好學의 敎育 1/원고[절기,헌신예배]

성찬설교 3

好學 2009. 11. 3. 19:16

 

성찬설교 3

 

 

제목 주의 성찬

저자 유병의목사

본문 눅22:14-20

참고사항 한양교회

 

설교내용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v19-20)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기록한 책을 복음서라고 한다.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사역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 선포다. 하나님의 나라 선포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창조하는 일과 그들을 모아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마16:16-18). 사도들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하였다. 그들은 교회를 세웠다.


참된 교회는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고백함으로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된다. 교회가 이와 같은 고백을 하는 것은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성찬과 세례다. 그렇다면 세례와 성찬이 없는 교회는 참 교회라 할 수 없다. 물론 성례를 거행한다 하여도 성례의 의미를 모른 체 참여한다면 이 역시 바른 교회라 할 수 없다. 물론 성례가 구원의 방편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성례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신앙의 유익을 주는 성령께서 역사 하시는 하나의 도구요 방편이 된다.


성례가 주는 유익은 주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됨이요, 그의 백성 혹은 그리스도에게 소속됨을 확인하게 된다. 개혁파는 천주교와 달리 성례의 종류를 세례와 성찬 두 가지만 인정한다. 성경이 그것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세례란 물을 뿌리며 성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죄를 씻는 의식이다. 실제적으로는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의미한다. 바울은 골2:12, 롬6:3-8에서 세례의 효능에 대해 언급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연합', '합하여', '함께'라는 단어를 동원하여 그리스도와 동일시 동질화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성찬의 의미와 요소 그리고 그 효능을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성찬은 예수의 대속의 죽음을 의미한다. 성찬의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떡을 떼는 일과 잔을 붓는 일이다. 떡은 예수님의 살이요 몸이다(눅 22:19). 잔, 포도주는 예수의 피를 상징한다(막14:24).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고 하였다. 이는 이사야 53:10-12을 인용하신 말씀이다.


출애굽기 24:8을 보면 최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셨다. 모세는 그 언약 위에 피를 뿌렸다. 그런데 예레미야 31:31-33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언약을 갱신하여 새 언약을 약속하셨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성찬을 베풀 때, 잔을 나누면서 이는 새 언약의 피라고 하였다. 성찬은 단순한 기념행사가 아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행사를 통한 새 언약의 효능이 우리에게 실제로 적용되도록 성령이 역사 하시는 축복과 은혜의 시간임을 잊지 말라.


이와 같은 성령의 은혜의 역사를 기대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참여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요,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다.


주님오실 때까지 성찬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고백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만인에게 전파하는 교회 되기 바란다.



 


제목 성찬에 참예할 자

저자 변한규목사

본문 롬6:1-5

참고사항 광주중앙교회

 

설교내용

오늘은 성례주일입니다. '성례'라는 말은 기독교의 '거룩한 예식'이라는 뜻인데 성례는 세례와

성찬뿐입니다. 성찬은 떡과 잔을 들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그 상하신 몸,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고전 11:20에서는 이 성찬을 "주의 만찬"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거행하려는 이 성찬 예식은 비록 눈으로 보이는 떡과 잔을 들기는 하지만 '기념하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찢기신 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보배로운 피를 기념 하려는 예식인지라 너무도 거룩하고 송구하고 소망이 넘치는 매우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자가 이 거룩한 예식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첫째,예수와 합한 자

롬6장의'합한다'는 말은 '접목한다 접붙인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접붙임 받으면 인생이 가치 있게 됩니다. 없었던 힘이 생기고 잃었던 생명을 만나게 됩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포도나무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 있고,예수님 안에 사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예수님때문에 사는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지만 의 되신 예수님과 합하여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으며,죄 씻음 받았고, 의롭다 함을 입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고,천국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성찬 예식에 참여 하면서 우리의 심령 속에 평화, 기쁨, 소망이 넘쳐야 합니다. 그러면서 신령한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찢기신 살과 예수님의 흘리신 보배로운 피를 생각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심정으로 이 예식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종일관 기도하는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보잘 것 없는 인 생이 힘을 얻고 재기할 수 있는 비결은 기도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심정으로 이 성찬예식에 동참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세례를 받은 자

성찬에는 세례를 받은 자만이 참예할 수 있습니다.

(1)세례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뜻입니다. 본문 2절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은 죄에서 해방 받았다는 말로 이제는 죄의 종 일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내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내 죄도 죽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죄 가운데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이 거룩한 예식을 거행하면서 죄사함받은 찬송, 감사,감격 속에서 참회하면서 성찬예식에 참예해야 할 것입니다.

(2)세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죽었다는 뜻입니다. 본문 3절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성도는 예수의 죽음과 함께 세례를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었습니다. 나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장사지 낸 바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의 혈기, 교만, 욕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살아 있어야 될 것 살지 아니하고 이미 죽었어야 될 것 죽지 아니할 때 덕스럽지 못한 일이 생겨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워 집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를 받을 때의 서약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례의 의미 속에 이러한 서약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찬 예식에 참예하면서 서약한 것을 지키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3)세례는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했다는 뜻입니다. 본문4절이 그 내용입니다. 사랑 하는 성도여, 내 안에 내가 살아서는 안됩니다. 내 속에 주님만이 살아 계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셋째,자기를 살핀 자

고전11:28"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사랑하는 성도여, 성찬 예식에 참예하면서 자기를 살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네가 누구냐?" 물으면서 진실한 인생을 배우는 신령한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거짓이 없고 부정이 없고 더러운 것 냄새나는 것이 전혀 섞이지 아니하는 진실한 인생을 배우는 은혜의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복된 예식에 참예하면서 가난한 심령,애통하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조용히 자신을 향하여 물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와 합한 자인가?" 내가 참으로 세례를 받은 자인가?" 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까?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 입니다.

본문 1절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그럴 수 없느니라"를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성찬예식에 참예할 때 "나는 믿음이 너무 약하고, 의지, 육신도 약하지않는가?" "나는 전도에 있어서는 병들어 있지는 아니한가?" "나는 성전건축에 있어서는 잠자는 자가 아닌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성도들처럼 "나는 부자라 부요 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성도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자기를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거룩 거룩한 성찬예식에 참예하려고 할 때에는 자기를 살핀 자만이 이 예식에 참예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를 해야 될 것입니다.

