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神 論]God.Jesus.성령

무교절과 예수그리스도

好學 2010. 4. 12. 20:37

 

무교절과 예수그리스도

 

 

레 23:6-8= “이 달 십오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너희는 칠일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제 칠일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이스라엘의 7대 절기는 정월로 시작하여 7월에 마감이 된다. 정월 14일 유월절을 시작으로 하여 15일 무교절, 16일 초실절, 그리고 초실절 후 오십 일째 되는 날에 칠칠절로 지키다가 약 넉 달 동안 농사를 지은 후 7월 1일 나팔절, 그리고 10일 속죄일, 15일 초막절을 지킴으로서 한 해의 절기를 마치게 된다.

 

한 해 한 해의 삶이 이런 싸이클로 살아진다는 것은 곧 한 해가 전부의 축약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한 해 동안 살아지는 삶이 일평생 동안 반복하여 살아지는 삶이란 뜻이다.

 

구약의 절기는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림자라고 하였으므로 모든 절기 속에는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계시들이 담겨져 있다.

 

오늘 살펴볼 무교절 또한 예수님의 그 무엇을 증거하고 있다. 지난 시간 유월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살펴보았다.

 

그럼 오늘 살펴볼 무교절은 유월절과 맞물려서 지내는 절기이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연속선상에 있는 절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 살펴볼 무교절은 두 번째 절기로서 유월절이 끝나가는 저녁부터 일주일간 지키는 절기이다. 유월절과 초실절은 하루만 지키지만 무교절은 일주일간 지켰기 때문에 봄 절기를 통틀어서 무교절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무교절을 지킨다 라고 하면 유월절과 초실절도 함께 지킨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막 14:12= “무교절의 첫 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 ”

 

무교절은 유월절 양을 잡는 시간부터 시작된다. 즉 14일 저녁부터 일주일간 지켰다. 날짜로는 15일부터이지만 실제로는 14일 저녁부터 지냈다.

왜냐하면 유월절과 무교절은 세 시간이 겹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 유월절 양이 죽는 시간부터 무교절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앞서 유월절을 살펴 볼 때에 유월절 오후 3시는 양을 잡는 시간이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간이다. 유월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실상 끝이 났다. 그리곤 바로 무교절이 시작이 된다.

그렇다면 무교절은 예수님이 죽고 난 후의 것을 계시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는 유월절 양 잡는 날을 무교절의 첫날이라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봄 절기를 유월절이라 하지 않고 무교절 속에 집어넣어서 불렀던 것이다.

 

 

무교절의 의미

 

무교절의 어원적 의미를 살펴보면 무교절 속에 담긴 그 의미를 잘 알 수가 있다.

 

무교절의 원문의 뜻

 

원어로는 “하크 함 마짜트(Hahk Ham Mazaht)”라고 쓰는데 세가지 단어의 합성어이다.

“하크(Hahk)”“축제일, 기념일” 이라는 뜻이고,

“함(Ham)” 이란 “그” 라는 뜻이다.

“마짜트(Mazaht)”“장례 지내다, 묻어두다” 라는 뜻이 있다.

 

풀이하면 두 가지 뜻으로 살펴 볼 수가 있다.

 

첫째로는 “그 묻어 둔 것을 기념하는 날”

둘째로는 “그 장사 지낸 것의 축제일” 이라는 뜻이다.

 

한 가지 뜻으로 축약한다면 “그를 장사 지낸 날을 기념하는 날” 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라고 하는 정관사이다.

물론 본문에선 “누룩 없는 떡” 을 말한다. (그러나 그를 의인화 하면 어느 한 인물을 계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종합적으로 판단하면 “그” 란? 바로 장차 죄 없는 몸으로 무덤에 갇힐 예수그리스도 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무교절을 지키는 방법

 

성경적으로 무교절의 일차적인 의미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아래의 본문 8절을 보면 예식을 지키는 의미가 잘 나와 있다.

