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神 論]God.Jesus.성령

초실절과 예수 그리스도

好學 2010. 4. 12. 20:39

 

초실절과 예수 그리스도

 

 

레 23:9-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12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14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 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초실절은 정월 14일 유월절과, 15일 무교절을 지나, 16일에 지키는 세 번째 절기로서 안식일 다음날 지키는 절기이다. 봄 절기인 무교절 절기 중에 맨 마지막으로 지킨다.

 

초실절은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은 후 첫 곡식을 추수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이다.

 

유월절은 어린 양의 피로서 죽음의 재앙에서 살아난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고, 무교절은 누룩 없는 떡을 먹으면서 홍해바다에서 장사지낸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고,

초실절은 첫 곡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절기이다.

 

이 세 절기는 모두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하신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는 '계시사적 절기'란 뜻이다.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민족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것엔 장래에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들이 들어가 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이나 하는 모든 것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장래 일을 보여주는 그림자라고 증거 한 것이다.

 

골로새서 2장 16-17절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평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렇다면 초실절도 예수님께서 하실 어떤 일을 계시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럼 초실절은 예수님의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초실절에는 제사를 지내는데 그 제사를 지내는 모습 속에 예수님의 모습을 담아 놓았다.

 

 

초실절엔 첫 곡물 한 단을 요제로 드렸다.

 

레 23:10-11=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초실절이 되면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지은 첫 곡물을 추수하여 그 중에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 가져가 드린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곡물 단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서 열납되도록 드렸다.

 

초실절은 봄 절기이므로 초실절에 드려지는 곡물 제사는 가나안 땅의 첫 소산물이 된다. 즉 맏물이란 뜻이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서 장자가 살아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초태생(맏물)은 여호와의 것이라고 하였다. 너희들도 애굽의 장자가 죽을 때 같이 죽어야 하는데 어린양의 희생으로 살아났으니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였다.

 

출 13:2=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맏물을 바친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장자는 가문에 기력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맏물을 바치면서 장자가 죽어나가는 재앙에서 벗어난 유월절 사건을 기억하여야 한다.

절기를 지키는 목적은 과거 사건을 현재화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선 맏물은 받음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유월절 어린 양 안에 묶어두고 담아두기 위함이다.

 

모든 절기는 기념이 아니라 그 정신으로 살으라는 뜻이다.

 

그래서 모든 맏물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이스라엘 자체가 유월절 어린 양에 포함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첫 곡식단을 드릴 때 요제로 드렸다는 것이 중요하다.

 

요제란? 흔들어 드리는 제사란 말이다.

제물을 흔든다는 것은 곧 “살아난다, 깨어난다”는 뜻이다.

 

흔히 잠자는 사람을 흔들어 깨우는 것과 같다. 이처럼 흔든다는 것은 깨어난다는 뜻이다.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깨어날 것을 전제로 하여서 자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음에도 깨우러 간다고 하였다.

 

요 11:11-14=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사도바울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신약의 성도들의 죽음을 “주 안에서 잔다” 고 하였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살전 4:13-18=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그렇다면 초실절에 첫 곡물의 이삭을 요제로 드린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계시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유월절 속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담겨져 있고,

무교절 속에는 예수님이 사흘간 무덤에 계신 것을 담고 있고,

초실절은 예수님이 살아나심을 담고 있다.

 

 

초실절 제사는 안식 후 첫날에 드렸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과연 안식 후 첫날에 부활 하셨는가?

 

만약에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지 않았다면 절기를 통하여서 계시하신 약속된 메시야가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믿고 있는 메시야는 성경에 약속된 메시야가 아니므로 가짜가 된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다면 1500년 전에 약속하신 그 메시야가 맞기 때문에 반드시 메시야로 영접하여야 한다.

 

 

그럼 예수님께서 과연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는지 살펴보자.

 

“유월절은 14일 목요일”에 지켜졌고,

“무교절은 15일 금요일”에 지켜졌고,

“초실절은 16일 토요일”에 지켜졌다.

 

유대인들은 금요일을 안식일로 지켰다. 그렇다면 안식 후 첫날이란 토요일이 된다.

 

우리나라 식으로 보면

유월절은 목요일 저녁 6시부터 시작하여 금요일 저녁 6시까지이다.

무교절은 금요일 저녁 6시부터 토요일 저녁 6시까지이다.

초실절은 토요일 저녁 6시부터 일요일 저녁 6시까지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안식 후 첫날이라고 하였으니 우리나라 시간으로 하면 일요일 날 새벽에 부활하신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가까워 예수님을 유월절 날엔 죽이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예수님이 이미 1500년 전에 약속된 유월절 어린양의 실체이므로 죽임당하도록 하셨다.

 

그리곤 안식일 날인 무교절날 무덤에 갇히게 된다. 이로서 유월절과 무교절은 성취하셨다. 이제 남은 것은 초실절을 성취하시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에 살아나신 것이 맞는다면 초실절에 드려지는 첫 곡물의 요제의 실체가 된다.

 

사복음서는 예수님이 안식 후 첫날에 부활 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 해 주고 있다.