20일 홍해작전 특별 새벽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은혜 받을 만한 때, 능력 받을 만한 때, 심령이 부흥할 만한 때, 그래서 가정이 부흥하고 교회가 능력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동참 하셔서 은혜 많이 받고 믿음의 생기를 얻고, 새롭게 능력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동참하셔서 은혜 많이 받고 믿음의 생기를 얻고, 또 새롭게 능력 얻는 우리 모두들이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은혜 충만한 이 시간 되어지기를 소원하면서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성찬상에 오신 예수님

저자 변한규목사

본문 요3:16

참고사항 광주중앙교회

 

설교내용

봉독한 요3:16은 성경전체의 요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약하면 '기독교는 주셨으니'의 종교입니다.

'주셨다' 이 말씀은 하나님 편에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냈다는 의미요. 예수님 편에서는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첫째, 어디에 오셨는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세상'은 죄악 된 인간을 의미하며 어둠이 짙은 세상, 죄악 된 세상, 고통이 많은 세상, 눈물이 있고 근심이 있는 세상, IMF 세상, 죽음의 세상을 의미합니다.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께서 나 같은 것을 사랑하사 예수님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 교회도 주셨습니다. 교회를 주신 것은 모이기를 힘쓰기 위해서입니다. 루터는 교회를 어머니처럼 여기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는가? 교회를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흥사경회를 할 때에 양식을 싸 짊어지고 이부자리를 어깨에 메고 열심히 좇아 다니면서 은혜를 사모하지 않았습니까? 히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셨으니'의 사랑입니다. 참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기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오늘 성례주일 성찬예식에 동참하면서 떡을 들고 잔을 들 때 예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성찬예식에 동참하는 성도들 모두 모두에게 이러한 사랑과 축복이 넘칠 수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어떻게 오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 육신은 살과 피가 있는 우리와 똑같은 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살려고 오신 분이 아니고 죽으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비밀한 이름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로고스" 곧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말하려고 오신 말씀이요. 하나님을 나타내고 또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오신 그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눈에 뵈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죽을 수 없지만 예수님은 육신, 곧 사망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시지 아니했더라면 육신인 내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영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그 몸을 찢기시고 피를 쏟으셨으나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내가 사니 너희도 살리라"말씀하셨습니다. 요6:53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성찬예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예수님을 모셔야 될 바로 나입니다. 성찬예식에 참여하려는 성도들이여, 떡과 잔을 들면서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소망이 넘치는 찬송을 마음으로 불러야 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여, 내 약한 육신이 강하게 하옵소서"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외면한 자는 불행한 자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가 행복한 자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 주님 예비하신 넘치는 축복을 우리의 심령가운데 충만히 누릴 수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어째서 오셨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 "이처럼"이란 뜻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실 만큼 사랑하사'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나'같은 죄인을 살리시려고 오셨습니다. 나의 구원을 성취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 본문에도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루터는 성찬상에 놓인 떡과 잔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수많은 죄악 된 인생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얼마나 많이 넘어졌고 새로워 졌으며 새 길을 걷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성도여, 떡과 잔을 들면서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위해 무엇을 주느냐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하와를 지으셨습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과 같이 죄의 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들이 짐승의 형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거듭나지 아니하면 안되는 인생입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죄인 가운데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리고 죽으신 우리 주님을 기념하기 위하여 친히 성찬예식을 마련하사 성찬상에까지 오신 우리 주님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의 죄를 회개하라 인자의 온 것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 예식에 참석하면서 떡을 들 때에 잔을 들 때에 내 가슴이 뭉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죽으신 주님, 내 남은 날 주님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갈꼬 생각하면서 재헌신을 다짐하는 거룩한 예식이 되었으면 싶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예비하신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예비하신 축복을 받아 누리십시다. 우리 주님과 함께 먹고 함께 마시는 복스러운 성찬예식이 되어질 수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목 성찬에의 초대

저자 안영모목사

본문 시136:1-7 요6:53-59

참고사항 경주성화교회

 

설교내용

한해동안 받은 은혜를 깊이 생각하면서 진정한 감사를 우리 하나님께 드리며 성례예배에 동참한 우리 성도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은혜가 충만하시고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교회의 샘 줄기가 되게 한 예식이 있다면 바로 성찬예식입니다. 근대신학의 대부라 할 수 있는 독일의 쉴라이에르마허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가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 하나는 기도이고, 그리고 중요한 것 하나는 성찬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가장 중요한 통로가 성찬예식 입니다. 성도는 성찬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비로움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새로운 약속의 관계를 맺고 복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초대하신 성찬예식에 참여했습니다. 성찬의 의미와 뜻을 생각해보면서 신령한 교제를 나누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찬은

첫째 / 내 자신을 살피며 고백하는 예식입니다.

고전11:28에 보면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성찬에 참여한 우리는 내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내 자신을 살필 때 허물이 있고 혈기가 남아 있고, 아직도 마음 가운데 불의한 것

이 남아 있다면 이것을 다 고백하고 회개하면서 참여해야 합니다.

둘째 / 성찬은 생명을 얻게 되는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지 아니하고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새롭게 태어날 때 우리의 모습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집니다. 언어가 달라지고 얼굴이 달라지며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셋째 / 성찬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시고 잔을 나누어주신 다음에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씀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넷째 / 성찬은 새 힘을 얻게 되는 예식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밥을 먹어야 힘이 생깁니다.

우리의 심령과 영도 먹어야 영적인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먹어야 할 생명의 떡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성찬예식에 참여하여 주님의 몸을 상징하는 포도즙을 먹음으로써 믿음이 생기고 새 힘을받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새 힘을 공급받아야 어떤 고난도 고통도 이겨나갈 수 있으며 세상도 마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성찬에 참여한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새 힘을 공급받고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잘

감당해 나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제목 거룩한 성찬

저자 이석권목사

본문 마26:26-30

참고사항 순천성북교회

 

설교내용

우리 기독교에는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두 가지 성례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세례와 성찬을 말합니다. 오늘은 그 두 가지 성례 중에 성찬에 관해서 피차에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⑴ 성만찬의 역사적 내력

성만찬의 기원은 아무래도 유월절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유월절은 장막절, 오순절과 함께 유대 나라의 3대 절기 중의 하나로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적인 출애굽을 하기 전날 해질 무렵에 미리 준비했던 1년 된 흠 없는 양들을 매 사람 수대로 잡고, 그 피를 자기들이 살던 집의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발랐습니다. 그리고 양고기는 불에 구워서 무교병과 쓴 나물과 같이 먹고 남은 것은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유월절 음식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먹게 되어 있습니다.

