죄를 가볍게 여긴다. 죄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율법 수여자를 공격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의 보좌의 기초를 형성하는 신성 불가침의 하나님의 의를 침범하는 것이요, 우리의 모든 삶속에서 거룩한 살을 살도록 요구하는 하나님의 흠없는 거룩함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형벌을 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자연적인 형벌과 적극적인 형벌

형벌은 죄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결과이다. 인간은 회개와 용서를 통해 이 형벌에서 면제될 수 없다. 그리고 적극적인 형벌은 일반적이고 법적인 의미의 형벌이다. 이 형벌은 범법의 본질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형벌이 아니라 거룩한 법령에 의하여 범법에 가해지는 형벌이다.

형벌의 본질과 목적

형벌은 죄때문에 가해지는 자연적이고 필연적으로 가해지는 벌을 말한다. 사실상 그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공의에 기인하는 일종의 빚이다.

형벌의 목적은 무엇인가?

1. 거룩한 의 또는 정의의 수호를 위해서이다.

2. 죄인을 교정하는 것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3. 인간이 죄를 범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이다.


죄에 대한 실제적 형벌

죄에 대한 실제적인 형벌은 성경적인 죽음이다. 그 죽음은 영적인 죽음을 말한다. 또한 그 형벌은 삶의 고통, 육체적인 죽음, 영원한 죽음으로 나타난다.

죄는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한다. 이 도전에 대해서는 그 응당한 댓가를 치루어야 할 것이다. 그럼 죄를 짓는 인간은 왜 하나님에게 그 댓가로 바로 응당한 형벌을 받지 않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형벌은 더디오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한꺼번에 모아서 오는 것인가? 죄에 대한 실제적인 형벌이 삶의 고통, 육체적인 죽음이라면 모든 이런 현상들은 죄의 댓가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증명되지 않는 것을 죄의 명목으로 타당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하나님의 형벌이 그때 그때 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거룩과 정의를 수호하거나 죄인을 교정하기 위한 목적이 달성될 수 있는가? 그렇게 된다면 형벌의 원래의 목적달성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제 3 부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인간

언약의 명칭과 개념

명칭

구약에서 언약은 묶는다라는 뜻을 가진 베리트라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어느 한편이 복종하는 입장에 서고 다른 한편보다 말을 적게 하는 입장을 취할 때, 언약은 어느 한 편이 다른 편에게 부과하는 약정의 성격을 띤다. 따라서 하나님이 인간과 언약을 세우실 때는 일방적 성격이 드러난다.

신약에서는 디아데케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 말은 법적 동등성에 근거하고 있는 순데케를 대신하여 쓰여진 말이다. 왜냐하면, 언약을 체결할 때 우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개념과,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을 주권적으로 인간에게 부과하신다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헬라어에는 없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개념

모든 언약 생활의 원형은 하나님의 삼위 일체적인 존재 안에서 발견된다. 은혜언약이란 언약의 형식으로 표현된 구원의 약속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약정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두 경우 모두 우선권을 쥐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엄연한 언약이다. 행위언약에서 있어서 인간은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은사들을 사용하여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하나님은 은혜로써 자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주신다. 이것을 은혜 언약이라고 부른다.


구속언약

"구속언약은 성자를 선태받은 자의 머리와 구주로 주시는 성부와 성부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지원하여 대신하시는 성자 사이에서 맺어진 협정이다."

구속언약에 있어서의 성자

구속언약에서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공적인 위치는 보증의 위치이다. 이 보증은 조건적 보증과 무조건적 보증이 있다. 이 구속 언약이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취하는 형식은 죄인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은혜 언약의 영원한 원형이지만,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은혜 언약이라기보다는 행위언약이다. 언약안에있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선택의 작정에 의해 제한된다. 선택은 구속의 의논에 선행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보증적 사역은 그의 구속과 같이 특별한 것이 때무이다.

구속 언약과 은혜 언약과의 관계

구속의 의논은 역사적인 은혜 언약의 영원한 원형이며, 은혜 언약의 굳고 영원한 기초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은혜 언약을 유효학 하는 것이다.


