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聖書槪論/[신약성경개론] 개관

[스크랩] 빌립보書 槪論

好學 2010. 4. 3. 16:14

빌립보書 槪論

 

 

빌립보書 槪要

 

▣ 주제:그리스도인의 기쁨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

1. 단일한 마음/1장

바울의 한 가지 관심사는 그리스도와 복음이다.

복음의 교제 /1장 1-11절

복음의 진보/1장 12-26절

복음의 신앙/1장 27-30절

2. 순종하는 마음 /2장

그리스도의 모범/2장 1-11절

바울의 모범/2장 12-18절

디모데의 모범/2장 19-24절

에바브로디도의 모범 /2장 25-30절

3. 신령한 마음/3장

그리스도인의 과거-구원 /3장 1-11절

그리스도인의 현재-성화 /3장 12-16절

그리스도인의 미래-영화 /3장 17-21절

4. 안정된 마음 /4장

하나님의 임재-“가까우시니라“/ 4장 1-5절

하나님의 평화 /4장 6-9절

올바른 기도-생각-생활

하나님의 능력 /4장 10-13절

하나님의 예비하심 /4장 14-23절"

 

▣ 빌립보서 서론

 

▣ 도시:빌립보는 외국의 영토에 세운 로마의 식민지였으며, 로마의 법으로 치리되었고 완전히 로마의 지배에 종속되어 있었다. 마치 이 땅에서 교회가 “하늘의 식민지“인 것처럼 이 도시는 그리이스 문화로 둘러싸여 있는 “작은 로마“였다. 트라키아누스에게서 이 도시를 빼앗은 빌립왕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고, 본래 농업과 함께 금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의 토양은 매우 기름졌다. 지도를 보고 마게도냐에서 이 도시의 위치를 살펴보라.

▣ 교회:유럽 최초의 교회는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 시 빌립보에 설립한 것이었다(행 16장). 바울이 데살로니가로 이동한 후에도 빌립보 신자들은 바울을 지원하였다(빌 4:15/고후 11:9). 5년 후 3차 여행 중에 바울은 고린도로 가는 길에 빌립보에 들렀으며, 돌아올 때에도 역시 들렀다(행 20:1-6). 바울과 빌립보 사람들 사이에는 깊은 사랑이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 교회는 바울에게 거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것이 확실하므로 그가 그들과의 교제를 즐겼음은 이상할 것이 없다.

▣ 서신:이 교회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돕고자 하였다. 또한 이들은 자기들 중에서 에바브로디도(아마도 장로였을 것임)를 보내어 로마에 있는 곤핍한 사도에게 헌금을 전하였다. 빌립보에서 로마까지의 여행은 그 당시로는 한 달 가량 걸렸을 것이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로마에 머물며 바울을 섬겼는데, 사실상, 그는 너무나 일을 많이 하여 병이 났다(빌 2:25-30).

바울이 이 교회에 감사의 편지를 쓸 때 친구의 병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이는 교회가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바브로디도가 바울과 함께 수개월의 너무 오랜 기간을 머물러서 교회가 이를 비판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에바브로디도가 그의 체력을 회복하자 바울은 빌립보서로 알려진 편지를 주어 집으로 돌려 보냈다. 이 편지를 쓴 데에는 몇 가지 목적이 있다.

바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에게 형편을 설명하기 위함.

에바브로디도의 사역을 설명하며 그를 비판하는 데에 대해 변호하기 위함.

그들의 관대한 지원에 다시 감사하기 위함.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 그들을 격려하기 위함.

▣ 강조점들:빌립보서의 핵심 사상은 기쁨이다. “기쁨“과 “즐거움“이 간략한 네 장에서 여러 번 반복되고 있다. 또 다른 강조점은 마음이다. 빌립보서를 읽을 때 바울이 얼마나 여러 번 마음, 기억, 생각에 대해 말하는지 살펴보라.우리는 이 책의 주제를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를 닮은 마음“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려고 한다면 마땅히 소유해야 할 마음의 종류들이 각 장에서 설명되고 있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잘못된 생각은 잘못된 생활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앞에서 살펴본 이 서신의 개요를 통하여 빌립보서에 있는 네 가지 마음, 곧 단일한 마음, 순종하는 마음, 신령한 마음, 안정된 마음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강조점만이 이 서신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교훈이라고 결론을 짓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이 서신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시며(1장), 우리의 모범이시며(2장), 우리의 목표요(3장), 우리의 힘(4장)이시다. 빌립보서에서는 죄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고 다만 슬픔에 대한 암시만이 3장 18절에 나오는데,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께 불순종하는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인하여 울고 있다."

 

▣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빌립보서 1장

 

물론 바울의 형편은 기뻐해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는 체포되어 로마로 송치되었으며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 곳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분열이 있었고(1:14-17), 어떤 이들은 사도에게 문제가 불리해지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불편한 환경의 한복판에서 그는 어떻게 그와 같은 기쁨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는 한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관심사는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복음에 관한 것이었다.

