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神學/[신학]Jean Calvin의 신앙

[스크랩]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好學 2010. 4. 11. 20:51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Ⅰ.들어가는 글

 

 인위적 과학 기술과 방편들과 인본주의적 가치 체계가 강조되는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주되심과 그분의 절대 주권을 인정할 것을 엄연히 선포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의 계시아래서 그분의 '주권자'되심을 인식하는 가운데  마땅히 그분께 영광과 존귀와 지위를 돌려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은 피조물로서 마땅한 자세이며, 구원받은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당연한 의무인 것이다.  

칼빈주의는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며, 그 가운데서 인간에게 나타나는 전적 무능력함과 구속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강조한다.  

성서에 입각하여 조직적으로 체계화된 칼빈주의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 가는 것은, 우리 신앙의 자본을 실질적으로 구축할 수 있는 유익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칼빈주의의 정의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봄으로서 칼빈주의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그후 칼빈주의의 신학 체계에 대해 자세히 서술함으로서, 칼빈주의가 주장하는 전반적인 신학 체계를 쉽게 인식할 수 있게 노력하였다.

마지막으로 '칼빈주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칼빈주의 5대 교리에 대해 성서적인 입장안에서 고찰해 봄으로서 알미니안 주의와 어떠한 점에서 구별되는가를  구분하여 개혁주의 신앙의 지표에 대한 이해가 분명해지도록 하였다.  

참고적으로 칼빈주의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과 발전사에 대해 기술하여,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칼빈주의를 연구할 수 있게 하였다.  

아무쪼록 이 칼빈주의 소고를 통해 그리스도안에서 성서에 나타난 분명한 계시의 빛 비춤을 얻어, 그리스도안에서 그분에 대해 아는 지식이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길 기도 드린다.(빌3:7-9)       

 

Ⅱ.칼빈주의의 정의

 

칼빈주의는 16세기 중반 제네바를 중심하여 중교 개혁을 일으킨 칼빈의 교훈을 충실히 따르는  신학자들이 17세기 초에 체계화 시킨 하나의 신학 체계를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칼빈주의는 루터파와 구별되는 '개혁파'의 신앙 고백과 교리 문답들에 본질적으로 나타나 있는 신학적인 신념 체계를 가리킨다.

칼빈주의는 바울과 어거스틴의 신학 사상을 계승한 포괄적인 성경 사상 체계로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근본 원리로 채택하여, 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조직화된 신학 사상이다.(롬11:36)

칼빈주의는 인간의 관심사나 인간 중심의 세상 체계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도리어 칼빈주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하셨으며, 그의 영광과 주권을 위해서 인간을 어떻게 붙드시며 섭리하시는 가를 먼저 생각하는 신학 체계이다.

즉,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중심으로 하여, 인간의 모든 사상과 삶의 근원을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에게서 시작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주와 구속주로서 만물의 처음과 나중이시며, 우주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는 절대 주권자와 입법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칼빈주의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연히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는 하나님 중심주의 신학 체계이다.    칼빈주의는 낙관주의 문화 철학이나 낭만주의가 아니라, 하나님과 성경을 제일로 여기고, 무한한 영광과 존귀와 능력속에 있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순종하는 사상이다.

 칼빈주의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연히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는 하나님 중심주의 신학 체계이다.

 

Ⅲ.칼빈주의 신학 체계

 

바우르는 칼빈주의의 기본원리를 "모든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하며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며, 인간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라 하였다.

 

1.하나님

 

  신인식의 문제가 인간에게 본질적인 문제임을 칼빈은 지적하는데 그는 "신인식의 문제는 인간들이 마땅히 일생을 바쳐 탐구해야 할 주제" 라고 말하고 있다.   칼빈이 주도한 제네바 교회 신앙문답 제1문에서는 " 인생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일 " 이라고 했고 제3문에서는 "인간 최고 행복도 신인식" 이라고 했다.   칼빈은 하나님 의식을 특별히 강조하여 그의 모든 사고와 일상생활의 대소 문제에 있어서까지도 하나님의 생각에서 조금도 떠날 수 없었다.   따라서 칼빈의 신인식은 불가피하게 인간 실존의 자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었고 이 신인식은 창조자로서의 참되신 하나님 인식으로 이끌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즉 칼빈은 신인식을 어디까지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 보았고 그리스도의 계시와 성령의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의 지식으로 확신했다.12)   따라서 칼빈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믿음과 일치 대응되는 사상임이 틀림없다.  그 이유는 성경에 나타난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존재 인식이 아니라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본질은 알 수 없고 가까이 할 수 없으므로 냉담한 사변은 그것을 엿보지  못한다고 보았다.   참된 하나님 인식은 단지 그의 존재를 아는 것 뿐이 아니고 그의 영광도 알고 그에게 대하여 경외의 있어서 이러한 지식은 하나님께로부터 생긴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본질은 계시에 의하여 알려지고 계시는 사람의 유한한 이해력에 적응시켜 진다.   즉 하나님의 본질은 사람에 접하면 사람을 죽게 하므로 피조물에 나타나는 것은 그의 영광으로 하신 다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계시의 간접성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을 탐지할 수 없는 높이에서 찾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한도 안에서 인식하라고 주장하였다.   즉 칼빈은 신인식에 있어서 피조물로나 죄인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한계를 지었다.

   칼빈은 신인식의 원천으로서 창조와 성서를 병립시키며 사람의 본래 마음에는 그것이 타락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씨가 잔존한다고 하여 자연에서 신인식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의 기술을 보면 강요 1:2:1에 아담이 순결했더라면 하는 전제도 말했고  종교의 씨는 더러운 미신에, 더러는 의도적인 악행에 기울어지고 열매 맺을 만큼 성숙함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했고  자연적 신인식이란 사람으로변명하지 못하게 하는 것 뿐이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신인식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즉 칼빈은 부패한 인간에게 관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상숭배와 모든 미신의 무서운 원천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자연은 신인식의 원천 으로서는 불완전한 것이고 오직 성서만이 유효하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마음안에 자연적으로 심어져 있다고 주장하며, 또한 창조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들에 대한 영광스러운 계시라고 하였다,

그러나 인간은 조의 상태에 의해 눈이 어두워져 있어서 성서에 주어진 더 완전한 계시를 필요로 한다,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특성은 출34:6에 나타나 그 이름에서 밝히 제시되고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출34:6)

더우기 이렇게 열거된 완전성들은 우리가 하늘과 땅에서 빛나고 있는 것을 보는 그것들, 즉 동성, 선하심, 자비,공의, 심판의 진리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의로써 모든 사람들안에서 보시는 죄악을 사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미움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지 인간을 사랑하셨기에 무한한 그분의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값없이 구속의 은총을 주셨다.

 

2.창조물인 인간의 의지

 

창조물은 절대적이고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해야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숨겨진 '영감과 능력'에 의해 창조물을 유지하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신다.(하나님의 내재성) 하지만 하나님이 결코 범신론적으로 그의 피조물들과 동일시 되지는 않는다.(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세계를 자신의 목적에 따라 그 섭리에 의해 통치하신다.(하나님의 목적성)

개혁파 신학의 근본적인 관념은 세계는 그 삶의 모든 부분과 과정과 단계와 형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진행된다.  