①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은 고기의 체질을 파상시키지 않기 위함이니 민족의 단합과 일체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② 쓴 나물을 먹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고생하던 것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③ 무교병을 먹는 것은 옛날의 죄악을 제거하고 새 생활을 시작하게 됨을 상징합니다.

④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⑤ 유월절 음식을 모두 불태워 버리는 것은 성물을 존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출애굽 사건은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구속받은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 만찬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진 다락방 만찬으로 끝나고 그후의 유월절 기념은 성찬 예식으로 거행하게 된 것입니다.


⑵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진 만찬

① 마지막 만찬입니다.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해서 식탁에 둘러앉은 제자들은 그 자라가 어떤 자 리인지,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지만 예수님은 이 만찬이 끝나고 나면 곧 체포되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화가 레오날드 다빈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만 찬 석에 둘러앉은 그림을 그려서 마지막 만찬(The Last Supper) 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② 주님을 기념하는 만찬입니다.

고전11:24-25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 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찬을 행할 때마다 주님의 가르침과 생애를 기념해야 합니다.

③ 거룩한 만찬입니다.

예수님께서 만찬을 잡수시다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서 자마다 "주여 내니이까? 주여 내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죄 중에 주님을 배신하는 죄가 제일 큰 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을 행할 때마다 "주여 내니이까?" 하면서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만찬은 거룩한 만찬이오 동시에 자신을 살피고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목 성찬의 메시지

저자 이신복목사

본문 눅22:14-23

참고사항 서울제일교회

 

설교내용

성찬, 혹은 성만찬(The Holy Communion)은 예수님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에서 유래(由來)된 것으로 초대 교회이래 교회가 지켜온 거룩한 예식이다. 초대 교회시대에는 모일 때마다 거행했는데 일부 생각없는 사람들이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일이 있어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1장 17-34절에 이를 책망하고 권면한 내용이 나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찬예식은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 그러면, 이제 성찬의 의미는 무엇이며 성찬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를 함께 살펴보자.


I. 주께 받은 것이다(고전11:23-25)

주 예수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또 이것을 행하라고 명령하셨다. 성찬은 주 예수께로서 온 것으로 거룩한 것이다.


Ⅱ. 떡과 잔(고전 11:23-25)

주께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하셨다.

오늘까지 우리가 떼는 떡은 주님의 몸을, 나누는 잔은 주님의 피를 의미한다.


Ⅲ. 피로 세운 새 언약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최초의 언약은 에덴동산에서 체결된 선악과 언약이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의 범죄로 이 언약이 무참히 깨어지자 하나님께서는 곧 무조건적인 언약, 즉 "여자의 후손"(창3:15)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 언약의 성취를 위하여 아브라함(창12:1-3)을 택하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셨다.

이 언약의 성문화(成文化)가 430년 후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의 사이에 체결된 십계명 언약이다.(출20:1-17)

이 십계명, 즉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므로 새 언약을 맺게 되었다. 이로써,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요3:16) 구원의 길이 열렸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요 1:12)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게 되었다.

피로 세운 새 언약의 의미를 알자. 보혈의 능력을 알자. 예수 십자가의 피로써 죄와 저주는 끊어지고 흑암권세는 깨어졌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것이다(롬8:1-2).


Ⅳ. 구원받은 자들의 신앙 고백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은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이 구원의 신앙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찢기신 주님의 몸과 흘리신 피가 내게 해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믿고 고백하는 행위가 성만찬이다.


Ⅴ. 보이는 예배

일반적으로 예배는 말씀의 예배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우리는 아멘으로 응답한다. 여기에 성찬은 보이지 않는 말씀에 비하여 보이는 예배로써 의미를 가진다. 떡과 잔을 들 때에 더욱 생생하게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속에 새기게 되는 것이다.


Ⅵ. 재림 신앙의 보전(保傳)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6) 주님 다시 오실 것을 굳게 믿으며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신앙을 굳게 가지게 하는 것이다.


Ⅶ. 유월절 어린양

예수께서 이 마지막 만찬을 나누신 때가 유대인의 절기로 유월절이었다. 성찬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죽으셨다고 하는 깊은 의미가 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36) 한 말이 바로 그 뜻이다. 이사야 53:1-6이 말씀하신 대로 대속제물(代贖 祭物)이 되신 것이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의 피를 바른 그 날, 바로는 꺾이고 이스라엘은 해방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흑암권세는 꺾이고 모든 죄인들이 죄에서 해방되는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다.

- 그러므로, 주의 떡이나 잔을

①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지 말자(고전11:27).

②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들자(고전11;28).

③ 함부로 하면 죄가 있다(고전11:29).

④ 잘못하면 죽는 수도 있다(고전11:30).

- 이제 성찬의 의미, 성찬이 주는 메시지를 바로 깨닫고 온전한 마음과 믿음으로 참여하여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주시는 넘치는 은혜와 복을 마음껏 받아 누리자! 아멘.






제목 성찬과 영원한 생명

저자 손영화목사

본문 요6:47-58

참고사항 광주영림교회

 

설교내용

미국 듀크대학의 제임스 클리란드 박사는 소년 때, 어머니에게서 성찬에 대하여 처음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때 받은 감동이 수십 년이 지났으나, 지금도 새롭다고 말했습니다. 제임스는 어머니께 성찬에 대하여 설명해 달라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제임스야,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을 먹고 마시며 나를 잊지 말라고 부탁하셨단다. 제임스야, 나는 주님의 제자야. 나는 주님을 잊을 수가 없어. 그래서 과거 수십 년간 한 번도 주님의 부탁을 잊지 않고, 반드시 성찬식에서 떡과 포도주를 마시며 주님을 기억했단다."