본 장에는 복음이란 말이 다섯 번(5, 7, 12, 16, 27절), 그리스도는 일곱 번 언급되어 있다. 바울은 이러한 환경들이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하여(1:20) 그리스도께로부터 왔다고 여기고 있다(1:13). 만일 바울이 이중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면 생활이 너무도 불편하여 불평을 했을 것이다(1:20). 오늘날 우리에게 단일한 마음이 얼마나 필요한가!

 

1. 복음의 교제(1:1-11)

“그리스도 안에“ 있어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은 일들이 어려울 때 기쁨의 근원이 된다. 바울은 여기서 로마의 죄수이지만 복음의 교제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의 즐거운 태도는 세 구절에서 요약되고 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한다“(1-6절)-바울은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머나먼 빌립보에 있는 친애하는 성도들(성별된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 빌립보 감옥에서의 고통스러움까지도 포함하여(행 16장) 모든 추억은 그에게 축복이 되었으며 그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들이 구원받는 것과 성장하는 것을 기뻐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삶에 시작하신 일을 친히 온전하게 완성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알파와 오메가이시며, 믿음의 창설자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계 1:8/히 12:1-2).

“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7-8절)-빌립보 교회는 여러 부류의 무리가 혼합되어 구성되어 있었으나 사랑으로 묶여져 있었다. 부유한 루디아, 간수, 노예 소녀(행 16장)가 있었으며, 아마도 이방인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바울과 함께 복음에 참여한 사람들이며, 그들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서로간의 사랑 안에서 연합되어 있었다. 고린도 교회와는 얼마나 다른가!(고후 12:20-21)

“내가 너희를 위해 기도한다“(9-11절)-바울은 언제나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여기서의 기도는 그들이 온전한 생활을 하게 되기를 구하는 기도이다. 공허한 그리스도인이란 비극이다. 바울은 그들이 사랑과 분별에 있어 온전하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들이 일상생활에 충실하기를 기도했으며 그리스도인의 봉사 사역에서 열매맺기를 기도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성숙, 곧 성숙한 사랑, 지혜, 성품, 봉사를 위한 기도였다."

 

2. 복음의 진보(1:12-26)

바울은 그가 통과해야 했던 모든 고난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이 시련의 사건들을 “나의 당한 일“이라고 부른다. 우리들 대부분은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해왔을 것이지만 바울만큼 많이 당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바울의 소망은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며 복음을 진척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첫 자리에 모셨다(12-21절)-그의 발목에 쇠사슬이 매여져 있었는가?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매임“이었다. 그의 원수들이 전도함으로서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었는가? “그런들 어떠한가? 이들은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친구들이 그를 염려하여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가? “잘하는 일이다! 그리스도를 높이게 될 것이다.“ 그가 죽을 가능성이 있는가? “그렇다면 살거나 죽거나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와 복음을 모든 것 위에 두는 것, 이것이 한 뜻(마음)이다.

우리가 어떤 형편을 당하든지 그리스도를 모시면 기쁨을 소유할 수 있다. 바울은 로마의 죄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갇힌 자“였다(엡 3:1/엡 4:1). 그의 발목에 쇠사슬을 채우는 군인들은 경비병들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영혼들이었다. 바울에게는 “포로로 잡혀 있는 청중“이 있었으며, 1장 13절과 4장 22절로 미루어 보아 그들 중에서 여러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한 뜻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환경이 그들을 지배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러한 환경을 바꾸어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며 영혼을 인도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다음 자리에 둔다(22-26절)-이기심은 언제나 불행을 낳는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기쁨을 소유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려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려고 노력하였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 땅에 있는 천국“은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기를 갈망하는 반면에, 이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도록 돕게 되기를 열망하였다.

그는 자신을 마지막에 둔다-그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그의 미래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명성 또한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을 첫자리에 두는 일은 언제나 비참함을 초래한다. “기쁨(JOY)“은 예수(Jesus)-“다른 이(Othets)“-“당신“(You)으로 철자가 이루어진다. 철자를 거꾸로 해서는 안 된다.

어려움이 우리의 생활에 닥칠 때는 언제나 “주님,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영광받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한 뜻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비결이다."

 

3. 복음의 신앙(1:27-30)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싸워야 할 전투들이 있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를 공격하는 원수들에 대하여 경고한다.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은 다음의 세 가지 단계들을 거치게 된다.

-가족에 속한 아들-복음의 교제

-종-복음의 진보

-군사-복음의 신앙

사단은 교회를 망하게 하려고 나다니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사단과 맞닥뜨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 한 뜻을 지녀야 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복음의 신앙을 방어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몇 가지를 격려하고 있다.

너희는 혼자가 아니다(27절)-우리가 생명의 싸움을 싸우고 있을 때 다른 이들이 우리와 함께 곧게 서 있다는 것을 알 때에 참으로 놀라운 축복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가족이 연합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을 대신할 만한 일은 없다. 사단은 대단한 분열자이며 파괴자이나, 그리스도는 연합시키며 건설하는 분이시다.

