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절기,헌신예배]

성찬설교 1

好學 2009. 11. 3. 19:02

 

성찬설교 모음(초교파 목회자)


성찬에 참예할 자-고전11:23-32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고린도전서 11:23~32)


현대 교회에서는 목사 안수식, 장로 임직식, 성전기공식, 성전 입당식 등 많은 예식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식을 성례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성례전은 세례식과 성찬식을 가르킵니다. 침례식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는 온 몸을 완전히 물에 담갔다가 물속에서 나오는 의식을 통해 옛사람은 완전히 장사지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식은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의식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되었음을 증거해 줍니다. 이와 같은 성찬식과 세례식은 예수님께서 제정하시고 지키라 명령하신 예식이기 때문에 오늘날도 그 의식을 신성하게 여기며 거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찬에 담긴 의미와 그 속에 담겨진 축복을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무의미하게 형식적으로 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찬에 대해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하여 올바른 성찬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성찬의 기원

첫 번째, 성찬의 기원은 구약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압제자의 강포와 압박으로 인해 탄식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모세를 바로에게 보냈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아홉가지 재앙이 내릴 때까지도 완전히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1년된 흠없는 어린 양을 잡아 그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기름 뺀 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 먹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열번째 재앙으로 죽음의 사자가 애굽 전역으로 돌게 했습니다. 이때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자손의 집은 죽음의 재앙이 들어가지 않고 그냥 넘어갔지만 양의 피를 바르지 아니하는 집은 임금으로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자가 죽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가축의 첫번째 난 생축들도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날을 유월절이라 하고 매년 이날을 기념했는데 바로 이 유월절이 오늘날 성만찬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즉 유월절은 신약시대에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기 전 날에 제정하신 성만찬으로 성례화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24절로 25절에 보면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6장 26절로 28절에 보면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으며 요한복음 6장 53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 양의 살과 피로 애굽에서 해방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죄악에서 해방되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예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믿고 참예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찬에 담겨져 있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

오늘 본문 말씀 27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찬에 참예할 때 성찬이 주고 있는 깊은 뜻과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담겨진 축복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냥 무의미하게 아무 감동도 없이 성찬에 참예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찬은 신성한 것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무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 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놀라

운 주님의 은혜가 담겨져 있다고 하는 것을 깊이 기억하면서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바로 나 때문에 형벌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는 회개하는 심령으로 성찬에 참예해야 합니다.

28절 말씀을 보면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주셨기 때문에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단을 가지고 성찬에 참여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합당하게 참예하여 믿음이 돈독해지고 은혜가 충만하고 더 큰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주의 몸을 분변하고 참예해야 합니다

또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주님 뜻대로 살기를 다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보배로운 피와 살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사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살과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얼마전에 심장병으로 사형선고 받은 사람에게 심장을 이식 시켜 준 사람과 이식 받은 학생이 함께 나란히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사진에 나타난 그들의 진지하고 평온한 표정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형 선고 받아 앞날에 희망도 없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심장을 이식 받아서 사망에서 새 생명을 얻었을 때에 자기에게 심장을 준 사람이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그리고 심장을 이식시켜 주는 사람은 심장을 이식받은 그 사람이 오래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자신의 피를 다 흘려서 그 피 때문에 영생을 얻게 된 우리를 바라보면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의 고백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찬을 뗄 때마다 이것은 나를 위하여 살찢고 피흘리신 피라고 하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찬에 참예해야 할 것입니다.


3. 성찬의 축복을 알아야겠습니다.

창세기 14장 13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성찬을 예표한 사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돌라오매라고 하는 포악한 왕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소돔과 고모라를 침범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고 그들의 제물을 다 약탈했습니다. 그 중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가족이 함께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사병 318명을 이끌고 그돌라오멜을 쫓아가 그들을 섬멸하고 빼았겼던 재물과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때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들고 나와 아브라함에게 먹고 마시게 한 뒤에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옵소서"라고 축복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멜기세덱은 제자상으로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증거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권위있게 축복하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성경 전체를 보면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림자라고 했는데 히브리서 6장 20절에 보면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주어 먹게한 후 아브라함을 축복하였지만 오늘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찢어 우리를 먹고 마시게 하여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케 되는 축복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뗀 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우리 심령에 은혜와 기쁨이 넘치며 생활 속의 저주 사슬이 끊겨지고 병든 육체가 치료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성찬 속에 이와 같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담겨져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참여할 때에 그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의 거룩한 의미와 성스러움을 옳바로 알고 분변된 합당한 심령으로 참예하여 성찬에 담긴 은혜와 축복을 넘치게 받으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성찬의 의미 본문 고전11:17-34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죤 칼빈(John Calvin), 그리고 쯔빙글리(Zwingli) 등과 함께 종교개혁을 시도하면서 1520년 4가지의 유명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 첫 번째 작품은 당시 부패한 천주교회를 개혁하기 위하여 특별한 설교를 시리즈로 설교한 것으로서 그것은 1520년 3월에 시작하여 5월 까지 실시한 십계명 설교였습니다.

