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書槪論/[신약성경개론] 개관

[스크랩] 골로새書 槪論

好學 2010. 4. 3. 16:15

골로새書 槪論

 

 

▣ 주제:그리스도는 탁월하시다 /1장 18절

 

1. 교리: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선포함/1장

복음의 멧세지에서/ 1장 1-12절

십자가에서/ 1장 13-14절

창조에서/ 1장 15-17절

교회에서/ 1장 18-23절

바울의 사역에서/ 1장 24-29절

2. 위험: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변호함/2장

헛된 철학을 조심하라/ 2장 1-10절

종교적인 율법주의를 조심하라/ 2장 11-17절

인위적인 훈련(금욕주의)을 조심하라/ 2장 18-23절

3. 의무: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드러냄 /3-4장

인격적인 순전함에서/ 3장 1-11절

그리스도인의 교제에서/ 3장 12-17절

가정에서/ 3장 18-21절

일상적인 일에서/ 3장 22절-4장 1절

그리스도인의 전도에서/ 4장 2-6절

그리스도인 봉사에서/ 4장 7-18절

 

▣ 골로새書 序論

 

▣ 도시:골로새는 세 쌍동이 도시 중의 하나였으며(다른 두 도시는 히에라볼리와 라오디게아) 에베소 남동쪽으로 200k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지역은 광물이 풍성하고 상업이 발달하였으며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여 살고 있어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지도에서 위치를 조사해 보라. 이 도시들은 서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 교회:바울이 골로새를 방문한 일은 없다(2:1 참조). 에베소에서 3년간 사역을 하는 동안 “모든“ 아시아는 복음을 들었다(행 19:10/행 19:26). 에베소에 있는 바울의 회심자 중의 한 사람이 에바브라였는데 그의 고향이 골로새였다. 에바브라는 복음의 멧세지를 고향으로 가져왔으며, 그의 사역을 통하여 이 교회가 세워졌다(1:4-7/4:12-13). 이 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 모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빌레몬은 그의 노예들 중의 하나인 오네시모와 함께 골로새에서 살았기 때문이다(골 4:9 / 빌레몬서 참조).

 

▣ 위기:바울은 지금 로마에서 죄수로 있었다. 에바브라가 그를 방문하여 새로운 교훈이 교회로 침투하여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오늘날 이 이단은 “영지주의“(Gnosticism)라고 불리워지는데, 이 말은 “안다“는 뜻의 “g-nosis“라는 헬라어에서 왔다. 영지주의자들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즉, 이들은 영적인 것들에 대하여 우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공언하였다.

그들의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진리와 유대인의 율법주의, 헬라의 철학을 혼합한 이상한 것이었으며, 오늘날로 말하면 접신론이나 크리스찬 싸이언스와 별다를 것이 없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들은 몸을 포함하여 모든 물질은 악하므로 하나님은 물질을 입고 오셨을 수가 없다고 가르쳤다. 그렇다면 세상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연속적인 “유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으셨으므로 이러한 “유출“의 하나이고,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한다.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출“의 복잡한 단계들(천사들을 포함하여)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격하시키고 있다.

이러한 체제는 신자들에게 다튼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는 “온전한 지식“을 특별히 준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이들은 “온전함(충만함)“이란 말을 쓰기를 좋아하였으므로, 바울은 이 편지에서 이 단어를 여러 번 사용하는 것을 볼수 있다.그들의 교리는 율법주의적인 실천을 요구하였으나(2:16) 육신의 엄격한 훈련(금욕주의, 2:18-23)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는 것이 이들의 규율 중의 하나였고, 오늘날 로마 카토릭처럼 어떤 날들을 정하여 거룩히 지키며 어떤 음식은 죄악되다고 가르쳤다. 이들의 종교적인 제도는 영성의 모양은 있으나 영적인 참된 가치는 없는 것이었다(골 2:21-23).