우리도 오늘 주님의 분부하심을 받들어, 성찬에 참예하려고 합니다. 성찬을 받기 전에 먼저 성찬의 말씀을 살펴봅시다.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그 전날 밤에 언제나 같이 했던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았습니다. 주님의 그 거룩한 식탁 앞에서 제자들은 결점과 허물의 먼지들도 그대로 묻은 채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팔려는 유다까지도 그 곳에 나와 앉아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세상 먼지가 낀 채로 나왔어도 좋습니다. 마음과 영혼의 먼지를 씻어 내고, 주님과 만남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때의 제자들은 성찬의 감격을 간직하고 어디서나 주님의 제자로서 살다가 최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마태와 요한은 생생하게 성경에 기록해 두고,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받게 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주림이 있습니다. 음식을 얻지 못한 육체의 주림과 음식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주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진리에 대한 기근, 생명에 대한 기근, 사랑에 대한 기근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보다 그 앞 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영혼의 주림에는 관심도 없는 사람들을 책망하셨습니다(25-27절).


예수님은 진리와 생명과 사랑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와 생명과 사랑에 기근당한 자들은 예수님만이 치료하고 구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나를 믿으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그러면 하늘에서 내려온 증거를 대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서 먹게 한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왔다면 하늘에서 떡을 내려 먹게 하라. 그러면 믿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떡은 생명을 지탱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여기서 '생명'은 예수님을 통하여 다시 얻은 생명,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1. 이 생명은 어떻게 받습니까?


우리 함께 53~54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여기서 '먹는다', '마신다'는 말은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기를 즐깁니다.


전에 한 달 동안 "성경답사연구"를 하며, 애굽의 남쪽 룩소르에서부터 시내 반도를 거쳐, 요르단과 이스라엘을 돌아서 터어키의 이스탄불까지 20여 일이 지나는 동안 거의 아랍 사람들의 노린내 나는 음식을 먹고 지냈습니다. 일행 목사님의 친구집에서 한국음식을 먹고, 우리는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세상에서 다시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음식은 극히 평범한 한식이었는데도, 우리를 무척 행복하게 했습니다. 같은 뜻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맛있고 즐겁게 먹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맛있게 먹고 마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맛있게 먹고 마실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맛있는 음식처럼 즐겁게 영접하여 모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1: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음식처럼 먹고 마시며,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믿기를 원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영접하여 믿으면,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게 됩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라."라고 하셨습니다(55절).


2. 이 생명은 예수님과 연합된 생명입니다.


5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한다."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육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걸림이 되었습니다. 아마 그들은 얼굴을 찌푸리며 사람을 잡아 먹는 식인종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십자가 위에서 상하신 몸과 흘린 피를 말합니다. 그 살과 피로 우리의 죄값을 갚고, 속죄해 주신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하여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모시면, 그리스도와 영접한 그 사람과는 하나가 됩니다. 마치 음식을 맛있게 먹고 마셔서 그 음식이 내 속에서 내 살과 피가 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내가 받아들여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살고, 나도 너희 안에 산다."고 하셨습니다. 이 진리를 가장 잘 설명해 주신 말씀이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는 끊을 수 없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그처럼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가지인 우리와는 생명의 관계라는 뜻입니다. 가지가 나무에게서 끊어지면 죽는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에게서 떨어지면 죽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우리는 끊으려 해도 끊어질 수 없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영원토록 함께 살아야 할 한 생명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한 생명체로서 사시기 바랍니다.


3. 이 생명은 영원합니다.


57절에서 "……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나로 인하여 산다."는 말씀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얻어진 생명의 근원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또한 58절에서 "……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을 배부르게 한 음식은 영생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의 양식은 잠깐뿐입니다. 먹고도 배고프고, 먹고도 죽을 음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음식 삼아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예수님의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사람은 죽되 영원히 죽고, 영접하여 살면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2:20에서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말씀으로 된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 버리신 예수 위해 산 것이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살아난 우리 모두, 예수님을 위해 살아갑시다.







제목 주님의 성찬에 참예하는 바른 태도

저자 William Powell Tuck

본문 출16:14-21 막14:22-25

참고사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설교내용

우리들이 성찬식에 참예하는 태도를 돌이켜 보면 대부분 성찬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와 영적인 교제를 갖게 되는 것인가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찬식의 신성함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참에는 하지만 그 의식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이 라든지 신비스러움 또는 경이로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놓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성찬에 참예하는 바른 태도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리하며 우리가 주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갖게 되기를 원합니다.


1. 우리들이 첫 번째로 기억해 두어야 할 젓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성찬의 주인'이 되신 다는 사실입니다. 성찬은 우리가 베푼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베푸신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주인이 되십니다. 그분이 제자들에게 떡을 떼시고 잔을 돌리는 자리가 성찬의 자리였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참예할 떡과 산에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분의 초대로 성찬에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찬을 위 해 자기에게로 오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영접하기 위해서 손을 펼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시며"너희 중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찬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2. 다음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성찬의 참예는 받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것을 받기 위한 자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찬에 참예할 때 먼저 우리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그리고 죄사하심의 수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1)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 베드로, 너 안드레와 야고보, 너희 여기 모인 열두 명의제자들, 너희를 위해 내가 내 생명을 버린다. "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여러분과 저도 포함하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틴 루터는 "진정한 종교란 인칭대명사로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추상적으로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으며, 모두 그 사랑을 지금 받을 수 있습니다.

(2) 구약의 본문말씀은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만나에 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만나를 내일을 위해 저장할 수 없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새롭고 신선한 만나를 모아야만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많은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날마다 새롭고 신선한 힘을 공급받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인 힘을 저장해 둘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때때로 예배에 참석하면서 자신들의 삶이 무기력하고 힘이 없다는 사실을 의아해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역경에 처해 있었을 때에 자신들의 신앙이 그들을 지탱해 주지 못했던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날마다 신선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분이 베푸시는 식탁으로 와서 배불리 먹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며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힘을 얻어야하는 것입니다. 그의 용서와 사랑과 은총을 경험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의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는 보다 확실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위해 보다 효과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3. 우리는 '성찬에 참예하여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그분이 은총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일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들을 위해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생명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서 성찬에 참예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찬이라는 말로 영어에 '유카리스트'(Eucharist)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감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그 위대하신 일을 감사하는 자리가 바로 성찬의 자리입니다. 성찬의 떡과 잔을 대할 때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우리는 또한 '성찬이 주님이 세우신 언약의 증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잔은 새 언약의 잔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만찬이 열리던 그날 밤은 옛 언약이 끝나고 새 언약이 시작되던 순간이었습니다.