그후 이 십계명 설교 시리즈는 '선행에 관한 설교'(Sermon von den guten Werken)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그것이 종교개혁을 시도하면서 남긴 첫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종교개혁 두 번째 작품은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글'(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des christlichen Standes Besserung)이란 것인데 1520년 7월 20일에 급히 완성되어 8월 18일에 출판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작품은 '크리스챤의 자유'(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란 작품으로서 1520년 10월에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내는 편지에 첨가된 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의 작품은 '교회의 바벨론 포로'(Von babylonischen Gefaengnis der Kirche)이라는 작품으로서 그의 종교개혁 초기에 발표한 십계명 설교인 '선행에 관하여'라는 글은 일반 교인들을 대상으로 발표한 종교개혁의 메시지이고, 그 다음으로 발표한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글'은 귀족을 대상으로 한 종교개혁 메시지였으며, 그 다음에 발표한 '크리스챤의 자유'란 글은 정치권을 향한 종교개혁의 메시지였다면, 마지막으로 발표한 이 '교회의 바벨론 감금'이라는 글은 특히 종교계 특히 신학자들과 지식인들을 위하여 라틴어로 쓴 성찬예식에 관한 글로써 1520년 10월에 발표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틴 루터의 저서 중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신학적인 논문 중의 하나로서 '교회의 바벨론 포로'라는 말은 교회가 어떤 외부에 감금되어 있다는 말이 아니라 교회라는 공동체가 성례전의 교리(敎理)와 의식(儀式) 밑에 감금당하여 영적인 손상이 초래케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며 이 점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 논문에서 로마 교회가 가르치는 성례전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를 7성례(聖禮)를 중심으로 비판하면서 주로 성찬과 세례를 논하였는데, 그 중 성찬과 관련된 사항으로서는 세 가지 과오가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첫째 성찬식을 거행할 때 사제들은 떡과 포도주를 다 먹지만 평신도들에게는 떡만 주고 포도주는 주지 않는 당시의 성찬 제도가 잘못되었고,


둘째 성찬예식을 거행할 때 집례자가 기도를 하고 나면 성찬상 위에 있는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이 잘못되었으며,


셋째 성찬예식을 매번 행할 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진다고 믿고 해석하는 성찬을 '희생'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틴 루터와 죤 칼빈 그리고 쯔빙글리 등 개혁자들이 시작한 종교개혁 운동은 결국 구교(舊敎, Roman Catholic Church)와 신교(新敎, Protestant Church)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제가 왜 오늘 이런 말씀을 서두에 드리는가 하면 이 시간 우리가 행하려고 하는 거룩한 성찬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기독교 역사적으로 그리고 성경적으로 바르게 이해하고 나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찬이란 거룩한 식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성찬예식은 인간이 만든 작품이 아니라 주님께서 명하셔서 시작된 거룩한 예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찬예식은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간이란 늘 넘어지고 쓰러지는 죄인이지만.... 성찬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영적인 체험을 갖게 하며 또한 성찬을 함께 나누는 성도들끼리 비록 겉모습은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하나이고 또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할 사람들임을 깨닫게 하는 거룩한 식사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 가운데는 이러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성찬예식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가 되며 인간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가?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단 한번 살을 찢기고 피를 흘린 것 밖에 없는데...

어떻게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이 부서지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담이 부서지게 되어... 하나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가?

그러한 논리(論理)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이렇게 '나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해하려고 하면 안되고...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바로 그 때.. 그 믿음 위에... 이해의 역사가 일어나며... 신비한 역사 곧 하나되는 역사도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이란 신비스러운 거룩한 식사이며 영적인 식사인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 죄된 본성을 지닌 인간이란... 아무리 깊이 연구하고 생각하고 수양하여도...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없고 이웃과도 하나가 될 수 없지만...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하나됨을 위하여 찢기신 그 살을 상징하는 빵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먹고....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 마심으로... 그 조그마한 떡과 잔이... 믿음으로 먹은 그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 먼저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이어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자들의 몸을 다 연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는 신비한 역사가 일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이루는 예수님을 다른 성경에서는 '모퉁이 돌'이라고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퉁이 돌이란 건물의 벽과 벽이 만나는 지점인 바로 그 곳에 그 기초에 세워지는 돌로서 거기서 부터 서로의 건물 벽을 쌓아가기 때문에 모퉁이 돌이란 건물의 기초가 될 뿐만 아니라

벽과 벽을 연결하는 까닭에... 건물의 중심이 되기도 하는데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요 모퉁이 돌이며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고리이요 모퉁이 돌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같이 앉아있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이렇게 함께 모여 앉아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서로 거룩한 식사인 성찬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가까운 사람도 함께 앉아 있지만,... 서먹서먹한 사람도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함께 앉아 있고

전혀 모르는 사람도 함께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한 형제자매입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하나로 묶었으며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예배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가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셨기 때문에... !! 우리가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그분의 그 아름답고 숭고한 십자가 사건을 함께 기억하며... 기념하며... 성찬을 나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24절입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고린도교회(Church of Corinth)는 그리스의 고린도 지역에 AD 50년 경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 교회가 위치하였던 고린도라는 시(city)는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도 매우 번성하는 항구 도시였으며 상업 도시였습니다. 대부분의 대도시나 특히 항구 도시가 그러하듯 이 고린도시도 상거래가 활발하여 재정이 잘 돌아가는 부유한 도시였으며, 거기에다가 각종 문화도 공존하였으며, 특히 그리스의 각종 철학적 종교들과 이방 신전이 즐비한 우상숭배의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도시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지만 금권주의 물량주의 제일주의 혼합주의 분파주의와 이방종교 속에서 빈부격차 등... 좋지 않은 사회적 풍습이 교회 안에까지 파고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하여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이 고린도 전후서이며 오늘의 본문도 그 중의 일부분입니다.