 

▣ 상호 교신:바울은 오네시모와 에바브라를 두기고와 함께 골로새로 보내며 골로새서, 에베소서(엡 6:21-22), 친구 빌레몬에게 보내는 편지를 준 것 같다. 어떤 학자들은 라오디게아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골 4:15-16)가 에베소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 강조점:이 서신은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강조한다. 이 편지를 읽을 때 “모든“과 “충만함“, “채워짐“이란 단어들이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11/1:16-20/1:28/2:2-3/2:9-10/3:8/3:11/3:14/3:16-17/3:20/3:22/4:9/4:12). 바울의 주제는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다“(3:11)는 것과 우리는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다“(2:10)는 것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으므로 그리스도는 신자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다! 율법주의, 인간이 만든 철학, 식물, 성일들, 육신의 훈련,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께 그 탁월한 지위를 드릴 때 물러가게 된다.

골로새서는 영적인 성숙을 탄원하는 편지이다(1:9-12 의 기도에 유의). 의로운 의식이나 예배는 외적으로는 신령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속 사람의 생활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조차 참된 영성 대신 인간이 만든 규율로 대체해 버리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 대조점:에베소서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강조하는 반면 골로새서는 그리스도께서 그 몸의 머리되심을 강조한다. 이 두 서신은 상호 보완적이며, 사실상 이들 사이에 유사성을 많이 발견할 것이다. 골로새서는 교회의 머리에 강조를 두고 있어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위해 충분하신 분이심을 보여준다. 에베소서는 몸의 각 지체들이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을 이끌어낸 것으로서, 그 지체의 삶을 더욱 많이 다룬다."

 

▣ 피로 말미암은 화목-골로새서 1장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골로새의 거짓 교사들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그저 높은 지위를 드릴 뿐 그가 마땅히 받으실 탁월한 지위를 드리려 하지 않는다. 주님은 “위대한 사람들 중의 한 분“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모든 것 위에 탁월하신 분이시다. 본 장에서는 몇 가지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선포한다.

 

1. 복음의 멧세지 안에 나타난 탁월성(1:1-12)

거짓 교사들도 멧세지를 전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멧세지에는 능력이 없었다. 이들은 천사들, 하나님께로부터의 “유출“, 율법주의적인 규칙들, 육체의 훈련 등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들의 멧세지에는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었다.

이 구절들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골로새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하여 성찰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이 교회를 방문한 일은 없으나 에바브라로부터 그들의 구원에 관한 좋은 소식을 들었다(4, 7절).

그들이 구원받은 방법-에바브라는 에베소에서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삶을 변화시키는 이 멧세지를 골로새로 가지고 왔다(7절). 전도는 집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막 5:19). 에바브라는 영지주의의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는 거짓말과 반대되는 “복음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였다(5절).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이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믿었으며 구원을 받았다.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증거들-구원의 증거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다(4-5, 8절).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에게 믿음을 줄 수 있으며 이기적인 마음을 사랑의 마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장래에 대한 축복된 희망을 줄 수 있으시다. 말씀이 그들의 생활에서 열매를 맺었는데(6절), 실로 열매는 언제나 참된 구원의 증거로 나타난다(마 13:23).

그들의 성장을 위한 바울의 기도(9-12절)-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 갖는 개인적인 경험이므로, 일단의 교리를 받아 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매일의 성장과 발전이 있어야 한다. 이단들은 그 추종자들에게 신비적으로 “충만해지는 것“을 가르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이 충만해질 수 있다고 언급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다“(2:9-10). 이제 그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러한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그가 간구하는 것을 살펴보자.

-하나님의 뜻을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실을 하기를 원한다.

-사역의 열매를 맺기를 원한다.

-말씀을 더 잘 이해할 것을 원한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

이러한 일들은 이단들이 그의 추종자들에게 약속하는 것들이지만 이러한 축복들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축복들이다. 그리스도는 탁월하시다."

 

2. 십자가에서 나타난 탁월성(1:13-14)

역사상의 어떤 인물들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각별히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십자가이다. 종교적인 지도자들은 죽었으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만은 세상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 구절에 나오는 묘사는 한 민족을 속박에서 해방하여 축복된 새로운 땅으로 이동시키는 종합적인 거대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죄인들을 구속하려고(지유케하려고) 죽은 천사가 있는가? 종교적인 규율들이 사죄한 일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올리운 것은 십자가이다.