즉 창조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작정을 따라 만물이 그 창조의 정해진 법칙을 따라 필연적으로 자유롭게, 또는 우연적으로 이루지게 하도록 정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창조자가 아니시며, 피조물의 의지를 침범하지도 않고, 제2의 원인이 되는 것들의 자유와 우연히 되는 것을 페하시지도 않고, 오히려 그 것들을 굳게 세우신다. 하나님은 가능한 모든 상태에서 되어질 일이나 또는 되어질 수 있느 것은 무엇이나 알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장래의 어떤 일에 대해서 장차 그 일을 보고 아시므로 작정하심도 아니며, 또는 무슨 일이 어떤 형편에서 되어질 것임으로 무엇을 작정하신 것도 아니다.  

  칼빈주의에서 모든 행위와 사건들을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 포함시킨다고 해서, 이차적인 원인들이 작용하는 현실(인간 자유의 현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의지의 자유'를 인간에게 주신 자연적인 은사로 여겨 소중히 여긴다.

인간은 본래 타락하기전의 올바른 상태에서는 의지의 온전한 자유를 소유했으며, 아담이 그 의지를 사용하여 생명 나무를 선택했더라면 영생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앞에서 범죄하여 넘어진 것은 아담 자신이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여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후 인간의 자유 의지는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게 나아가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기위해, 죄을 짓고자하는 내적인 죄성에 더 기울어 지게 되었다.

칼빈주의을 보다 분명히 파악하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다시금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생활의 복잡한 현상에 있어 하나의 작은 요소에 불과 하다.

인간은 주어진 상황안에서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며, 다만 제한된 정도로 상황을 만들어간다. 물론 인간은 어느 정도로 자기의 환경을 만들기도 하며, 파괴하기도 하지만, 결코 전적으로 그것을 변화시킬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경우에 인간에 제어 할 수 없는 원인들이 혼합되어 있으며 , 일반적으로 그러한 제어 할 수 없는 것에 압도되고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은 자기의 부모나 자기가 태어난 환경과 삶의 상태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며, 또한 특정한 나라와 문화안에서 자신를 이 사람 저 사람들과 만나게 하며 자신에게 기회를 주며, 관계를 맺게 하는 특별한 사건의 과정들을 스스로 선택해서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만들지 않는 힘들과 부딪히며, 어떤점에서든지 외적인 섭리에 조금만 변화가 생기면 그와 관련되는 모든 개인들과 그것들 다음에 오는 사람들의 미래의 전체적인 양상이 바꾸어질 수 있다.

예컨대, 요셉이 형제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가지 않았더라면 하나의 특정한 행위가 일어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집트에서의 요셉의 결정이 전적으로 없을 것이며, 전적으로 다른 결정들에 있어서 요셉 자신과 이스라엘과 세계에 다른 결과가 생겼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편에서 본다면 인간의 의지가 무슨 소용이 되는가? 하나님의 예지'에는 가능성들'만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창조주앞에 놓인 이 무한한 가능성들가운데서 하나님이외에 누가 무엇이 그 이차적인것들이 '현실성들'로 나타나게 할 수 있겠는가?

피조물의 이차적인 자유와 부수성은 단지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만 이것들이 현실적인 세계안에서 원인들로 작용하도록 허락을 받게 된다.

 

3.죄

 

칼빈주의의 섭리론에선 죄가 창조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의지에서 나온다고 일관성있게 주장한다. 그러면 죄의 행위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죄는 하나님에 의해 허락된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에 따라 하나님에 의해 여러 가지로 결정되고 규정되고 통제된 것임을 가르쳐 준다. 죄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며, 이 죄는 하나님의 지혜속에서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인간안에서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며 통제하신다.

즉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하신 선하심이 죄와의 관계속에서 그분의 섭리을 통해서 나타난다. 죄는 단순히 하나님의 허락에서뿐만 아니라, 그분의 섭리안에서 지극히 현명하고 능력있는 통제력을 결합시킨 가운데 일어나며,  그분 자신의 거룩하신 목적에 따라 여러기지 경륜속에서 그것들(죄가 일어나게 될 환경과 시간등)을 정하시고 지배하심으로 그렇게 하신다. 하지만 그것의 죄악성은 단지 피조물에게서 나오며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셔서 죄를 창조하거나 승인할 수 없는 분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죄을 지은 인간을 반드시 심판하신다.(롬3:22-23)

 

4.인간

  

칼빈의 인간 타락이전의 상태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형사에 관하여 사람의 구성요소 가운데 동물보다 뛰어난 것이 있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안의 모든 동물에 뛰어난 요소에까지 미친다.   따라서 이 말은 아담의 지성이 명확하고 감정이 이성에 복종하고 그의 모든 감성이 잘 조절되고 자기가 가진 모든 훌륭한 것은 조물주가 주시는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하던 그때에 아담에게 주어진 완전성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어서 칼빈은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장소에 있었고 진정으로 이 은사를 가지고 평화롭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는 두가지 가능성 중의 하나를 택해야 했는데 그는 불행히도 옳지 않은 부분을 택했으므로 타락하게 되었다고 했다.

  칼빈은 원죄의 성격이 부정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더 적극성을 띤 아담의 행동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원죄를 설명하는 용어는  교만이라든가 아니면 불순종, 배신, 변절, 범법과 같은 적극성을 띤 용어가 많은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아담이 원죄를 범할 때 범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했거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범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명렬에 반항하는 행동인 줄 알면서 행한 것으로 보았다.   이 원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미친 상처는 "인간 존재의 한 부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 전체에까지 미쳤다."  "머리에서 발꿈치까지 존재 전체가 사악의 홍수에 침몰되고 말았다." 고 그는 인간의 전적 타락을 말하고 있다.17)  

칼빈주의에서는 인간은 창조주의 형상에 따라 순수한 존재로 지어졌지만 지금은 임의로 선으로부터 떠나 타락하고 부패한 것으로 본다. 인간 본성의 이런 부패는 인류의 첫 조상으로부터 나와 모든 후손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인간의 자연적인 은사들은 죄에 의해 부패되었으며, 인간은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회수되었다

한 사람의 죄가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되는 갓에 대해서 칼빈은 '간접적인 '전가론을 주장한다. 즉 아담의 자손들은 직접적으로 아담의 죄 때문에 정죄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부패와 그 부패한 본성에서 비롯되는 죄의 행위들을 통해서 정죄받는 다는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을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다(롬5:12)

즉 모든 삶이 원죄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의 오점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아마 모든 사람들이 본래 씨의 형태로 그 아담 한 사람안에 있었으며, 인류의 자연적인 본질에 의해서 유전적인 부패, 보편적인 타락과 ㅇ니간의 영적 자유의 상실등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에게 덕목이나 찬란한 업적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칼빈은  이 덕목들과 은사들을 인간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과 형상의 잔재로 설명하고, 완전한 부패를 막기 위한 억제적인 은사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특히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보편적인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활동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덕목들안에는 하나님을 위하는 참된 경건의 뿌리가 없으며,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의의 특성을 결코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은 스스로 지식이나 의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없다

 

5.중보자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죄를 위한 유일하고 가장 완전한 희생과 보상이며, 온 세상의 죄를 속하기에 충분한, 무한한 진가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더욱이 복음의 약속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한다. 이 약속은 회개하고 믿으라는 명령과 함께, 하나님이 그의 순수한 선의에 따라 복음을 보내시는 모든 민족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과 구별 없이 선포되고 공포되어야 한다. 그리고 복음에 의해 부름을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거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불신속에서 살기 때문에 마땅히 자신의 죄로인해 멸망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위에서 드린 희생에 어떤 결함이나 부족이 있기 때문이 아니고, 전적으로 그들 자신들에게 돌려져야한다.