교회는 일치(unity)와 하나됨(oneness)을 향하여 나아가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됨과 일치를 반드시 이루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을 말로 가르치고... 몸으로 가르쳐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바르게 세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찬예식을 거행한 것이며 이렇게 실시하기 시작한 성찬예식은 초대교회에서 중세교회 시대까지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찬예식에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에 대하여도 점점 과대하게 의미를 확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떡이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이다'라고 하는 이 명제를 놓고 논란하기를 '그렇다, 아니다, 단순한 기념일뿐이다, 상징만이다... 기도하면 영적으로 임재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복잡한 토론과 격론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중세시대까지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이며(요 6:55) 그것을 먹는 우리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요6:54) 선언하신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요. 이 약속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가 성찬예식을 거행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성찬예식에서 경계해야 할 두 가지 점은... 떡과 잔을 경시함으로서 성찬예식의 신비를 너무 격하시켜서도 안되며 또한 떡과 잔이라는 것을 과도하게 격상시키고 찬양함으로써 물질을 신비 자체로 만들어가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24절에서도 말씀하시듯이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만 하셨지... 그것에게 '절하라' 하거나 그것에게 '예배하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단론자들은 주장하기를.... "만일 그것이 주님의 몸이라면 몸에는 영혼과 신성이 함께 있으며 몸에서 분리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예배해야 된다"고 하면서 소위 떡과 잔을 과도하게 성별하고 기도하기만 하면 그 후에는 화체(化體)가 되었다고 하면서... 그것에 절하거나 경배하며 기도하도록 전시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행위들은 정말로 잘못되었으며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성찬의 바른 의미란 무엇이며 성찬에 바르게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고... 그 후에 기도하는 가운데 참여할 때 놀라운 은혜와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성찬의 복 본문 마26:26-28


우리가 가지고 있는 눈은 대단히 정확한 것 같아도 때로는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한 가지는 사람을 판단할 때입니다. 우리는 늘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노부부가 생의 말년에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교육 사업에 헌납할 생각으로 명문대인 하버드 대학을 방문했습니다. 총장실에 들어가 총장을 만나려 했지만 총장실 비서는 허름한 옷차림의 노부부를 아주 불친절하게 대했습니다. 노부부가 물었습니다. "이런 대학 하나를 설립하려면 얼마나 듭니까?" 그 질문에 비서는 더 업신여기면서 들은 척도 않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받은 두 노부부는 집으로 돌아와 전 재산을 다 털어 대학재단을 세웠습니다. 이 부부가 세운 대학이 그 유명한 스텐포드대학입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하버드 대학에서는 매우 아쉬워했지만 이미 늦은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부터 하버드 대학에는 이런 글귀가 써있다고 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여러분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는 않으십니까? 사람을 외적인 조건으로 판단하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인다운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약에 우리를 외몰 취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경건치 않을 때에 주님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볼 때 어떤 마음으로 보십니까? 하나님은 이 시간 여러분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 예배에 참여하는가에 따라서 여러분에게는 복이 될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느냐에 따라서 복이 될 수도 있지만 잘못하면 의미없는 행사로만 끝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성찬의 예식이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복과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똑 같은 십자가가 어떤 사람에게는 미련하게 보여 아무런 은혜도 주지 못하지만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마지막 식사를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기억하고 거기에 기념비를 세우라고 지는 않으셨습니다. 언제 우리가 주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리신 날이라고 기념식을 해본적이 있으십니까?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하나 주님과 함께 같이 나누었던 성만찬 예식을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기에 이 일을 지금까지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성찬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찬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의 의미도 설명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이 의미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1.떡을 떼는 일과 포도주를 나누는 행위가 중요합니다.

2.그 행위에 대한 설명이 중요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눅22:19) 그리고 포도주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막14:24)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성찬의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찬이 왜 복입니까?


1.성찬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15년 전 저의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저희 가정은 지금까지도 그 날이 되면 모여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식사도 하곤 합니다. 이렇게 추도예배를 드릴 때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날 먹는 음식이 뭔지가 중요하겠습니까? 아니면 예배시간의 길이가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분이 일생동안 사실 때 전해주신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게 생명을 전달해 주신 분이십니다. 제가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을 때 예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알게 하고, 구원받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뿐 아니라 목사가 되게하기 까지 늘 배후에서 기도해 주시고 인도해 주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제가 결혼할 때, 아이를 낳아 키울 때에 늘 잘되기를 바라면서 눈물로 기도하셨던 분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저는 그 날에는 아버지가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감사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생각할 때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없겠습니까? 우리는 마땅히 감사한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면서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생각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노르웨이 어느 시골마을 교회 종탑에 어린양의 조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수 많은 조각 가운데 왜 어린양의 조각을 세웠을까요?