 

3. 창조에 나타난 탁월성(1:15-17)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으로부터 연속적으로 “유출“하심으로써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유출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이러한 유출들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형상“이란 “정확한 재생산“이란 뜻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피조물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높으신(먼저 난) 분이시다.

“처음 났다“는 용어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중에서 처음이라는 식으로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며(요 1장 참조),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가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신다!(“구성하다“는 뜻은 “함께 붙들고 있다“는 뜻이다.)"

 

4. 교회에 나타난 탁월성(1:18-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 몸의 머리이시다. 교회는 새로운 피조물이며, 주님은 “시작“이시고 새로운 피조물의 창조자이시다. 주님의 부활은 탁월함의 보좌에 앉게 하였으며 죽은 자들 중에서 처음난 분, 곧 죽은 사람들 중에서 부활하셔서 다시는 죽지 않는 첫사람이 되셨다. 본 장에서 “모든“이란 말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존재하는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주적으로 통치하시는 것을 보여 주는 말이다.

“한 몸“이 뜻하는 바,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평화를 이루어 이 둘을 “한 몸“인 교회로 화해시키셨는가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에베소서 2장 11절 이하에 나와 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들만을 화해시킨 것이 아니라 “만물“ 곧 전 우주의 화해를 가능케 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신자들 개개인에게 적용시킨다(21-23절).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생활을 완전히 변화시키셨으며 하나님께로 그들을 화해시키셨음을 기억나게 한다.

거짓 교사들은 천사의 교리, 그리고 “유출설“이라는 교리로 혼란하게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여전히 교회의 머리이시며 탁월한 분이시다. 그는 피조물의 “처음난 분“이시며(15절) 죽은 자들 가운데서 처음 난 분이신데(18절), 이 말은 그가 가장 상석에 계시며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심을 뜻한다."

 

5. 바울의 사역에서 나타난 탁월성(1:24-29)

하나의 “유출물“에 불과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한다면 바울은 분명히 어리석은 자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탁월한 분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라면 위험을 무릅쓰지 않아도 된다. 바울이 영광스럽게 되신 구주를 처음 보았을 때 맨 먼저 한 말은 “주여 뉘시니이까?“ 였다. 그리스도의 주님되심, 만물위에 탁월하심, 이것은 곧 바울의 생애와 사역에 있어서 심장의 박동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고난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여겼다. 24절에서 그는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셨듯이 자신도 고난을 받았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의 고난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의 일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듯이 그의 고난도 한 몸인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고난이란 단어는 십자가 상에서 당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주님의 지상 사역 기간 동안 당하신 고난으로서, 헌신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려고 할 때에 당하는 고난을 말한다.

바울의 사역은 “비밀“(mystery)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곧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비밀로서, 과거에는 숨겨져 왔으나 이제 계시된 것이다(엡 3장 참조). 실제로 바울은 교회에 대한 비밀(24-26절),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비밀(27절),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격,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대한 비밀(2:2-3)인 삼중의 비밀을 얘기하고 있다.

바울은 균형잡힌 사역을 수행하였다. 설교하고, 가르치고, 경고하였으며, 몇몇 사람에게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려고 하였다. 그의 목표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숙(온전함)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온전함이란 죄가 없음이 아니라 성숙함, 곧 모든 면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수준으로 성장하는 것이다(엡 4장).

골로새서의 전체적인 주제는 “그리스도는 너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다“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온전하게 되었으므로 이것은 필요한 모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충만함을 인간이 만든 규율과 훈련, 종교적인 의식으로 대신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그러나, 바울의 사역은 자신의 능력에 제한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안에서 역사하셨으며, 그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였다(빌 2:12-13/엡 3:20-21 참조)."

 

▣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골로새서 2장

 

본 장에서는 문제의 핵심에 이르는데, 바울이 거짓 선생들을 탄핵하며 그리스도는 모든 필요에 대처하시기에 충분하심을 명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는 세 가지 경고를 발하였는데, 이 경고들은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필요하다.