 

마 28:1-6=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막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눅 24:1-6=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예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기운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예수님은 우리나라 시간으로 일요일 날 새벽에 부활하셨다.

그리고 저녁 시간에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찾아 갔음을 말해주고 있다.

 

요 20:1-19=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 ~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로보건데 예수님은 안식일 후 첫날에 부활하심으로서 초실절 요제로 드려지는 제물의 실상으로서 완성하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초실절의 첫 곡식으로 부활 하셨음에도 아직도 유대인들은 초실절만 되면 곡식의 첫 이삭을 제사장에게 가지고가 흔들어 대고 있다.

 

성령께서 밝히 알려 주지 않으면 기독교는 의식 종교로 변질 되게 되어 있다. 이 시대 교회들이 갖가지 이름의 절기들을 만들어서 성도로 하여금 지키게 하는 것은 구약을 답습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무교절 때 누룩 없는 떡을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사흘째 꺼내어 먹었는데 이는 예수님이 사흘간 무덤에 계시다가 살아나는 것을 예표한 것이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사흘 만에 초실절의 요제가 되기 위해서 살아나신 것이다.

 

마 16:21=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 17:23=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마 20:19= “ …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마 27:63=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런데 그 사흘이 안식 후 첫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안식 후 첫 날 첫 곡물을 요제로 드려진 초실절의 제물에 실체임이 드러난 것이다.

 

사도바울도 예수님을 잠자는 자의 첫 열매라고 증거하였다.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골 1:18=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첫 열매라 함은 그 다음에 줄줄이 그에게 붙은 자들도 살아난다는 뜻이다.

 

고전 15:22-24=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그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과 같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심이 곧 이를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부터 부활하심은 모두가 성경대로 약속된 것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고전 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부활 프로그램”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만일 하나님의 부활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예수님도 부활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전 15:13-20=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15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16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활 프로그램에 따라서 첫 열매로 부활한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처럼 예수님에게 붙은 자들을 예수 안에서 부활된다는 프로그램에 따라서 하나 하나 부활시킬 것이다.

 

성도들의 부활도 이런 프로그램에 의하여서 이루어진다.

 

바울은 이 변할 수 없는 죽음과 부활의 프로그램을 이미 구약의 절기를 통하여서 보았으며 그 실체로 예수님께서 완성시켜 주심을 믿었기 때문에 죽는 줄 알면서도 복음 증거하는 일을 감당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예정된 프로그램에 의하여 예수님께서 부활 하실 때에 예수님에게 붙은 자들도 함께 부활하였다.

 

 

초실절에 드려지는 첫 곡물을 한단으로 드렸다는 것이 중요하다.

 

한 단이란? 한 묶음이라는 말이다. 즉 여럿이면서도 하나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살아나실 때 예수님과 한 묶음에 사람들도 살아나야 되어야 한다. 그래야 초실절의 요제로 바쳐지는 첫 곡물 한 단이 된다.

 

마 27:50-53=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만약 예수님께서 홀로 살아나셨다면 한 단으로서의 초실절 요제 제물이 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한 묶음으로 살아나셔야 초실절의 첫 곡물 한단이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무덤에 들어가신 것은 옥에 갇힌 영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다.

 

벧전 3:18-19=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구약 시대에 죽은 사람들은 모두가 스올이라는 한 곳에 있었다. 예수님께서 주가 되어 무덤 속에 들어가셔서 구약의 사람들을 갈라내야 한다. 누가 창세전에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을 자인지 찾아내야 한다.

 

결국 예수님께서 무덤 속에 들어간 것은 무덤 속에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 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심으로 막혔던 에덴동산의 문을 열어 놓으셨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로 인하여 죄인을 얼씬하지 못하도록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하여 속죄가 되어 이제 에덴동산으로 들어 갈 수 있게 되었다.

 

히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은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은 산 길이라고 하였다. 즉 천국으로 가는 길에 막혔던 담을 허셨다는 말이다.

 

휘장이란? 구약의 성막에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아 놓은 담이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으로서 천국을 예표한다. 이곳엔 오직 대 제사장만이 일년에 단 한 차례 7월 10일 대 속죄일 때만 피를 앞세우고 들어가는 곳이다.

 

대 제사장만 드나들 수 있는 그곳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활짝 열려진 것이다. 이제 누구라도 예수님의 피만 앞세우고 들어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 하실 때 구약에 성도들이 무덤에서 깨어나 거룩한 성에 들어간 것이다.

 

거룩한 성이란? 하늘 예루살렘 즉 천국을 의미한다.

 

마 27:50-53=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예수님의 부활 때 구약의 잠자던 성도들이 깨어나 예수님이 열어 놓은 새롭고 산 길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바로 부활시키지 않고 사흘 동안 무덤에 계시게 한 것도 구약의 성도들에게 막혔던 에덴의 문은 예수님의 육체로 여신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서도 천국 복음을 증거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의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무덤에 들어 가셨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무덤에 갇힌 구약의 성도들을 구해내시기 위해서 무덤 속에 들어가신 것이다.