그 교회는 교인들이 교회를 건축할 때 돈이 많이 없어서 건축회사에 의뢰하지 못하고 교인들이 직접 예배당을 짓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교회를 건축하고 거의 다 지어져 갈 즈음 한 교인에 교회 종탑을 세우다가 그만 실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 그 사람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기적같이 살았습니다. 때마침 그 아래에로 지나던 양떼 위에 떨어진 것입니다. 양 한 마리가 죽고 대신 그 사람을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신분상 다 죄인이었고 마땅히 죽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신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자랑할 이유들이 많았습니다. 자신의 가문과 학문 그리고 행한 일들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러한 일들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을 살게 한, 새 생명을 얻게 한 주님의 사랑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를 멸망에서 영생으로 인도하신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존재가 없고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고, 우리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살아난 인생, 그러므로 나는 내가 아닙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와 감격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가치있는 인생입니다. 그 자체로만 봐도 우리는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게 여겨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서 끝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천국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기에 사도바울은 이 일에 감사해서 늘 성도들에게 인사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평강은 주님이 함께 하심이고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선물이 가지고 있는 그 액수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는 분의 마음이 그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이란 은혜를 선물로, 공짜로 주셨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무엇을 먹일까 고민합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아이에게 무엇을 먹여야 튼튼할까를 고민하면서 음식을 가리기까지 합니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어떤 우유를 먹일까를 생각하면서 이 회사, 저 회사를 알아보면서 결정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를 향한 부모의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크면 어느 학교를 보내야 잘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유치원, 초등학교, 그리고 대학까지의 과정을 거치게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하실 때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없으시겠습니까?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는 자리까지 이르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획이 당신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종의 신분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획만 있으면 이 자리에서 더 높은 자리까지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비록 고난의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계획이 있기에 여기에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나를, 나 자신이 나를 어떻게 볼는지 몰라도 하나님은 나를 귀하게 보시고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다 되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그리고 내게 어떤 것이 복된 것인지를 아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생각하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까지 바라보면서 그 안에 소망을 두고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2.성찬은 언약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까지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19장에서 시내산에 내려오셔서 20장부터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너희를 이끌어 낸 하나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난 이후에 말씀하신 것은 십계명, 제사의 방법, 종의 규례, 사형의 죄, 손해배상법, 성 도덕법, 사회 정의 복지의 법 등을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계약을 체결하십니다. 백성들은 산에 오르지 못하고 평지에 있었고 장로와 제사장들은 산 위에 까지 올라왔고, 그리고 모세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모세는 12지파를 상징하는 돌 기둥을 세우고 청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번제는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순종한다는 표시이고 화목제는 하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관계 속에 살려고 하는 결단의 의미로 드렸습니다. 이때 모세는 짐승의 피 절반을 하나님의 단 위에 뿌립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낭독했습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 때 모세는 짐승의 피에 나머지 반을 백성들에게 뿌렸습니다. 출28: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들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 제사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약속을 체결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행했던 것처럼 자신의 피 흘림으로 제자들을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서의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고 남은 자들과 새 언약을 세울 것을 렘31:33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여


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바로 그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새 언약의 제사를 드린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죽으심을 새 언약을 세우시는 제사로 보았고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창조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신앙으로 받아 드리고 고백하는 것이 성찬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이 행하질 때는 반드시 그 행위와 함께 그 행위를 설명하는 말씀이 늘 동반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궁극적인 의도는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시기 위함인데 우리는 과거에 죄로 말미암아 고난과 형벌과 죽음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고 그 죄가 해결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대속, 곧 죽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 들어갈 능력도,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 곧 피흘리신 죄 씻음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가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작업이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죄 사함의 대속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실재적인 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구체적인 열매로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선포와 죽음을 신앙 고백하는 것으로 그 존재를 확인했는데 그 신앙고백의 표현으로 교회는 규칙적으로 세례와 성찬예식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와 성찬예식이 없는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비록 성례예식이 행해지고 있더라도 참여하는 자들이 그 예식의 내포된 의미를 모른채 형식적으로만 참여한다만 바른 교회의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성례는 그 자체가 구원의 방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성례에 참여하는 자에게는 놀라운 하나님의 복이 있을 것입니다. 신자들은 성례를 시행함으로서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확인하고 성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된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이루리라" 주 안에 있는 자에게 놀라운 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의미를 바로 알고 참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야 복이 되고 은혜가 될 것입니다.


우리말에 짐승의 머리에 달린 뿔과 나무의 뿌리는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위로 솟아난 뿔과 아래로 뻗어 있는 뿌리가 같은 어원이라니 얼마나 신기합니까?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지만 결국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소싸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소 들이 싸울 때 뿔이 부러지는 것을 본 적은 있어도 뿔이 뽑히는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뿔은 깊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생활은 어떠합니까? 너무나 보이는 것, 겉으로 나타난 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누가 높은가, 공부 잘했는가, 많이 가지고 있는가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습니까?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이 뭔가, 누가 나를 알아주느냐, 교인이 몇 명이고 얼마의 예산을 가지고 운영하느냐를 얘기하면서 그것이 목회의 성공의 기준인 것처럼, 성공한 교회의 기준처럼 여깁니다.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그러나 나무는 나무는 높이 자란 만큼 아래로 뿌리는 내린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뿔 만큼이나 뿌리도 중요합니다. 성찬의 참여는 뿌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조그마한 빵조각 하나를 먹고, 포도즙을 마신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통한 우리의 신앙의 고백이 바르게 이루어 질 때 우리의 신앙은 든든히 서가고 그 신앙 위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복과 은혜를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성찬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성찬의 의미

저자 이상돈목사

본문 고전11:23-29

참고사항 군포영광교회

설교내용

1. 성찬의 제정

성찬예식은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처음 행하시면서 그 후 모든 성도들이 기념

하라고 하였습니다(마26:26-29)바울 사도도 "내가 너희에게 권한 것을 주께 받은 것이니"

(고전11:2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찬은 사람에 의한 제도가 아니라 친히 "주 예수님"께서 제정하시고 이를 기념하라고 명하신

거룩한 예식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 지켜야 할 영구적인 예식입니다.

성찬식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이 찬양과 영광을 받으셔야 하며 성도들은 감사로 영광

돌리며 기념해야 합니다.


2. 성찬의 내용.

성찬식에 사용되는 떡과 포도즙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 고난 당하시고 피흘리신 은총에 대한 표현으로 떡과 포도즙을 통해

기념하는 것입니다.

① 주님이 축사(축복)해주신 시간입니다.(마 26:26)

②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전입니다(고전11:24)

③ 주님과 맺은 새언약의 표징입니다.(고전11:25)

④ 주님이 영적으로 임재하시는 기념입니다.(전파,감사,소망,고전11:26)


3.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성도의 자세

성찬예식은 애찬이 아니며 거룩한 성찬 예식입니다. 성만찬에 참여하고져 하는 모든 세례교인들은

자신을 살피고 성찬예식에 참여해야 합니다. 상대방보다 '나 자신'을 먼저 살펴 보아야 합니다.