 

 6.칭의와 성화   

 

   A. 칭 의

   칭의란 성경에서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는다"고 표시되어 있는데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서 칭의라고 한다.   칭의라는 말이 구약에서는 "체다카(    )"란 말로 사용되었고, 신약에서는 "디카이오수네(         ) 란 말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성겨에서는 믿음과 칭의라는 말이 병용되어 사용되고 있는 데 이것은 구원을 양면에서 말했기 때문이다.

  행위에 의해서는 바르다는 증거를 받을 수 없는 죄인이지만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 그의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나타날 때에는 신앙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인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다.   이 칭의는 상속이 아니고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재로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이 사면은 우리 자신의 무죄가 확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였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라고 말하였다.   즉 칼빈은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은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의롭다함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며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받는 것으로 해석 하였다.  

 

   B. 성 화   

   칼빈에 의하면 칭의가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처럼 성화도 믿음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로 칭의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되어지고 성화는 보내주신 성령의 역사로 되어지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강조하였다.   칼빈은 그리스도는 우리를 세상과 분리시키고 영원한 유업의 소망을 갖도록 하시기 위하여 어떤 특별한 방식을 따라 성령과 함께 오셨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그는 성화의 영(SPIRIT OF SANCTIFICATION)이라 불리다고 보았다.   

 

7. 성서론

 

   칼빈은 열광적 영감주의자가 성서 본문을 떠나서 임의의 때와 곳에서 받는 일시적 감명으로  진리 판단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았다.   칼빈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있게 우리에게 파악되는 것은 성령의 내적 증거로 된다고 했다.   즉 성서의 으뜸이 되는 증거는 말씀하시는 자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또 성서의 말씀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확신이 어디에서 오느냐 함을 설명하기를 " 만일 우리가 양심의 참된 관심을 의논컨대 -저희가 심적 동요를  받지 않기 위하여- 또 영속적 의심의 주제를 의논컨대 -저희가 적은 일에 주저 않기 위해서-    이 확신을 인간의이성이나 판단이나 추측보다 높은 원천에서 구해야 하는 데 곧 성령의 숨은 증거에서 얻은 것이다. " 고 하였다.   이 구는 강요 제2판(1541년)에 처음 있는 그대로 실려 있고 그 이후 성서의 권위가 항상 제 1원리로 강조 되었다.

   칼빈은 성령의 내증을 설명하면서 이 원리는 결코 주관주의가 아닌 성서 본문의 자증력과 그 명료성을 전제로 하고 그 저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시던 성령이 그 문자에 기계적으로 구속 받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독자에게 다시 인격적으로 임하여 가르치는 것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이 성경의 권위의 소재를 성령에 두는 것으로 성서 자체가 성스러운 영감받은 책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합리적인 증거도 열게 되었다.   그러나 성서의 권위를 받든다고 하여 똑같은 해석을 하기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는 말하기를 경건히 또는 열심히 존경과 바른 마음으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종종 의견을 서로 달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의 종들로 하여금 그들이 모든일의 완전하고 충분한 지식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며 그들로 겸손하게 하며 인간이 성서의 진리를 찾아냄에 있어 서로 돕고 서로 보충하기를 권면했던 것이다.

 

8.삼위 일체론

 

   칼빈은 전통적인 표현 "인격"이란 술어를 독특한 말 SUBSISTANCE, 즉 존재 양태, 현실 존재로  대치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칼빈은 SUBSISTANCE라고 부른 것은 개별적 현실 존재성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요한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가 곧 하나님이라고한 것은 동질성과 개별적인 존재와 특성을 각 인간이 지속한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 하였다.   즉 다른 존재 양태에서 관계되어 있으면서 도히려 혼동될 수 없는 특성으로 서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성서적 계시에 의한 하나님은 자기를 하나라고 선언하면서  명확한 구별로 세 인격으로 생각하도록 제시하였다고 했다.   이어서 이것을 이행하지 않고는  우리는 참 하나님의 사상이 없고 우리의 머리중에 부동하는 하나님의 공허한 이름만을 가지게  된다고 하여 삼위일체는 신관의  본질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세 인격의 본성은 개별적인 검토에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나치안의 그레고리의 말과 같이 세 인격의 동시조명에서 비로소 한 인격이 이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터틀리안의 말을 인용해서  한 하나님이 계시지만 오히려 배경과 질서에서 그의 말씀이 있다는 것과 본질의 통일에서  한 하나님이 있으나 이 통일이 신비스런 배경으로 삼위에 배정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셋이 있음은 상태로가 아니라 형태에서, 권능에서가 아니라 질서에서 된다고 하였다.   터툴리안의 이 세가지 인격의 차이에 대하여 많은 공격이 있으므로 그는 이를 변호하여아들이 아버지 다음 간다고 주장했으나 그는 이것을 인격의 구분에만 적용한 것이지 본질에서는 그런것이 아니라고 했다.

   칼빈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의 특성은 구분되고 부자, 성령이 영원하고 성부에게도 지혜나 권능이 결여되지 않으므로 시간적인 선행 후행을 말할 수는 없으나 질서가 존재 한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칼빈은 하나님은 세가지 본체가 있고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시며 분할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가 참 사람이지만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양성(신성, 인성)의 완전함을 주장하였다.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 오셨고 하늘을 떠나지 않고서 자의로 처녀의 태중에 계시며 지상을 다니시며 편만하셨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칼빈은 성부와 성자에 관한 이러한 이론을 성령에도 동일하게 적용했는데 왜냐하면 성령을 성부, 성자와 구분이 된 분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다.

  칼빈은 삼위일체와 위라는 말이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 한 실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실체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통할 수 있는 특성에 의하여 구분된다고 보았다.   즉 칼빈은 성부, 성자, 성령이 본질에 있어서 일치하며 고유성의 구별에도 불구하고 관계에서 일치하며 그 행동양식에 있어서도 일치함을 설명함으로써 고대 교회로부터 교회신학이 정립하고 인정한 삼위일체의 한 위로서의 성령의 신격과 그 관계와 행동에 있어서 오류가 없음을 성서상의 증거를 들어 믿고 승인하였다.   

