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을 와신상담케 한 월나라의 명재상 범려(范蠡)
범려는 춘추시기에 월(越)나라 왕 구천(勾踐:재위 BC 497~BC 465)을 섬긴 유명한 정치가이자 사상가이며 정략가이다. 자는 소백(少伯)이고 춘추 말기에 초(楚)나라 완(宛:지금의 하남성 南陽縣)에서 태어났다.
월나라 대부로서 월나라가 오나라에게 패하였을 때 오나라에 3년간 인질로 잡혀있었다. 그후 석방되어 월나라로 돌아가서 월나라 왕 구천을 도와 각고의 노력으로 부국강병을 시행하여 결국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만년에는 제(齊)나라로 가서 농사를 짓다가 마지막에는 도(陶:지금의 산동성 定陶縣)에 은거하여 이름을 도주공(陶朱公)으로 바꾸고 장사를 하였다.
범려는 지략이 뛰어나고 처세에 능하였으며, 정치와 군사는 물론 상업에 이르기까지 통달한 보기드문 인재였다. 특히 그와 서시(西施)의 사랑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유명하다.
고대에 지금의 절강(浙江) 지역에는 오나라와 월나라가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춘추시대 후기에 이르러 이 두 나라는 세력을 크게 떨치기 시작하여 상호간에 전쟁이 잦았다. 이 두 나라 중에서 도읍을 고소(姑蘇: 지금의 강소성 蘇州市)에 정한 오나라의 국력이 먼저 월나라를 앞섰고, 도읍을 회계(會稽: 지금의 절강성 紹興市)에 정한 월나라는 오나라에 대항하지 못하고 해마다 오나라에 조공을 바쳐야만 했다. 그러나 구천이 즉위하면서 국력이 점점 강성해진 월나라는 서서히 오나라의 위세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BC 494년에 구천은 오나라 왕 부차(夫差)가 절치부심하며 군대를 양성하여 월나라를 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매우 불안해 하였다. 구천은 앉아서 오나라의 공격을 당하기 보다는 오나라의 공격 준비가 끝나기 전에 오나라를 선제 공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중신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렇게 초조해하는 구천의 마음을 알아차린 대부 범려는 무모한 공격을 하지 말고 신중히 자중할 것을 건의하였지만 구천은 그의 말에 한마디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범려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풍부한 학식과 경륜을 쌓아 성인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세상을 원망하면서 미련을 버리고 미치광이처럼 강호를 떠돌아 다녔다. 월나라의 대부 문종(文種)은 마침 명사(名士)를 찾아다니다가 완현(完縣)에 이르러 범려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미치광이라 했지만 문종은 그러한 범려가 비범한 인물이라 생각하고 그를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범려는 문종의 마음을 시험해보기 위해 처음에는 일부러 그를 회피했지만, 재차 문종이 그를 찾아오자 의관을 갖추고 정성껏 맞았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 의기투합하여 천하의 대사와 부국강병책을 논하였다. 문종은 범려가 역시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구천에게 그를 천거하였다. 구천도 그러한 범려를 매우 중시하여 곧바로 그를 대부에 임명했던 것이다.
그러한 범려가 갑자기 오나라에 대한 공격을 반대하고 나오자 구천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범려는 구천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오나라와 월나라의 형세에 대해서 더욱 자세하게 분석하였다.
"오나라 왕 부차는 그의 아버지 합려(閤廬)가 우리에게 피살되자 치욕과 원한 속에 3년간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전쟁을 준비해 왔기 때문에 병사들은 용맹하고 세력이 막강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무리하게 공격한다면 틀림없이 힘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가장 현명한 선택은 잠시 피하여 방어를 견고히 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천은 범려의 말을 듣지 않고 정예병 3만명을 선발하여 오나라를 공격, 부초(夫椒: 太湖에 있는 산 이름)에서 오나라 군대와 마주쳤다. 그 결과 구천은 대패하여 단지 5000여명의 군사와 함께 회계산(會稽山: 지금의 절강성 중부)으로 퇴각하였으나 다시 오나라 군대에 포위당하고 말았다. 절망에 빠진 구천은 힘없이 범려를 바라보고 그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대책을 강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범려는 치욕을 감수해서라도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오나라 왕과 신하들에게 예를 갖추어 뇌물을 바친 다음 천천히 기회를 보아야 한다고 권하였다.