 

1. 공허한 철학을 삼가라(2:1-10)

신자들을 곁길로 인도하려는 사단에 대항하여 기도로 씨름하며 바울은 대단한 부담을 느꼈으므로 영적인 전쟁을 하고 있다고 해야 좋을 것이다. 바울은 사단을 이기는 방도를 알고 있었다. 즉,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엡 6:17-18)인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요함의 축복을 누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한 성도들을 보기를 갈망하였다.

거짓 선생들은 매혹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었으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를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철학들은 우리가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부유하다. 그런데 왜 인간이 만든 교리를 좇음으로써 우리 자신을 낮출 것인가. 종교적인 교사들로 하여금 그들의 “감추어진 교리들“을 가지고 나오게 하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숨겨진 모든 지혜를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와 더불어 감춰져 있다“(3:3).

인간의 철학은 매력적이다. 그 철학들은 지혜와 지성을 과시하고 있어,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꼬이는 말들“에 속임을 당하는 일이 너무나 많다(4절). 젊은 사람들이 세속적인 학파들에 말려들어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부인하는 인간의 철학에 희생을 당하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사로잡을까) 주의하라“(8절)고 이 사도는 경고한다. 신자가 이러한 철학들을 이기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6절)-“그러므로... 했으니.“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믿음으로 행하라. 말씀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말씀에 따라서 행하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성령 안에서 행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라(7절)-말씀의 풍요함에 깊이 뿌리를 내리라.예수 그리스도 위에 놓여진 강력한 기반을 소유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그리스도인들이 만일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며 말씀에 기반을 다지며 성경 진리 안에서 세워지지 않는다면 종교적인 철학에 희생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를 시금석으로 삼으라(8절)-모든 어마어마한 종교적인 철학들이라도 다음의 질문으로 시험해 보라. “그 철학이 그리스도에게 탁월한 지위를 드리는가?“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적인 제도들이 그리스도에게 출중한 지위를 드린다. 그러나, 참으로 성경적인 기독교만이 탁월한 지위를 드린다.

주님의 충만하심을 의지하라(9-10절)-그리스도를 대신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알라.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 신자가 세상으로 가거나 인위적인 제도들의 먹이가 될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공급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자기에게 결여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너희도 그 안에서 느끼기 때문이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다.“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지위를 소유하고 있는가 !"

 

2. 종교적인 율법주의를 삼가라(2:11-17)

이 거짓 교사들은 동양의 신비주의와 헬라의 철학, 유대의 율법주의를 혼합하였다. 실로 대단한 혼합이기도 하다 ! 육신은 종교적으로 되는 것을 좋아하는데, 거기에는 육신을 못박는 십자가가 없기 때문이다. 골로새 신자들은 유대의 율법주의, 즉 의식, 식사법, 성일 들에 주입되어 있었다.

바울은 “너희가 햇빛을 떠나 그늘로 들어가려 한다“고 바울은 외친다(17절). “너희는 상징을 위해서 실재(몸)를 버리고 있다.“ 아버지의 현존을 무시하며 아버지의 사진을 찬양하는 어린 아이처럼 이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을 떠나 세상의 초등한 것들을 향하였다(2:8/2:20).

우리가 필요로 한 모든 것은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다. 11절의 할례는 어려서 받는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눅 2:21),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죽음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물로 세례(침례)를 받으신 것이 십자가에서 고난의 세례(침례)를 상징하는 것이듯(눅 12:50), 유아로서 받은 주님의 할례는 갈보리에서 우리의 죄를 지셨을 때 “그의 몸을 벗어버리게 됨“을 미리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영적인 할례는 육체적인 의식보다는 훨씬 더 놀라운 것이다“라고 바울은 주장한다. “왜 그리스도를 모세와 대치하는가? 마음에 영적인 수술을 하는 대신 왜 육체를 베는 일을 하는가? 할례는 몸에서 육체의 한 부분을 떼어내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것은 모든 육신의 본성을 벗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은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교회)에 속하도록 세례(침례)를 베풀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가능해진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었으며 주님과 함께 부활하였다. 구약 율법은 이제 제쳐졌으며 사단은 완전히 패배하였다(15절). 그러므로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갖는 자유를 즐기라. “아무도 당신을 판단치 못하게 하라.“"