예래미야는 돌에 새겨진 언약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질 언약으로 바뀌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주님이 떡을 베푸시고 잔을 돌리시던 그 다락방에서 새 언약이 시작된 것입니다. 바로 그 시점부터 인간의 마음에 새 언약이 새겨졌고, 새로운 공동체는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자신의 삶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온전히 섬긴다면 우리는 이 언약의 공동체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다른 지체들과 어려움과 고통을 함께 나눌 것을 언약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다른 지체들로부터,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새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주님의 성찬에 참예하는 매순간이 언약의 증표를 되살리는 순간입니다. 성찬식은 주님과 우리들, 우리 자신들과 우리들 사이에 세워진 것이므로 이 아침에 성찬에 참예하기 전에 잠시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마땅할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목 성찬에 참여하는 마음(세계성찬주일)

저자 김영태목사

본문 고전11:23-26

 

 

설교내용

신앙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지면서 출발합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출발하려면 출발하기 전에 먼저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 기계들이 정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 기름은 있는가? 타이어는 정상인가? 이런 것들을 모두 점검한 후 이상이 없으면 자동차는 출발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교제를 이름에도 점검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할 것은 없는가? 주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의 생명에 동참하여 살고 있는가? 구원받은 확신을 갖고 사는가? 등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점검해 보아야 할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이루어짐으로써 신앙은 출발하고 생명에 참여합니다. 신앙은 영적인 교제와 체험 없이는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런 체험 없이 아무개가 믿으니 나도 그렇게 믿겠지 하는 신앙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지 않고는 음식의 맛을 모르고, 먹지 않고는 배부를 수가 없습니다. 옆 사람이 먹었다고 해서 내가 그 맛을 알고 배부를 수가 없습니다. 음식을 먹은 사람이 먹고 난 후에 참 맛있다고 할 때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직접 먹어 보아야 맛을 알고 배부름도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관계를 가지지 않고서는 믿는 사람들의 기쁨과 감격을 알 수가 없습니다. 흉내는 낼 수가 있겠지요. 맛있는 척하고, 배부른 척 하고, 믿는 척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가 하는 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몸과 피를 기념하는 성찬예식에 참여합니다. 주님은 잡히시던 날 밤에 떡과 잔을 가지고,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과 피라고 말씀하시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확증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입니다.


1.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모든 제자에게로 나아가서 모든 믿는 신자에게로 나누어 졌습니다. 그것은 곧 한 몸 되게 하심입니다. 즉 예수님의 형상이 믿는 모든 사람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 안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된 모습으로 살아갈 때 예수님의 몸은 온전해지십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연합할 때 모든 기능은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성찬을 나눌 때마다 늘 생각할 것은 우리는 하나요, 서로 떨어져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이면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진 지체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마음은 주님 앞에 겸손히 "이제 내가 작은 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세상에 주의 뜻을 이루겠다. "고 다짐하는 마음자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형상으로, 예수님의 모습으로 사는 것, 그리고 하나되어 사는 것, 이것이 몸을 나누는 마음입니다.


2.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피는 곧 생명을 말합니다(레 17:ll). 주님은 자신와 생명을 제자들과 모든 믿는 자들에게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 : 53 이하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내가 아버지를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속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에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영생의 생명 안에 내 생명이 하나가 되어 버리니 내 생명은 영생의 생명이 됩니다. 밝은 전등불 밑에 촛불은 있으나 마나 합니다. 그 촛불이 꺼졌다 해도 나는 밝음 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끝이 나지만 이제 주님의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없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 성찬은 단순한 빵조각과 포도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에게서 아무런 생명을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마치 먼 옛날 아프리카의 원시인들이 보석을 가지고 놀면서도 보석인 줄을 몰라 백인들이 가져다주는 빵조각과 보석을 바꾼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영적인 눈이 떠 있고 신앙의 눈이 떠 있는 사람에게는 이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주님과 내가 하나된 것과 성도와 성도가 하나된 것과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사랑과 희생과 봉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빵만 먹으면 사는 줄 압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우리에게는 신령한 양식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 신령한 양식이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요 6: 55). 이 신령한 양식을 먹는 자들이 영생하게 될 것입니다.


3. 주님은 몸과 피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찬에는 나눔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생명의 나눔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찢으시고 자신의 피를 다 쏟으셔서 이 세상 모든 사람과 나누셨습니다. 성찬에서 떡을 나누고 잔을 나누어 마시게 함은 곧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나누어 갖도록 교훈하심인 줄 압니다. 이 세상에는 생명을 나누어야 할 자리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계시는 동안 수많은 사람과 함께 그가 가지고 계신 생명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병든 자, 죄인, 창녀, 세리, 가난한 자, 고아, 과부들, 그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성찬을 나누는 이 시간에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을 나누어야 하는 주님의 부름에 초대되길 바랍니다.







제목 피로 맺은 새로운 계약(세계성찬주일)

저자 김동익목사

본문 고전11:23-29

참고사항 서울새문안교회

 

설교내용

2000년 전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교회의 본보기 예식이 있다면 성찬식이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생명력에 영합되면서 새로운 삶을 다짐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이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가지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떡과 포도주 잔을 나누어 주시면서 하신 말씀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성찬의 떡과 잔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새로운 약속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련하신 성찬상 앞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단순히 떡과 잔을 가진다는 생각보다는 우리 주님이 친히 오셔서 우리를 위해 찢기진 살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는 떡과 잔을 직접 우리 입에 넣어 주신다고 생각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과 새로운 약속을 다짐할 수 있는 성찬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성찬을 통해서 어떤 약속을 우리와 맺기를 원하시고 계시겠습니까? 동시에 성찬의 떡과 잔을 가진 우리들은 주님 앞에 어떤 약속을 해야 하겠습니까?