 

출 13:3-1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애굽에서 곧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온 그 날을 기념하여 유교병을 먹지 말라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곳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라 4 아빕월 이 날에 너희가 나왔으니 5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 곧 네게 주시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거든 너는 이 달에 이 예식을 지켜 6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고 제 칠일에는 여호와께 절기를 지키라 7 칠일 동안에는 무교병을 먹고 유교병을 너희 곳에 있게 하지 말며 네 지경 안에서 누룩을 네게 보이지도 말게 하며 8 너는 그 날에 네 아들에게 뵈어 이르기를 이 예식은 내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인함이라 하고 9 이것으로 네 손의 기호와 네 미간의 표를 삼고 여호와의 율법으로 네 입에 있게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능하신 손으로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니 10 연년이 기한에 이르러 이 규례를 지킬찌니라”

 

모세가 출애굽한 1 세대들에게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면서 이 절기를 지킬 터인데 그때에 너희 자녀들이 묻거든 무교절의 의미를 잘 가르치라고 하였다.

 

자식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이 절기는 왜? 지켜야 합니까? 그리고 왜? 이렇게 맛없는 무교병(누룩 없는 떡)을 먹어야 합니까?” 라고 물으면 조상들의 출애굽 이야기를 해 주라고 한다.

 

그러면 부모는 자녀들에게 출애굽 할 때 발생되어진 모든 사건들을 일러주어야 한다.

(세세하게 말한다면 애굽의 열 가지 재앙에서부터 홍해 바다를 건넌 사건까지 다 말해주어야 한다.)

 

무교절 속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1). 온 집안에서 누룩을 없애는 일과, 2). 누룩없는 떡을 사흘간 땅에 묻어 두었다가 꺼내서 먹는 일과, 3). 홍해 바다를 건넌 사건들이다.

 

무교절을 지키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온 집안에 누룩을 없애는 일과, 누룩 없는 떡을 사흘간 땅에 묻어두었다가 꺼내서 먹는 일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원래 농사보다 짐승을 기르는 목축(주로 양과 염소임) 업을 주업으로 살아가는 유목민들이다. 농사는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면서 짓게 되었다.

목축을 하자면 여기저기 떠돌아 다녀야 했기 때문에 빵을 주식으로 하여 먹었다.

 

알다시피 빵은 밀가루로 만든다. 밀가루로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밀가루를 발효시키는 누룩은 없어서는 안 될 재료이다. 이스라엘은 누룩으로 밀가루를 부풀려서 부드럽게 만든 유교병(누룩을 넣어서 만든 떡)을 먹었다. 누룩 없는 떡은 거의 먹지 않았다.

 

그러나 무교절을 지키는 날 만큼은 집안에 누룩을 두어서도 안 되거니와 누룩으로 만든 떡을 먹어서도 안 된다. 반드시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맛없는 떡을 먹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선 과거 가난했던 보릿고개 시절에 먹었던 보리개떡을 연상하면 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무교절이 되면 누룩을 집 밖으로 내어가 바깥에 보관하였다. 대신 누룩 없이 만든 떡은 땅 속에 사흘간 묻어 두었다가 꺼내어 먹었다. (고대 유대의 요세프스 라는 역사학자의 말을 인용하면 이스라엘백성들은 무교절이 되면 누룩 없는 떡을 보자기에 싸서 사흘간 땅에 묻어 두었다가 꺼내서 먹는다고 기술하고 있다.)

 

무교절은 언뜻 보면 누룩 없는 떡에 관한 절기 같지만 그 떡으로 뭔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는 절기이다. 유월절처럼은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절기 자체가 누군가 그 무엇을 계시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건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럼 왜? 무교병을 먹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출 12:33-34=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백성을 재촉하여 그 지경에서 속히 보내려 하므로 34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출 12:39= “그들이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남으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이스라엘의 하루는 저녁 6시부터 그 이튿날 저녁 6시까지이다. (우리나라는 밤 12시에서 그 이튿날 밤 12시까지이므로 이스라엘과는 시간상으로만 6시간 차이가 난다.)

 

이스라엘이 하루를 저녁에서 저녁으로 하는 이유는 창세기가 말하는 창조의 날을 가지고 지키기 때문이다.

 

창 1: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창 1:1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세째 날이니라

창 1:19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창 1:2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가 하루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라고 말하는 것은 혼돈에서 질서로 회복하는 일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벌리시는 창조의 참 의미이기 때문이다.