 

3. 인위적인 훈련을 삼가라(2:18-23)

종교적인 육신은 금식과 음식에 관한 규례와 육체의 훈련 등을 참으로 좋아한다. 종교적인 규례들을 지키며 수많은 사람들이 신령하다고 느끼고 있다. “당신의 생애에 있어서 다른 어떤 사람도 심판자가 되게 하지 말라“(폄론하다, 16절). 일부러 겸손함을 삼가라. 신령한 체하는 종교적인 태도를 버리라.

로마 카토릭에서 금식을 하며, 검은 옷을 입고, 고행을 하는 것을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현대의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실까?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조차 참된 영성의 표시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을 하지 않는 것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신자는 그의 자유를 남용하여 거치는 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심으로 믿지만, 어떤 습관을 버리거나 어떤 장소에 가지 않는 것이 자동적으로 신자를 신령하게 한다고는 한 순간도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살아 있는 연합의 관계로서, 그리스도는 머리이시며 우리는 몸의 지체들이다. 당신은 율법이 몸에 작용하게 해서는 안 된다. 몸은 양분을 공급함으로써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지 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누가 자기의 위에다 대고 “소화를 시작하라! 아픔을 멈추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

그러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개인적으로 또는 교회적으로 육신의 규율로 말미암아 신령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준(“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을 믿지만 기준에 대한 외적인 순종이 반드시 내적인 영성을 산출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적인 요소들에 대해 죽어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다.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다.

인간이 만든 종교적인 규율들에 순종하는 일은(21-23절) 인간이 외적으로 보기에 매우 신령하게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것들이 육신을 조절하거나 극복할 수 없다고 명백히 서술하였다. 그렇다. 이런 규율들은 인간들에게 매력있게 보인다. 이들은 신앙심과 보다 우월한 영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련된 한에 있어서는 소용이 없다.

이미 언급되었지만, 골로새서의 주된 주제는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그리스도이시라는 점이다. 인간이 만든 제도와 규율들은 매우 신령하게 보이지만 다만 기초(초보)일 뿐이다(20절). “이것은 유치원의 생활이다. 이제는 졸업하고 기독교의 보다 높은 수준으로 나아갈 때이다“라고 이 사도는 말한다. 인간이 만든 금욕주의(훈련)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육신이 육신을 조절하거나 더좋게 만들거나 완전하게 만들기란 불가능하다. “영으로 시작하고 이제 육으로 완성하려는가?“라고 갈라디아서 3장 3절은 묻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맺은 연합은 살아 있는 연합이며, 생명이 율법으로 지배받을 수는 없다. 또다른 생명만이 생명을 다스릴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가질 수가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여졌다!“ 할렐루야, 얼마나 놀라운 구주신가!"

 

▣ 우리의 지위와 상태를 조화시킴-골로새서 3장

 

본 장은 이 서신의 실천적인 부분을 시작하고 있으며, 여기서 바울은 그가 우리들에게 나타낸 진리의 빛에 비추어서 우리가 져야 할 책임들을 요약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탁월하신 것이 복음 안에서, 십자가에서, 창조에서, 그리고 교회에서만 탁월해서는 온전하지 못하며,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탁월하셔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실천해야 할“ 몇몇 분야를 언급한다.

 

1. 인격의 순전함(3:1-1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다른 말로 하면, 땅에서의 실천 생활이 하늘에서의 지위와 일치하게 되라는 것이다. 당신은 이전에는 죄 가운데서 죽었었지만(엡 2:1-3), 그러나 이제 죄에 대하여 죽었다.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 계시며 영광의 소망이시다(1:27). 머지 않은 어느 날 그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4절).

간단히 말해서,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하여 하신 일에 따라 행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이러한 단순한 원리는 인간이 궁리해 낼 수 있는 어떤 규칙이나 규율보다 더 힘이 있다. “너희는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다“(2:10). 이제 일상생활에서 그 충만함을 유지해가라.