1. 성찬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새로운 언약입니다.

마태복음 26 :28에 보면,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찬의 떡과 잔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당시 해야 할 죄의 값을 대신 감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이사야 53 :6에는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이 떡과 잔을 받을 때,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주님, 우리는 죄인입니다. 올바른 길을 걸으려 하였지만, 이런 저런 실수와 잘못, 허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요." 우리들의 잘못, 허물, 실수와 분노, 죄를 주님 앞에 겸허하게 고백하면서 주님의 손으로 우리에게 주신 그 떡과 잔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성찬을 통해서 회개와 용서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2. 성찬은 화해를 이루기 위한 언약입니다.

에베소서 2 : 13~15에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세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새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이 떡과 잔을 가지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의해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새로운 마음, 새로운 생활,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떡과 잔을 가질 때 이제는 새로워지겠습니다. 옛 것을 정리하고 새 사람이 되겠다는 이 다짐, 이 약속 가운데 성찬을 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멀리 있던 사람들을 서로 가까이 하게 합니다. 서로 서먹서먹했던 사람, 거리감을 느꼈던 사람, 때로는 분노와 섭섭함과 감정의 손상을 가졌던 그 사이를 가까이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셋째, 화평케 하고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이 떡과 잔을 가지면서 멀리 있던 사이를 가까이 하겠습니다. 서먹서먹했던, 서로 원망했던 사이를 가까이 하겠습니다. 화평을 이루면 서로 화해하겠습니다. 이러한 다짐과 더불어 화평케 하신 그 주님의 몸과 피를 가집시다.

가족 관계에 있어서 교회 안에서 서로 섭섭한 관계가 있습니까? 마음상하는 일이 있습니까? 감정에 손상을 입고 있는 관계가 있습니까? 성찬의 떡과 잔을 가지면서 화해를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화해의 마음의 준비가 없으면 성찬의 떡과 잔을 받지 마십시오. 이것이 오히려 더 정직한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흘리신 피, 찢기신 살을 기념하는 이 떡과 잔을 가지시면서 화평케 하신 그 주님의 사역을 내가 감당하겠다는 다짐 속에서 겸허한 마음으로 성찬에 임하시기 바랍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화평을 얻을 수 있습니다. 먼저 대접하는 자가 대접을 받을 수 있으며, 먼저 낮아지는 자가 높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성찬은 상처를 치유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사야 53 :5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어떤 분이 예수님을 이사야 선지 예언에 의해 바라보며, "고통당한 자와 함에 울고 괴로워하고, 슬픔에 잠긴 자와 함께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며, 상처받은 사람의 그 상처를 싸매 주시는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가졌던 수가 성 여인의 상처받은 마음을 싸매주셨습니다. 남들로부터 증오와 버림을 받던 세리 마태의 마음을 감싸 주었습니다. 상처받은 자의 그 심령을 감싸 주고 위로해 주신 분이 주님이십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성화의 떡과 잔을 가지는 우리에게도 역사하셔서 상처받은 심령, 상처받은 마음, 여러 가지 감정에 손상을 입고 있는, 실패와 좌절을 가지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상황을 치유해 주시고, 우리들의 연약을 도와 주십니다. 치유케 하시는 능력이 주님의 성령을 통해 전해집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셨듯이 우리도 남이 당하는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가르쳐 주셨듯이 우리 역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세 종류의 인간상이 있습니다. 즉 상처를 입은 자, 상처를 입힌 자, 상처를 싸매 주는 자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상처를 입고 산다. 피해를 입고 산다. "고 생각합니다. 아내들은 남편으로부터 피해를 입고 산다고, 남편들은 자기의 아내에 대한 불평을 말합니다. 때로는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 환경이 나쁘다, 친구를 잘못 만났다, 여러 가지 자기의 상처, 실패, 좌절, 고통이나 괴로움을 모두 남의 탓으로 들립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자처합니다. 자신은 남에게 상처를 하나도 입히지 않은 것처럼 어떤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강도는 분명히 상처를 입힌 사람입니다. 그런데 상처받은 사람의 곁을 지나가는, 강도를 당한 사람의 곁을 지나가는 레위 사람이나,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은 겉으로 보기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면 그 사람들 역시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입니다. 상처입은 사람을 못 본 척 외면하고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상처받은 자를 방치해둠으로 인해서 또 상처를 더 크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상처를 입힌 사람이나 똑같습니다.

여러분은 제사장처림 상처를 방치하는 자로서 상처를 입힌 자가 되지 않습니까? 아니면 상처받은 자의 그 상처를 싸매 주려고 하는 주님의 사랑과 그 긍휼의 손길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경말씀에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고 말씀하십니다.

성찬의 떡과 잔을 가지실 매, 우리 주님이 오셔서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상처, 육신의 고달픔, 사업의 실패, 감정의 손상을 치유해 주시고 성찬의 잔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작은 예수가 되어 고통과 고달픔과 실망과 분노를 느끼고 있는 상처받은 이웃의 상처를 감싸주는 따스한 손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찬을 가지며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언약의 관계를 새롭게 맺기 위해서 우리 입에 떡을 떼어 주시고, 우리 입에 잔을 부어 주신다고 생각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이 성찬의 떡과 잔을 통해서 주님 앞에 새로운 약속을 다짐하셔야 합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회개와 용서'의 약속을 합시다. 멀리 있던 사람과 가까워지는 '화해'의 약속을 하십시다. 상처를 입히는 자가 아니라 상처를 감싸 주는 사람으로 사랑과 긍휼을 다짐합시다.






제목 사람들을 제자리에 두심에 관하여(성찬예배)

저자 H. Alden Welch

본문 눅14:7-11

참고사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설교내용

어느 나라에서든 최고의 만찬회에서는 우리가 어디에, 누구와 함께 앉도록 좌석 배정을 받느냐가 몹시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만약 여러분이 누가 성공 도상에 있으며, 누가 내리막길에 있는가 알고 싶으면 손님들이 어느 좌석을 배정받았나를 보라고 말합니다.