① 습관적을 참여하고 있지느 않은지 (형식,외식,애찬) ② 미신적인 신비주의로 참여하고 있지는

않은지 (화체설,죄용서) ③ 탐식과 무질서하게 참여하고 있지는 않은지 ④ 아직도 회개하지 않은죄를 숨기고 있지는 않은지 (엡5:22-24) ⑤ 믿는 자로서 본을 보이고 있는지 (고후13:5) ⑥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실천하고 있는지 (예배,기도,십일조,전도,봉사) ⑦ 성령을 소멸하거나 근심시키는

일을 하지는 않았는지 (살전5:19,엡5:30) 다시 한번 고전11:27-29절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입니다./ 성찬예식을 통하여 주님과 연합되었고 모든 성도들과 연합되었기에 주님을 사랑하고

모든 성도들과의 교제가 더욱 친밀해지며 하늘 나라의 주님을 소망하며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멘-

991128






제목 세례와 성찬

저자 박우택목사

본문 고전10:1-13

참고사항 한샘교회

설교내용

기독교의 세례는 초대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베풀어졌습니다. 초대교회의 시작으로 보는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였습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성령주심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관지어 설교하였습니다. 이때 베드 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회개 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2:37-38)고 도전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세 례를 받는 일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연관지어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세례는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적인 표현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받는 신자는 성찬에 참여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놀라운 구원의 사건, 즉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기념하였습니다. 하지만 떡과 잔을 마시면서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만이 아니고 성령을 통하여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우리 가운데 임재하 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중요한 외적인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세례와 성찬은 그리스도인됨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외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한다고 하여서 그 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의 행함에 있어서 신자됨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 다. 바울이 이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게 쓸 당시에 영혼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 몸으로 어떤 짓을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 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들을 경계하면서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중요한 사건을 가지고 신자됨의 모습이 무엇인지 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연구하면서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자와 그 삶의 상관관계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 니다. 이 주제를 연구하면서 첫 번째로는 어떻게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는가, 두 번째로는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 세 번째로는 어떻게 세례와 성찬에 참여한 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 수가 있는가 하는 문제들을 살펴보 도록 하겠습니다.