동양의 종교나 그리이스(헬라), 로마의 종교는 인격의 거룩함에 대해서는 거의 또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사람은 자기의 희생 제물을 가져오고 기도를 하며, 제단을 떠나서는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는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내면의 새로운 생활은 외부의 새 생활을 요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우리를 죄로 인도해 가는 몸의 지체를(롬 6장) 죽음에 내주어야 한다(극복하다, 5절). 바울은 이렇게 주의를 준다. “너희가 살던 대로 살지 말라.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무리가 사는 방식이다. 그리스도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이제 주님의 생명이 너희를 통하여 매일매일 나타나도록 하라.“

8-11절에서 바울은 새로운 생활을 옷을 바꾸어 입는 것으로 비유한다. “옛죄, 곧 너희가 입은 불결한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거룩함의 새 생활을 옷 입으라.“ 우리가 이러한 일을 하기는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옛 사람을 벗어버렸기 때문이다(9절). 즉,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의 몸(죄악된 본성)을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참된 할례를 통하여 벗어버렸다(2:11).

구약의 육체적인 할례는 유대인에게 있어 죄를 베어 버리고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로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영적인 할례는 옛 본성이 베어냄을 받았고 우리는 이제 새로운 생활 가운데서 행할 수있다는 뜻이다."

 

2. 그리스도인의 교제에서(3:12-17)

그리스도 안에는 장벽이 없다(11절).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이며 주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신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활에서 탁월하시다면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과 화목할 수가 있을 것이며, 의견의 차이가 있더라도 우리가 말씀을 먹으며 그리스도를 예배할 때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평화가 다스릴(심판할) 것이다.

지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헌법으로 규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면에서, 신자들의 마음에서 와야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다른 신자와의 교제에서 벗어난다면 이것은 둘 다, 또는 그 중 하나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하라 !“고 권고한다. 야고보서 4장을 읽으면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이기적인 동기로 일들을 할 때 다툼과 싸움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3장 15-18절과 에베소서 5장 18-22절을 비교해 보면, 말씀으로 충만할 때는 성령으로 충만할 때와 같은 축복을 받게 됨을 알게 된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말씀으로 조절을 받는다는 뜻일 뿐이다."

 

3. 가정에서(3:18-21)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행사해야 할 첫번째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가정이다. 디모데전서 5장 4절에 보면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만일 아내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영적인 양분을 흡수한다면 순종적인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종하게 될 것이다(엡 5:22- / 벧전 3장 참조).

물론 남편 역시 아내와 가족에 대하여 사랑과 상냥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 남편의 머리됨은 교회에서 그리스도가 머리되심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에베소서 5장 23절 이하는 말하고 있다.

자녀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것이다.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이 부모에게 대항하여 반역하고 그리스도와 교회에 항거하여 죄를 짓는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은 주의 몸의 지체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높은 지위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만일 가정의 각 지체들이 “나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며 모든 것보다 탁월하신 분으로 삼겠다“고 말한다면 우리의 가정은 얼마나 축복될 것인가! 이기심이 줄어드는 반면 사랑은 많아질 것이고, 인내하지 못하는 마음은 줄고 상냥함이 늘어날 것이다. 어리석은 일들에 돈을 낭비하는 일은 줄어들 것이며 가장 중요한 일들을 위하여 살게 될 것이다. 원한들이 사라질 것이며 가족들은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우리 가정에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이 얼마나 필요한가 !

 

4. 일상생활에서(3:22-4:1)

물론 바울 당시에 노예는 한 가속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와 똑같은 진리를 그리스도인 고용주들과 고용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 바울은 종들에게 이 땅에서의 육신적인 주인과 하늘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로 두 주인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마 6:24).

그리스도인 고용인은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며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일한다. “눈가림“이란 고용주가 지켜볼 때만 일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하늘의 주인은 언제나 지켜보고 계시다 ! 우리는 인간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다.