 

창세기가 말하고자 하는 창조란 없는 것을 만든다는 의미보다 혼돈된 것을 회복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이다.

성도의 구원사로 이야기 하면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를 살려 내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루는 창조의 날을 그대로 계승하여 저녁부터 시작하여 저녁에 마감한다.

 

암튼 이스라엘은 유월절 막바지 시간인 오후 3시에 양을 잡아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장자가 죽어나가는 재앙의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장자가 죽는 재앙의 밤은 무교절이 시작되는 밤이다.

 

출 12:29-34=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30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31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32 너희의 말대로 너희의 양도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33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백성을 재촉하여 그 지경에서 속히 보내려 하므로 34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한마디로 말해서 무교절의 밤은 죽음의 밤이다. 온 애굽이 심판 받는 날이다. 그 무서운 밤이 시작 되자 하나님의 말씀대로 애굽 전역에 죽음에 천사들이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없는 집을 찾아가 장자를 죽이는 일을 단행하였다.

 

(이는 흡사 에스겔 선지자가 성령에 감동으로 바라보았던 성소로부터 시작되어지는 이마에 표가 없는 자들을 도륙하는 살육의 현장과 같다. = 겔 9장= 참고)

 

애굽 왕 바로는 애굽에 장자들이 죽어나가는 광경을 목도하곤 혼비백산하여 모세를 급히 부른다. 그리곤 모세에게 이런 재앙은 모두가 이스라엘 때문이라고 하여 한시라도 빨리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떠날 것을 종용한다. (바로의 눈에는 이스라엘은 재앙을 몰고 다니는 재수 없는 족속들이었다.)

 

한편 애굽의 장자가 죽어나가는 시간에 이스라엘 민족들은 양고기를 불에 구워먹으면서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빨리 애굽을 따나라는 모세의 명령을 듣는다.

이에 부랴부랴 귀중품과 은 금 패물들을 챙기고 발교 되지 못한 떡 반죽 그릇을 보자기에 싸 어깨에 메고 무교절 밤에 급하게 애굽을 떠나게 된다.

 

출 12장 33-34=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백성을 재촉하여 그 지경에서 속히 보내려 하므로 34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상시에는 밀가루에 누룩을 넣어 발효를 시켜서 떡을 해 먹었다.

그러나 무교절 날 밤 애굽에서 탈출 할 때는 밀가루에 누룩을 넣고 부풀릴 시간이 없어서 누룩을 넣지 않고 밀가루를 반죽 하였다.

 

그리고 광야에 나와서 그 반죽으로 떡을 해 먹었다.

 

출 12:39= “그들이 가지고 나온 발교 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남으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이스라엘에게 있어 누룩 없는 떡이란? 죽음을 경험하게 하는 떡이다.

도망치는 이스라엘에게는 누룩 없는 떡은 양식이 아니라 죽고 살아나는 사건이다.

그래서 무교절에 양식으로 떡을 먹지 않고 사건을 현재화 시켜서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교절에 먹는 누룩 없는 떡을 일컬어 고난의 떡이라고 한다.

 

신 16:3=“… 칠일 동안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아울러 먹으라 …

 

무교병을 먹으면서 우리는 애굽에 장자가 죽을 때 함께 죽었어야 할 인간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광의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무교절을 통하여서 “넌 죽은 자야! 넌 이미 무덤에 묻힌 자야!” 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교절을 장사를 지낸 축제일 이라고 한다.

 

(죽어야 할 자라는 것을 아는 자는 누룩 없는 떡을 먹으면서 맛이 있네 없네 라고 불평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누룩 없는 떡은 양식의 개념이 아니라 죽음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불평이란? 나는 당연히 살아야 하는 자라고 생각 할 때 나타난다. 반대로 감사란? 난 이미 죽었어야 하는데 이렇게 살아 있구나! 라는 것을 알 때 나타난다.)

 

그래서 무교절 속에는 이스라엘의 집단적 죽음을 상징하는 홍해바다 사건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무교절과 홍해바다 사건

 

출 12:17-18= “너희는 무교절을 지키라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영원한 규례를 삼아 이 날을 대대로 지킬지니라 정월에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위 말씀을 보면 애굽에서 군대를 인도하였기 때문에 무교절을 지키라고 한다.