너희는 승리하는 편에 있다(28절)-“대적들을 두려워 말라!“고 바울은 조언한다. “사단은 그가 패하고 있으며 너희가 승리하고 있음을 안다.“ 신자들의 연합과 믿음은 원수가 패하고 있다는 데 대한 “명백한 증거“이다(명확한 징조 또는 표시).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특권이다(29-30절)-그리스도를 믿고 거저 주시는 구원의 선물을 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또 다른 선물이 있으니, 곧 예수를 위한 고난의 선물이 그것이다. 빌립보서 3장 10절은 우리의 고난이 주님과 교제(참여)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행 5:41 참조). 우리가 예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 바울과 같은 성도들을 이어 따르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가!

어떠한 상황이 벌어지든지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해야만 한다. 바울은 1장 27절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경고한다. 어떤 사람이 간디에게 “인도에서 그리스도인의 선교에 방해가 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간디는 “그리스도인이지요“라고 대답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해야 한다.

괴로움의 와중에 있으면서 바울은 평온한 확신을 보여 주었다. 바울은 빌립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행보를 계속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으며(1:6) 그의 시련이 로마의 신자들에게 새로운 확신을 준 것을 기뻐하고 있었다(1:14). 그는 또한 이 시련이 거의 끝나가고 있으며 그의 친구들에게로 다시 돌아갈 수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1:25). 이것은 하나님이 환경들을 조절하고 계심을 알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하나님 안에서의 확신인 바, 한 마음으로 인한 축복이다."

 

▣ 우리의 모범이신 그리스도-빌립보서 2장

 

환경은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가는 원인이 될 수 있으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서 우리의 평안과 기쁨을 잃어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가! 유일한 해결책은 순종하는 마음, 곧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겸손한 마음이다. 교만은 불안과 말다툼의 원인이 되지만(약 4장 참조) 겸손은 평안과 기쁨을 준다. 바울은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는 문제에 있어 우리가 따라야 할 네 가지의 모범을 제시한다.

 

1. 그리스도의 모범(2:1-11)

빌립보 교회에 분열이 있었던 것 같다(4:1-3). 바울은 그들이 경험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체험에 근거하여 마음을 연합하고 다른 이들을 자신보다 앞에 두라고 호소한다. 교회가 단합되는 동기는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가장 강력한 자극을 주는 단합의 동기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과 동거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 성령으로 말미암는 친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지는 뿌리 깊은 소망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기쁨들, 이러한 것들도 단합의 동기들이다.

바울은 로마에서 대립과 이기적인 야심을 보고 있었는데(1:14-17) 그 곳 빌립보에서는 발견되지 않아야 함을 경고하고 있다. “마음을 낮추는 것“, 이것은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순종적인 마음이다. “겸손은 자신에 대하여 예민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바울은 주님이 육신으로 오시기 전의 마음가짐을 지적한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자신의 특권을 이기적으로 주장하려고 하셨던가? 아니다! 그는 기꺼이 자신의 영광을 제쳐 두시고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 그는 하나님 되심을 그만 두신 것이 아니라 그의 영광과, 또한 하나님으로서의 속성을 독자적으로 사용하시는 일을 제쳐 두신 것이다.

지상에 계실 때 신인(God-Man)으로서의 그의 생활은 완전히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는 것이었다. 주님은 요한복음 8장 29절에서 “나는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셔서 육신이 되셨으며, 십자가를 향하여 기꺼이 가실 때는 죄인이 되셨다.그러나, 그리스도의 경험은 항상 낮추어진 다음에 높임받는 것임을 입증한다. 베드로전서 5장 6절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약속하신다.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다(눅 14:11). 바로, 사울왕, 느부갓네살, 하만, 헤롯을 기억하라.

우리는 “구유에 누인 아기“나 “십자가에 달리신 희생자“를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보좌에 높이 올리워지신 주님을 예배한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케 하는 것이 높아지는 길임을 영원히 입증한다. 교만과 이기주의에는 기쁨이나 평화가 없다. 그리스도가 지니신 순종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주님의 기쁨과 평화를 가질 것이다."

 

2. 바울의 모범(2:12-18)

순종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는 희생과 봉사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2:7-8)와 바울(2:17)과, 디모데(2:21-22)와 에바브로디도(2:30) 그에게서 사실로 드러났다. 한 마음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인도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려고 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살게 된다. 바울의 생애는 참으로 그러하였다.

그 비결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이다. 육신은 겸손이나 헌신을 성취할 수가 없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안으로부터 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기 전에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살전 2:13)과 성령(엡 3:20-21)과 기도를 사용하신다.

바울은 순복하는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제시한다. 하나님의 순종하는 자녀, 곧 아버지 하나님을 높이려고 애쓰는 자녀로 나타내며, 또한 어두운 이 세상을 비추는 별로 상징한다. 이 세상은 얼마나 어두운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빛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가! 16절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을 올림픽 횃불을 들고 달리는 사람으로 나타낸다. 17-18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제단에 부어진 관제(마시는 제물:drink offering)로 묘사한다. 순종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희생과 봉사가 있기 마련이다.