“단일한 마음“이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한 가지 목표에 마음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 기계를 작동시키거나 도구를 사용하거나 트럭을 몰거나, 무슨 직업에 종사하든지 그리스도인 고용인들이 사실상 그리스도의 사역자임을 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일은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해야 한다.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 마음을 반만 기울이는 일은 보잘것 없는 간증을 남긴다. 이같은 태도의 불충성한 일꾼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위하여 우리의 최선을 다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

고용주들 역시 그리스도인답게 일들을 운영해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인 고용주들이 그의 그리스도인 노동자들을 불리하게 만드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이는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정당하고 동등하게 그들을 대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이 계약과 정부 차원의 규칙들과 혼란한 경제 조건하에서는 그리스도인 고용자들이 사업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첫자리에 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하는 신자를 높이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만일 고용주가 그리스도를 첫자리에 두고 주님께 탁월성을 부여한다면"

골 3:22-4: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1-2장에 나오는 위대한 교리들을 즐거이 누리면서도 3-4장에 나오는 의무들에 항거하는 그리스도인이 너무도 많다. 얄팍하고 불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모든 충만하심을 사실상 믿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일단 머리, 곧 부활하신 영광스러우신 구세주께서 영양을 공급하고 안내하시며 지혜를 주신다는 것을 의존할 때, 그는 충만함 가운데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발견할 것이다.

 

▣ 그리스도인의 교제-골로새서 4장

 

바울은 우리의 생활에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계속 적용시키고 있다.

 

1. 그리스도인의 증거(전도)를 통하여(4:2-6)

바울은 로마에서 죄수로 있었지만, 그러한 처지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증거하는 일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그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거하는지에 대하여 말한다.

깨어 기도하라-“깨어“는 경계한다는 개념을 전해 준다. 즉, 눈을 뜨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 진리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려고 할 때 원수가 이들을 위협하던 느헤미야 4장 9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기도를 하였고 파수꾼을 세웠다 !“ 이것이 느헤미야의 해결책이었다. 그리고 이 방법은 적중하였다!

우리 자신이 경계하는 일을 기도가 대신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는 깨어서 기도하는 일은 유혹을 이기는 길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신다(막 14:38). 전도하고 봉사할 기회가 오면 우리는 깨어 기도해야 한다. 물론 바울은 빌립보 간수를 위하여 기도할 때 눈을 떴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도는 그 사람이 칼에 손을 뻗치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질러 정지시켰기 때문이다.

만일 각 신자가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회의 문을 열어 주시는 것을 지켜본다면, 우리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세주께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지혜롭게 행하라-“외인“이란 물론 그리스도의 가족에 속하지 않은 잃어버린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없이, 희망없이, 평화없이, 용서 없는 것 등, 밖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잃어버린 사람들 가운데서 지혜로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의 생활을 살펴보고 비판할 것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2절은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정직하게 행하라고 권면한다.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에게 부정직하다면 이것은 참으로 비참한 간증이 아닐 수 없다! 신자가 간증을 잃고 그리스도의 이름에 욕을 돌리는 것보다는 빼앗기는 고난을 당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리스도인이 사업상 채무를 이행하지 못할 때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거룩한 말을 하라-그리스도인들은 “대충 줄잡아 들으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말할 때는 언제나 거룩함이라는 소금이 있어야만 한다. 구약 유대인들은 희생제물에 소금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순전함과, 좋은 것을 보전한다는 상징이었다. 헬라어로는 소금을 채리타스(Charitas)라고 하는데, 은혜라는 뜻으로서 소금이 맛을 내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은 부패해서는 안 되며(엡 4:29), 소금은 부패를 막는다.

불신자들이 듣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의 말에 보초를 세우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가 ! 생각 없는 비판의 말, “수상쩍다“고 비판받는 것, 성난 말, 이런 일들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세워 놓은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게 된다.