 

애굽에 장자들이 죽어 나가는 무교절 밤에 이스라엘은 애굽을 빠져 나오게 된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빠져 나가자 바로는 장자들의 죽음을 수습한 뒤 군대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추격하기에 이른다.

 

출 14:5-9= “혹이 백성의 도망한 것을 애굽 왕에게 고하매 바로와 그 신하들이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가로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 하고 6 바로가 곧 그 병거를 갖추고 그 백성을 데리고 갈새 7 특별 병거 육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발하니 장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8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 친데 미치니라”

 

바로는 이미 죽은 놈은 죽은 것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였다. 그러자면 일꾼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있어서 농사를 잘 짓고 살아 왔는데 이젠 노예들이 도망갔으니 이대론 안 된다고 신하들이 바로 왕에게 다시 이스라엘을 잡아 올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바로는 애굽의 정예 부대 특별 병거 6백승과 모든 군대들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쫓기 시작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 하였다.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애굽의 전차부대가 쫓아오고 있으니 꼼짝없이 잡히게 되었다.

 

급기야 백성들은 모세에게 돌을 던지면서 원망하기 시작한다. 왜? 우리를 이곳에 끄집어내어서 죽게 만드느냐? 애굽에 장지가 없어서 이곳에 끄집어내서 무덤을 삼으려고 하였느냐? 라고 원망을 하였다. (아니 애굽에 장자가 죽을 때 이미 죽었어야 할 인간들인데 살려 주었더니 이젠 왜? 살려 놓았느냐 라고 원망한다.)

 

출 14:10-12=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에 모세는 백성들을 안돈시키면서 이런 일이 닥치게 한 것은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한다. 너희들을 인도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보여 주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여호와가 누구냐?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는 분이라고 한다.

 

출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은 홍해바다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민족은 고이 건너게 하시곤 애굽의 군대는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게 수장을 시켜 버렸다.

동일한 바다에서 한 민족은 살아났고 한 민족은 몰살당하였다.

이렇게 불공평하고 불가사의한 일이 홍해바다 사건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를 하였다.

말로만 이스라엘 백성이지 모두가 애굽에서 태어났고, 애굽에서 자라고, 애굽에서 교육받고, 애굽에 풍습으로 살던 애굽 사람들이다.

그들 속에는 애굽의 기질들이 살아 있다. 무엇을 해도 애굽식이다.

피만 이스라엘 피이지 껍데기는 완전히 애굽인이다.

 

이를 성도들에게 적용하면 모든 성도는 아담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이다.

아담 안에서 태어나고, 아담 안에서 자라고, 아담의 교육을 받고, 아담의 기질대로 살아가고 있다.

 

한 가지 다르다면 이스라엘 속에 “아브라함의 피(약속)”가 흐르듯이, 성도들 속에 “하나님의 약속(예수그리스도의 피)”이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어디에 있든지 그 속엔 아브라함 언약이 담겨져 있다. 이스라엘이라서 이스라엘이 아니고 아브라함 언약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인 것이다.

언약이란? 다른 말로 피이고 생명이고 씨앗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하나님의 자기 씨앗 찾기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바로에게 가서 내 장자를 내어놓으라고 말하라 하셨던 것이다.

 

이를 신약적 관점으로 전 세계적인 사건으로 확대를 하면 예수님이 오셔서 창세전에 작정된 자기 씨앗 찾기를 하신 것과 같다. 영생 주시기로 작정 된 자를 찾아내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용사가 되셔서 싸우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시는 것이다.

 

구원해 내는 방법이 죽였다가 살려 내는 방식이다. 홍해바다 사건은 죽였다가 살려내는 것의 표상이다.

 

홍해바다 사건은 이스라엘의 집단적 죽음 사건이다. 홍해사건은 애굽에서 난 이스라엘 사람이 몽땅 죽는 사건이다.

 

홍해바다 사건은 장차 성도들을 이런 방식으로 살려 내겠다는 예시이다.

 

사도 바울은 구약의 홍해바다 사건을 신약적 용어로 세례라고 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해주고 있다.