 

       9.성령론

 

  칼빈은 성서에 나타난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하였고 고대 교회 교부들이 인정하고 있는 성령의 신격을 인정하고 그 어휘를 사용하였다.   칼빈은 성서의 증거들을 들어서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의심없이 믿고 해명했는데 기독교 강요 제3권에서 성령을 삼위일체의 체계 안에서 성서가 증거하는 성렬이 하나님이심을 해명하고 있다.   그가 '성령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믿고 승인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이 있었는데 첫째, 성령이 사용된 이름이  신이심을 증명한다.   성자가 인격적 존재 이기 때문에 예수(마1:21,25)라는 이름을 가진 것처럼 성령도 인격적 존재 이기때문에 보혜사(요16:7)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가 성령을 속였을 때 베드로가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4)라고 책망하였다.   둘째, 하나님의 속성이 성령에게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즉 영원성(히9:15), 전지성(고전2:10-11), 편재성(시 139:7-8), 생명과 진리의 영(롬8:20, 요16:13)등을 거론하고 있다.   셋째, 성령 훼방죄는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훼방하는 자가 용서 받지 못하듯이 성령을 훼방하는 죄도 용서르 받지 못한다. (마13:31-32)   네째, 여러가지 은혜를 선물로 주신다는 것이다.(고전 12:4-11)마지막으로 마태복음 28:19절을 인용하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이니 되리라" 에서 이름이 단수로 사용됨에 따라 삼위가 한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칼빈은 성령 하나님이 어떤 현상적육안으로 볼 수 없는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지만 성경에서 여러가지 현상적인 제목을 붙여서 이름을 불렀던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성령을 양자의 영 (SPIRIT A DOPTION), 보증과 인(THE GARANTEE AND SEAL), 물(WATER), 불(FIRE), 생명(LIFE), 기름과 기름부음(OIL AND ANONTING), 샘물(SPRING), 주의 손(HAND OF LORD)등으로 표현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성령을 삼위일체의 한 위로서의 성령으로 보았고, 아버지와 아들의영으로서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위하여 일하시는 인격적인 영이라고 하였다.

 

10.거룩한 공회(교회론)

 

칼빈에 의하면 참된 교회는 믿는 자들의 어머니이므로 성도는 교회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따라서 성장하고 발전한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오직 하나의 몸을 가지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러한 교회에는 참된 두 가지 표식이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파하는것과,  성례가 정당하게 베풀어지는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바른 교리와 바른 예배에서 떠난 로마 교회는 참 교회라고 할 자격이 없다. "진정한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요 또 그 기초라고 한다면(딤전 3:15) 거짓말과 허위가 지배하게 되는 곳에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역을 사용하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  복음선포의 직책은 특히 중요하다.  칼빈은 로마 교회의 교황 중심의 성직 제도에 반대한다.

집사는 두 가지 직무를 수행한다.  하나는 구제 물자를 나누어 주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빈민, 병자 및 과부를 돌보는 일이다.

칼빈은 교회가 교역자를 투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선 하나님의 선택의 증거들을 보고 하나님의 선택된 성도의 높은 표준에 의하여 투표로 선출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교회의 왕권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주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대리나 후계자를 필요라 하지 않고 홀로 친히 그 권리를 지키시며, 따라서 아무에게도 이양하시지 않는다."  칼빈에 의하면,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머리이시며, 우리는 모두 그의 지배 하에서 그가 제정하신 질서와 조직에 따라 서로 연합된다. 교회에 머리가 없을 수 없다는 구실로 세계 교회 위에 한 사람을 앉히려고 하는 그들은 그리스도를 현저히 모욕한다. 교회의 대리는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고 주장 한다.

칼빈은 교회회의의 권위에대해 어는 종교회의의 교리결정이든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며 그 회의가 언제, 어디에서 모였고, 무슨 문제로 모였으며, 누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무슨 말을 했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한다.

칼빈에 의하면 회의들도 인간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칼빈은 교리문제 혹은 성경해석의 문제로 교회가 싸울 때 노회나 총회 차원에서 결정하되 말씀과 성령을 따라 그렇게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칼빈은 권징의 필요성과 목적을 이야기하는데, 권징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악한 사람들 때문에 선한 사람들이 타락하는 일이 없도록, 악한 자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이다.  그러나 사소한 죄악이 아니라 큰 범죄에 대하여는 출교시켜야 한다.

칼빈은 성찬에 대해서 하나님은 성찬을 통해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인도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연약함에까지 자신을 낮추사, 그의 말씀에 보이는 표식을 더해주시고, 우리를 모든 의심과 불확실함에서 건지신다.

성만찬을 제정하신 이유에 대해 칼빈은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먼저 보이는 표식을 통해서 약속의 실체를 나타내시기 위해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교제한다는 이 '신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성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를 깨닫고 하나님을 보다 온전히 찬양토록, 성찬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임을 알고 모든 성결에 힘쓰도록 하기 위해서라 말한다.  이러한 성찬이 가져다주는 유익으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도하여 우리에게 무슨 불의가 있든지 주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는 것이며, 우리에게 어떠한 비참함이 있든지 지복으로 우리를 채우신다는 사실을 우리로 확신케 한다는 것이다.

성찬은 죄인된 우리를 건지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부어주신 유익을 잊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감사하게 하고, 공적인 신앙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그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를 고백케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성찬에 참여하는 자의 태도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신앙의 터를 제공하는 국가 역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칼빈에 의하면, 인간 사회에서 정부가 하는 일은 빵과 물과 태양과 공기가 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다. "사람들이 호흡하고 먹고 마시며 따뜻하도록 하는 이런 모든 활동을 포함한 생활 방도를 마련할 뿐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한다"(우상숭배 억제, 치안 유지, 시민 재산 보호, 인간 상호간의 선한 교제를 가능하게 함).  이러한 의미에서 국가에 대한 신자의 태도역시 중요하다고 말했다.

 

Ⅳ.칼빈주의 5대 교리

 

1.전적 타락(Total Depravity)

 

인간은 아담의 범죄후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가거나 복음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아담의 범죄후, 부패한 내적 죄의 본성(롬7:20-8:2)을 유전받게 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과 일에 대해 죽게 되었고, 영적인 눈과 귀가 멀게 되었다. 아담의 범죄후, 인간의 마음은 기만적인  것이 되었으며, 하나님보시기에 절망적으로 부패하게 되었다. 인간의 의지는 부패한 죄의 본성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고,  인간 자신의 악한 본성에 억눌러 그 죄성에 종노릇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롬7장) 그러므로 인간은 영적인 영역에서 스스로 선함을 선택하여 온전히 행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죄에 종노릇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적 부패가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부패한 인간은 스스로 선악을 판단할 수 없고 , 선한 행동을 할 수 없고, 가능한 죄들에 대해 깊이 몰입되어있다.  

이 전적 부패란 타락한 인간이 인간으로서 하게 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보시기에 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아담의 범죄후 모든 인간이 영적인 면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도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엡2:1)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어 사탄의 종이 되어, 우리 육체의의 욕심을 따라 지내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다. (엡2:2-3)

인간의 이 전적 무능력이란 인간의 그 타락한 본성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이 나 생각등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성령으로 거듭나서 주예수님의 생명주는 영(고전15:45)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공중권세 잡은 자의 종이 되어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삶을 산다. (엡2:2-3)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는 육체의 정욕(갈5:20-24)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고 그것들을 충족시키도록, 날마다 유인하고 매혹하고 있다. 사람이 비록 선을 행할지라도 자기 자신이나 사람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것이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삶을 살지는 않는다. (창6:5하, 렘 17:9)

모든 인류가 죄를 사랑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죄의 선고와 심판이 모든 인류에게 내려지게 되었다.(창6:5, 렘17:9) 죄란 사람의 외적인 행위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내적 행위와 생각까지 포함한다.