1. 어떻게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는가


이 본문은 헬라어 성경에서는 "왜냐하면"( , For))이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이 점은 참 중요한데, 이 내용은 앞에 내용에 대한 이유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9장 후반부의 내용의 핵심은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래서 그는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선수의 예를 들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리기 선수가 상을 얻기 위해 달려갑니다. 하지만 상을 얻는 사람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기기를 원하는 자마다 모든 일에 자신을 절제해야 합니다(고전9:24-25). 바울은 이러한 예를 들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에 승리하기를 원하는 자도 자신을 절제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바로 바울 자신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 이로다." 이 말씀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최후의 면류관을 얻기까지 자신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는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어난 일을 실례로 들면서 절제해야 할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1에 있는 "왜냐하면"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절제하지 않을 때 어떤 결과를 보여주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에 절제해야 한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역사가 무엇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우리 본문 고린도전서 10:1-3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 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켜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 성경에 나타난 의미대로 번역 한다면 "모든 사람이 모세와 합하여 구름과 바다로 세례를 받았다"( )라고 해야 합니다.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연합하여 그 길을 지나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 이 연합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과 합하여 우리가 죽었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일과 연합하여 우리가 부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에서 "구름과 바다로"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물로 세례를 받습니다. 물이라는 외적인 수단을 통하여 성령으로 세례받음을 인치는 일입니다. 이 일과 비교해 본다면 구름과 바다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 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나타난 구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에서 인도하던 구름기둥을 의미합니다(출13:21). 그리고 바다 는 홍해를 의미합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고 홍해가 그들의 길을 가로막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큰 능력으로 바다 를 가르시고 그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이 구름기둥이나 홍해 바다가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 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면서 모세와 연합하여 모세의 인도를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큰 능력으로 구원하셨 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름과 바다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이들은 신령한 식물과 신령한 음료를 마셨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식물이라는 것은 만나를 말하는 것입니다. 신 령한 음료 역시 그들이 광야에서 마신 물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 마셨으매 그 반 석은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고정된 반석의 개념이 아니고 그들과 항상 함께 동행하신 구약의 그리스도로부터 마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령한 식물을 먹고 신령한 음료를 마신 것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인하고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과 바다로 세례를 받은 후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신약의 성만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과 바다로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물을 마신 사건을 언급하는 목적이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애굽에서 구원함을 받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며 물을 마시면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구원을 경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과거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지고 당시에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며 성찬에 참여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우 리 신자의 삶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2.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자의 삶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합니다.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구원받은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로 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은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세례와 성찬 에 참여하는 자는 아주 특별한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말하기 위하여 바울은 계속하여 이스라엘의 역사에 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예를 들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 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 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 람들이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우리의 거울이 되는 사건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거울이 된다"는 말은 "본보기가 된다," "표본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을 표본으로 삼아 당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의 문제와 우리 성도들의 문제를 지적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들을 기뻐하지 않으셨을까요? 가장 먼저 지적하고 있는 부분은 우상숭배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저희 중 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서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 이 말씀은 구약의 출애굽기 32:1-6에 기록된 사건을 표본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이후에 빨리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습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가리켜 "우리 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이 신을 섬기는 방식대로 먹고 마시며 뛰어 놀았습 니다. 이 사건의 결과로 이들 중에 약 삼천명이 죽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 습니다. 우상숭배는 십계명 가운데 제 2 계명을 범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상은 인간의 사색과 상상으로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 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우리 생각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명한 방법에 따라 섬겨야 합니 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의 고린도교회는 우상의 신전에 참여하여 그들과 함께 뛰며 즐겼습니다. 지금 바울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상황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이방인들의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 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고린도전서 10:20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 지 않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참된 신자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인간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거나 우상에 축 제에 참가하여 믿지 않는 자들과 함께 술마시고 뛰어 놀아서는 안됩니다. 오늘날 절대 가치를 상대화시키는 포스터모던(postmode rn) 사상을 종교에 적용한 종교다원주의는 불교, 유교, 샤머니즘 등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 다를 뿐이지 최종적인 목표는 하 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우상을 섬겨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간음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 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여기에 바울이 표본으로 제시한 간음사건은 민수 기 25:1-9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싯딤이라고 하는 곳에 머물러 있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기서 모압 여자 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알브올의 제사에 초청하였습니다. 이 바알브올은 처녀들의 행음을 통하여 숭배되었던 모압 족속의 신 이었습니다. 그래서 간음 사건으로 인하여 하루에 이만 삼천명이 죽었습니다. 이 사건 역시 당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삶과 연 관된 사건이었습니다. 이들은 고린도에 있었던 비너스 신전에 참여하여 다른 여자들과 성관계를 가졌습니다. 문제는 이 행위를 비너스에게 드리는 제사방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이방신전에 참여하면서 간음을 행하 였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다른 남자나 여자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이상하게 오늘날 성도덕에 대한 분위기 는 남녀간의 성관계는 사랑의 표현일 뿐이지 죄악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의「제 3 물결」(1980)이라는 책 에서 미래 사회에 가정문제를 많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전통적인 가치가 붕괴되고 자유로운 성생활을 강조하는 시대적인 분위기로 흘러가게 될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점차적으로 우리 사회에 전통적인 성도덕이 자리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 가운데 이 본문의 간음의 문제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리스도를 믿음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 성도들은 시대적인 분위기가 어떻게 변화된다고 할지 라도 여전히 성경적인 윈리가 무엇인지 바르게 이해하고, 그 원리를 생할에 적용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세 번째로는 주를 시험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 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이 말씀의 표본은 민수기 21:1-9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에돔 땅을 둘러서 조금 멀고 돌아가는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 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하면서 원망하였습니다 . 이 일로 인하여 사막에 불뱀이 나타나 죽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한 이유는 하나님이 인도해 가시는 것이 그들 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길을 돌아가게 하신 것은 에돔이라는 나라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조바심을 극복하지 못했고,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시험하였습니다. 역시 이 일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시험한 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가 더디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분명하 게 나타나지 않을 때 원망하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우리에게 비록 더 디고 어렵게 보이는 일조차도 궁극적으로 선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네 번째로 주를 원망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 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 말씀의 표본은 민수기 14:2 이하에 있는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보 기도 하고, 16장에 나오는 고라 자손이 반역하여 원망한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14장의 사건이 더 적절하 다고 봅니다. 민수기 14장에서 보면 열 두 정탐꾼들이 가나안을 탐지한 이후에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이 부정 적인 보고를 듣고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외부 적인 상황만 보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어울리는 행동이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다 가나안에 들어가 서 구원의 은혜들을 누리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어나 사건을 가리켜 고린도전서 10:11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희에게 당 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과 바다로 세례를 받 고 광야에서 신령한 양식과 물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하거나, 간음을 행하며, 하 나님을 시험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구원의 사건을 믿고 그리스도와 연 합하여 세례를 받고 주의 은혜의 상에 참여하는 우리가 이러한 행동을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는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고,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삶의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면서 우상을 숭배하거나 간음을 행하거나 하나님을 시험하거나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3. 어떻게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그러면 세례와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는 어떻게 합당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바울은 두 가지 중요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느니라." 여기에 아주 중요한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 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나타났던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는 상황은 계속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답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깨끗하고 정직하게 사는 일이 정말 어렵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위장하고 교회 안에 들어온 종교다원주의 사상들 이 있습니다. 죽은 조상에게 절하는 일들을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전통문화라고 하는 미명하에 무당을 우 리의 고유한 놀이문화인양 위장되기도 합니다. 부부 외에의 남녀간에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국가에서 사창제도를 인정하고 있다면 창녀들과 관계를 가지는 것은 합법적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우리 사회는 정직하고 올바 른 길을 걸으면 손해를 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원받은 자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모릅니다. 또한 많이 기도 해도 응답이 없을 때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부단히 자신의 삶을 말씀으로 훈련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27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강하다고 생각하면서 경솔하게 유혹에 뛰어들 지 마십시오. 그레이엄 골즈워디(Graeme Goldsworthy)는 칼빈주의 5대 교리 가운데 하나인 "성도의 궁극적 구원" 또는 "성도의 인내"로 알려진 교리에 대하여 아주 적절하게 말했습니다. 이 교리가 믿는 자의 안전보장을 말하는 것은 사 실이지만 이 교리는 자신의 중생체험을 믿고 죄를 자유로이 범하며 경건을 무시하게 만들기도 하는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 히 구원받은 것"이라는 사상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인내라는 것은 참으로 구원받은 자는 어떤 어려움 과 유혹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부단히 자신의 삶을 훈련하면서 넘어 질까 조심합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느니라. "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험이 찾아옵니다. 물론 이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하는 시 험(trial)도 있고,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시험(temptation)이 있습니다. 이 본문의 헬라어 성경에 나타난 시험(( )은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하나님께서 감당치 못할 시험 외에는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 야 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받은 시험도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사람이 감당 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 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어 주셔서 능히 감당케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약속을 신뢰하고 기도하는 일은 모든 시험을 이기는 방법입니다980301






제목 부활과 성찬

저자 윤정현목사

본문 막14:17-31

참고사항 대선교회

설교내용

주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여러 번 주님께서 십자가에 고난받으실 것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하시면서 제자들과 나눈 대화입니다. 그 만찬 석상에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가롯 유다를 향한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 21절에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다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가롯유다에 의해서 예수님은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 속하셨습니다. 주님이 빌라도에게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주님은 물과 피를 흘리셨습니다. 히브리셔 기자는 말씀하시기를 "피 흘리심이 없으면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라 하시더니 주님은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씀하신 대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때문이었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길은 이 길 말고 없기에 주님께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돌아 가셨습니다. 그 때 하늘과 땅이 어두워지고 해가 빛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그 영혼을 맡기시면서 운명하셨습니다.