 

3. 디모데의 모범(2:19-24)

디모데는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이 젊은이를 그리스도께 인도하였기 때문이다(행 16:1-5/딤후 1:1-6/고전 4:15-17). 디모데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살았다. 빌립보서 1장 21절 대신에 빌립보서 2장 21절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다. 디모데는 바울의 조력자요 대리자였으며, 자신이 주님께 충성스러운 것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그는 젊은이였지만 그리스도를 섬기는 법을 알고 있었으며, 주님을 위하여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려고 하였다. 바울은 디모데를 곧장 봉사 사역으로 부르지는 않았으며, 집에 머물러 있어 4년 또는 6년간 성장하도록 하였다. 바울이 그를 선교 회원에 가입시켰을 때 디모데는 고향에서의 봉사 사역에서 선한 증거를 갖고 있었다(행 16:2/딤전 3:6-7). 새로운 그리스도인에게 당장 중요한 임무를 맡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4. 에바브로디도의 모범(2:25-30)

그는 균형잡힌 그리스도인이었다(25절)-그를 “형제“라 함은 그가 복음의 친교를 알고 있다는 뜻이며, “함께 수고한 자“라 함은 복음의 진보를 위해 자신을 헌신했다는 뜻이다. 또한 “함께 군사된 자“임은 그가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싸우는 법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면에 있어서 균형을 잃게 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교제(형제애)만을 중요시하며, 영혼을 구원하거나 적과 싸우는 시간을 갖지 못한다. 다른 이들은 봉사 사역에 둘러싸여 교제를 잃는다. 마르다가 범한 실수가 바로 이것이었다(눅 10:38-42). 또다른 이들은 언제나 싸우기에만 바빠서 교제와 봉사를 소홀히 한다. 원수와 대적하여 전투를 하면서도 교회를 세우지 못하게 되는 일이 허다하다. 우리는 균형잡힌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

그는 부담감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었다(26-27절)-그는 순복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그가 몸이 아파 거의 죽게 되었지만 바울과 빌립보 교회에 대하여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부담감을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이 필요하며, 이러한 사람들은 외국 선교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지교회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는 축복받은 그리스도인이었다(28-30절)-그는 바울에게 참으로 축복이 되었다! 당시와 같이 어려운 실정에서 함께 기도하며 바울을 격려하고 그와 더불어 수고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의 교회에도 축복이 되었다. 그가 있음으로 해서 그들은 바울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었다. 에바브로디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축복이 된다. 우리는 지금 그에 대하여 연구하며 그의 생애와 사역을 통하여 유익을 얻고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은 정당하게 존중을 받아야 한다. 바울은 “주안에서 그를 영접하라“고 권면한다(살전 5:12-13 참조).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는 말은 2장 8절의 “자기를 낮추시고“라는 말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2장 8절을 직역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셨다는 뜻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교회의 지도자에 대해 적절한 존경을 표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바울을 섬기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30절- “자기의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우리가 복종하는 마음, 곧 그리스도의 마음을 행사하는 것은 얼마나 다른가! 우리가 눈으로 보는 대로라면 낮아진다는 것은 잃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가르치기를, 높아지는 유일한 길은 낮아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복종하는 마음을 가지셨으며, 하나님은 주님을 높게 올리셨다!

바울, 디모데, 에바브로디도는 복종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이들은 그 희생과 봉사로 인하여 존경을 받고 있다. 사람들과 교만을 이기고 승리하는 유일한 길은 순종하는 마음, 그리스도의 마음을 통해서이다. 성령과 말씀으로 하여금 우리의 생활에서 역사하도록 허락할 때에만 우리는 이 마음을 받을 수 있다(2:12-13)."

 

▣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빌립보서 3장

 

“일들“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기쁨과 평화를 잃어버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다. 이들은 “땅의 일들을 생각하여“(3:19) 헌신한 신자로서 가져야 할 신령한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

본 장에서 “일“(things)이란 말이 몇 번 사용되었는지 살펴보자. 여기서 바울은 신령한 마음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곧 하나님의 생각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길로 인도해 가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17절을 읽고 신령한 마음에 대하여 좀더 알아보자.

본 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과거, 현재와 미래, 곧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온전한 전기를 설명한다.

 

1. 구원-그리스도인의 과거(3:1-11)

구원받기 이전의 바울은 종교적인 사람이었으나, 그의 종교는 그를 구원할 수없었다. 그가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종교를 잃어야 했다! 바울은 3장을 시작함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떠난 종교에 대하여 신자들을 경고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들“이라고 불렀으나, 여기서 바울은 할례를 강조하는 유대 선생들을 “개들“이라고 불렀다. 사실 그는 “할례“라고도 부르지 않고 “베어냄“(육신을 다만 절단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참된 예배는 성령으로 이루어지며(요 4:20-24) 육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예배는 인간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며, 육신의 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라고 통용되고는 있으나 실상 육신의 종교인 것이 얼마나 많은가!