사람은 부패한 내적 죄의 본성으로 인해, 주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마음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신적인 선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었다"라고 말한다.(롬3:10-12)  

그러므로 인간 본성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을 배척하는 인류는 흑암의 신을 섬기고 흑암을 빛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요1:1-12) 또한 범죄한 인간은 흑암의 권세을 잡은 사단의 포로가 되었기에 인간의 그 자유 의지는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즉 마음은 바르게 살기 원하지만, 실제로는   원치 않는 죄를 짓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보시기에 전적으로  부패된 인간의 영혼은 그 자신 스스로의 자유 의지와 마음으로는  주예수님을 영접하는 결단을 내릴 수 없다. (요15:40) 이는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의지가 영적으로 '죽음의 신'인 사단에게 포로되었고 죄와 사망의 법 아래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롬7:17, 딤후2:36)

또 타락한 인류는 그 자신의 모습으로는 완전한 진리에 도달치 못하게 되었고, 오히려 죄와 사망의 법에 순종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러기에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전도와 그 복음을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전2:14)

 또한 아담의 범죄후 함께 전적 부패한 사람들은 그 영으로 거듭나지 못하면 신령하고 영원한 하늘의 것들을 볼 수 있거나 생각할 수 없고 깨달을 수 조차 없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빛과 진리와 거룩이신 주예수님을 그분으로 깨닫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였던 것이다.

니고데모역시 이스라엘의 유능한 교사였으나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요3:3)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이들은 빛(요1:3-10)을 볼 수가 없고 이해할 수 없다. 아담의 범죄후  함께 전적 부패한 인류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각이나 외적인 어떤 행동을 할 수 없다. (엡2:8-9) 불순종과 함께 타락한 인류는 소망없이 죄에 얽매여 있는 자들이며, 영적인 죽음의 밧줄로 사단에게 포로 된 자이며, 하나님의 사역과 전혀 상관 없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런 타락한 본성이 주의 능력으로 깨어지게 되면 죽음은 영생으로 대치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믿음과 열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자원하여 행하게 된다. (빌2:13)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조건 없는 선물이며 은사이지, 인간의 행위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2.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모든 인류는 창조전에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변함없는 목적을 따라 생명으로 인도될 자들을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 이 예정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선하고도 기쁘신 뜻에 따라 된 것이며 그분의 선하고도 기쁘신 뜻에 따랄 된 것이며, 그분의 영원한 영광과 존귀를 위한 것이다.

또한 이 예정하시고 선택하심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과  그영원하신 사랑에 위한 것이지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끼칠 어떤 행위나 조건이 원인이 된 것은 아니다. (롬 8:28-29, 롬7:11,13, 고전 1:26-29, 딤후1:9, 요15:16, 엡1:4, 요6:44등)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경륜에 따라 예정되고 선택받은 자들만이 죄와 사망과 그 모든 소극적인 것에서부터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선물로 받게 된 것이다.(행13:48) 주예수님께로 나아온 자는 하나님께서 영원전에 택한 자들이지, 사람이 선택한 것이 아니며 주께로 나오는자들는 결코 내쫓김 당하지 않는다,(요6:37-390

엘리사 당시에 이스라엘에 문둥병자가 많았으나 오직 이방인이었던 나이만 장군만이 고침받았으며, 엘리야 시대에 온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가 있었으나 엘리야가 오직 시돈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만 보내심을 받은 것같이, 주님께서는 영원전에 수많은 사람들중에서 특별한 무리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셨으며, 그외의 무리들은 강팍케 되도록 내버려 두셨다.(롬11:7)

나아만 장군이나 사렙다 과부가 그 은혜를 받을만한 어떤 행위를 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하나님께선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셨고,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신 결과 였던 것이다.(롬9:18)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지키려는 이스라엘을 무시하시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찾지도 않은 이방인들에게 분수에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베푸셨다.(롬9:25-29) 하나님께서 인간의 어떤 행위나 선행이나 조건이나 마음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대로(롬9:15-16) 무조건적인 은혜로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것이다. 주예수님께서도 친히 '선택'이 하나님의 뜻에 그 근거를 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6:65-66)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의 능력과 선행과 그 행위의 의를 자랑하거나 앞세우거나 교만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예정하심과 선택하심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된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며 살아야 하며, 주님이외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빌3:8) 주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안에서 발견되어지도록 전진해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으로 생명과 믿음의 은사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결단과 의지와 마음으로는 속죄양되시는 '주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다.(요5:40)

 

 

3.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A.문제제기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해 죽으려 오셨으며 실제적으로 누구의 죄에 대해 구속을 성취하려고 이땅에 오셨는가? 이 문제에 대해 정통적인 그리스도인은 두가지 상이한 방법으로 해답을 강구해왔다. 알미니안주의자는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 고 말하는 보편속죄를 주장하였으나,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는 믿는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믿는 제한 속죄를 가르친다. 알 미니안주의자는 그리스도가 에서와 유다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고 말한다.(요일2:2, 고후5:14, 요4:42)

그들은 그리스도가 의도적으로  에수님을 배척하고 지옥에 빠져 들고 있는 버림받은 자들의 죄까지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속전을 지불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행하신 것(그분이 모든 자을 위해 죽으신 것)과 그분께서 성취하신 것(모든 자들이 다 구원받지 못한 것)을 구분한다.

알미니안주의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근거로 하여 인간에게 사죄함을 베풀어줄 수 있으나 정죄를 받은 죄인이 그 사죄함을 스스로 거절할 수 있다고 한다.   반면에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무한한 능력과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오직 그 사실을 믿는 신자, 즉 실제적으로 구원을 받아 천국에 들어갈 선택된자만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선 성부께서 그분 자신에게 주신자들의 죄를 속죄하기위해 , 십자가에 죽도록 계획되었다.(요6:37-40)

칼빈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분을 불신하는 인류가 포함된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마1:21), 자기 양(요10:15), 자기 친구(요15:13), 교회(행20:28), 신부(엡5:25)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한다..

칼빈주의자는 주예수님의 속죄가 그 능력에 있어서 제한이 없고, 무한한 능력과 가치를 지니지만, 그 실제적인 범위에 있어서 그분이 영원전에 선택한 자들에게만 효과적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B.정의

 

하나님께선 그분의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과 경륜에 따라 그 백성들을 예정하셨지,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를 선택하신 것은 아니다.(롬8:31-33) 그 구원의 은혜는 공로없이 주어지는 은혜인 것이다. 만약 온 인류가 그분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갈보리에서 이룩하신 주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것을 믿음으로 영광에 이른 자보다 불신앙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자가 더 많아지기 때문에, 주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완전한 승리가 되지 못하고 부분적인 승리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 어떤이들은 베드로서을 언급하면서 이 말을 반박한다.