 

고전 10:1-2=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홍해바다에서 죽어서 장사가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죽었다는 의미로서의 집단적 세례 사건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세례란? 죽었음을 말한다.

 

골 2: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뜻이다.

즉 함께 붙어 있는 자란 말이다. 이를 연합이라고 한다.

 

롬 6:3-4=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신약성경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함으로서 성도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약적인 의미에선 구약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 바다에서 모두 죽은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난 이스라엘을 홍해 바다에 수장을 시킨 것이다. 땅에 묻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홍해바다를 건너게 한 것은 의도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일부러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홍해로 끌고 간 것이다.

 

출 13:17-18=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18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위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지름길로 인도하였지, 멀고 힘든 홍해 바다가 있는 길로 인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하나님께서 굳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꺼낸 이유를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것은 집단적으로 죽이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홍해라는 붉은 바다를 건너게 한 것은 애굽에 죄를 씻어내기 위함이다.

 

이스라엘이 들어가야 할 땅은 가나안 땅이다. 가나안 땅을 일컬어 약속의 땅이라고 한다.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그곳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만이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계시된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는 창조주 하나님이셨다.

그 상징적 사건이 생물학적으로 죽은 자와 같은 사라의 몸에서 이삭이 태어난 것이다.

이삭은 약속의 자식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기들 몸에서 자식을 준다고 할 때 비웃었다. 즉 믿지 않았다.

 

그런데 사라에게 내년 이맘때 자식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떨어졌다.

그 후 약속대로 사라의 몸에서 이삭이 태어났다.

비로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다.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처럼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들어가 살 수가 있다.

 

그러나 애굽에서 자란 이스라엘 민족들은 애굽에 사고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을 믿어도 애굽적 사고방식으로 믿고자 한다.

 

애굽적 사고란? 이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고이다. 즉 내가 이해되고 믿을 수 있어야 믿는다는 사고이다. 그러니 믿음이 아니고 경험된 지식인 것이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애굽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믿을 수가 없다.

이런 인간은 가나안에 들여 놓아도 뭐든지 자기 이성을 바탕으로 판단하게 된다.

 

가나안 땅은 애굽과 다른 땅이다.

 

신 11:10-15=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대기를 채소 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11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13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14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15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애굽과 가나안은 농사 짓는 법이 다르다.

애굽에서는 저수지에 물을 가두어 두고서 필요에 따라서 물을 퍼 다가 농사를 지었지만 가나안 땅은 산악지대라서 하늘에서 그때 그때 비가 와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한다.

즉 애굽은 내 힘으로 농사를 짓지만,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농사를 지어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가나안엔 하나님께서 농사를 지어주신다는 믿음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애굽에 사고방식으로는 가나안에서 살아 갈 수가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로만 언약백성이지 애굽에 사고방식으로 가득채워져 있었다.

 

이런 애굽에 사상을 가지고 가나안에 들어가 보아야 망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은 애굽에 사람이 죽는 것이다.

 

그래서 애굽 사람은 몽땅 죽은 홍해바다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이스라엘은 비록 홍해바다에서 살아났다고 하지만 실상은 애굽에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 죽은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 사건을 담고 있는 무교절에 누룩을 없애라고 하고 누룩 없는 떡을 땅을 묻으라고 한 것이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무교절에 누룩 없는 떡을 먹게 하고 누룩을 땅에 묻게 한 것은 애굽 사람을 장사지낸 것을 기념케 하는 것이다. 즉 “너희들은 죽었다” 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무교절 칠일동안 무교병을 먹으면서 “난 이미 죽은 자야!” 라고 해야 한다.

 

신약적인 의미에선 “아담 안에서 태어난 나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나도 함께 못 박혀 죽었어!”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난 예수 안에서 태어난 새로운 내가 사는 것이야!” 라고 해야 한다.  

 

누룩이란? 죄를 상징한다. 누룩을 없애라는 말은 죄를 없이 하라는 말이다.

누룩 없는 떡을 땅에 묻는 것은 곧 애굽에 죄인을 묻어 버리는 것과 같다.

 

홍해바다 속에는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 모두가 동일하게 들어갔었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나오지 못하였지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의 재앙에서 살아난 이스라엘 사람은 모두가 살아나왔다.