구천은 어쩔 수 없이 문종을 파견하여 오나라에 화의를 청했다. 그러나 문종이 오나라 진영에 갔을 때 오나라의 상국(相國) 오자서(伍子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화의를 성사시키지 못했다. 이를 보고받은 구천은 죽음을 각오하고 오나라와의 마지막 결전을 불사하고자 했지만, 범려와 문종은 그러한 구천을 계속 만류했다. 범려와 문종은 정세를 냉정하게 분석하면서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결국 그들은 오나라 왕 부차에게 많은 미녀들을 바치고 오나라의 태재(太宰) 백비에게 무수한 금은보화를 바쳐 화의를 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구천은 회계산 포위에서 풀려나 월나라 도읍으로 돌아간 후 범려에게 모든 국정을 맡기고 자신은 직접 오나라로 가서 부차를 섬기려고 했다. 그러나 범려는 국정을 문종에게 맡기고 자신도 함께 오나라에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구천은 범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부차와 백비에게 바칠 미녀 330명과 금은보화를 수레에 가득 싣고 범려와 함께 오나라로 떠났다.
BC 493년 구천과 범려는 부차를 만나 미녀와 보물을 바치고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부차는 그들을 석실(石室)에 가두고 말을 기르는 노역을 시켰다. 그리고 부차가 수레를 타고 사냥을 떠날 때마다 구천은 채찍을 들고 부차의 마차를 호위하며 따라다녀야만 했다.
어느 날 부차가 구천과 범려를 불렀다. 부차는 구천을 모시고 있던 범려에게, "현명한 여인은 몰락한 집에 시집가지 않고, 뛰어난 선비는 멸망한 나라에 벼슬하지 않는다. 지금 구천은 나라를 잃고 노예가 되었는데 그대는 치욕스럽지도 않은가? 그대가 만약 개과천선하여 월나라를 버리고 오나라를 섬긴다면 과인은 그대의 죄를 사면하고 중임을 맡기겠노라."고 하였다. 구천은 그 말을 듣고 범려가 변절할까 염려하면서 땅에 엎드려 몰래 눈물을 흘렸다.
이때 범려는 완곡하게 사양하면서, "망국의 임금은 정사를 말하지 않고 패전의 장수는 용맹을 말하지 않습니다. 신이 월나라에서 구천을 잘 보좌하지 못하여 대왕께 근 죄를 지었습니다. 지금 요행이 죽지 않고 오나라에서 말을 기르고 마당을 쓸고 있으니, 신은 이것만으로도 대단히 만족합니다. 어찌 감히 부귀를 넘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부차는 더 이상 강요하지 않고 구천과 범려를 석실로 돌려보내고 부하를 보내어 그들을 감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로지 말을 기르고 마당을 쓰는 일에만 열중할 뿐 어떠한 원망이나 불만도 나타내지 않았다. 부차는 그들이 진심으로 항복한 것에 만족하고 그들을 월나라로 돌려보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번은 부차가 병에 걸렸다. 범려는 그 병이 평범한 질병으로 조금 지나면 바로 낫는다는 것을 알고는 구천과 상의하여 부차의 환심을 사기 위한 계책을 하나 준비하였다. 구천은 부차를 만나 그의 병세를 살폈다. 구천은 손가락으로 부차의 대변을 찍어 입에 넣고 맛을 본 다음 큰 소리로 축하한다는 말을 하면서, "대왕의 병은 금방 나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부차가 의아하게 여기고 그 이유를 물었다. 구천은 범려가 부탁한 그대로 말하였다. "신은 일찍이 의술을 배운 적이 있는데, 환자의 대변만 맛보아도 그 병세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대왕의 대변은 맛이 마치 곡식의 맛처럼 시큼하면서도 씁니다. 이로써 대왕의 병세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부차는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면서 구천과 범려를 석실에서 나와 근처의 민가에 살면서 말을 기르도록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차의 병이 다 나았다. 범려가 예상했던 대로 부차는 구천을 월나라로 돌려보낼 결정을 하였다. 오자서가 극구 반대를 하였지만 부차는 그것을 듣지 않았다.
BC 490년 구천은 오나라에서 3년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나 월나라로 돌아갔다. 구천은 회계산에서 당한 치욕을 한시도 잊지 않고 복수를 향한 집념을 불태웠다. 구천은 도읍을 제기에서 회계로 옮기기로 하고 범려에게 새로운 도읍의 건설을 명했다. 범려는 천문과 지형을 살핀 다음 신성을 축조하였다. 밖에 성벽과 성문을 만들면서 서북쪽에 특별히 성문을 하나 더 만들고 오나라에는 조공을 바칠 길을 닦는다고 소문을 내었다. 부차는 그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였지만, 실제로 그것은 오나라를 신속히 공격하기 위한 군사도로였던 것이다.