“세월을 아끼라“(5절)는 말은 “기회를 사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다른 이들을 인도할 기회를 잡기 위하여 경계 태세를 취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인의 봉사에 있어서(4:7-18)

우리가 바울을 위대한 사도로 높이는 반면 바울의 사역에 조력했던 많은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혼자서 주님의 사역을 할 수 있는 목회자나 부흥사나 선교사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수고하는 사람들이다.“

두기고(7-8절)-그는 여러 해 동안 바울과 함께 있었으며, 바울이 에베소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동행했었다(행 10:4). 아마도 그는 에베소의 시민이었을 것이며 바울과 더불어 3년간 거기서 수고했을 것이다. 두기고는 골로새서를 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에베소서도 전하였다(엡 6:21-22).

이 사람은 자기 앞에 놓인 길고도 험한 여행을 하였다. 우리는 그가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보인 충성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해야 할 것인가!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성경을 연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딤후 4:12 참조)

오네시모(9절)-그는 빌레몬에게서 도망친 노예였다. 바울은 그를 그리스도께 인도하였으며 이제 골로새에 있는 집으로 돌려보내고 있는 것이다(빌레몬서 참조). 그와 두기고는 함께 여행했을 것이며, 오네시모는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귀중한 편지를 전하였을 것이다.

아리스다고(10절)-이 사람은 에베소의 소요 사건에서 나타난다(행 19:29)거기서 그는 지도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뽑혔었다. 그도 역시 바울과 동행하였으며(행 10:4), 로마로 가는 길의 무서운 폭풍 때에 바울과 함께 있었다. 좋은 때나 나쁜 때나 바울에게 충실하였던 참으로 놀라운 그리스도인이다.

마가(10절)-이 사람은 물론 마가 요한이다. 그는 바나바의 조카로 몇 년전에 바울에게서 “떨어져 나갔었다“(행 13:13/행 15:36-41). 골로새 사람들이 마가의 실패를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이 젊은이를 영접하고 사랑을 보이기를 원하였다. 마지막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마가가 사역에 “유익하다“고 시인하였다(딤후 4:11).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실패를 용서하며, 주님의 사역을 위하여 “유익한“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

예수-유스도(11절)-그는 유대인 신자였다. 그의 히브리 이름은 여호수아였으며 헬라어로는 “예수“가 된다. 유스도라는 그의 다른 이름은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는 바울과 함께 일하였으며 바울을 위로(격려)하였다. 사도가 감옥에 있는 기간에 그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

에바브라(12, 13절)-그는 이방인으로서 골로새 교회를 창립한 목회자였다. 이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사역을 믿었다(1:7/4:12). 그는 참으로 기도의 투사였다! 그는 단순히 말로 기도한 사람이 아니라 기도 중에 수고를 하였는데, 이 말은 기도하며 고뇌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경기하는 사람이 선수들과 투쟁할 때 사용하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만일 경기자들이 경기를 하듯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축복을 좀더 보게 될 것이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성숙하고 온전해“질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였다(1:28-29 참조). 다른 말로 하면,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이 “충만하심“에 이르러 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골로새사람들만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아울러 이웃에 있는 도시들의 성도들을 위해서도 열심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참으로 놀랍다!

누가(14절)-이 사람은 드로아에서 바울과 합세한(행 16:10) 이방인 의사였으며, 말년에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썼다. 누가와 데마는 디모데후서 4장 10-11절에서 다시 관계를 맺게 된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데마는 나를 버리고...“.

다음의 세 구절에서 데마의 생애를 요약할 수 있다. “나의 동역자 데마“(몬 24절), “데마...“(골 4:14), “데마는 나를 버리고...“(딤후 4:10). 골로새서와 빌레몬서가 동시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데마의 타락이 반복해서 기록된 것이 분명하다. 참으로 비극이다!

바울은 종결짓는 교훈을 통하여 몇몇 성도들에게 인사를 보내며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서로 편지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이 오늘날 우리가 가진 에베소서인 듯하다. “모든 성경은 유익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어떤 것도 무시할 수 없다.

바울은 아킵보에게 기진해 하지 말고 주 안에서 그의 사역을 성취하라고 경고하며 끝을 맺는다. 아마도 그는 빌레몬의 아들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빌레몬서에서도 역시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몬 2절).

바울은 일상적인 인사인 은혜로 이 편지를 끝내는데, 이것은 이 편지를 믿을수 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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