은혜 언약의 성질

은혜 언약과 행위 언약의 비교

두 언약의 일치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창시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계약의 당사자들은 하나님과 인간이고, 외적 형시, 곧 조건과 약속, 약속의 내용, 곧 영생, 그리고 일반적 목적,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은혜 언약의 내용

은혜언약의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에 있다.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속에 언약의 내용이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복을 공유하는 자들은 참되고 신실하고 성별되고 헌신된 사랑으로 반응한다.

은헤 언약의 특성들

그 특성은 은혜로운 언약이라는 것이다. 또 삼위 일체적인 언약이며, 파기되지 않는 언약이며, 보편적이 아닌 언약이며, 그 시행의 형식은 변할 지라도 본질은 시대를 초월한 동일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은혜 언약의 관계

그리스도는 자신의 희생 제사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수행하는 중보자로 표현된다. 그는 객관적인 법적 영역에서 그리고 주관적인 도덕적 영역에서, 하나님에게 속한 일과 인간에게 속한 일을 수행한다.

언약의 이중적 국면

외면적 언약과 내면적 언약

외면적 언약에서는 인간의 신분이 전적으로 일정한 외적인 종교적인 의무를 수행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내면적 언약은 사실상 외면적 언약과 구분될 수 없는 것이다.

은혜 언약에는 외적인 국면과 내적인 국면이 있다는 견해와 혼동해서는 안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어떤 이들은 참된 영적인 방법으로 언약상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한편, 어떤 이들은 다만 입으로만 하는 외적인 고백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언약에 참여한다.

언약의 본질과 시행

언약의 본질은 언약이 규정하고 있는 모든 복을 영적으로 수납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연합하는 것을 의미하며,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적용된다.

조건적 언약과 절대적 언약

쾰만은 조건적 언약과 절대적 언약으로 구분한다. 그는 외면적 언약과 내면적 언약은 하나임을 전제하는 것이라고 한다.

법적 관계로서의 언약의 회원이 되는 자격

언약의 회원이 되는 자격은 언약에 있어서의 성인들로서 자발적으로 믿음과 고백을 함으로서 언약의 관계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또 신자의 자녀들과 언약 안에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라도 언약의 회원이 되는 자격이 있는 것이다.

언약의 여러 세대

여러 세대에 관한 바른 개념

3세대 이론이라는 것은 이레네우스가 구분한 것으로 첫째 언약은 마음에 새긴 율법이 그 특징을 이루는 언약이요, 둘째, 언약은 시내산에서 주어진 외적인 명령으로서의 율법이 그 특징을 이루는 언약이요, 셋째, 성령의 작용에 의하여 마음속에서 회복된 언약이다.

이 언약은 모세 이전과 모세 이후의 언약의 시행을 구분한다. 여기서 율법이주어지기 이전과 이후의 언약의 시행에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언약의 은혜적 성격의 표현함에 있어서, 복의 영적인 성격을 강조함에 있어서, 언약의 보편적인 목적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 차이점을 볼 수있으며,

신약의 시대와 구약시대의 일치점이 있는데 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은 후손으로서의 중보자를 예사함에 있어서, 의식과 모형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예표함에 있어서,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초기 공동체들을 통하여 언약의 영적인 실재에 참여하게 될 자들의 운명을 예시함에 있어서 일치점을 보인다.

구약의 언약은 최초의 언약의 계시로 원복음이 있고, 노아와 맺은 언약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그리고 시내언약이 있다. 신약의 언약은 몇 가지 주목 할 것이 있는데 첫째, 신약에 계시된 은혜 언약은 본질적으로 구약의 신자들이 하나님과 맺고 있던 관계를 지배했던 것과 동일하다. 둘째, 신약 시대는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곧 모든 국가들에게 확장된다는 점에서 구약시대와 다르다는 것이다. 세째, 신약 시대는 언약의 은혜적 성격을 더욱 강조한다. 약속이 전면에 부각된다. 네째, 신약시대는 구약 시대보다 더 부요한 복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언약론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하나님이 언약을 세우시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