바울은 유대의 랍비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성을 지닐 수 있었다. 출생과 훈련에 있어서 그는 친구들보다 훨씬 뛰어났다(갈 1:11-24). 그는 또한 진지하여, 유대 종교는 그에게 있어서 생명이요 죽음을 의미할 정도였으며, 너무도 진지한 나머지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기조차 하였다. 천국에 가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울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잃어버린 죄인이었다!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세상과 육신의 모든 학식과 재능을 배설물로여겼다! “...로 여기다“라는 말로 그는 설명한다. 조심스럽게 측정해 보고, 스스로 평가해 보고, 그리스도를 떠난 그의 모든 종교와 세상의 명예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그는 그리스도를 원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바울은 무엇을 얻었는가? 그 한 가지로는 의(義)이다(3절). 바울은 많은 법적인 의를 소유하고 있었으나(6절)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참된 의가 결여되어 있었다. 회당에 다닐 정도로 종교적이라는 것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의롭다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바울은 또한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을 얻었다. 구원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요 17:3), 바울은 또한 자기의 생활가운데서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였었다(엡 3:14-). 이 모든 축복들에 첨부하여,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특권을 가졌다(빌 1:29 참조). 마지막으로,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약속을 얻었다. 곧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다. 구약 유대인들은 부활을 믿되 말세에 있을 일반적인 부활을 믿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는 것을 소개하셨다. 이것은 첫번째 부활이다.

바울이 “어찌하든지...“라고 말한 것은 불확실함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겸손을 나타낸 것이다. 살인자인 그가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2. 성화-그리스도인의 현재(3:12-16)

처음 부분에서 바울은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따지는 “영적인 계산가“였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는 상을 향하여 땀흘리며 밀고 나가는 달리기 선수이다. 달리는 사람의 비유는 바울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고전 9:25-27/살전 2:19-20/히 12:1-3/딤후 2:5).

물론 바울의 말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달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이스(헬라)의 경주자는 올림픽에서 그들이 대표하는 나라의 시민이어야 하며,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어야 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노예이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시민이며(3:20),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되었다.

그리스도인 각자는 봉사 사역에 있어 특정한 위치(“track“)에 서게 되며, 그리스도께서 각자에게 설정해 주신 목표를 갖는다. 삶에 있어서 우리의 임무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잡고 계신 그 목적을 우리도 붙잡는 것“이다. 바울은 구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 곧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봉사 사역에 있어서의 성장과 진보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설정하신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그 한 가지는 자신에 대해 정직하여 우리의 현재 위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다음으로는 믿음의 눈을 그리스도께 유지하고 지나간 죄와 실패, 과거의 성공들도 잊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놀이가 아니다. “이 한 가지가 내가 할 일이다“라는 우리의 최선을 요구하는 경주이다. 조각 조각 나누어진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일부는 세상에 마음을 두고 일부는 주님을 위해 살며, “일“들에 대하여 야망을 갖게 되어 세상의 일들에 마음을 두기 시작한다. 우리의 부르심은 “높은 부르심“이며 “하늘의 부르심“이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을 위해서 산다면 우리는 높은 부르심에 따른 상을 잃을 것이다."

 

3. 영화-그리스도인의 미래(3:17-21)

그리스도의 오심을 바라는 것과 같은 신령한 마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세상적인 여러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주의를 준다. 여기는 기쁨으로 가득 찬 본 서신 중에서 슬픔을 대하게 되는 유일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믿음을 고백하였으나 세상을 위하여 살고 있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바울이 울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들은 이 땅의 일들을 생각하는데, 이 말은 이들이 세상적인 것만을 생각하며 세상이 제공하는 것만을 생각한다는 뜻이다.

-이들은 육신을 위하여 사는데, 이는 그들의 배가 그들의 신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종말은 멸망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이다. 십자가는 세상과 육신을 패배시킨다. 십자가는 희생과 고난을 말하지만, 이 사람들은 세상과 육신을 위하여,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산다.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말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더구나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죄인이 다시 태어나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될 때 그의 이름은 하늘에 기록되는 것이다. 이 말은 그가 하늘의 영광을 위하여 살 뿐, 이 땅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시민은 자기 나라를 높이는 것이 당연하므로, 그리스도인은 물론 하늘을 높일 것이다! 그는 하늘의 법으로 산다. 빌립보에 사는 사랑들은 마게도냐법이 아니라 로마법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마게도냐에 있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있는 하늘의 식민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의 법에 따라 산다. 천국의 법이 이 땅의 법과 대립이 되는 일이 많으나, 우리의 책임은 인간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 있다.하늘의 시민은 참으로 놀라운 미래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와 같이 될 것이다.“ 이 비천한 몸(“타락한“은 “낮아진 몸“-“겸손한 몸“의 뜻)은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영화로운 몸처럼 될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을 읽고 성도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재림이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될 것임을 알아보자. 이 날은 부활의 날이요 재결합의 날일 것이다. 또한 이 날은 회계하고 상을 받는 날일 것이다. 주님께 충성된 자로 발견되어 주님이 오실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를 빈다(요일 2:28-3:3)."