Ⅰ. 주님의 부활


그리곤 곧장 아리마데 사람 요셉의 새 무덤에 장사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무덤에서 사흘을 계셨습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 하셨습니다. 이는 막14:27,28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라고 하신 대로 주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고전15:3절 이하에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믿는 자는 마지막 때에 다시 살 것을 믿습니다. 부활의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이요, 빼앗길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도 주님 부활하심 같이 주님 오시는 그날에 다 부활할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요14:1-3)


주님은 이 땅에 40일 동안 계시다가 감람산에서 승천하셨습니다. 그때의 모습을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감람산에서 약 오백여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리어 가셨는데 구름이 주님을 가리워 보이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 천사들이 하는 말이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우리 주님께서 두 번째 오실 것입니다. 그때에 죽은 자는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게 될 것이고, 산 자는 변화하여 우리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맞이하여 주님의 승리하심과 같이 우리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처럼 부활 할 줄 믿는 부활신앙으로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 오실 때까지 이 사실을 증거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Ⅱ. 주님이 제정하신 성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성찬에 떼는 떡은 주님이 우리를 위래서 십자가에서 찢기신 몸입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상하신 주님의 몸입니다. 이렇게 떡을 떼신 후에 또 잔을 가지시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잔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언약의 피였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성만찬을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에 떡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또 식후에 잔을 가지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고전11;23절 이하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의 성찬 상에 참예하는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우리에게 내려 주신 축복의 선물이요,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가 떼는 이 성찬은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입니다.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51~52)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성찬을 참예하면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먹고 마실 때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초대 성도들은 떡을 떼며 교제하였다고 했습니다.(요6:56, 57, 마4:4) 또한 이 성찬을 참예하는 사람은 주님 뜻대로 살려고 힘써야 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먹고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살이 찌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사는 목적이 다르고 사는 방법이 다르고 삶의 행복의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이 예식을 언제까지 했으면 좋겠습니까? 고전11:26에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찬을 앞에 두고 주님의 죽으심을 생각하는 뼈아픈 회개가 있는가 하면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을 벅찬 가슴으로 바라보는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이 말은 환난과 핍박 중에서 마음 졸이며 살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큰 힘과 능력이 되었습니다. 다시 오마 약속하신 그 주님을 생각하며 저들은 토굴 속에서 이 성찬예식을 행했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그날을 간절히 고대했기 때문에 토굴 속에서도 견딜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다시 오시마 약속하신 주님을 굳게 잡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성찬은 우리가 한 형제 자매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찬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의 것입니다. "당신과 나는 한 형제입니다." "당신과 나는 서로 사랑을 나누어야 할 그리스도의 영원한 가족입니다" 이런 고백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성찬에서 만나는 주님은 나와 여러분의 죄 때문에 피 흘리셨습니다. 한 피 받아 한 몸인 형제자매입니다. 우리는 이 예식을 행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다" "한 순례 길을 가고, 같은 고향을 가진 형제 자매다" 이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쪼록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힘있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모임이 잔치 집과 같이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떡과 잔을 드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축사하셨습니다. 이 성찬에 참예하는 사람들은 이제 감사가 넘쳐서 우리 성도들이 사는 모든 환경을 축제로 만들어야 합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그의 영이 죽게 되었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음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요6:53절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57)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58)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고난받으시며, 나를 위해서 다시 살아 부활하신 우리 주님의 살을 먹듯이! 피를 마시듯이 주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음식물을 취하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주님을 믿지 않으면 죽는 줄 알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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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례,성찬, 그리고 감사

저자 윤정현목사

본문 출23:14-17

참고사항 대선교회

설교내용

오늘은 우리 교회에서 98년도 추수 감사주일과 성례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돌이켜 보면 금년 한해는 IMF 원년에 해당되는 해로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고통으로 인해서 미친 여파로 직장을 잃고, 사업의 위기와 부도가 연출되고 더 나아가서 가정의 위기로 연결이 되어서 깨어진 가정들이 생산되는 악순환의 궤도에 진입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소망과 의욕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음을 볼 때에 마음 아프기 그지없습니다.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다 이런 고난을 만나게 되었을까! 이것은 이 민족을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이요, 더 잘되게 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인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소돔과 고모라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화산의 폭팔로 잿더미가 된 폼페이 수도와 같이 되지 않게 하시려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작품임을 우리가 알고 이 시대의 고통을 함께 분담하면서 이 민족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운동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은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실 것이며, 흩으셨으나 다시 모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위기를 기회로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화가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금년에도 여호와의 절기인 추수 감사절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첫번 추수 감사절이라고 할 수 있는 퓨리턴들의 감사를 생각해 봅니다. 그들의 감사는 비록 보잘것도 없었습니다. 인디언들의 습격과 풍토병과 기근과 허기에 지친 그들이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상륙했던 청교도들의 거의 절반 이상이 이미 죽어간 후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은 얼마 되지 않는 곡식이지만 그들의 손으로 농사할 수 있었고 농사하게 하시고, 그래도 모든 위기에서 건져 주셔서 생명이 있게 하신 하나님께 물질로 감사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IMF 상황이지만 과거의 더 어려웠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하나님께 오늘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라고 명하신 것이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행하여야 할 규례와 절기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Ⅰ. 할례