"주의약속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3:9)

물론 그렇다. 그러나 이 문제는 베드로 후서가 누구에게 보낸 것이며, 그안에 무엇을 언급했는 가하는 질문에 응하므로 답을 얻을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종인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예수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후1:1)

여기에서 베드로는 선택된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믿는 자들에게 편지한 것이지, 그들 자신의 의로운 행위와 조건을 믿는자에게 편지한 것은 아니다. 그 구절의 본래 의도는 주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지, 전세계 모든 인류를 위해 죽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롬5:8)

하나님께선 우리 죄를 위해 그 아들을 죄인되게 하셨고, 그 아들의 몸을 제물로 받으심으로 단번에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다.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주예수님께서 택하신 '신부'만이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 됨을 말한다.(엡5:25)

또한 육체의 소욕을 따라 난 이스마엘은 하나님에 의해 �김을 당했고, 약속을 따라 난 이삭이 그 유업을 이을 자가 된 것같이(롬9:7-9)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받은자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그분이 만세전에 택한 자들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특별한 대상이 되는 것이다. (갈1:1-4)

성경은 '제한 속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요10:25-26)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양'(여10:26)을 위해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시어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더구나 주예수님께서는 그의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에 그 양들은 그분을 알고 따른다고 말한다.(요10"27)

그러므로 주예수님의 죽으심은 영원전부터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속죄의 죽음인 것이다.(벧전2:9, 마1:21)

 

4.불가항력적 은혜( Irresistible Grace)

 

구원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주권에 의한 것이며, 그분은 무한히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의 은총을 피조물이 대항할 수 없다.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를 (성령이 역사할지라도) 물리치거나 거절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원을 위한 믿음은 그 댓가를 지불하지 않는 자들에게 무상으로 주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물인 것이다. (롬4:4-5)

인간은 사실 구원받을 만한 공로가 조금도 없으며, 그 공로를 하나님앞에서 행할 수도  없다(딤후1:9) 그러면 저항할 수 없는 은혜란 무슨 말인가?

첫째로 소극적인 면에서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그들이 원하지 않는 일들'을 억지로 행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예로 주께서는 가롯 유다의 그 한일을 억지로 시킨 것이 아니라 유다가 그 주인인 사단의 기뻐하는 뜻을 따라 '자의'로 행한 것이다.

즉 가롯 유다는 그 부패한 마음이 행하도록 충동질한 것을 순응했고, 행동으로 실제 옮겼던 것이다.  이 사실은 주예수님께서 왜 유다를 택하시어 그의 공생애에 3년동안 함께 있게 하셨는지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둘째로 긍정적인 면에서 그 은혜는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따라 그분 자신이 예정하신 자들에게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이다. (롬9:22-23)

하나님의 그영으로 거듭난 사람의 영은 불가항력적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원죄와 자범죄로 죽은 인간의 영은 불가항력적으로 죄와 사망의 법인 사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롬7:20,8:2)

주예수님께선 창세전에 그분안에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모든 자들의 죽은 영혼과 육체를 살리시는 분이시다.

여기에서 살리신다는 말은 그 양들에게 목자되신 주예수님을 불가항력적으로 발견하게 하는 새로운 성품(거듭난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다. 돼지는 본래 타고난 본성 때문에 진창에서 딩굴기를 좋아한다. 그라나 양은 그 본래의 타고난 본성때문에 진창에서 딩굴지 않는다. 가장 적은 새도 그 본래 '날 수 있는 생명의 법'을 가지고 있기에 가르치지 않아도 날 수 있는 것이며, 개에게 짓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 본성이 본래 '짓는 것'을 가지고 있기에 짓는 것이다. 허물과 죄로 죽은 중생하지 못한 영혼은 아담으로부터 전수되어진 그 본래의 타락한 본성과 성품 때문에 '죄와 불신앙'가운데 홀로는 일어서지 못하고 계속 죄의 수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택한 자들에게는 거듭난 생명(새로운 성품과 본성)을 주신다.  이제 주을 믿는 자에겐 옛 것들이 다 지나가고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 새성품과 본성은 인간의 거듭난 새 영을 말하며, 그영은 성령이 거하시는 영인 것이다, 인간의 타락과 범죄로 죽었던 그영이 불가항력적으로 마귀와 어둠을 찾고 좇았던 것 같이, 이제 성도는 주예수님의 그 피의 구속을 통해 새로운 생명, 즉 거듭난 영을 얻게 되었다. 이것은 인간이 저항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그 은혜로서 사람은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주예수님을 의지하고 사랑할수 있게 된 것이다.  성경은 아들이 원하시는 자만이 아버지에게 올 수 있고 영생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요5:21) 사탄은 여호와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능력있는 피조물이었으나 그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완전히 타락하게 되었다. 사탄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미워하기까지 하는 저주받은 교활한 원수로서, 인간보다는 훨씬 큰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님보다는 결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능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저주받은 천사의 그 행동을 그분의 뜻안에서 엄격히 제한하셨다. 그예로 욥을 사탄이 시험했을 때, 박해할 수 있었으나 생명에는 손을 될 수 없게 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사탄은 여호와처럼 어디에나 편재하지 못하고 절대로  전능하지 못한 작은 피조물임을 명심해야 한다.

사탄은 단지 하나님이 만든 지극히 적은 피조물 중의 하나에 불과하며, 그의 머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님에 의해 상하게 되었다.

인간은 아담의 범죄와 불순종후 타락한 죄의 본성 때문에 사단에게 저항할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아담의 범죄후에  사탄으로 비롯된 죄와 사망의 법(롬7:17)에 종노롯하게 되었다. 즉 타락한 인간에겐 하나님께서 만드신 가장 강력한 피조물이었던 사탄을 대항하고 저항할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허물과 죄로 물든 인간들은 악한 사탄의 계획과 그 뜻의 통치를 저항할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엡2:2)

그러기에 사탄은 자기 뜻대로 인간을  유혹하고 매혹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식들로서 마귀의 뜻을 따르며,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저주아래 있었다. 우리들은 본래 자유롭지 못하고 속박되고 제한된 의지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거듭난 생명과 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주시지 않았다면 어쩔 수 없이 불가항력적으로 사망과 죄의 법에 끌러 가게 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에게 붙여 주신 선택된 자들만이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날 수 있고  주의 특별한 사랑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죄와 사망의 법으로 우리가운데 표현되어진 사단에게 포로된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주예수님에게 나올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죄와 사망의 법을 저항하거나 뿌리치고 그 법에서 빠져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범죄후 마귀에게 사로잡힌바된 의지와 뜻인 '죄와 사망의 법'을 가지고 있어  주예수님께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창조 당시의 완전했던 그 자유의지가 범죄후에 죄와 사망의 법에 눌리게 되었기 때문에, 온전하게 그 자유의지를 활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한 인간이 되었기에 사람은 하나님께서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이끌어 주시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사람도 주예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나 통로를 만들거나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6:44)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선을 추구하는 어떤  경향도 일부러 회피하려는 마음을 가진 존재이며, 설사 선(善)을 행한다해도 그 마음에는 부패하고 타락한 내적인 본성이 잠재해 있기에, 그 마음을 관찰하시는 하나님에게는 그 선한 행동이 외식밖에는 되지 못하며, 온전히 열납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범죄하여 죄와 사망의 법을  가지고 태어나기에 그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만한 어떤 공로를 스스로 행하거나 가질 수 없다. 그러기에 사람은 무조건적으로 생명과 믿음에 이르도록 선택되고 예정받았고 부름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예수님의 그 죽음과 그 고귀하신 피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예정하신 자들'만을 위해 특별히 주어진 것이다.