 

▣ 우리의 힘과 공급이 되시는 그리스도-빌립보서 4장

 

근심, 근심, 근심 ! 근심 때문에 행복과 평강을 잃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본 장에서 바울은 안정된 마음, 곧 하나님의 평강으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는 마음이 우리를 근심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고 말해 준다. 물론 한 마음(1장), 순종하는 마음(2장), 신령한 마음(3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신자는 결코 안정된 마음을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 장의 약속들과 조항들을 주장할 수 있기 앞서 바울이 앞의 세 장에서 말한 삶을 먼저 살아야 한다.

근심이란 무엇인가? 영어 단어의 “근심“(worry)이란 말은 “목을 졸라 질식시키는 것“을 뜻하는 고어에서 왔다. 근심이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목을 조르는 것은 확실하다. 성경 용어 “걱정하다“ 또는 “조바심하다“라는 말을 직역하면 “찢겨지다“는 뜻이다. 우리의 정신과 감정에 들어 있는 생각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겨 우리를 떼어 놓을 때 근심이 생긴다.

정신은 문제거리를 인식하는데, 이 문제거리들은 마음속에 감정을 더하여 불어넣어 결국은 그 사람을 찢어 놓는 순환논법이 형성된다. 마음으로는 우리가 신경질을 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 자신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우리가 평강과 행복을 가질 수 있기 앞서서 우리는 이 근심이라는 순환논법을 부숴뜨려야 한다.

근심을 일으키는 요인은 무엇인가? 사람들, 환경들, 그리고 사물들에 대한 그릇된 생각이다. 4장에서 바울은 사람들과(1-5절), 환경들(10-13절), 또는 생활에 있어서의 물질적인 것들에 대하여 아무런 염려를 하고 있지 않는 것에 유의하자(14-19절).

물론 바울은 1장에서 한 마음을 가지고 환경을 극복하고 승리를 얻었으며, 2장에서는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기고 승리하였다. 3장에서는 신령한 마음을 가지고 사물에 대하여 승리하였다. 따라서 그가 4장의 안정된 마음을 얻기란 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정신과 마음은 평화로웠으며, 사람이나 환경이나 사물에 의해 방해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 장에서 바울은 근심을 치료하는 네 가지 비법을 전해 준다.

 

1. 하나님이 함께 하심(4:1-5)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깝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가까이 계셔서 지금 당장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는 뜻이다. 빌립보 교회의 이 두 여인은 서로 불화하고 있었으므로 바울은 그들이 바른 관계를 가지도록 격려하였다. 근심은 언제나 사람들과 관계를 바르게 하지 않을 때에 온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정직하게 일들을 직면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마 18:15-17).

5절에서의 “관용“은 “친절한, 분별력“을 뜻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때 화해하기가 쉽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만일 모든 환경에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명심한다면 주님께 순종하며 다른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일은 쉽게 된다. 만일 우리가 오직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사람들에서 눈을 떼어 주께로 시선을 둔다면, 우리는 주님의 기쁨과 평강을 얻을 것이다.

바울의 권면을 눈여겨보라. “주 안에 굳게 서라, 주 안에서 한 마음을 품으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것은 생의 모든 환경 가운데서 주님을 보며 주님이 그의 완전하신 뜻을 성취하도록 하며 “그리스도의 현존(임재)하실“을 익히는 일이다."

 

2. 하나님의 평강(4:6-9)

“하나님과의 평화“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결과이다(롬 5:1). 신자가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기도하며 바르게 살 때, “하나님의 평강“이 오며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근심은 정신과 마음 사이의 긴장이다. 하나님의 평강은 그가 제시하는 조건에 우리가 응할 때 우리의 마을과 생각을 지킨다(수비한다).

바른 기도(6-7절)-단지 “기도“만이 아니라 “바른 기도“이다. 어떤 종류의 기도라도 우리의 마음에 평강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한 곳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바른 기도란 찬양으로 시작한다. 왜냐하면 6절에서 기도라고 한 말이 바로 찬양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즐기며 예배하는 중에 주님을 높이는 사랑이다. 주님 앞에 달려나가며 마음의 평강을 구한다면 결코 그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예배하며 주님께 머리를 숙이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살피시게 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간구가 있는데, 이는 정직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원을 뜻하는 것이다. 참된 기도는 입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온다. 우리의 요청을 주님께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

마지막으로는, 감사가 있다(엡 5:20/골 3:15-17). 불편한 환경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요구 사항이 허락을 받지 못해도 감사를 드릴 수 있기위해서는 믿음이 요구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감사드리는 말 듣기를 좋아하신다. 다니엘 6장 10절을 읽으면 다니엘도 이런 식으로 기도한 것을 알게될 것이다. 그가 사자굴에서 그와 같은 평강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바른 생각(8절)-평강은 마음의 문제이다(26:3/롬 8:6 참조). 생각에는 힘이 있다. “대저 그 마을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그릇된 생각은 불안과 실의로 이끌어 갈 것이며, 신령한 생각은 평강으로 인도해 간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이러한 덕들을 시편 19편 7-9절과 비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한 모든 조건들에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은 반드시 평강으로 인도한다(시 119:165).