할례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17:10-14에서 제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을 떠나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국경 지대인 하란에서 아버지가 데라가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세겜 땅에 거주하다(창12:7), 다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겼다가(창12:8),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으로 옮겨갔다가 다시 벧엘과 아이 사이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창13:3). 그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도착하긴 했지만 손바닥만한 땅도 자식도 없이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무자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고 그 땅을 그 자손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가나안에서 번성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는 언약의 상징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의 명령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이삭은 야곱에게 야곱은 열 두 족장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대대로 모든 남자들은 히브리인이나 돈으로 산 자까지 할례를 받으라고 명하셨고 그렇게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창17:14) 라고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 된 표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그 할례는 신약 시대에 세례로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할례를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것처럼, 이 세례도 우리 주님께서 친히 명하신 것입니다. 마28:19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 요한에게 나오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 때에 비둘기 같은 성령이 예수님에게 임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일이요, 참으로 소중한 축복된 예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례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된 언약의 표가 되는 것처럼! 신자들이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되었다고 하는 공적인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는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이기도 합니다. 좀더 말씀드리면 이 세례는


. 세례는 육체의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는 것을 뜻합니다.(롬6:2)

. 세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마음속에 죄를 씻는 표징입니다.

. 세례는 예수님과 함께 영적으로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골2:12,3:1-3)

. 세례는 하나님 집의 한 식구가 되었다는 표징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딛2:14)

. 세례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표입니다.(롬6:13)

. 세례는 주님만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 세례를 받음으로 신앙이 향상됩니다.(골3:1-3)

. 세례 받은 사람만 성찬에 참예 할 특권이 부여됩니다. 구약에 유월절에 참예할 수 있는 자격은 할례를 받은 사람만 할 수 있었습니다.(출12:48)

. 물세례를 받음으로 성령 세례까지 받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마3:15,16)

. 세례를 받음으로 교회의 정회원이 되는 특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Ⅱ. 유월절(출23:14,15)


유월절 절기도 하나님의 절기로서 대대로 지킬 규례입니다. 이 유월절을 무교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출12:14에 보면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 지니라"


이 유월절은 대대로 지킬 예식인 것입니다. 대대손손이 기억하여야 할 예식인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놀라우신 은혜를 그래야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후대에 우리의 자녀들이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고 물을 때에 "이는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라고 대답해 주라는 것입니다. 이 유월절을 어떻게 지켰는가를 살펴봅니다.

1) 양을 잡아야 합니다. 출12:21절 말씀에 양을 잡을 때에 "너희 가족대로 어린양 을 택..."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구원은 인류 전체를 위한 속죄 사역이지만 하나 님은 구원은 각자의 믿음으로 이루어짐을 말씀합니다.

2) 양을 잡아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라고 출12:22절 말씀합니다. 그 피의 보호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3)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출12:22c에 말씀하셨습니 다. 이 말씀은 피를 뿌린 문안에 있을 때만이 안전하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 합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달리 없기 때문입니다.(행 4:1-2)

4) 그 밤에 하나님의 보내신 멸하는 자가 그 피를 보고...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출23:23) 그 피가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5) 이 유월절 규례는 26절에 보면 "너희....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여 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 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구약의 유월절은 신약에서 성찬으로 대신하게 되었 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떡과 잔을 가지시고 떼어 주고 나누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요...내 피로 세운 언약이니 이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전11:24-25) 라고 분부하신 예식입니다. 요6:53,54에


"예수께서 이르시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 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 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로다"


성찬의 의미


1) 생명이신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느니라."(요6:56) 우리는 이 성찬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상하신 몸과 흘리신 보혈의 은총을 입으며 그분과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연합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우리도 죽고, 주님이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심 같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 다시 사는 몸이 되는 것입니다.


2) 속죄의 은총을 덧입는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1:7)라고 하셨으니 성찬의 잔은 나의 모든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대속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마다 육신의 기갈이 없어지고 배부름이 있듯이, 이 성찬을 통해서 우리의 심령이 기갈을 극복하고, 사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기쁨과 평강이 넘쳐 나게되는 것입니다.


3) 성찬은 부활과 영생을 소망케하는 예식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하셨으니 주님 오실 때에 이 성찬에 참예하였던 모든 이들이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 날 것을 약속하는 예식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이 예식에 참예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유월절도 할례 받은 사람만 참예할 수 있는 것처럼 성찬의 상에도 세례받은 사람만 참예할 수 있는 것입니다.


Ⅲ. 맥추절과 수장절


출23:16에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년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축함이니라"

맥추절은 칠칠절(신16:10), 오순절, 초실절(출34:22)이라는 말과 같은 말로 쓰이는데 밭에 씨를 뿌리고 첫 열매인 보리와 밀을 추수하였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 제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이후에 50일 째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이라

고도 하는 것입니다.


수장절은 "초막절(레23:34), 성막절, 장막절 등과 같은 이름으로 불려졌습니다. 이것은 년 종에! 가을에 추수하고 창고에 거두어들인 후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맥추절과 수장절을 지키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라"(출23:15c) 라고 하십니다.


우리 대선의 모든 성도들이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시고, 더욱 기도하고, 능력을 받아서 범사에 감사하면서 살아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비록 전쟁의 소리는 들리고, 환난은 연속적으로 우리를 위협한다고 해도,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어도,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비록 실직을 당하고 부도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생사화복을 책임지시며, 끝까지 은혜 주실 우리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완성을 이루실 하나님을 생각하며 감사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합3:16-18)


모쪼록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화답하며, 찬송하며, 감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하여 대대손손 이 절기와 규례를 지켜 복을 받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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