구천이 범려에게 월나라를 발전시킬 방법을 묻자 범려는 예리한 주장을 펼쳤다.
"하늘의 운행과 사람의 일은 부단히 변화하기 때문에 방침과 정책을 세워 미리 대처해야 합니다. 만물은 땅에서 소생하고 땅은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만물과 하나가 되어 기르고 있기 때문에 금수와 농작물 등은 대지를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만물이라도 땅은 차별 없이 그것들을 자라나게 하고 있으며, 사람들도 그러한 대지에 의존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생장에는 각기 정해진 때가 있는지라, 때가 되지 않았는데 억지로 생장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일에 대한 변화도 마찬가지여서 최후의 전환점이 되지 않았는데 억지로 성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처세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국면을 유리하게 전환시켜야 합니다."
범려는 계속하여 내정 방면에서 월나라를 부흥시킬 정책들을 건의하였다. 그는 백성들을 적극적으로 동원하고 보호하면서 생산력을 강화시켜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갈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구천에게 직접 들에 나가 백성들과 함께 농사를 짓도록 하고, 구천의 부인에게도 직접 베를 짜면서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나눌 것을 권하였다. 그 결과 월나라는 점점 국민생활이 안정되고 국력도 부강해졌다.
대외관계에 있어서 범려는 약소국에게는 친절하게 대하고 강대국에게는 표면적으로만 유순한 입장을 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오나라에 대해서도 그들의 힘이 쇠약해질 때를 기다렸다가 일거에 멸망시킨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구천은 범려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면서 인재를 등용하고 백성들을 보살피며 군대를 양성하는 일에 조금도 나태함을 보이지 않았다.
범려는 또 직접 민간에서 미녀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을 찾아내어 그녀들을 금은보화와 함께 오나라 왕에게 헌상하는 한편, 부차에게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도록 부추기고 주색에 빠지도록 유혹하였다. 그리고 초(楚)·제(齊)·진(晋)과 연합하여 오나라를 최대한 고립시켰다.
BC 485년 구천이 월나라로 돌아온지 5년째 되던 해에 월나라는 국고가 충실해지고 전국토가 개간되어 백성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구천은 오나라에 대한 원한을 갚고 "회계의 치욕"을 씻고자 하였다. 그러나 범려는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좀더 기다릴 것을 간청하였다.
1년 후에 오나라 왕 부차는 제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월왕 구천은 여기에서 오나라가 많은 국력을 소모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직접 많은 예물을 가지고 오나라를 방문하였다. 오나라의 왕과 신하들은 온갖 허세를 부리면서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오직 오자서만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매우 근심스러워하면서 부차에게 제나라 공격을 포기하고 월나라를 칠 것을 건의했다. 부차는 오자서의 건의를 뿌리치고 마침내 제나라 공격을 감행하여 애릉(艾陵)에서 제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제나라 공격에서 승리를 거둔 부차는 더욱 기세등등하게 개선하였다. 그는 오자서를 보고 크게 나무랐지만 오자서는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3년내에 오나라가 월나라에게 멸망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크게 노한 부차는 오자서에게 보검을 내려 자결을 명하였다. 오자서가 죽은 후 부차는 태재 백비를 더욱 총애하여 오나라 조정은 더욱 부패해졌다.
마침내 17년간 와신상담을 통한 각고의 노력 끝에 구천은 오나라를 공격하여 지난날의 원한과 치욕을 갚고 부차를 고소산(姑蘇山)에서 자결토록 했다. BC 473년 구천은 여세를 몰고 북상하여 산동의 서주(徐州)에서 제후를 회맹케 하여 장강, 회하(淮河) 유역 일대까지 세력권을 확대하고 자칭 "패왕(覇王)"으로 일컫기에 이르렀으나, 그 공적은 명신 범려의 보좌에 힘입은 바가 컸다.
범려는 그 공에 의해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범려는 구천의 인간됨이 환난은 함께 할 수 있으나 즐거움은 함께 누릴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관직을 버리고 제나라로 갔다. 범려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자호를 치이자피(鴟夷子皮)라 하여 해안가에서 초막을 짓고 살았다. 범려는 두 아들과 함께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면서 농한기에는 장사도 하였다.