바른 생활(9절)-담대히 기도할 수 없게 하는 무엇인가가 내 생활에 있다면 나는 결코 평강을 가질 수 없다. 바른 생활은 언제나 평강을 가져다준다(사 32:17/사 48:18/사 48:22). 성경을 기도의 근거나 약속을 주장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생활의 기초로 사용하며 그 법도에 순종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이다. 야고보서 4장 1-11절을 주의해서 읽고 그릇된 기도(4:3) 그릇된 생활(4:4), 평강대신 그릇된 생각(4:8)이 싸움을 낳는다는 것에 유의하자 !"

 

3. 하나님의 능력(4:10-13)

바울은 결코 환경의 희생물이 아니었다. 그는 경험으로 평강의 비결을 배웠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는 구절이 다른 번역본에서는 “나는 내 안에서 사는 분의 힘을 통하여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고 있다“(Phillip's Translation)고 되어 있다. 빌립보서 2장 12-13절로 돌아가, 하나님이 먼저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실 수 없으심을 보자.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살전 2:13), 그리고 기도와 성령을 통하여(엡 2:14-)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실패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존할 때 우리는 그를 통하여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바울이 감옥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안정된 마음을 얻는 비결을 배웠던 것이다."

 

4. 하나님의 예비하심(4:14-23)

“일“에 대하여 근심하게 되기는 얼마나 쉬운 일인가 ! 예수님은 산상설교를통하여(마 6:19-34), “일들“에 대해서 우리가 염려해서는 안된다고 우리에게 경고하시는데, 우리는 꼭 그런 일을 행한다. 바울은 그의 개인적인 필요들에 연관하여 마음에 평강을 누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

그는 그들의 선물로 인하여 빌립보 사람들에게 감사했으며, 그에게 있어 그들의 선물이 지닌 영적인 의미는 선물 자체보다도 훨씬 더한 것이라는 확신을 준다. 하나님께 바친 우리의 선물이 우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희생 제물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알 때 참으로 축복이 된다.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으며 하나님이 사건들을 조절하시고 계심과 모든 필요에 대처하실 수 있으심을 믿었다(롬 8:28).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때 모든 우주는 그를 위하여 일할 것이나, 그가 하나님의 뜻밖에 있을 때는 모든 일들이 그에게 대항하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 빌립보서의 適用

 

빌립보서와 같은 놀라운 복된 책을 연구하고 그 대략과 핵심 진리들을 배우고는 자신의 길로 가버리기는 쉬운 일이다. 이렇게 한다면 성경을 연구하는 주된 이유(곧, 보다 나은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를 놓치는 것이다. “내적인 절망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다. 이들은 근심하고 신경질을 낸다. 기도는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은 결코 올 것 같지가 않다. 이들은 사람들, 환경들, 사물들에 대하여 신경질을 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유업인 기쁨과 평강이 결여되어 있다.

빌립보서는 일상적인 평화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들 중에는 이 놀라운 비결을 놓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으므로, 우리가 이 책을 복습하고 우리의 마음속에 이 진리들을 적용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이 책에 나오는 진리들이 당신의 생활에 실현되기 위해서는 따라야 할 몇 가지 간단한 단계들이 있다.

 

당신의 문제들이 내적인 것임을 인정하라.

당신의 불안과 근심을 환경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어떤 일들이 결핍된 탓으로 돌린 일이 있는가? 당신이 근심하는 것을 교묘하게 변명하며 당신의 조절 능력이 미치지 않는 환경 탓으로 돌린 일이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에는 결코 하나님의 평강과 기쁨이 머물지 않을 것이다. 모든 문제거리들의 핵심은 마음의 문제이다.

근심은 “내적인 일“이며, 무엇 때문에 생겼는지를 정직하게 시인하고 고백해야만 한다. 곧, 죄 때문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복해지기 위해 당신이 맨 먼저 해야 할 일은 핑계대기를 그치며, 외부적인 환경이나 사람들, 일들을 탓하는 것을 중단하고, 당신의 마음과 정신과 내적인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과 뜻을 살피시게 하라.

그리스도는 “마음과 뜻“을 살피신다(계 2:23). 마음과 생각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 근심이 생겨나는데, 근심은 환경, 사람들, 또는 사물들에 대한 그릇된 생각과 감정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과 생각에서 그릇된 생각과 태도를 보신다면 하나님의 평강을 주실 수가 없으시다. 원한, 복수심, 씁쓸함 등, 이 모든 일들은 마음과 생각에 해독을 끼치고 종국에 가서는 전 인격에 해악을 끼친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만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시 139:23). 자기의 마음과 생각에 있는 바를 시인하며 고백하기를 거절하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관계를 바르게 하라.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잘못되었으면 나는 그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그리스도인답게 견해 차이를 해결하라고 강권한다. 마태복음 18장 15-17절은 우리가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해 준다. 과거는 그리스도의 피 아래로 가져가서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문제를 바르게 하지 않는 한, 우리를 따라 다니며 괴롭힐 것이다.

 

한 마음을 가지라.