1세기 경에도 좌석 배정에 대한 비슷한 강박관념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명 인사들이 앉는 가운데 자리를 원했습니다. 예수께서 어는 유력한 바리새인의 집의 이러한 최고의 만찬회 중 하나에 초대받으신 일이 있습니다. 도착하신 주님은 자신의 높은 지위를 확신하여 스스로 영예로운 자리에 앉은 일부 손님들을 홍미를 갖고 주시하셨습니다. 그는 주인이 도착할 때 재빨리 몇 사람을 자리를 바꾸어 앉게 할 것이고, 이 먼저 온 사람들이 크게 망신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에서 한 교훈을 보셨습니다. 그는 또 하나의 비유를 만드셨습니다. 그 교훈은 무엇이었습니까?


1. 손님들은 기다렸다 앉아야 합니다.


(1) 언뜻 보기에 이 비유는 연회에 가는 사람들을 위한 예절상의 교훈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경거망동하지 마시고, 기다렸다 앉으십시오. 그리고 만약 기다릴 수 없으면 주인의 의사를 알 때까지 말석에 앉으십시오. 그렇게 하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2) 좋은 예의가 전부는 아닙니다-그것이 성공을 보장하지 않고, 우리의 개인적 혹은 세계의 문제를 풀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마는 그것이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얼마간 제거하고 우리의 개인적 관계를 더욱 유쾌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사회적 미덕을 가르치기 위해 오셨다고 생각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군의 주는 우리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실로, 그가 비난을 받은 것 중의 하나는 그가 기꺼이 누구하고나 식탁에 앉으셨다는 것입니다.


2. 겸손은 기릴 덕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 아무도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적극적인 나섬에 공개적으로 갈채를 보내지만, 속으로는 그것에 분개하고 은밀히 그것에 저항합니다. 주제넘게 나서는 사람은 결국 제자리로 가게 마련입니다.

(2) 역사 이래로 어느 시대에나 겸손은 기림을 받는 덕이었습니다. 잠언 기자는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하였습니다(잠11:2). 성 어거스틴은 "사람을 천사로 만드는 것은 겸손이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에머슨(Emerson)은 '겸손한 자만이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3) 예수는 겸손을 가지셨습니다. 그는 너무 교만해서 자기 제자들의 발을 씻기지 못하며, 너무 교만해서 가장 낮은 자와 지극히 작은 자에게 봉사하지 못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으며, 어린 아이 같은 겸손과 결백을 기리셨습니다. 바울은 그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늘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자기를 낮추시고"(빌2:6,8).

(4) 그러나 이 비유를 단지 좋은 충고로 여기는 데에는 위험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겸손을 개발하려고 착수하고, 다른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자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실은 자기 멋대로 행동하면서도 얌전한 척 한다면 우리는 결국 덕이 아니라, 계산된 종류의 겸손을 보이는 것으로 그것은 속이는 죄이기 때문에 가장 나쁜 종류의 죄입니다. 이 비유의 참 의미를 알려면 우리는 아직 더 깊이 파헤쳐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사람들을 제자리에 두시는 분이십니다.

(1) 예수의 모든 비유가 그러하듯이 이 비유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및 우리와의 관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인이시며, 이것은 그의 연회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제자리에 두시는 분이십니다. 이 비유의 교훈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낮추거나 높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그가 바라보시는 그대로 우리에게 세상과 인생을 보여 주심으로써, 그리고 일의 구성에서 우리의 자리를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를 겸손케 하실 것입니다. 흔히 사용하나 부정확한 표현은 "욥의 인내"입니다. 사실 욥은 그렇게 인내심이 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푸념하며 불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불평에 응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은 그의 시각에서 본 세상과 그가 이루시고자 하는 것을 그에게 보이십니다. 그것이 욥을 제자리에두며 그로 침묵하게 합니다. 우리가 전능자 앞에 나아와서 그가 보시듯 우리 자신과 인생을 볼 때에 우리도 겸손해질 것입니다. 타이런 에드워즈(Tyron Edwards)가 말하듯이 "진정한 겸손은 비굴한, 자기를 경멸하는 정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듯 우리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대조하여 우리 자신을 평가할 때에 교만이 죽고 겸손이 자랍니다.

(3) 그러나 자신의 임재로 우리를 겸손케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기 위해, 그리고 우리를 그의 나라로 데려가시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행동하셨습니다. 헌터(A. M. Hunter)의 말이 맞습니다 : "가장 좋은 자리는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주제넘는 생각을 할 때에 우리를 우리의 자리에 두신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하여 그의 연회 식탁에 한 영예로운 자리를 따로 남겨 두셨습니다. 그것 또한 겸허하게 하는 사상입니다. 두 가지 종류의 겸손이 있습니다. 자기 머리를 숙이는 종의 겸손과 자기 부모의 얼굴의 미소를 보려고 자기 머리를 드는 아이의 겸손이 있습니다. 우리로 절하게 하는 겸손과 우리로 솟구치게 하는 겸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 겸손을 다 주십니다.






제목 새 언약은 실로 모험적이다(성찬예배)

저자 Robert T. Young

본문 렘31:31-34 벧전2:4-10 눅22:14-20

참고사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설교내용

1. 성서적 의미의 언약에 대하여 잠시 생각하고서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알아 봅시다.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는 우리가 자유로이 들어가는, 자유로이 머무르는, 또한 우리가 자유로이 취소하는 관계입니다. 성서적 의미에서 언약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심을-하나님이 창시자이시요, 제 1차적 행위자이시요, 동기 부여자이시요, 발기인이시요,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심을-보여 숩니다. 하나님과의 계약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 (1) 우리는 하나님의 행위로부터 받고 인익을 얻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2) 우리는 남과 세상을 돌봄에 있어서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초대를 받습니다. 따라서 언약은 하나님의 행위와 우리의 응답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과의 계약에 참여하라고 부르심은 창조 그 자체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이 부르심은 노아, 모세, 아브라함, 이사야, 예레미야, 예수, 제자들 및 초대교회 교인들의 생애와 체험에서 보여집니다. 언약에서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악속하십니다 하나님이 책임을 지십니다 우리의 순례의 길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마련하십니다 길을 따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징조를 주십니다.


2. 우리에게 계약을 맺으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항상 정상에 오르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그것은 항상 우리로 즉시 약속된 땅에 들어가게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모신다는 것은, 주님의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에 응답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큰 모험입니다 !