 

왜? 애굽인은 죽었고, 이스라엘은 살아났는가? 이는 애굽인에겐 어린 양의 피가 없었고,

이스라엘에겐 어린 양의 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홍해바다에서 모두 몰살한 애굽인을 보면서 자신들도 애굽인처럼 같이 죽어야 했음에도 살아난 것은 어린 양의 피 때문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무교절은 유월절의 연속선상에서 지켜지도록 해 놓으신 것이다.

 

 

홍해바다 사건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적용해 보자.

 

누룩 없는 떡을 사흘간 땅에 묻어 두었다가 꺼내어 먹는 것은 원문의 뜻이 함축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는 떡을 의인화 하여서 보면 특정한 한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자신이 곧 떡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요 6:51=“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

 

막 14:22=“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라

 

참고적으로 원문을 다시 살펴보자.

 

무교절을 원어로는 “하크 함 마짜트(Hahk Ham Mazaht)”라는 합성어이다.

“하크(Hahk)”“축제일” 이라는 뜻이고,

“함(Ham)” 이란 “그” 라는 뜻이다.

“마짜트(Mazaht)”“흡수하다, 장례 지내다, 묻어두다” 라는 뜻이 있다.

 

풀이하면 두 가지 뜻으로 살펴 볼 수가 있다.

 

첫째로는 “그 묻어 둔 것을 기념하는 날”

둘째로는 “그 장사 지낸 것의 축제일” 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중요 한 것은“그” 라는 장관사이다.

알다시피 떡과 같이 어떤 물건을 묻어 두는 것을 장사라고 말하지 않는다.

장사 지낸다는 말은 사람에게 쓰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사흘간 땅 속에 묻혀 있다가 꺼냈다는 떡을 의인화 하면 어떤 사람이 된다.

 

누룩 없는 떡은“누룩 없는 떡과 같은 사람” 이 된다.

앞서서 “누룩은 죄를 상징”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 “누룩 없는 떡은 죄 없는 사람” 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흘 후에 떡을 꺼내어 먹었다는 것은 살아난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죄 없는 사람이 사흘간 무덤에 있다가 살아난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은 유월절(목요일) 오후 3시에 죽어서 무덤에 장사가 되어 진다.

그리고 무교절(금요일)을 지나 안식일인 초실절(토요일) 새벽에 부활을 한다.

예수님은 날 수로 사흘간 무덤에 계셨다.

 

마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사흘간 땅 속에 계시다가 살아나심으로서 무교절을 성취하셨다.

 

지금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교절을 지키는 것이다.

반대로 무교절을 지키면 무교절을 지키지 않음이 된다.

왜냐하면! 무교절의 실체를 예수그리스도가 완성을 하셨기 때문이다.

실상이 왔음에도 그림자를 붙잡고 있으면 불의가 된다.

 

유대인들은 1500년 동안 무교절 날이 되면 집안에 누룩을 없애고, 누룩 없는 떡을 땅에 사흘간 묻어 두었다가 꺼내서 먹으면서 무교절을 지켰다.

 

그럼에도 사흘간 무덤에 계시다가 살아나신 예수그리스도가 그 무교절의 실체라는 것을 몰랐다. 예수그리스도가 사흘간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꺼내서 먹던 떡인 줄 몰랐다.

 

솔직히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절기가 예수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려 주시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알 수가 없다.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것은 세상 지혜로는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유대인들과 같은 자들은 절기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절기 지킴이 엄청난 믿음인 냥 호들갑을 떤다.

상대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면 믿음 없는 자로 치부해 버린다.

 

이 시대 교회들이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곧 유대인들과 같이 소경이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교회의 지도자로 행세하고 있다.

이런 자들을 교회의 목사와 지도자로 인정하고 있는 교인들 또한 소경이다.

소경이기 때문에 소경을 인도자로 따르는 것이다.

눈 뜬 사람은 절대로 소경을 인도자로 두지 않는다.

 

십자가 이외 그 어떤 것에도 의미를 두지 말라.

반대로 십자가 외에 그 어떤 것으로 미혹하는 자를 조심하라.

그는 광명의 천사로 위장한 마귀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