당신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면서 또한 세상을 위하여 사는가? 아니면, 죽거나 살거나 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며 그를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 당신의 한 가지 큰 소망인가? “두 마음을 품은 자는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니라“(약 1:8). 주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하셨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불행하며 좌절하는 것은 그들이 정직하게 한 마음을 가지지 못한 때문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그의 삶의 첫자리에 두지 않는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봉사 사역“에 온전히 시간을 바치라는 뜻이 아니라, 온전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라는 뜻이다. 즉, 목수는 그리스도와 그의 영광을 위하여 톱질을 하고, 점원은 고객이 미소를 받을 만하거나 않거나 예수를 위하여 그들에게 미소를 보내며, 학생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며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하여 좋은 점수를 얻도록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뜻한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순종하는 마음을 양성하라.

교만은 사람들 사이에 알력을 일으켜서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라는 식으로 어느 누구도 양보하지 않게 된다. 야고보서 4장에서 사람들이 교만하며 이기적일 때에 오는 생생한 혼란의 모습을 읽어 보자. 순복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와 다른 이를 자기 앞에 둔다.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겸손이란 이 세상의 정신과는 너무도 반대되기 때문이다. 비록 보기에는 우리가 잃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신령한 마음을 양성하라.

당신은 재산, 안정, 쾌락, 성취 등의 일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는가? “세상의 일들을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인가? 사실이 그렇다면 결코 행복할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일이란 언제나 변하며 결코 만족을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신 데에는 특정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라. 당신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채울 수 없는 그러한 위치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원하시는 한 가지 일을 발견하고, 그 일을 하라! 세상이 당신을 무시한다거나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잘했다 !“고 말씀하시는 것만이 문제인 것이다. 경주가 끝나면 모든 희생에 대해 그 값을 치러주실 것이다.

 

근심하기 시작하면 멈추어서 당신 자신을 검토하라.

근심이란 사람들, 환경들, 그리고 사물들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그릇된 자세이다. 만일 내가 근심하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면 이것은 나의 마음이나 생각(또는 둘 다)이 뒤로 한 걸음 후퇴한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한 마음을 가졌는가, 아니면 환경에 따라 요동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살기를 멈춘 것은 어느 선인가?“

아마도 어떤 사람이 근심의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나는 순복하는 마음을 갖기를 멈추었으며 나 자신을 내세우기 시작하고, 또는 내 길을 막는 사람에게 “보복을 하려고“ 할 것이다. 또한 어쩌면 문제가 되는 것은 “일들“일 것이며 신령한 마음 대신에 세상의 마음을 가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빌립보서 1, 2, 3장에 나오는 한 마음, 순종하는 마음, 신령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4장에 나오는 안정된 마음을 결코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다.

근심하는 것을 알고 그 원인을 안다면 그것을 시인하고 즉시 고백하라.

옛 본성은 자기 연민을 부채질해 주며 원한과 굳은 감정을 양육하기를 좋아한다. 근심을 깨닫게 되는 즉시, 그리고 그 근심의 요인이 무엇인지를 아는 즉시, 이것을 죄로써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며, 요한일서 1장 9절이 작용하도록 해야한다. 자신에 대하여 냉혹하라 ! 만일 자아를 버릇없이 기르며 근심을 키운다면 행복과 평화를 잃을 것이다. 환경, 사람들, 또는 일들에 핑계대기를 중단하고, 문제는 내부에 있는 것임을 시인하며 근심이 죄라는 것을 인정하자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유지하라.

평강을 위한 공식을 암기하자. 즉, 바른 기도와 바른 생각, 바른 생활이다. 말씀과 기도에 매일 시간을 드리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자기의 모든 염려를 그리스도께 던져버리고 온종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은 그의 생활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소유할 것이며,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음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평강을 주는지 모른다.

다음의 구절들을 암기하자. “의의 공효(work)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17).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사 26:3).

근심은 습관이요 생활 방식이다. 어떤 사람들은 근심하는 것을 즐긴다. 근심은 이들을 순교자가 되게 한다. 그들은 관심과 동정을 모으고 자신의 자아(ego)를 부풀린다. 바리새인들처럼 이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기의 문제와 골치거리들을 행진시킨다. 우리의 동기가 바르다면 우리의 짐을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누어 지게 하는 일은 잘못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관심과 동정을 바라는 것이라면 우리의 문제를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편이 낫다. 근심이란 죄이다. 따라서, 사람들 앞에 우리의 죄를 늘어놓는다는 것은 무가치한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행복은 문제들이나 곤경으로부터 자유로운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것이다. 바울은 그가 감옥에 있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그 감옥 생활에 대한 그의 마음 자세는 그에게 자유로움을 주었다! 당신의 가정이나 혹은 당신의 직업이 감옥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에 대한 당신의 마음과 생각의 자세가 올바르기만 한다면 당신은 여전히 기뻐할 수가 있다.

주님께 헌신함으로(순복함으로) 매일을 출발하라. 한 마음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실 것을 기도하라. 즉, 처해 있는 모든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살며, 복종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와 다른 사람들을 첫자리에 두고, 이 땅의 것들이 아니라 하늘의 부르심에 집중하는 신령한 마음을 가지고 살자. 그리고, 하나님의 평화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는 안정된 마음으로 살아가자."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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