3.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의 언약 경험에 대하여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언약으로부터 즉시 약속된 땅으로 이동하였다는 경험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언약과 약속된 땅 사이에 광야가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계약을 관리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는 관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관리하십니다. 그 요구와 그 주장과 그 계약은 종종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때에 임합니다. 신약에 계약 하든가 받는 세 표상(image)-세례, 성찬, 성령-이 있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종종 우리는 리가 그것을 관리한다고 느끼는데, 그것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아주 평이하게 보여집니다. 우리는 세례는 우리가 행하는 것이고, 성찬을 우리가 먹는 것이며, 성령은 우리가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다(do), 먹다(take), 가지다(have)-이 셋은 몹시 소유적인, 지배적인 동사들입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왜 그것들이 우리 담당이라고 생각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례는 우리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것이며, 성찬은 우리가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가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 언약은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를 의미합니다.


4. 그러나 그것은 모험적인 일입니다. 종종 언약은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때에 임하며, 종종 언약은 우리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 때와 곳에 임합니다 ! 종종 언약은 우리가 내키지 않는 책임을 의미합니다 ! 모세와 예레미야와 이사야와 예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 결국 우리는 우리가 함께 얼하고 실지 않은 사람들과 일하며, 남들이 알아 주지 않는, 상관하고 싶지 않는 명분을 위해 싸우며, 우리가 전혀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문제들을 다루게 될지도 모릅니다.


5. 그러므로 만약 다음 몇 주가, 내년이, 혹은 심지어 여러분의 여생이-모세의 경우에서처럼-새 삶하고, 새 언약을 실행하려 할 때에 광야처럼 보인다면 있어도 괜찮습니다 ! 모세, 아브라함, 예수 같은 분들이 그곳에 계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그곳에 계십니다 ! 바로 그곳 광야에 그 여행을 위한 하나님의 임재의 확신과 실재가 있으며, 순례 중인 우리를 위한 상징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자녀를 위한 만나가,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리고 밤에는 불기둥이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그러한 표적들이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낮에 EM는 무지개와 떡과 포도주와 수건과 대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십자가가 있습니다. ꡒ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ꡓ ꡒ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ꡓ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계약은 모험적인 일입니다. 정말로 모험적인 일입니다!







제목 자신을 시험하라(성찬예배)

저자 J .A . Davidson

본문 고전11:28

참고사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설교내용

1. 만약 우리가 신약의 교훈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주의 만찬이 ꡒ죄인들을 위한", 실로 죄인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영적, 도덕적 시험에서의 우리의 높은 명성에 대한 일종의 대가로서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가정하고, 성찬이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선의 상징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대로 오십시오"(Come as yon are) :이것은 성찬에의 초대에 항상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이 부주의하게 혹은 무심코 성찬에 오실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 이 아닙니다.


2.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그의 첫 서신에서 바울은 예배자의 성찬식 준비를 위한 이 규정을 말했습니다 .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이 잔을 마실지니." "살피다"의 헬라어 원어에 "시험하다"(test)의 뜻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사람에 대해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금속을 시험함을 언급하였으며, 그것은 기본 품질의 세밀한 점검과 평가 및 현재의 상태와 미래의 성능 평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은 점수를 매기는 종류의 시험을 요구하지 않으시며, 다만 그는 시험되는 것의 참 본질을 드러내는 종류의 시험을

요구하십니다.


3. 아마 때로 우리는 우리가 성찬식에 참여할 만큼 충분히 선하지 않다고 느낄 것입니다. 그러한 느낌이 가상할 만하며 정직할지는 모르지만, 일반적으로 그것은 왜곡된 감수성의 문제이며, 성찬의 본질과 목적의 심각한 오해를 보이는 것입니다. 종교상의 이러한 완전주의는 우리가 영적, 도덕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기 전에는 어떤 기독교 예식에도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만약 거의 완전함의 표준이 요구되어진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참으로, 성찬식에 참여할 만큼 층분히 선합니까?


4. 우리는 완전해야 한다거나, 완전에 가까워야 한다는 요구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참회하라는 요구를,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거기서 본 바에 대하여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바울은 이 참회가 성찬식에 선행되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16세기의 위대한 영국의 성직자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는 회중의 고백기도는 각 예배자가 "자신의 개별적 차실"에 적용해야 한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입에서만 구르는 말뿐인 기도나 고백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 말들이 우리 자신의 믿음없고 사랑없는 행위를, 우리 자신의 교만과 이기의 경향을, 우리 자신의 악의와 시기를-우리 자신의 피를-일깨우게 해야 합니다.


5. 존 칼빈(John Calvin)은 그 문제를 매우 현실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 "만약 우리가 여전히 믿음 혹은 생활의 고결함에 있어서 약하다는 것을 우리가 성찬에 오지 않는 구실로서 주장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그가 아프기 때문에 약 복용을 삼가는 핑계를 대는 것과 같다. " 성찬에 와야 할 자는 불완전한 자, 궁핍한 자, 근심하는 자 뿐이요, 죄 많은 자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찬에 올 때에 비유의 세리처럼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 이로소이다"하고 말할 수 있다면 거기서 여러분은 자애로우신, 용서하시는 주님을 만날 것이며, 거기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의 상처에 대한 치유를, 그리고 여러분의 생의 여로를 위한 힘과 인도하심을 받을 것입니다. 요한 일서에 이것이 보증되어 있습니다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1:9)

우리는 떡을 먹고 잔을 마시기 전에 자신을 시험해야 합니다. 이 시험은, 이 고백은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자기 정죄에 빠지는 것도 아니며, 자신에 대한 슬픈 비관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아에 패한, 그리고 우리 자신과의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의 문제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받아들이시며, 우리를 도우시어 의미와 목적의, 평강과 성취의 삶을 얻게 하심을 신뢰함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먹을 가치가 없음을 인정함에 의해서만 성찬을 먹을 자격을 우리 스스로가 부여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창조적 역설중의 하나입니다. 성찬을 먹으십시오! 성찬은 죄인들을-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신앙을 통해서 속죄와 성취에 이르는 길을 보게 된 죄인들을-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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