 

5.성도의 견인( Perseverance of the Saints)

 

한번 선택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변치 않으시며, 전능하신 그 뜻에 의해 결코 그들의 구원을 잃거나 스스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선택하심과 예정하심이 인간의 어떤 조건이나 행위로 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주권적인 뜻에서 비롯되었듯이, 우리에게 주신 그 믿음의 선물역시 인간의 그 어떠한 행위나 악행이나 조건들에 의해  구원받지 못할 존재로 다시금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들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그일은 하나님의 사역이지 인간의 사역이 아님을 바울은 말한다,(빌1:6)

아버지께서 그 모든 능력을 아들이신 주예수님께 주셨기에,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그 자신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것이다,(빌3:20-21, 요17:2)

우리의 구원은 온전히 주예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기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은자는 언제나 그  믿음에서 떨어지거나 잃을 수 없다.(요6:38-39)

우리가 구원을 얻을 많나 행위를 절대적으로 행할 수 없듯이 구원을 보존하고 유지시키는 행위역시 결코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지 사람의 행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예수님께서도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요, 또 거처를 내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라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디모세후서1장12절에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줄 확신하노라"라고 고백했다. 주예수님께서는 그분자신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성도들을 흠없이 보존하시는 놀라운 사역을 행하실 것이다. 사실 인간은 그 구원의 은혜를 자신의 힘으로 보전할 수 없다.   주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성도들을 항상 지켜 주실 뿐 아니라, 항상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기에 성도들은 그분의 성령안에서 보존될 것이다.

만약 그 구원의 은혜의 유지와 보존이 사람의 타락한 본성으로부터 빚어진 불완전하고 변덕스러운 성품에 의존한다면, 그 구원은 결코 소망없이 깨어질 것이다.

 

Ⅴ.칼빈주의 예정론

 

예정론은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칼빈의 독창적인 교리는 아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과 어거스틴 심지어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는 마르틴 루터와 훌드리히 쯔빙글리, 마르틴 부써와 초기 멜랑히톤 등이 주장했다. 그런점에서 그 교리는  그리스도교의 교리학에 있어서 아마도 무시되거나 외면 될 수 없는 위치를 가질것이다. 그러나 종교 개혁이후 예정론은 주로 칼빈과 그의 사상적 전통에 서 있는 교회와 신학자들에 의해서 특징적으로 지지되고 주장되어 왔기 때문에 오늘날"예정론" 하면 주로 칼빈이나 또는 칼빈주의를 연상하게 되는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칼빈의 예정론은 논란의 여지가 매우 큰 주제이다.

칼빈의 교의학 속에서,예정론은 실제로 그렇게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다. 칼빈에 대한 주석적이고 학문적인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에 한때 알렉산더 슈바이처나 F.C.바우어 등여러 학자들이 칼빈 신학의 중심교리를 예정론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러나 예정론이 중심교리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교리가 칼빈에게 있어서 중요하고, 부정될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만일 칼빈이 그랬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리고 신학적으로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그것의 중요성과 역사적 의의는 무엇일까? 그런 의문점들을 가지고, 우리는 이 연구에서, 예정론이 칼빈에게는 어떤 정황에서 어떻게 발생하여 발전되었으며, 또한 그것이 신학적으로 어떤의미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그것의 형성 과정들을 통해서, 그리고 칼빈 당시에 있었던 여러논쟁중에서 멜랑히톤과의 논쟁을 통해 살펴 보고자 한다.

 

1.박해받는 교회들을 위한 위로와 확신의 교리

  (초기 예정론의 자리와 의미)

칼빈은 1532년부터 파리와 오를레왕,부르쥬 같은 대학도시들을 다니면서,신학,법학,문학등을 공부했다. 당시독일이나 스위스 등지에서는 종교개혁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으며,그 여파가 파리와 여러 지방 도시에까지 확산되고 있었다.특히[교회의 바벨론포로]나[그리스도인의 자유]같은 루터의 저술들이 많이 읽혔다.

칼빈은 1530년대 초부터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접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이유나 정황은 알려져있지 않지만,그는 아마도1533년에'급격한 회심'을 경험하고 복음적인 기독교의 전파자가 되었다. 당시에 프랑스에서는 군주 프랑수와1세가 개신교도들을 박해하고 있었다. 특히 1534년10월에 일어난 플라카드 사건은그의 개신교도 박해를 가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B.밀롱이 화형당하고,여러 사람들이 그 뒤를 이었다. 그 가운데는 칼빈을 자신의 집에 묵게 했던 상인 E.드리포르쥬도 끼어 있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칼빈은 일단 파리를 떠났다가 프랑스를 벗어나 바젤로 갔다.그는 1535년 바젤에서 [기독교 강요] 초판 집필을 마치고 그 이듬해 출판했다.

이 책은 일반적인 교리문답서보다 조금 더 길고 상세한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된 비교적 간결한 책이었고 그 크기도 작았다. 박해받는 개신교도들이 망또 속에 숨겨 다니기 쉽게 하려고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칼빈이 예정론을 말한 최초의 책이 바로 그 기독교강요 초판이었다. 거기서 그는 예정론을 사도신조를 해설하는 네번째 단락 교회론의 자리에서 말한다. 그는 여기서 '예정'대신에 '선택'이라는 용어만 쓰고 있다.'예정'과'선택'이 함께 나타나기 시작하는것은 그 이듬해의[교육과 신앙고백서]에서부터다. 그는 거기서도, 그리고 그이후로도 그 용어들을 특별히 구별하지는 않는다. 기독교강요 초판에 따르면 '거룩한 공교회'는 바로 '선택 받은자들의 수 전부'인데,"그리스도가 그들 모두의 인도자이며 왕자이며 몸으로 볼때 머리이므로 그들은 하나님왕국에모두 모여지기 위해서 세상이 세워지기도 전에 그분안에서 선택되었다"고 한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혀서 의롭다고 인정하며... 성령의 축복들을 부어 주셔서 그들을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며,결국 거룩하고 흠없이 보이도록 나타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칼빈은 하나님의 선택은 소명(vocatio)과 칭의(justificatio)로서 드러난다고 보았다. 즉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을 바로 선택된자로 본다는 것이다.오직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구원은 "너무나 확실하고 튼튼한 구조위에"서 있기때문에"세상이라는 건물이 전부 무너진다고 할지라도"그들의 "구원은 흔들리거나 넘어지지 아니하며",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하나님은 그들의 손을 붙들어 주신다"고했다.

그러므로 신자들에게 문제는 , '누가 선택된 자며 버려진자인지'를 가려내는 데 있는것이 아니라..."아버지가 영원 전부터 그 안에서 자신의 것으로 선택해서 자신의 교회의 양떼속으로 인도하시고자 원했던"... 그 그리스도에 대한'확실한 신앙'에 있었다."우리가 신앙으로 그를 받아들이는 만큼 사실상 그는 자신을 몸소 우리들에게 내어 주신다."

우리는 여기서 예정론, 즉 하나님의 선택론을 말하는 칼빈의 일차적인 관심이 교회론적으로 정위되어 있는것을 발견한다.

칼빈이 초기에 가지고 있었던 신학적 주요 관심들 가운데 하나가 교회의 문제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에 따르면 교회는 어떤 외적 형식이나 제도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창세 전에(그리스도안에서)선택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으로 의롭다고 인정했으며 성령의 축복으로,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해서 결국 하나님 보시기에 흠없고 아름다운 상태"로 만드는 그런 '선택받은 사람들 전부'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카톨릭 교회가 하나의 보편적 교회를 주장할 수 있는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들, 즉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한 교회들이 -그것이 카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이건-바로 하나의 보편적 교회라는 시각이다.