 

초실절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살아나실 때 한 무리의 성도들이 무덤에서 깨어났다. 예수님과 함께 구약의 성도들이 초실절의 첫 곡식의 한 단이 되어 살아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하실 때 깨어난 구약의 성도들은 예수님과 한 단이 되어서 천국으로 인도된 최초의 예수님과 한 묶음의 단인 첫 곡물들이다.

 

이로서 1500년 전에 초실절이라는 절기를 통하여서 약속하시고 계시하셨던 일을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서 완벽하게 성취하셨다.

 

첫 곡식이 살아났다면 그 다음 곡식들은 순차적으로 살아나서 하나님께 요제로 바쳐질 것이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초실절은 장차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이루실 일을 미리 표상적으로 보여주신 사건이면서도 신약의 성도에게 말씀하고 계신 약속이다.

 

구약의 성도들은 초실절로 약속을 받았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받았다.

 

초실절은 옛 언약에 속한 것이라면, 십자가는 새 언약에 속한 것이다.

 

성령은 새 언약을 성도 안에서 이루어 가신다. 자기 안에서 새 언약이 이루어진 사람은 이미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무덤 속에 갇히지 않는다.

 

히 2:14-16=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냐? 죽음에서 놓여진 자이다.

성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자이기 때문에 죽음이 가두지를 못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라고 해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새 언약이 믿어져야만 벗어나지는 것이다.

 

각오를 다지고 맹세를 한다고 죽음의 공포를 이겨 낼 수가 없다. 베드로가 의지가 약해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한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인간도 죽음을 이겨내지 못한다.

 

그러나 새 언약이 믿어지는 자는 이겨낸다.

새 언약 안에 있는 자는 믿어진다.

마치 베드로가 성령 받기 전에는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였지만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나서 죽으면 죽으리다 라고 하며 산 것처럼,,,,,,

 

“베드로처럼 사세요” 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베드로처럼 살아진다.

 

믿어지는 자는 믿음으로 살지만 믿어지지 않는 자들은 믿고자 온갖 노력을 경주한다.

 

그러나 믿음이란? 믿고자 노력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엔 방법론이 없다. 그져 믿어지는 것으로 사는 것일 뿐이다.

 

베드로가 각오를 다질 때는 왜? 믿음을 지켜내지 못하였는가?

이는 아직 예수님께서 초실절의 첫 곡식으로 부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동안 무덤에 계시다가 살아나시는 수순을 다 밟으신 후에 초실절의 요제로서 완성하시고 난 후 성령을 베드로에게 보내 주시니 이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일평생 죽음에 종노릇 하던 아브라함의 자손을 놓아 주셨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말씀 중에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붙들어 주신다는 말씀이다.

 

16절에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우리가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이겨 내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붙잡아 주실 때 가능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주께서 붙잡아 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결국 믿는 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지만 믿음이 없는 자는 여전히 두려움으로 살아가게 된다.

 

사람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천국이 세상 보다 커 보일 때이다.

천국이 세상보다 커 보이면 자연히 세상에서 담대할 수가 있어진다.

 

바울은 예수의 생명이 날마다 자기의 생명을 삼키우기를 소망하였다.

예수의 생명이 자기를 삼키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가 된다.

 

그러나 반대로 내 생명이 예수의 생명을 삼켜 버리면 나는 날마다 사노라가 된다.

 

내가 사는 것은 흙의 인생으로 사는 것이고, 예수님이 사는 것은 하늘에 인생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살아 있으면 흙에 인생이므로 뱀의 밥이 된다.

뱀은 흙을 정확하게 알아보고 자기 먹이감으로 삼아 버린다.

 

그래서 바울은 흙에 생명인 나는 날마다 죽어서 예수 안에 있는 하늘에 생명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부활을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던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 이라고 하였다.

 

요 11:23-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는 곧 마르다야 네가 초실절을 알았다면 곧 나를 믿었어야 하리라 라는 말과 같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를 살리는 사건을 유월절을 앞두고 하셨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난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자 유대인들에겐 비상이 걸렸다.

 

그래서 이 사건을 계기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요 11:53=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린 사건은 마치 날 잡으라고 하신 사건이다.

 

예수님 스스로 내가 무덤 속에 갇힌 성도들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무덤에 들어가야 하니 날 죽이라고 하신 것과 같다.

 

그래서 죽기 전에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하셨다.

 

그리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라고 묻고 계신다.

 

제자들에게 너희가 날 믿다가 죽어도 여기 나사로처럼 살아 날 것이니 두려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도 동일하게 성경을 통하여서 성도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초실절의 첫 곡식이고 내가 부활이고 생명이다.

지금 우리에게 “나를 믿는 자들은 죽어도 산다는 것을 너희들은 믿느냐” 라고 묻고 계신다.

 

마르다처럼 지식이 아니고 관념이 아니어야 하리라!

 

OOO야! 네가 이것을 믿느냐! 라고 묻고 계신다.

 

 

정녕 이 말씀이 믿어지는 자는 복이 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