그는 열심히 집안일을 돌본 결과 몇 년 사이에 수천금의 부를 쌓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여 그 명성을 드높였다. 얼마후 제나라 왕이 그 명성을 듣고 그를 도성 임치(臨淄)로 초빙하여 상국(相國)에 임명하였다.
범려는 2~3년간 상국의 자리에 있은 후, "집에 있을 때는 천금의 재산을 쌓았고, 관직에 있을 때는 재상의 지위에까지 이르렀다. 자수성가한 평범한 백성에게 있어서 이것은 이미 갈 수 있는데까지 다 가본 것이다. 고귀한 자리에 너무 오래 머무는 것도 좋지 않은 징조이다."고 하면서, 관직을 반납하고 재물은 친구와 해안가의 농민들에게 전부 나누어준 다음, 아내 서시(西施)와 두 아들을 데리고 서쪽으로 가서 도(陶: 지금의 산동성 定陶 서북)에 은거하였다.
도(陶)는 동으로는 제(齊)·노(魯), 서로는 진(秦)·정(鄭), 북으로는 진(晋)·연(燕), 남으로는 초(楚)·월(越)과 접경을 이루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는 그곳에서 다시 도주공(陶朱公)이라는 이름으로 무역을 하여 거부가 되어 그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이후 "도주공"이라는 이름은 부호의 대명사로서 사용되었다.
○ 와신상담(臥薪嘗膽)
臥:누울 와. 薪:섶(땔)나무 신. 嘗:맛볼 상. 膽:쓸게 담.
[유사어] 회계지치(會稽之恥), 절치액완(切齒扼腕).
[출전]《史記》〈越世家〉
[뜻] 섶 위에서 잠을 자고 쓸개를 핥는다는 뜻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참고 견딤의 비유.
춘추 시대, 월왕(越王) 구천(勾踐)과 취리[취李:절강성 가흥(浙江省嘉興)]에서 싸워 크게 패한 오왕(吳王) 합려(闔閭)는 적의 화살에 부상한 손가락의 상처가 악화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B.C. 496). 임종 때 합려는 태자인 부차(夫差)에게 반드시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고 유명(遺命)했다. 오왕이 된 부차는 부왕(父王)의 유명을 잊지 않으려고 '섶 위에서 잠을 자고[臥薪]' 자기 방을 드나드는 신하들에게는 방문 앞에서 부왕의 유명을 외치게 했다. "부차야, 월왕 구천이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때마다 부차는 임종 때 부왕에게 한 그대로 대답했다. "예, 결코 잊지 않고 3년 안에 꼭 원수를 갚겠나이다."
이처럼 밤낮 없이 복수를 맹세한 부차는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사실을 안 월왕 구천은 참모인 범려(范려)가 간(諫)했으나 듣지 않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월나라 군사는 복수심에 불타는 오나라 군사에 대패하여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갔다. 오나라 군사가 포위하자 진퇴양난에 빠진 구천은 범려의 헌책(獻策)에 따라 우선 오나라의 재상 백비(伯비)에게 많은 뇌물을 준 뒤 부차에게 신하가 되겠다며 항복을 청원했다. 이때 오나라의 중신 오자서(伍子胥)가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구천을 쳐야 한다'고 간했으나 부차는 백비의 진언에 따라 구천의 청원을 받아들이고 귀국까지 허락했다. 구천은 오나라의 속령(屬領)이 된 고국으로 돌아오자 항상 곁에다 쓸개를 놔두고 앉으나 서나 그 쓴맛을 맛보며[嘗膽] 회계의 치욕[會稽之恥]을 상기했다. 그리고 부부가 함께 밭 갈고 길쌈하는 농군이 되어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며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회계의 치욕의 날로부터 12년이 지난 그 해(B.C. 482) 봄, 부차가 천하에 패권(覇權)을 일컫기 위해 기(杞) 땅의 황지[黃地:하남성 기현(河南省杞縣)]에서 제후들과 회맹(會盟)하고 있는 사이에 구천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로부터 역전(歷戰) 7년만에 오나라의 도읍 고소[姑蘇:소주(蘇州)]에 육박한 구천은 오와 부차를 굴복시키고 마침내 회계의 치욕을 씻었다. 부차는 용동[甬東:절강성 정하(定河)]에서 여생을 보내라는 구천의 호의를 사양하고 자결했다. 그 후 구천은 부차를 대신하여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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