그럼에도 초판의 서문을 대신한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낸 서한"에서 칼빈은 기존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의 "형태를 로마교회와 그 주교제도에다 설정하면서",자신들(개신교)의 교리와 새롭게 태어나는 진정한 어린 교회들을 중상하고 박해하면서 전멸시키고자 했다고 고발한다.

 

2.종교개혁 정신의 신학적 표현으로서의 예정론

  (예정론의 발전과 신학적 자리 매김)

 

기독교 강요가 발간된 그해 8월 칼빈은 기욤 파렐의 요청으로 쥬네브에서 종교 개혁활동을 시작한다. 구체적인 그의 직무는 성서를 가르치고 파렐을 도와 목회하고, 또한 종교적으로 필요한 여러 문건들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그 이듬해인 1537년, 그는 최초의 교리문답을 작성하는데, 그것이[쥬네브교회에서 사용되는 교육과 신앙고백서]이다.

칼빈은 바로 이 문서에서 최초로 예정론을 "선택과 예정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독립된 항목에서 다루고 있다.

칼빈은 그것을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오직 주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선택으로써 자신의 자녀와 하늘의 왕국의 상속자로 예정했던 그런 사람들에게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 세상의 창조이전에 되었던 하나님의 같은 그 계획에 의해서 영벌에 처해진 사람들 모두에게는 명백하고도 분명한 진리의 설교가 죽음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냄새 말고는 다른 어떤 것일수 없다".

그리고 칼빈은 주님이 그렇게 한 이유를 "우리들의 완악함"과 "연약함" 때문에 "숨겼으므로", 그것을 알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에 의해 압도되는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단지 "선택된 자들은 하나님의 자비의 그릇이며, 영벌자들은 진노의- 그렇지만 정당할 뿐인- 그릇이라는 점을 인정하자고" 권했다.

끝으로 칼빈은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을 구하기 위해서 하늘을 꿰뚫고 들어가지 마고...하나님이 우리에게 충분하고 풍성하게 그 확실성을  확고히 해준 그 증거"가 바로 "세상의 기초들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생명에로 미리 정해진 사람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 선택된" 그리스도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알려지는"거울"일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선택의 담보"이다. "그러므로 신앙으로써 그리스도를 소유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그 안에서 생명을 소유한다면,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에 대해서 더이상 탐구할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여기서 두드러진것은 칼빈이 최초로 이중예정을 말했다는점과 선택의 확실성을 기독교강요 초판에서보다 더 분명하게 그리스도에게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칼빈은 이 이중예정론을 말하기 위해서 문서 처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 예정된 자들에게만 뿌릴를 내리고 ... 영벌에 처해진 사람들에게는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는 냄새"일 뿐이라는 경험적인 사실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것은 1539년 기독교 강요 제2판 이후모든 판들에서 예정론의 출발점으로 다시 제시한다.

그럼에도 칼빈이 여기서 경험을 들어 주장하는 이중예정은 사실상 칼빈의 것은 아니다.프랑수아 벤델이 지적했듯이, 그것은 어거스틴, 그리고 종교개혁자들 가운데서는 마르틴 부써의 것이었다. 칼빈은 이중예정에 관해서 의심할바 없이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초판이 기록되던 어간인 30년대만 해도 121명이 재판에 넘어갔는데, 그것은 바로 이전 20년대의 8명보다 무려 15배나 증가된 숫자였다.  그렇게 소수자들의 교회가  거짓교회로 낙인 찍히면서 박해받고 존폐의 위기 앞에 서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칼빈이  그 교회의 확실성,  다시 말해서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의 확실성을 왜 그렇게 강조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선택 받아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의 구원은 "너무나 확실하고 튼튼한 구조" 위에 서있기 때문에, "세상이라는 건물이 모두 무너진다고 할지라도", "흔들리거나,넘어지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그들의 손을 붙들어 주신다".  

이런 선언은 당시 신앙의 문제로 고난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매우 큰 위로와 격려와 희망, 그래서 장작더미 위에서 죽어가면서도 변치않는 믿음을 가져다 주었다.

그와 같이 당시에 박해 받던 개신교들은 예정론으로써 위로 받고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했으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견뎠다. 그래서 우리는 개신교들이 집단적으로 당했던 그러한 심각한 고난과 박해의 경험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칼빈의 초기 예정론을 바르게 이해 할수 없다고 분명히 말할수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칼빈에게 있어서나 또한 신교도들에게 있어서 이 예정론이 자신들을  적대하는 세력들을 증오하고 심리적으로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되지는 결코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예정론은 선택된자의 자의식을 우월감으로 가득차게 한다거나 또는 선택되지 않은 자들을 멸시 비방하게 하는 그런 것도 전혀 아니었다.

칼빈에게 예정론의 효용, 또는 목적은 바로 그것일 뿐,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었다. 칼빈에 의하면 예정론의 목적은 결코 "선택된 자가 누구인지를 가려내는데" 있지 않았다. 칼빈은 그것을 매우 강조했다.

따라서 이상의 논의로 볼때 칼빈의 예정론의'삶의 자리'는 박해, 특히 프랑스에서의 개신교의 수남이라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그초기  예정론이 가지고 있는 의의는  두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다.

 

첫째로 예정론이 참된교회가 외적인 제도나 기존의 권위적 질서에 있는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부름을 받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며 성령의 빛으로 날마다 거듭나는 신자들의 무리들이라는 점을 천명함으로써 새로 태어나고 있던 개혁 교회의존재근거를 밝혀 주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그것은 당시에 박해 받고 있었던  어린 개신교회들에게 확신을 주고 용기와 위로를 줌으로써 그 고난의 상황을 견디어내게 했다는 점이다.

그런것 들이 바로 칼빈의 초기 예정론이 갖고 있는 주요한 의의였다.

그는 설교나 목회의 경험등을 통해서 그것을 공감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런점은 이[교육과 신앙고백서]가 칼빈이 쥬네브에 정착해서 성서를 가르치며 파렐과 함께 목회했던 그런 정황에서 쓰여졌다는 사실레서 뒷받침된다. 칼빈이 이중예정을 말한 신학적인 이유는 이 문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강요 제2판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칼빈은 39년, 스트라스부르에서 기독교강요 제 2판을 발행했다.예정론은 8장에" (신의 예정과 섭리에 관해서)"라는 제목으로 자리잡았다.

"우리는 예정론을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라고 부른다. 그것으로써 그는 자신이 각 사람에 대해 하기를 원하는 바를 결정했다... 주님은 자신이 구원하기를 원하는 자들과 멸망 가운데 놓아두려는 자들을 자신의 영원하고 움직일수 없는 결의 가운데서 한번 정해 놓았다. 그는 자신이 구원으로 부른 자들을... 그들의 고유한 가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값 없는 자비로써 받아 들였다... 반대로 생명의 문이 그가 정죄 가운데 넘겨주기를 원하는 자들에게는 막혀 있는데 그것은 정의롭고 공정함에도 불구하고 신비하고 이해 할 수없는 그의 심판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

칼빈은 그렇게 말하면서 초판에서도 지적했던 바와 같이 그 예정이 소명과 칭의로 드러난다는 점을 강조한다."소명은 그들의 선택의 진열장이나 증거와 같으며... 마찬가지로 칭의는 또 하나의 다른 표시이자 표식이다..."


출처 : The King Dom
글쓴이 : KINGDO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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